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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초지진, #초지돈대, #덕진진, #손돌목 돈대, #용두돈대, #쌍충비, #광성보,
#어재연 장군, #강화 6경, #5개 진과 7개보 53돈대, #미군침공, #강화8경, #按海樓(안해루)
#강화 나들길 2코스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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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여행] 강화 6경, 신미양요때 미군과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던 현장 광성보........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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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여행] 강화 6경, 신미양요때 미군과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던 현장 광성보........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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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랑자가 신미양요의 처참했던 현장인 광성보를 돌아보았다. 본시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
과 더불어 염하강[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 중 하나였다. 강화도의 이 돈대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시계를 거꾸
로 돌려 고려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민족들은 서러운 법이다. 그때도 그랬고 현재에도 트럼프의 관
세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나약한 민족들은 항상 피로서 죽음으로서 답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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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당시 고려 시대를 가리킨다. 당시 몽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려 무신정권 최우는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강
화도의 역사는 시작된다. 1232년[고종 19]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을 고려 수도로 삼으면서 강화도는 내성과 중
성 그리고 외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土石雜築[토석잡축]성으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
다. 이때부터 강화도는 대몽항쟁의 심장부로서 완벽한 요새 도성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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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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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627년 丁卯胡亂[정묘호란]에 이어 1636년 丙子胡亂[병자호란] 당시 강화가 함락된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
섬의 방비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강화산성, 삼랑성, 정족산성 등의 유적은 당시의 치열했던 방어 체계
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이후 성은 헐리고 다시 쌓기를 반복하면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1658년[효종 9]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해안가에 처음으로 설치된 군사 지휘소가 바로 광성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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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환으로 우선 효종[17대, 1649년∼1659년]~숙종[19대, 1674년∼1720년] 의 시대를 거치며 단계적으로 강화 연안을
따라 12개의 진, 보를 다른 지역에서 옮겨 오거나 새로 설치하였다. 광성보는 당시 강화에 신설된 5개 진과 7개의 보 가운
데 하나이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연이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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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몽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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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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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海樓(안해루): 바다를 제압하여 누른다.라는 뜻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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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광성보는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이때 按[누를 안], 海[바다 해], 樓[다락 루(누)]
‘按海樓[안해루]’라 하고 懸板[현판]을 달았다. 안해루(按海樓)란 ‘바다를 제압하여 누른다’는 의미의 뜻을 지닌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벼슬은 오늘날 군 하사계급[서기보] 격인 종9품 별장의 지휘 아래 군관 15인, 吐猝[토졸] 45인이 배
속되었고, 군선 9척과 조총, 활, 화포, 완구, 불랑기 등 각종 화포와 탄환, 화약 등이 비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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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9년[숙종 5] 강화 연안을 따라 축조한 48개의 돈대 가운데 광성, 오두, 2개의 돈대를 관장하였다가 이후 화도돈대를
귀속 3개의 돈대를 관할 하게 되었다. 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광성보의 손들목 돈대는 신미양요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
이 요새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이 신미양요[1871년] 때 제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쇄국 정책을
고집했던 흥선대원군이 지배하던 조선 조정은 객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당시 군을
이끌던 로저스 제독도 당황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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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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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유랑자는 생각해 본다. 만약에 일본처럼 우리 조선도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개방했었더라면 지금쯤 우
리나라의 위상과 상황은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날 미친 트럼프 같은 인간이 우리 민족을 이렇
게 대 놓고 무시할 수 있었을까? 당시 일본은 미국이 군함을 앞세워 동경 만에서 압박하자 일본은 곧바로 항복하고 개항을
했다. 그 개항이 후에 패망[2차 세계대전]의 길로 가긴 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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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이때의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미국은 해병대와 해군 군함을 조선에 파견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미 군함이 진격하기 위해 중요 길목인 강화도 수로에 미군이 진입하게 된 것이다.
