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의 낙원 “오키나와” 에서의 하루하루
김원중
2019년 3월12(화) 미세먼지로 잔뜩 찌푸린 날씨에 찬바람이 불어오는 아침 일찍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공항철도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제2터미널에 도착하여 KAL 직원에게 미리 예약해 두었던 e-티켓확인증과 여권을 제시 후 넘겨받은 탑승권을 가지고 곧바로 2층 平和屋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
KAL KE735 14시35發 항공기에 몸을 싣고 2시간 넘게 날아가서 오후 5시에 오키나와의 나하(那覇)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의 관광안내소에 들러 앞으로 10일간 머무를 값싼 호텔을 물었더니 나보고 공중전화박스에 동전 넣고 전화 걸어보라고 해서 기분이 잡쳤다. 하지만 어쩔 수없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하공항은 국제선 건물과 국내선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국내선 건물을 빠져나가 모노레일을 타고 오로쿠(小禄)역에 내려 바로 앞에 있는 “쟈비로 호텔 나하”에 여장을 풀었다.
내가 투숙한 호텔 正門벽에 하루 숙박요금 ¥5,000 ¥5,400 ¥7,400 의 금액이 표시되어 있으며 滿室, 空室이 적혀 있어서 밖에서도 入室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어있다. 숙박료는 先拂制이고 방 열쇠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고 숙박이 끝나는 날 아침 10시 이후에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첫째 날 아침 산책을 겸해서 도로표지판을 따라 해군방공호 공원으로 향했다. 나하 시내의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와 모노레일이고 그 밖에 소형차와 오토바이, 자전거가 거리를 누비고 있다.
처음 찾아가는 길이라서 물어물어 가는 도중에 뜻밖에 우연히 마음씨 고운 中年女人을 만났다. 아카요오꼬(阿嘉洋子)氏는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싶은데 한 시간 정도 볼일을 보고 나서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하고 헤어졌다.
해군방공호는 오늘날 해군시설이 아니고 에도 막부(江戶幕府)시대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대였다.
낮 12시반에 약속 장소로 가서 기다리는 동안에 재미있는 가게가 눈에 띠었다. 먹는물만 전문으로 팔고 있는 가게 문에는 알칼리음료수는 1리터에 28엔, 탄산수는 100엔이라고 쓰여 있다. 약속시간에 다시 만난 洋子女史의 안내로 그 女人이 파트타이머로 일하고 있다는 노인복지관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오키나와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내가 서로 연락하고 있는 타와다(多和田), 미유키(美幸)氏에게 연락해달라고 부탁해서 마침내 연결되어 다음날 오후에 만나게 되었다.
多和田氏는 流球傳統舞踊硏究所의 師範으로서 世界各國에 공연하러 다니고 있는데 한국에 공연왔을때 내가 통역을 담당했던 인연으로 알게 되어 이제는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洋子女史는 둘째 아들이 오사카에 살고 있는데 며느리가 한국인이니 통화해보라고 스마트 폰을 건네주어서 통화해보니 목소리가 쾌활하고 친정이 의정부인데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인사말을 나누었다. 또한 洋子女史는 몇년전 서울 광화문 뉴국제호텔에 투숙했을 때 덕수궁의 大漢門앞에서 본 수문장 교대식 광경이 인상에 남아있다고 했다.
