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지역 사찰 답사기
2026년 7월 26일 정구복 선생님과 불교방송 BTN에서 운영하는 국토순례 사찰 답사에 참여하여 경북 예천에 있는 한천사, 개심사지, 용문사를 답사하였다.
1. 한천사
오전 10시 20분 경 한천사(寒天寺)에 도착하였다.
한천사는 예천 감천면 주마산(走馬山) 자락에 있다.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지만, 영주 부석사와 인연이 깊다. 조선 고종 12년(1875)에 작성된 사찰의 연화기(緣化記)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울 때 기둥이 계속 넘어져 그 이유를 살펴보니 소백산 남쪽 주마산의 지세가 달리는 말머리 모양이라서 그 지리적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주마산에 한천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한천사는 부석사이 비보사찰 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전인 대적광전을 비롯한 사찰 건물은 대부분 근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찰 입구 부분에 있는 3층석탑과 대적광전 안에 본존불로 있는 철조비로좌나불은 얼핏 보기에도 역사성이 유구한 유물임을 알 수 있었다.
한천사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높이 3.6m의 작은 크기이지만 우아하면서도 단정하며 안정된 느낌이다. 이중의 기단에 삼층의 몸돌을 세웠고, 상륜부에도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있다. 본전 앞 뜰에 있지 않고 한 단 아래의 뜰에 일탑으로 있는 배치가 좀 특이하게 느껴졌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역시 삼층석탑과 같은 시대의 유물이다. 신라말 고려초 가부좌한 철불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남원 실상사, 장흥 보림사, 철원 도피안사 철불이 대표적이다. 한천사 철불 역시 이들 철불과 동시대 같은 양식이다. 다른 철불에는 명문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철물에 명문은 없었다. 하지만, 우아하면서도 침착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 건장한 신체, 의젓한 앉음새, 탄력 있는 다리 등의 생김새는 다른 철불보다 우수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한천사에서 점심 공양을 받고 개심사지로 갔다.
<사진1 : 한천사 삼층석탑과 철불>
2. 개심사지오층석탑
개심사터는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에 있다. 예천 읍내 중심부이다. 낙동강의 지류 한천이 읍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관통하는데, 그 강의 남쪽 평지에 해당한다. 너른 평지에 사찰 건물은 물론이고 주춧돌도 하나 없고, 오층석탑만 홀로 우뚝 서 있다. 10년 전만 해도 사적지로 지정되지 않았고 탑 주변에 논과 밭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넓은 잔디밭이다.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있고, 꼭대기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다. 하단 기단석에는 한 면에 3구씩 12지상을 돋음새김하였다. 십이지상은 몸은 사람, 얼굴은 짐승이며, 법의를 걸치고 있다. 2층 기단석에는 한 면에 2구씩 팔부중상을 새겼다. 그리고 다시 그 위의 탑신부 1층 몸돌 중 남쪽 면에만 문고리 모양과 그 양쪽으로 인왕상 2구를 새겼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도 비율이 잘 갖추어져 보기 좋지만, 거기에 새겨진 조각도 훌륭하였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석탑을 주목하는 진짜 이유는 그러한 예술성보다도 탑에 새겨진 명문 때문이다. 명문은 2층 기단석 위에 있는 옥개석의 아래쪽(上臺甲石 처마)에 있다. 4면 모두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아래 면에 새겨져 있기에 몸을 숙이고 고개를 하늘을 보는 자세로 돌려서 보아야 보인다. 그리고 2층 기단석 동쪽 면의 팔부중상 사이에 3줄의 명문이 또 있다.