어찌 되었든 고종 8년[1871]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조선 5백 년 쇄국의 단잠을 깨우는 서양의 포성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고종 8년[1871] 6월 1일 로저스 제독의 지휘하에 함대 콜로라도를 비롯해, 호위함 3척,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
명으로 구성된 미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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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돈대로 들어가는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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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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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돈대로 들어가는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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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군함은 더욱 발전된 증기선 함대였고 병사와 무기는 남북전쟁의 경험을 가진 정규군과 신형 대포로 무장한 최정
예 부대였다. 1871년[고종 8] 당시 초지진을 거쳐 염하강을 따라 북상하던 미국 함대가 손돌목 근처에 도달하자 우리 조선
군은 광성보에서 사격을 하였고 남쪽의 덕진진과 덕포진에서 이에 호응하면서 함대의 북상을 막았다. 북상에 실패한 미군
은 양력 6월 10일 초지진에 상륙하여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을 함락한 뒤 강화 수로의 마지막 보루인 광성보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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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정에서는 고종 8년 삼군부에서 아뢰기를 "鎭撫中軍[진무 중군] 강화도 자리가 지금 났습니다. 이런 때에, 이 벼슬
자리에 특별히 선발하여 임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行護軍[행 호군] 魚在淵[어재연]을 특별히 差下[치하]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하니, 고종[대원군]은 윤허하였다. 어재연은 병인양요 당시 초지진에서 근무했었다.
6월 7일 진무 중군은 강화도 지역 군 책임자로 오늘날 사단장급에 준하는 직급이다. 어재연 장군은 洋夷[양이] 침공을 막
고 수도 한양을 지키기 위해 각각의 영에서 파견된 600여 명의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로 급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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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용했던 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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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경내 전체가 광성보의 영역으로 인식되지만, 보(堡)는 개별 성곽이나 방어 시설이 아니라, 군사
지휘부이다. 광성보의 본진이 따로 존재하였고 옛 지도를 통해 광성돈대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지금까지
구체적인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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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미군 상륙 부대의 마지막 공격 목표였던 광성보에는 양이를 방어하기 위해 진무 중군 魚在淵[어재연] 장군이 와있
었다. 그러나 사실은 장군은 전투 개시 며칠 전에 급파되어 지휘 체계가 엉망인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
에서 급파된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은 휘하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광성보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장군은 6월 11일에 초지진, 덕진진까지 점령한 미군의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하였다.
여기서 손돌목돈대까지 밀리자, 어재연 장군은 휘하 군사 350명과 함께 최후의 전투 준비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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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장군은 수륙 양면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에 맞서 싸우며 야포 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해서 끝까지 물러서
지 않고 치열하고도 처절하게 싸우는 도중 미군 수병 제임스 도허티가 찌른 총검에 통한의 한을 품은 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렇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전투는 미군이 돌격을 개시한 지 단 15분여 만에 조선군의 궤멸로 종료되었다. 그 결과
미군은 맥키 대위 이하 3명이 전사 9명이 부상을 당하지만 조선군은 지휘관 어재연, 그의 동생 어재순, 그리고 *군사 240
여 명이 전사하고 20명이 포로, 100명이 자결하는 대패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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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는 강화 동남쪽 해안선이 손돌목 방향으로 돌출한 언덕에 자리한다. 약 1.5km 남쪽에는 덕진진이, 강화해협(염
하강) 건너편에 덕포진이 위치한다. 현재 광성보 경내에는 광성, 손돌목, 용두 등 3개의 돈대와 강화외성 6개 문루 가운데
하나인 안해루(按海樓)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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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미군은 당시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광성보도 점령하였다. 당시 돈대의 성첩 과 문루가 파괴되었으며 ‘帥[수]자기: 장
군기]’를 비롯한 깃발과 화포 등이 미군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자신들과 끈질기게 싸운 조선군을 높이 평가한 미 해군에서
는 어재연을 포함한 장교들을 정중히 매장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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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선군은 광성보가 함락된 후에도 전장을 피해 있었던 군사들이 초지진 등지에서 첨사 이렴의 지휘 아래 야간 기습
을 가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 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 날인 6월 12일에 철군해 버렸다. 조선 조정은 3일 후인 6월
14일에 그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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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는 1971년 12월 29일 사적 제227호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대 강화전적지 보수 정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돈대
와 문루를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2011년 광성보에서 강화 광성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매년 음력 4월 24일
