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이수(理隨)
남전(南泉)이 언젠가 수유(茱萸)화상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편지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치가 일을 따라 변하니.
너그럽고 넓으나 밖이 아니요,
일이 이치를 따라 변하니,
고요하나 안이 아니니라”
수유가 읽고 나서 이 대목을 들어 대중들에게 물었다.
“누가 나를 위해 답장을 써 주겠는가?”
그러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너그럽고 넓으나 밖이 아닌 것입니까?”
수유가 말하였다.
“하나를 물어 백을 대답해도 무방하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고요하고 적막하나 안이 아닌 것입니까”
수유가 말하였다
“소리와 빛을 보고 듣는 것은 능숙한 솜씨가 아니니라”
그 스님이 다시 장사(長沙)에게 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너그럽고 넓으나 밖이 아닌 것입니까?”
그러자 장사가 눈을 감고 잠자코 있으니.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고요하고 적막하나 안이 아닌 것입니까?”
장사가 눈을 뜨고 마주 보았다.
그 스님이 다시 조주(趙州)에게 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너그럽고 넓으나 밖이 아닌 것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밥 먹는 시늉을 하니,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고요하고 적막하나 안이 아닌 것입니까?”
이에 조주가 입 닦는 시늉을 하였다
스님이 선사에게 가서 이 일을 이야기 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세 사람 다 틀림없는 내 맏아들이로다”
승천간(承天簡)이 염 하였다.
“이 세 사람 중에서 하나는 가죽을 얻었고,
하나는 살을 얻었고,
하나는 진(秦)나라에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위(魏)나라에서도 감싸주지 않는구나”
說話
“이치가 일을 따라 변하니[理隨事變]……”라고 한 것은
두순(杜順)화상의 법계관(法界觀) 중에서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에 나오는,
즉 이치가 일을 따라 변하니 이치가 곧 일[理卽事]이요,
“너그럽고 넓으나[寬廓]”라고 함은
일[事]이나 밖이 아니라[非內]했으니,
이치가 일을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일이 이치를 따라 변한다[事從理變]”함은
일이 곧 이치[事卽理]요, “
고요하다[寂寥]”함은
이치이나 안이 아니라[非內]했으니,
일이 이치를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물어 백을 대답해도
무방하니라[問一答百也無妨]”라고 함은
일이요,
“소리와 빛을 보고 듣는 것은[ 對聲色]……”이라 함은
이치[理]이다.
“장사가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長沙閉目良久]”함은
일이 곧 이치요,
“눈을 뜨고 마주 보았다[開目視之]”함은
이치가 곧 일이다.
“조주가 밥 먹는 시늉을 했다[州作 飯勢]”함은
일이요,
“입 닦는 시늉을 했다[作拭口勢]”함은
밥을 먹은 뒤에 입을 닦은 것인데,
이는 평상시의 일인즉
조주의 뜻은 이치와 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세 사람이 각기 한 팔을 내밀어 함께 한 가풍을 이루었으니
그러기에 “세 사람 다[此之三人]……”라고 하였다.
승천(承天)의 염은 본칙 설화 속에서 이미 언급했다.
233. 육합(六合)
남전(南泉)에게 육긍(陸亘)대부가 물었다.
“제자가 직접 육합(六合)에서 왔는데
거기에도 내 몸이 있습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작가(作家)에게 이야기하라”
천동각(天童覺)이 상당(上堂)하여 이 이야기를 들어 말 하였다
“공하여 있지 않으나 끝없는 몸이 구족하고
묘하여 없지 않으나 끝없는 작용이 구족하니
하늘에 있으면 같은 하늘이요,
사람에게 있으며 같은 사람이며,
저쪽에 있으면 같은 저쪽이요, 이쪽에 있으면 같은 이쪽이다.
그러나 하늘ㆍ사람ㆍ이쪽ㆍ저쪽이 그와 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스스로가 주인이 아니로되
온갖 곳에서 주인이 되고 손은 스스로가 손이 아니로되
온갖 곳에서 손이 되나니,
만일 이렇게 알면 남전만을 엿볼 뿐만 아니라
육긍 대부가 생사에 들고 나면서 종횡으로 변화하되,
몸에 구애되지 않는 모습도 알리라.
확실히 알겠는가?
밝은 달이 사람을 따르는 것은
뜻이 있는 것 같으나
흰 구름이 비가 되는 것은 딴 마음이 없느니라”
※ 중국 선주(宣州)에 속한 고을의 이름이니,
대부가 그 고을의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부른 것이다
여기서 육합(六合)에서 왔다는 말은
고을의 이름이긴 하나
사방과 천지를 합친 6방이란 뜻을 염두에 두고 물은 것인데,
남전이 그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說話
“육합(六合)”이라 함은
선주(宣州)에 속한 현(縣)의 이름이다.
대부(大夫)가 선흡관찰사(宣歙觀察使)였을 때에 물은 것인데,
선흡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특별히 육합에서 왔다고 한 것은
아마도 천지육합(天地六合)의 뜻을 취한 것인 듯하다
그렇다면
“제자가 직접 육합에서 왔는데[弟子親從六合來]”라고 한 것은
마치 보은사(報恩寺]의 혜명(惠明) 선사가 두 스님에게 묻기를
“상좌(上座)가 도성(都城)에서
이 산으로 왔다면 여기에는 상좌가 남고,
도성에는 상좌가 모자란다.
남는다면 마음 밖에 법이 있고
모자란다면 마음과 법이 두루하지 못하리라”하였으니
이것이 흠잉관(欠剩關)인데,
실은 둥글기가 허공 같아서 모자람[欠]도 없고 남음[餘]도 없다.
“잘[分明]……작가에게 이야기하라[作家]”고 한 것은
물음거리가 썩 좋겠다는 뜻이다.
천동(天童)의 상당(上堂)에서
“공하여 있지 않으나[空不可]”에서부터
“끝없는 몸[際身]”까지는
본신(本身)이니 곧 체(體)라는 뜻이요,
“묘하여 없지 않으나[妙不可]”에서부터
“작용이 구족하다[用]”까지는
본용(本用)이니 곧 용이란 뜻이다.
무(亡)는 무(無)와 같은 뜻이요,
“하늘에 있으면[在天]”에서부터
“같은 이쪽이다[同此]”까지는 끝없는 용(用)이며,
그러나[誰然]“에서부터
그와 합하는 것[他合]은 아니다”까지는
끝없는 몸이다.
“주인은 스스로가 주인이 아니로되[主不自主]……온갖 곳에서
손이 된다.[一切處賓]”고 한 것은
주인[主]이 곧 손[賓]이기 때문에
주인이 철저[到底]하고 손이 곧 주인이기 때문에
손이 철저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종횡(縱橫) 자재(自在)하게 생사(生死)에 나오고
들어가 몸에 구애되지 않으니
몸은 곧 거기에서 이리로 온 몸인 것이다.
“밝은 달이[明月]……”라 한 것은
까닭이 있는 듯 하되, 무심하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