저녁때 호텔로 돌아와서 NHK 방송을 보니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가 9년간은 일본에서, 19년간은 미국에서의 프로야구 선수 생활 끝에 45세가 되어 은퇴한다는 신선하고 보기 좋은 뉴스였다. 어쨌든간에 아직은 젊고 美男인데 한창 활동할 나이에 물러난다는 용기가‧‧‧
그리고 몽골 출신의 요코츠나(横綱-천하장사) 하쿠호(白鵬翔)가 오사카의 체육관에서 열린 봄철 씨름대회에서 全勝했다는 快擧도 함께‧‧‧
수많은 섬들 속에 살고 있는 長壽의 나라. 오키나와 사람들의 長壽秘訣을 찾아보는 이번 여행은 이튿날에도 계속 되었다. 아침은 호텔식당에서 제공해주는 納豆(일본의 청국장), 바나나, 토마토주스, 계란후라이, 김, 공기밥과 된장국으로 거뜬히 해결했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섬 나하(那覇) 시내를 걷다보면 세 가지의 많은 것과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것은 소형차, 자전거, 오토바이고, 없는 것은 높은 산, 빠칭코, 온천이다. 그래서 洋子女史에게 온천을 물어보니 세나가지마(瀬長島)호텔 속에 있다는 것이다. 세나가지마(瀬長島) 호텔 앞은 사방이 확 트이고 전망 좋은 바닷가에 새로 조성한 관광리조트 단지로서 일렬횡대로 돌계단을 따라 일본 전국의 맛집 순례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는 일본의 47행정구역대로 47개의 점포의 일련번호가 매겨져있으며 기념품, 특산품 가게와 환전소도 함께 있다. 바로 눈앞에는 나하 국제공항의 활주로와 격납고가 보이고 하늘에는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여러 나라 비행기가 날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속담처럼 나는 높지막한 카페에서 ¥1,500을 주고 그 고장 맥주 한병, 땅콩, 빵 한조각, 바나나 한 개로 한숨 돌렸더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구나‧‧‧
夕陽노을이 짙어지자 공짜 셔틀버스에 몸담아 아카미네(赤嶺)역에서 모노레일로 호텔에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쓰보가와(壺川) 공원에 갔는데 유치원 꼬마 어린이들이 손과 손을 맞잡고 인솔 교사의 보호 속에 걸어가는 모습이 귀엽고 천진난만해 보였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이곳 특유의 나무를 살펴보니 커다란 기둥나무에 칡넝쿨처럼 옆으로 찰싹 붙어서 휘감고 올라가는 가느다란 나무가 있는가 하면 바로 옆에는 나지막하지만 아주 넓고 큰 분재(盆栽) 모양의 나무들이 아담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호텔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호텔 직원이 洋子女史가 프론트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길래 저녁에 갑자기 무슨일인가 의아해 하면서 내려갔더니 이날밤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流球전통춤을 보러가자는것이다.
나하 시내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순수 오키나와 스타일의 2층 목조건물의 공연장에는 여자는 노래 부르고 남자는 악기로 장단을 맞추는 부부공연에 곁들여 多和田氏, 美幸氏가 무용으로 찬조출연하는 하조마(波照間)에 초대 받았던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는 美幸氏의 자가용차로 호텔에 돌아왔다.
3월 17일 저녁 7시에는 류구무용연구소의 코사 히로코(古謝弘子)氏가 기모노(着物)을 곱게 차려입고 年下의 남편이 운전하는 번화가의 고급요정에 가서 맛있는 회요리와 말고기도 먹을때 서빙하는 白人女子가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데는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섬들로 구성된 오키나와의 본섬 이외에 미야코지마(宮古島)와 이시가키지마(石垣島)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도 얼마인지 몰라서 그 대신 가까운 이웃섬으로 가보기로 했다.
도마리항(泊港)에서 도카시키지마(渡嘉敷島)로 가는 카페리로 당일치기 여행으로 한 시간쯤 달린 끝에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담당직원의 설명을 들은 후, 자판기에서 코카콜라 한병을 손에 들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꾸불꾸불한 길에 들어서자 소학교, 중학교가 나란히 붙어있고 좀 더 가자 동사무소 건물이 나타났다.
마침 동사무소 여직원에게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대로 자동차 가는길로 쭉 가면 된다고 해서 안심하고 시원한 바람을 온 몸에 받으며 길 양쪽을 번갈아 보면서 논밭길을 걸었다.