에는 신미양요 당시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한 ‘광성제’가 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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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돈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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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 해군 공식 기록관에 기록된 기사를 보면 이 당시 미국 측 대사였던 프레데릭 로우(Frederick Low)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미국은 손돌목 협상을 통하여 이미 조선 측이 협상이나 조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대로 미 해군이 물
러난다면 중국과 조선인의 전투적인 사기를 올려주어 결과적으로 조선과 중국에 대한 미국의 이익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대로는 물러날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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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 해군 지휘관이었던 존 로저스와 미국 측 대사인 프레데릭 로가 당시에 남긴 기록을 보면 이 강화도 공격에는 손돌
목 포격에 대한 보복(punitive)의 목적이 있었으며, 특히 전투를 통해 정치적인 목표를 이루겠다는 동기보다는 약소국이었
던 조선이 강대국이었던 미국을 공격했으니깐 본때를 보여준다는 감정적인 요인이 동기로 더 크게 작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힘의 자랑! 이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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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해협쪽에서 바라본 안해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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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
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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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洋擾護國無名勇士碑(신미양요 호국무명용사비) 故 박 정희가 ‘어재연 장군의 비각은 있으나 병사들의 순국비가
없다며 무명용사 순절비를 세우라’고 지시했다.”(중앙일보 1977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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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忠碑閣(쌍충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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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투 때 미국 슐레이 대령이 쓴 기록을 보면.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
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창과 칼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하다 그나마 쓰러져 가면서도 우리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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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
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슬프도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군이 군사적으로 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정신적으로 얼마나 용맹스러운 존재인가를 느끼고, 미군은 하루 만에 퇴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고서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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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撫中軍魚公在淵殉節碑[진무중군어공재연순절비], 幼學魚公在淳유학어공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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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城把守殉節碑[광성파수순절비]
本鎭別將朴公致誠[본진별장박공치성]
本管千總金公鉉暻[본영천총김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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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전 이후 미 해병대 대위는 본토로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포격 전과 조선군의 수준을 기록했다. "그들의 포는 매우 조
잡했으며. 통나무로 된 포가 얹혀 밧줄로 묶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미리 정해진 지점 외로는 사격을 할 수 없다고 하
오. 그래서 우리 배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에야 포격을 했소. 커다란 포환이 날아왔는데 배에는 전혀 맞지도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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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총통이라고 불리는 소형 화기에서 발사된 조잡한 탄환 두어 개가 적중했다고 하오. 그 총통이라는 것은 두 명이 어깨
에 걸쳐 메고 화승으로 발사하는 것이라고 하오. 단지 우리 승조원들 3명이 맞았는데 가벼운 부상이라고 하오. 최신의 무
기로 무장한 우리에게 그들이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수 있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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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殉義塚[신미순의총]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일대에서 미 해군과 격전하다가 장렬히 순국한 조선군의 시신들을 화장시켜 한 묘에 7~8인씩 함께
합장한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
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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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殉節墓壇[순절묘단]. 辛未洋擾 戰亡將兵侍郞(신미양요 전망장병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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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엇인가가 좀 이상하다. 당시 두 국가의 전력을 비교해 보면, 조선군: 1,000명 [수비대]/미군: ▶1,230명으로 미군
이 더 많다. 조선의 군 피해는 전사자: 53명(조선 집계) 으로 기록 되어있고, 미군에서는 조선군 전사자를 243명 [미국 집
계] 로 되어있다. 조선군 익사자는 100여 명 [투신 자결]/ 포로: 20명, 미군 피해는 사상자: 15명[전사자: 3명/부상자: 12명]
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선과 미군들의 사상자 집게가 다를까?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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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가 짐작해 보건대 243명이라는 숫자는 미 해병 측에서 초지 돈대 사망까지 총 집게 한 것은 아닐까? 물론 피해국인
조선에서는 감추려 했을 것이고 가해국인 미군 측에서는 부풀려고 했을 것이다. 아무튼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러나 아직 까지도 진실은 초지와 손돌목돈대에 묻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는 승리