허흥식 선생님의 판독문을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韓國金石全文』 中世上篇, 1984)
(2층 기단 위의 옥개석 아랫면)
上元甲子四十七統和二十七庚戌年二月一日正骨開心寺」
到石析三月三日光軍弎六隊車十八牛一千以十間入矣僧」
俗娘合一萬人了入弥肋香徒上秤神廉長長司正順行典福宣金由」
工達孝順位剛香德貞」
喦等卅六人椎香徒秩京成仙郞(光叶金叶)阿志大舍香式金哀位奉楊(能廉寸等)」
(隊正邦祐)其豆昕京位剛儡平(矣典)次衣等」
五十人」
(2층 기단석 동쪽면)
棟梁戶長陪戎校尉林長崔祐母主副棟梁▨▨邦祐」
罒弘爲身心上報之佛恩爲國正功德普及於一切」
辛亥四月八日立」
석탑에 직접 새겨진 석탑기를 통해 탑을 만든 시기와 탑을 만든 사람들 그리고 그 과정까지 알 수 있다. 그밖에도 당시 예천(고려 전기 甫州)에 있던 광군의 규모와 향도의 존재 등 주목되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첫 줄에 등장하는 正骨에 대한 해석부터, 탑이 어떠한 세력에 의해 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특히, 탑을 만든 統和(거란 요나라 연호) 27년 경술, 즉 고려 현종 즉위년인 1010년부터 탑을 완성한 그다음 해인 신해년 4월은 거란과의 2차 전쟁 중이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 간 시기였다. 물론 당시 예천 지역은 전쟁의 피해가 직접 미치지 않았지만, 하필 그 시기에 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흥미롭다. 정구복 선생님은 성종 때 연등회와 팔관회가 폐지되었다가 이때 다시 개설된 것에 주목하여, 그것을 축하하고 기리는 차원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 하였다. 나는 고려시대 대장경이 두 차례 모두 전쟁 와중에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발원에서 조성된 것처럼, 이 탑 역시 지방 세력이 그러한 소원을 담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석탑기 명문 중 2층 기단석 동쪽면의 두 번째 줄에 있는 “爲國正功德”은 그와 관련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이 탑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청동기시대 고인돌에 있는 성혈이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신종원 교수님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함께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그 탑의 기단석에 성혈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탑이 산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읍내에 있기에, 그 탑에다 대고 샤머니즘적인 민속 신앙 행위가 간간이 이루어진 흔적이라 하였다. 불교와 민속 신앙이 어우러진 복합성과 다양성 그리고 관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너무나 재미있는 공부이고 경험이었다. 나는 개심사지오층석탑을 보고도 왠지 성혈이 있을 것 같아, 버스로 돌아간 뒤 다시 와서 살펴보았더니, 진짜 2층 기단석 위에 두 개의 성혈이 있었다. 너무나 놀랍고 뿌듯하였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으로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자 무덤이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독바우’ 또는 ‘칠성바우’로 부르며 아들 낳게 해달라고 하는 등의 소원을 비는 대상이 되었다. 그 소원을 빌며 어떠한 행위를 했을 텐데, 그 과정에서 동그랗게 구멍을 파는 성혈이 만들어진다. 개심사오층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교의 예배 대상인 탑에 샤머니즘적 민속 신앙 행위를 한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많은 불교 신자들이 함께 탑돌이 예배 의식을 하였다. 약 50명이 넘는 사람이 탑 앞에서 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추어 함께 반야심경을 읊은 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 하면서 천천히 매우 천천히 탑을 두 번 돌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2시 경이었다. 탑돌이는 처음 보는 불교의 예배 의식이었기에 흥미롭기도 하였고, 거대한 행렬이었기에 그 장면 또한 장관이었다.
<사진2 : 개심사지오층석탑, 석탑 2층 기단석 위 옥개석 아래면의 명문, 2층 기단석의 팔부중상과 명문, 성혈>
3. 용문사
탑돌이까지 마친 사람들은 부랴부랴 버스로 올라탔다. 버스는 예천에서 가장 큰 사찰 용문사로 갔다.
용문사는 용문면 내지리에 있고, 산 중턱에 가람을 만들었다.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두운이 창건하였고, 고려 태조의 명으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려 왕실과 관련된 내력이 있어, 매우 중요시된 큰 절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다. 영주 부석사와 같이 여러 개의 단을 두고, 단 위에 건물들이 있다. 회전문, 범종루, 보광명전, 응진전 등 많은 전각이 있고 볼거리도 많은 큰 규모의 사찰이다. 그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가치가 큰 전각은 단연 大藏殿이다.
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크지 않은 건물이다. 하지만 다포의 장식과 내부의 천장 장엄 등이 상당히 화려하면서도 긴 시간의 흔적이 느껴졌다. 고려 명종 3년(1173)에 처음 만들어진 뒤,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지만 그 규모와 구조는 처음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고 한다.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국보로 지정되었다.
대장전은 실제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비록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지 않지만, 대장전 안에는 가운데 불단 양쪽에 윤장대 2대가 있다. 윤장대는 마룻바닥을 단면 8각으로 뚫고 회전축을 세운 뒤, 지도리를 놓아 경장을 받치고 회전축을 천장에 고정시켰다.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에는 1173년(명종 3)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대장전과 윤장대를 건립하였다고 하였지만, 사적기(事蹟記)에는 1670년(현종 11)에 고쳐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1670년 쯤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장대는 보통 하나를 설치하는데, 여기에는 두 개가 쌍으로 함께 있는 것도 특징이다. 해설사는 음양사상의 영향이라 한다. 내가 윤장대를 가장 감명 깊게 본 부분은 윤장대의 창살이다. 왼쪽에 있는 윤장대 창살은 8개 면에 각각 다른 장식을 했는데,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질서 있고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대장전 내부 가운데 불단에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있고, 그 뒤에 마치 광배와 같은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 걸려 있다. 가로 215, 세로 261cm의 직사각형 나무판에 가운데 여래상, 위에 구름무늬, 그리고 수많은 보살을 빼곡하게 새겨 넣은 뒤 도금까지 하여 더욱 화려해 보였다. 조선 숙종 10년(1684)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성보박물관까지 전체적으로 다 둘러보기는 하였지만, 용문사는 대장전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답사였다.