海邊山中이라고 바다로 둘러 쌓인 외딴섬속에서 논두렁도 보고 흙냄새도 맡아보고 조그만 저수 댐도 보니 그야말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한 시간 넘게 걸어서 고개 마루턱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있는 푸른 바다와 청소년 캠핑장이 보여서 그길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휴게소와 간이음식점이 있을걸로 생각했는데 천만에 말씀이었네요!
그곳은 돈 많은 사람들의 고급별장 지역인것을 비로소 알게 되어 잠깐 쉬었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 천천히 고갯길을 올라가는데 조그만 차가 멈춰서더니 포구로 가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타라고 하여 무조건 타고나서 여기는 식당이 없어서 굶었더니 어디 맛있는 식당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포구의 식당앞에 도착해서 건물 2층에 서있는 사람한테 한국사람인데 일본말을 잘 하시니까 잘 모시라는 말에 기분 좋았다. 그 건물은 민속박물관도 겸해서 그런지 시골집의 소담스런 옛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음식 메뉴판을 보고 정통인도카레라이스를 주문해서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배안에서 반주로 마신 아와모리(泡盛-오키나와의 전통소주)의 취기에 이거야말로 여행의 기쁨이 아니겠느냐고 혼자 흥얼거렸다.
오키나와에 와서 10일동안 어떻게 보낼까, 좀 지루하지 않을까? 돈이 많이 들진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그런 걱정은 봄눈 녹듯이 싹 사라졌다.
귀국을 하루 앞둔 날에는 多和田女史가 운전하는 소형차로 洋子女史와 셋이서 오우지마(奥武島)의 이마이유(오키나와의 사투리로 신선한 물고기)시장에 가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며칠 동안의 만남과 아쉬운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會者定離(정들자 이별)라는 속담이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졌구나‧‧‧ 이번 혼자만의 외로운 여행을 통해서 배운 소중한 체험은 인간의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듬뿍 느끼고 특히 세 명의 日本人 女性에게 깊히 감사하면서 앞으로 더욱 멋지고 보람 있게 살자고 굳게 다짐하구 싶구나.
動트는 東海바다 건너 러시아로 김원중 낙엽지는 가을은 어디론지 훌쩍 떠나버리고 초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2018.11.18.(日) 아침 6시에 집을 나와서 동서울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낮 12시에 동해국제항에 모여서 오후 2시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는 DBS크루즈페리에 승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속초국제항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의 자르비노항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블라디보스톡에 가보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항로가 달라서 다소 긴장되었다. 더구나 롤링이 심하고 배안에서 24시간 넘게 시달려야 한다고 하니 초조하기도 하고 전혀 낯선 사람들 틈에 끼여 혼자 여행하는 호기심도 생겼다 동해국제항은 북쪽으로는 380mil의 블라디보스톡, 남쪽으로는 240mile의 일본의 사카이미나토(境港)를 오가는 카페리 항구로서 시설은 아담하고 깨끗하나 아주 작고 비좁다. 러시아로 가는 승객은 대부분이 러시아의 상인들과 한국인 여행객들이다. 크루즈선은 밤새 달려 19일 오후 3시 30분 블라디보스톡항에 도착하였다. 입국하는데 세관신고서도 없이 그냥 통과하였다. 수하물 통관대 앞에는 마약 탐지견이 점잖게 앉아있는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상륙 후 항구 바로 앞에 있는 혁명광장을 찾았다. 광장 중앙에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여 설치한 영원의 불꽃이 1년 내내 꺼지지 않고 활활 불타고 있다. 또한 영원의 불꽃 왼쪽으로는 1941, 오른쪽으로는 1945로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을 표시하고 있다. 바로 100m거리의 높지막한 곳에 올라 독수리 전망대에 서서 눈앞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아울러 바로 옆에 우뚝 솟아있는 러시아 정교회(성당)안에 들어가 보니 내부에는 스탠드 글라스장식, 예수님과 성인들의 초상화가 아주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나서 내려오는 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함을 격침했다는 잠수한 C-56이 새로 단장되어 잠수함 박물관으로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있다. 잠수함 내부는 참전 군인들의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있고 한사람씩 허리를 꾸부리고 천천히 돌아 나오게 되어있다. 얼떨결에 잠수함을 빠져나와보니 어느덧 저녁 노을이 붉게 짙어 식당으로 가서 빵, 닭고기, 달걀, 쌀밥, 야채 및 보드카로 첫날밤 식사를 했다. 둘쨋날 아침 일찍 블라디보스톡 역으로 가서 우수리스크로 가는 시베리아 완행열차를 타기 전에 역 앞에 서 있는 레닌(1870~1924)의 동상을 보고 역 건물안으로 들어가서 로마노프왕조 최후의 황제 리콜라이2세의 흉상(胸像)을 보았다. 