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나온 빛의 환상
- 4월 12일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온 멕시코시티. 이제는 낯선 타국이 아니라 익숙한 집처럼 느껴지는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산투아리오 엘 세리토 산 후안 디에고(Santuario el Cerrito SanJuan Diego)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으로 향하는 버스 안, 내 마음은 이유 없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창밖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던 나의
시각 너머로, 상상인지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묘한 형상이 스쳤다. 내가 미사 중에 제2 독서를 하고 있었다. 성당 문 쪽
에서 누군가 나를 맞이하러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성모님이었을까, 아니면 이 땅의 주인인 후안 디에고였을까.
그 형상은 마치 나를 부르는 듯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잠시
현실의 중력을 잃은 듯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며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안에는 이미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온기 하
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성지에 도착하기도 전, 그분들은 이미길 위에서 나를 마중 나오고 계셨던 것이었을까
- 후안 디에고의 숨결, 후안 다섯 번째 발현 기념성당의 신비
우리가 도착한 툴페틀락의 발현 기념성당은 과달루페 성모님 다섯 번째 발현한 장소이다. 이곳은 성모님의 부름에 순종했던
가난한 원주민 농부 후안 디에고가 병든 숙부를 돌보며 살았던 집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16세기에 세워진 이 소박한 성소
는 화려한 대성당의 웅장함 대신, 사람들의 낮은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성 후안 디에고는 1474년에 쿠아우티틀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세례를 받기 전 그의 이름은 ‘독수리처럼 말하는((Talking Eagle)’
이란 뜻의 쿠아우틀라토아트진(Cuauhtlatoatzin)이었다. 그는 치치메카인으로 아나후악 계곡에 모여 살고 있는 원주민이며 50살
되던 해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피터 다간드 신부에게 세례를받았다. 1531년 12월 9일에 테페약 언덕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했고 이후, 성모님의 모습이 담겨진 기적의 망토가 전시된 발현 기념 성당 근처에 작은 오두막에서 평생을 보냈다.
2002년 7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처음, 성모님은 테페약 언덕에서 후안에게 나타나셨다. 자신을 위해 이곳에 성당을 세워달라고 부탁하며, 그 뜻을 주교에
게 전하라고 하셨다. 가난한 원주민이었던 그는 순종하여 주교를 찾아갔지만, 그의 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교는
확신할 수 없다며 표징을 요구했고, 그 반응 앞에서 후안은 깊은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다시 그를 찾아오셨다.
망설이는 그의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나아가라고 격려하셨다. 믿음은 한 번의 응답이 아니라, 다시 일
어서는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 후안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한 일이 있었다. 삼촌 후안 베르나르디노가 병들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는 성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도, 그 현실 앞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성모님은 그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셨고, 그의 걱정을 내려놓게 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숙부는 기적처럼 치유되었다. 바로 그 시각, 이곳 숙부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성모님의 다섯 번째 발현이었다. 그 치유
는 육신의 회복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신뢰를 잃지 않게 하는 표징이었다.
마침내 성모님은 마지막 표징을 주신다.
한겨울, 아무것도 피지 않는 계절의 언덕 위에 장미가 피어있었다. 그것도 이 땅에는 없는 스페인의 장미였다. 후안은 그
꽃들을 자신의 틸마에 담아 주교에게 가져갔고, 그것을 펼치는 순간 성모님의 형상이 그 옷 위에 새겨졌다. 그제야 주교는 확
신하게 되었고, 성모님의 뜻은 세상에 받아들여졌다.
그는 치유를 경험하며, 성모님이 자신을 ‘과달루페의 성모’라 불러주기를 원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렇게 이 이름은 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 한 나라의 신앙이 되었다. 숙부의 병이 나았던 바로 그 성당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아픔을 내어놓고 치유의
기도를 올렸다.
- 떨림을 지나 단단한 증언으로
오른쪽 성대 마비로 음성 치료를 받으며 멀리 이곳까지 온 터라,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늘 목소리였다. 오늘 나는 제 2 독
서를 하게 되었다. 삼촌의 치유가 일어난 이곳에서 나는 간절히 두 손을 모았다. “성모님,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전할 수 있
도록 제 목소리를 어루만져 주소서.”
마침내 독서대 앞에 섰을 때, 처음에는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낯선 성지의 경이로운 공기와 목소리에
대한 불안함이 섞인 떨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버스 안에서 나를 환영해 주던 그 따뜻한 형상의 온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올라왔다.
신기하게도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내뱉을수록 목소리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떨림은 확신으로, 불안은 평화로 바뀌
었다. 성당의 높은 천장을 향해 뻗어 나가는 나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또렷했다. 그것은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안의 온기가 내는 소리였다.
- 마음으로 남는 것들의 힘
나는 오늘 확신할 수 없는 것을 경험했고, 설명할 수 없는 치유를 얻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가장 선명한 진실로 다가오기도 한다. 가난한 농부 후안 디에고의 터전 위에서, 오늘 목소리가
아닌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증언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 벅찬 만남은 이제 내 책의 가장 신비로운 페이지가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가장 약한 나의 목
소리를 붙들어 주었던 그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첫댓글
거룩한 날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