<사진3 : 용문사에서>
첫댓글 1. 좋은 답사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가지 수정할 부분이 있습니다. 개심사지 5층석탑기에서 통화 27년은 고려 현종 즉위년(1009)이지만 그 해의 간지 경술년은 현종 원년(1010)입니다. 이는 이미 학계에서 지적된 것으로 그 거란의 연호의 27년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심사의 석탑건축은 현종 원년 2월1일부터 시작하여 2년 4월8일에 준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종은 즉위년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을 간 상황에서 지방 백성들을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성종8년(989)에 폐지된 국민의 축제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현종원년 윤2월에 반포되었는데 마침 탑을 건설 중인 보주(예천)의 백성들은 와하고 환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불사에 참여한 향도가 1만명에 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불사에 참석한 사람의 숫자는 마칠 때의 통계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이에서 예천의 개심사 5층석탑은 현종원년에 국민축제은 연등회를 허용함에 만세를 부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개심사 5층석탑기의 특징으로 지금까지 지적되지 않은 사실이 현종 원년의 연등회(2월15일, 지방에서는 4월초8일에 공식적으로 허락된 축제를 하게 되자 백성의 환호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팔관회는 서울과 서경에서 행하는 국민축제로 지방민이 참여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석탑기에 금석문해석에 지금까지 학자들이 소홀히 한 점을 더 든다면 참여인원이 僧(승) 俗(속)娘낭) 합 1만인이 참여했다는 기술에서 낭자를 郎자로 해석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승속랑이 성격을 달리하는 집단인데 이 경우 랑은 화랑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뒤에 추향도 명단에 선랑으로 광협과 금협의 두 사람이 명기된 점으로 확인됩니다. 이는 논문으로 밝혀야할 중대한 점입니다.
또한 이 석탑기의 조성과 글을 짓는 일은 탑신석에 새겨진 동량들이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발원문 중 공덕이 일체에 미치라한 발원문은 참으로 깊은 뜻을 가집니다. 일체는 일체 중생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이에는 당시의 중생만이 아니라 그 후로 이 탑을 찾아 경배하는 모든 사람에게 두루 미치라고 한 발원문은 참으로 의미 깊은 기원문입니다.
3. 예천 지역은 현재 상주, 안동, 영주, 의성, 문경에 접해 있는 내륙지방이지만 신라만 고려초에는 정치적으로도, 교통로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상주는후백제의 견훤이 태어난 곳이고, 신라의 지방 군현 중 대단히 중시한 곳이며, 행정, 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곳이고 안동의 중요성은 고려 태조가 신라 세력을 영합할 수 있는 요로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상주지역에 있던 호족 선기가 고려태조에게 투항한 것은 고려의 세력 확장에 아주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천지역은 당시 보주라는 주단위로 중시된 지역이었습니다. 이 점은 신라말 고려초에 세워진 여러 불교 사찰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특히 용문사에의 윤장대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유물이고 석가모니불 뒷편의 광배는 대나무로 만들은 점에서 특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답사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 개심사 석탑기의. 중요한 의미. 1).이 기록은 190자가 마모되지 않고 전문을 해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옥개석 추마에 새겨서 1천년간 빗물과 풍상을 피할수 있었다. 이에는 석재가 단단함도. 일조했다. 2) 이 글은 1000년 전의. 사회.문화전통.지역사회의. 모습 등을 잘.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백 교수는 이에 나오는 광군을 최초로 해명했고. 이태진 교수는 이에 나오는 향도 자료를 심층 분석했다. 이에는. 미륵향도와. 추향도의 임원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이 향도는 조선조의 촌락 구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상두군의 선례로 이해했다. 이에는 1만명이 참가한 대역사의. 실체를 파악한 업적이다. 최근에는 이 기록을 통해 예천지역의 서성희 박사의 논문이 있다.
5). 이 기록은 현종 원년(1010)경의 문화사상을 분석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연등회. 팔관회의 부활이 기지는 의미를 연구하는 일이다. 이에는 이웃 대구 칠곡의 정도사5층탑기와 비교연구도 요구된다. 이번 답사는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직접 현장을 보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가진다.
개심사 석탑기는 우리나라 기록 중 '향도" 라는 기록이 보이는 가장 빠른 최초의 금석문은 673년에 작성된 전의현 미륵불상조상기 입니다. 이는 백제유민이 중심이 된 불사를 향도라고 한 첫 사례입니다.(노중국교수 설). 그런데 그 향도의 기록은 상세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철원 토피안사 철조불상을 만드는 1500명이 향도가 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고고시대의 자료로는 이 개심심사 5층석탑기에 나오는 명문입니다.
이에는 미륵향도와 '추향도'가 있습니다. 미륵향도는 그 개념이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다음에 나오는 "椎香徒"의 발음을 '치향도; 또는 '추향도'로 읽고 있는데 이는 추향도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椎'자는 자전에 음이 두가지이고 그 뜻이 다릅니다. 이글자의 첫째는 음은 '치'이고 그 뜻은 "치다". "순박하다". "어리석다"의 뜻이고 이를 '추'로 읽을 경우. 그 뜻은 "상투", "등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척추라고 할 때 이 글자를 씁니다.
그래서 이 향도는 중심되는 향도라는 뜻으로 "추향도"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이아이에게 물어보니 "치향도"로 읽는 데 이는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