어두움 가운데 조용히 고개 숙여 눈을 감은채
두 손을 늘어 뜨려 숨을 죽여 서 있다.
어둠속을 날아 다니는 작은 날벌레들을
맨손으로 낚아 채고자 함이다.
나를 잊을만큼 어둠속에 몰입하면
날벌레들의 날개소리를 얼핏 얼핏 들을 법도 하지만
날벌레들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를 않는다.
역학의 세계는 아무리 정진하고 또 정진해도
어두움 한 가운데에 서 있을 뿐이다.
늘상 불어 와 나를 스치는 바람임에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거늘 어찌 바람의 빛깔 마저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 마음이 아닌 바람의 마음이 되어 바람과
하나 될 수 있다면 바람의 빛깔 마저 볼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되리라.
내 마음이 아닌, 내 생각이 아닌 음과 양 그리고 오행
그리고 아홉 상수(象數)가 되어 버린 마음으로
그들과 하나 될 수 있다면 이 답답한 어두움을 마침내
걷어 내고 그들과 하나 되어 함께 율동하며 그들의
꿈틀대는 움직임을 낱낱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리라 믿는다.
나는 한때 소강절의 역학과 도학(道學)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소강절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의 역학과
도학사상에 대해 더 음미할 수 없는 시간적 제약이 아쉽다.
소강절은 북송(北宋) 초기에 활동한 大사상가이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을 즐기며 살았던 그는
조정의 부름(官職)에도 응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신의 삶에
행복을 느끼며 살았다고 한다.
특히 낙양 부근에 은거해 살면서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장횡거, 정명도·정이천 형제, 사마광(사마온공)
등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떨쳤다. 주역 상수(象數)와
도가(道家)사상을 결합한 선천상수학(先天象數學)의 대가였던
소강절은 상수의 이치로 미래를 예견하는 ‘예지력의 소유자’로
이름을 날리면서 당시 지배계급인 사대부를 비롯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소강절은 "마음이 곧 우주이고 마음이 곧 진리"임을 주장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天地와 자연 만물 곧 우주가
존재하고 우주의 진리 역시 내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소강절의 문집인 ‘격양집(擊壤集)’에 실려진 ‘천청음(天聽吟)’
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하늘이 듣는 것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으니 푸르고 푸른데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
높지도 않고 또한 멀지도 않아 모두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구나” 라는 대목이 있다.
이 구절은 하늘은 아무런 말이 없어서 그 뜻이 무엇인지
들을 수 없고 또한 찾을 수도 없지만 천지와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이 결국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므로
심법(心法) 곧 ‘마음의 법칙’을 따르면 천명(天命) 즉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들을 수도 찾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소강절의 심법(心法)은 ‘자연과 우주 만물의 법칙을
관찰하는 것’ 즉 관물(觀物)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법칙의 탐구가 객관적
이기 위해서는 편견과 왜곡을 일으키는 ‘나’의 판단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아관물(以我觀物)' 즉
나로써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하나 소강절은
나로써 사물을 관찰하는 것은 편견과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므로 '이물관물(以物觀物)' 즉 사물로써 사물을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소강절이 말하는
관물의 이치이다. 즉 나의 주관으로 사물을 관찰하려
하지 않고 사물속에 내가 녹아 들음으로써(물아일체:
物我一體) 사물의 이치를 관찰한다는 소강절의 관법
이다.
사물속에 내가 녹아 든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의 집착과
주관을 버리고 나를 사물의 성정(性情) 속에 몰입시키는
것이므로 우주원력 기공명상(一元道)에서 행하는 명상법
즉 '자연명상법'과도 일치하며 역학에 있어서도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의 모습속에서 역(易)의 원리를 터득하는
이창우 구성학. 이창우 명리학의 역학수행 방법과도
상통(相通)하는 면이 있다.
아래는 한줄수다란에 올렸던 자연명상법에 관한 글이다.
예광 21.01.02. 12:57
자신 스스로 '지혜'라고 믿는 자신의 가치관과 믿음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은 자연을 살피는 눈이 없기 때문이며
자연의 순리를 살피고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 낸 지혜에 기대지 않고 '대자연의
순리' 라고 하는 물결에 자신을 실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 지혜는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들여다 보고" "그 이치에 자신을
맡길줄 아는, 겸손할 수 있는" 지혜일 뿐이다.