였으나 누구 한 사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의미한 승리였다고 1871년 6월 17일 자 뉴욕 헤럴드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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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의 발단은 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공식적인 사
과를 할 것과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강화유수(governor of Ganghwa)가 개
별적으로 연락을 취해 소 세 마리, 50마리의 닭, 1천 개의 계란을 선물로 보내면서 적대적인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 했지
만, 미국 측은 이 선물을 쓸모없다(worthless)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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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 정부에서는 雙忠碑[쌍충비]를 세워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쌍충비는 향토 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 비이다. 1기는 강화
군민이 건립한 廣城把守殉節碑[광성파수순절비]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 비로 1873년
에 건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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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1기는 어 재연과 어 재순 순절 비인데 폭이 58cm, 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 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 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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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공식 사과를 요구한 지 10일 동안 조선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대응은 나오지 않았고 이에 미 해군 측 지휘관 로저
스 제독은 미 해군을 6월 10일 강화도에 상륙시켜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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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당시 어재영 장군에게 주어진 군사들은 각각의 영에서 소집해 광성보로 파견된 600여 명의 포졸 군들이었다. 당
시 조선군은 지방에 중앙군을 파견할 때 다른 군영에서 차출 부대를 뒤섞어 보내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아마 같은 군영
부대만을 보내면 반란을 일으킬 우려를 해서 그런 듯] 그런데 하필 조선군은 각 군영마다 군령이 다르고 훈련 방식도 달랐
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조선만의 특이한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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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도 현재까지 원정군을 파병하는 경우 각 지역에위치한 육군 연대에서 대대를 하나씩 뽑아 여단을 구성해서 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비효율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게,당시 중앙 군영은 그냥 이름 다른 부대인 게 아니라 국가 체제 [세금
징수나 부역 등] 과 긴밀히 연결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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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대를 전부 보냈다가 전멸해 버리거나 대다수가 사망하면 국가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조선군
의 중앙군 군영들은 각 지방에서 올려보낸 번 상병들을 특정 군영에서 담당해서 수용, 운용했기 때문에 군영 하나를 통째
로 보냈다가 전멸하거나 하면 해당 지방은 한날한시에 제사 지내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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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도 1차대전 초기에는 각지방 출신끼리 묶어서 Pal이라는 지역연대를 편성해 전장에 투입했더니 회전 한 번에 한 지역
이 통째로 줄초상이 나는 일이 벌어져 결국 Pal 제도를 폐지하고 각 지역 출신들을 뒤섞어 편성하는 것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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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광성보 유적지 찾아가기
*주 소: 인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466번길 27
-구(지번): 불은면 덕성리 27
*입장료: 어른 1.100~1.500원
*전 화: 032-930-7070
*관람시간: 09:00~18:00 (입장마감 17:00 )
*정 보: 연중무휴/ 주차 무료, 예약 가능/ 반려동물 출입금지
*관련 홈페이지: https://www.ghs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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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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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여행 가이드
*관광 안내소: 032-932-2302.
*강화군청 문화 관광과: 032-930-3568
*관광 통역안내: 1330(24시간 운영)
*한옥관광 안내소: 032)932-5464
*터미널 안내소: 032)934-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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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여행 정보는 여기에서 확인 요.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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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8경
#제1경 전등사/. #제2경 보문사/. #제3경 연미정/. #제4경 갑곶돈대/.
#제5경 마니산/. #제6경 광성보/. #제7경 초지진/. #제8경 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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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도보 여행 시 유의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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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코스를 숙지 후, 시간과 거리를 감안한 자신의 체력에 맞는 여행을 하십시오.
*여러 사람과 함께 여행하며, 위급 시 119나 소리를 내어 주변에 알리도록 합니다.
*해안제방 길에서 밀물과 썰물 및 군사 보호지역 통행시간을 고려하여 여행하십시오.
*해안가 근처에는 폭발물 등의 위험물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강화 나들길 여행시간은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입니다.
*코스 중에는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으니 훼손하지 않도록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 중에 주민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할 수 있으니 조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위한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시고, 쓰레기는 반드시 회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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