그런데 불편한 것은 역 안으로 들어갈때는 열차표를 보여 주어야 들어갈 수 있고, 지하의 화장실을 이용할때에도 열차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열차 내부는 승객들로 만원이고 각역마다 정차 하기 때문에 달린지 한 시간되어 12시에 나제진스까야역에 도착해보니 전세버스가 먼저 와서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시간 넘게 버스에 시달린 끝에 우스리스크에 도착하여 점심 먹고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먼저 “인류의 행복과 미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와 “독립전쟁의 전설적인 영웅” 홍범도 장군의 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 바로 옆에 있는 연해주(沿海州) 일대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성금을 모아 2009년에 건립한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에 들렀다. 그 당시 한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韓人村에 가보았더니 높다랗게 높이 서 있는 돌기둥이 3개 있는데 이는 남한, 북한, 고려인을 상징하고 바닥에는 작은 돌 8개가 있는데 이는 조선 8道를 의미한다고 한다. 현재는 기념비를 중심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다. 쇠울타리 옆 건물 지붕에는 까마귀가 앉아 있고 땅바닥에는 비둘기들이 먹이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우리 일행은 기념비 앞에 헌화하고 합장재배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가서 나지막하고 평평한 곳에 있는 발해 土城에 가보니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비와 눈에 씻겨 토성은 흔적도 없고 무심한 말(馬)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지 않고 우리 조상이 그 뒤를 이어왔다면 우리나라도 지금에는 세계 강대국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뒤로하고 우스리스크 블로다르스카야 주택가에 있는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살았던 옛집을 찾았다. 길가 정문위에는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가 나란히 그려져 있고 건물내부는 텅 비어 있는 채로 아무것도 없다. 그동안 러시아 사람의 소유였던 집을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으로 고려인 민족자치회가 사들여 기념관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리모델링중이다. 최재형 애국지사는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9살 때 연해주로 이주해 일찍부터 무기와 식량, 의류등의 군납사업을 통해 연해주지방 최대의 부호로 성장했다. 특히 한국동포들에게 농사와 축산을 장려하고 생산물을 러시아군에 납품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하여 벌어들인 돈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우스리스크에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황제의 밀사로 네덜란드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던 이상설의 유허비가 수이푼 강변에 덩그라니 서있는데 2001년에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세웠다. 이상설 애국지사는 1917년 눈을 감으며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리오”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동해항에서 배로 24시간이면 닿는 연해주는 최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지만 항일의 역사와 유적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다. 질곡과 쓰라린 역사속에서도 불꽃처럼 타올랐던 독립투사들의 애국혼이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오는 큰길 양쪽으로는 하얀 첫눈이 내려 마치 화이트 크리스마스 기분을 맞보게 해주었다.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 시내의 아파트는 대부분이 5층으로 되어있으며 거리에는 신호등이 거의 없고 송전철탑과 전선이 많은 것을 보면 전력사정은 좋은 것 같았다. 또한 이 지역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새 차의 90%가 일본제이고 중고차의 대부분은 한국산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톡은 영화 “왕과 나”의 주연배우로 너무나도 유명한 머리를 빡빡 깍은 대머리 율 브린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 날 저녁 만찬에는 킹크랩(한국의 영덕대게)과 보드카로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블라디보스톡에의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그사이 엄청나고 빠르게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 보람 있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