예광 20.11.24. 18:37
천지(天地)의 허허(虛虛)로운 공간은 에베레스트山
부터 바닷가 모래 한알 한알까지 모두를 품고 있지만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 어느 것 하나 붙들고 있는
것이 없다. 허허로이 그 어느 것 하나 붙들고 있는
것이 없기에 그 어느 것 하나 놓침 없이 모두를
품을 수 있다. 우리는 집착이라고 하는 좁은 사고(思考)의
공간에 갇힘으로써 넓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흔히 명상을 할 때 생각과 마음(집착)을
비우는 방법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곧
'갇혀 있는 자아'로부터, '갇혀 있는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나 나와 교감하는 세계를 '넓은 세상, 넓은 우주'로
확충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의 속에
품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태양界인들 우주인들
품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우주원력 기공.명상에서 말하는 '자연명상'은
무엇일까? 우주 절대자의 생명 에너지인 원력(元力)이
이 우주의 모든 행성들을 비롯하여 신령계와 인간계와
동.식물계를 비롯하여 형형색색의 자연만물을 빚어낸
것인데(마치 무색無色에서 3원색이 생기고 3원색에서
수천가지 색상이 분화되듯) 자연 생태계(자연현상, 광물,
식물, 해와 달 등등) 가운데 그 어느 것 한가지와 교감
하여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생명 에너지를 나에게
끌어 들이는 방법이며 이 경우는 그 어느 한가지
자연기운에 대한 집착과는 다르다. 집착이라 함은 나의
의지(能動)가 결부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만물과의 교감은 나의 의지가 결부된 마음의 작용을
멈춘 상태에서 명상의 대상이 되는 자연 앞에서 내가
피동체(被動體)가 되어 교감하는 방법이다.
나의 의지가 결부된 마음을 비우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과정으로 이끌어 가는 명상의 방법이 초월명상이라면
자연의 기운에 내 마음을 의존하고 결부시켜 나의
의지(능동)가 아닌 자연의 기운이 결부된 마음(피동)을
생성시키는 방법을 통해 명상의 대상이 된 자연의
생명 에너지와 교감하는 방법이 자연명상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대자연의 크고 작은 모든 작용은 왜곡된 기운
이라고는 없다. 모두가 순리적인 이치(理致)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집착'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이치를 망각하고
자신이 추구하거나 자신이 처해 있는 것에 대해 행.불행
이라고 받아 들이는(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자연명상은 자연만물이 지니고 있는 생명 에너지를
나에게 끌어 들임으로써 순리적인 마음과 건강한 마음을
얻는 명상법이다.
아래에 있는 또 하나의 글은 2014년 1월 22일에 카페에
올렸던 글이다.
어제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함박눈이 두어시간 동안
쏟아져 내리더군요. 대낮이 마치 밤처럼 어두웠습니다.
창가에 서서 너플거리며 떨어지는 그 엄청난 수의
눈송이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이 짧은 시간에 저 많은 수의
눈송이들을 셀수 없듯 살아 움직이는 天地조화의
그 많고 많은 묘(妙)들을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生의 시간 동안 결코 다 깨우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과거 역학(易學)을 마치 정복해야 할 성(城)처럼
여기고 도전적으로 대해 가며 오기(傲氣)를 부렸던
어리석음을 문득 깨닫게 되면서 역학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한 동반자로 여겨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학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 아둥바둥
스스로를 괴롭혀 왔던 지난 과거 저의 모습은 대단한
오만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창밖에 내리는 그 많은
눈송이들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 보았던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편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음미하니 눈송이들은
더 아름답게 보여졌고 저의 시야(視野)로,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더 생생하게 다가 왔습니다. 어느덧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 무수한 눈발 한가운데에 서 있는듯
하였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천지조화의 時空속으로
다가가 다만 그 가운데에 안기고자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역학을 대할 것입니다.
(2014.1.22 "내 생각의 흔적들" 제하 카페글)
역학에 있어서 "살아서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 음양오행"의
작용력(作用力)을 주관적이고도 학술적인 논리만을 앞세워
탐구한다면 객관적 진실이 아닌 주관적 논리에 경도(傾倒)
되기 쉬우므로 나 자신이
음이 되어 음의 성정(性情)을 느껴 보고
양이 되어 양의 성정을 느껴 보고
나무가 되어 나무의 성정을 느껴 보고
불이 되어 불의 성정을 느껴 보고
흙이 되어 흙의 성정을 느껴 보고
돌이 되어 돌의 성정을 느껴 보고
물이 되어 물의 성정을 느껴 보는 것이
살아 움직이는 음양오행의 기운과 섭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명리 해석에 있어서도 틀에 박힌 오행 상극론,
격국론, 월령론, 억부용신론, 조후용신론 등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자연의 기운은
정형적인 공식안에 갇혀 작동할 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미세한 요소 하나에 의해서도 자연기운은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성정을 꿰뚫어 보기 위한 이러한 방식으로서의
관법은 곧 자연동화(自然同化),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방식을 통한 관법으로서 비단 음양오행의 법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구성학 상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짜여진 점반(占盤)이나 명반(命盤)에 있어서 내가
1백수성이 되어 1백수성이 처한 환경을 음미해 보고
2흑토성이 되어 2흑토성이 처한 면에 대해 생생하게
음미해 보고..... 9자화성이 되어 9자화성이 놓여진 처지나
환경을 음미해 보려는 노력으로 구성학을 연구해야만 모든
상수조합들이 아우성 치며 환희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생생한 모습과 작용들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명상법에 있어서 '자연명상'에 잠기는 기법이나
나의 역학연구에 있어서 '자연론'에 입각한 관법론이
소강절의 ‘이물관물’, ‘물아일체’의 수행법과 일맥상통
한다는 면에서 경이로움과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