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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탐방(Field Work) 정구복 선생님과 예천 지역 사찰 답사
전진국 추천 2 조회 54 26.08.06 04:42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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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6.08.06 08:58

    첫댓글 1. 좋은 답사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가지 수정할 부분이 있습니다. 개심사지 5층석탑기에서 통화 27년은 고려 현종 즉위년(1009)이지만 그 해의 간지 경술년은 현종 원년(1010)입니다. 이는 이미 학계에서 지적된 것으로 그 거란의 연호의 27년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심사의 석탑건축은 현종 원년 2월1일부터 시작하여 2년 4월8일에 준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종은 즉위년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을 간 상황에서 지방 백성들을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성종8년(989)에 폐지된 국민의 축제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현종원년 윤2월에 반포되었는데 마침 탑을 건설 중인 보주(예천)의 백성들은 와하고 환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불사에 참여한 향도가 1만명에 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불사에 참석한 사람의 숫자는 마칠 때의 통계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이에서 예천의 개심사 5층석탑은 현종원년에 국민축제은 연등회를 허용함에 만세를 부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26.08.06 09:20

    2. 개심사 5층석탑기의 특징으로 지금까지 지적되지 않은 사실이 현종 원년의 연등회(2월15일, 지방에서는 4월초8일에 공식적으로 허락된 축제를 하게 되자 백성의 환호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팔관회는 서울과 서경에서 행하는 국민축제로 지방민이 참여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석탑기에 금석문해석에 지금까지 학자들이 소홀히 한 점을 더 든다면 참여인원이 僧(승) 俗(속)娘낭) 합 1만인이 참여했다는 기술에서 낭자를 郎자로 해석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승속랑이 성격을 달리하는 집단인데 이 경우 랑은 화랑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뒤에 추향도 명단에 선랑으로 광협과 금협의 두 사람이 명기된 점으로 확인됩니다. 이는 논문으로 밝혀야할 중대한 점입니다.
    또한 이 석탑기의 조성과 글을 짓는 일은 탑신석에 새겨진 동량들이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발원문 중 공덕이 일체에 미치라한 발원문은 참으로 깊은 뜻을 가집니다. 일체는 일체 중생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이에는 당시의 중생만이 아니라 그 후로 이 탑을 찾아 경배하는 모든 사람에게 두루 미치라고 한 발원문은 참으로 의미 깊은 기원문입니다.

  • 26.08.06 09:44

    3. 예천 지역은 현재 상주, 안동, 영주, 의성, 문경에 접해 있는 내륙지방이지만 신라만 고려초에는 정치적으로도, 교통로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상주는후백제의 견훤이 태어난 곳이고, 신라의 지방 군현 중 대단히 중시한 곳이며, 행정, 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곳이고 안동의 중요성은 고려 태조가 신라 세력을 영합할 수 있는 요로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상주지역에 있던 호족 선기가 고려태조에게 투항한 것은 고려의 세력 확장에 아주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천지역은 당시 보주라는 주단위로 중시된 지역이었습니다. 이 점은 신라말 고려초에 세워진 여러 불교 사찰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특히 용문사에의 윤장대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유물이고 석가모니불 뒷편의 광배는 대나무로 만들은 점에서 특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답사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26.08.09 15:42 새글

    4. 개심사 석탑기의. 중요한 의미. 1).이 기록은 190자가 마모되지 않고 전문을 해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옥개석 추마에 새겨서 1천년간 빗물과 풍상을 피할수 있었다. 이에는 석재가 단단함도. 일조했다. 2) 이 글은 1000년 전의. 사회.문화전통.지역사회의. 모습 등을 잘.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백 교수는 이에 나오는 광군을 최초로 해명했고. 이태진 교수는 이에 나오는 향도 자료를 심층 분석했다. 이에는. 미륵향도와. 추향도의 임원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이 향도는 조선조의 촌락 구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상두군의 선례로 이해했다. 이에는 1만명이 참가한 대역사의. 실체를 파악한 업적이다. 최근에는 이 기록을 통해 예천지역의 서성희 박사의 논문이 있다.

  • 26.08.08 06:54

    5). 이 기록은 현종 원년(1010)경의 문화사상을 분석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연등회. 팔관회의 부활이 기지는 의미를 연구하는 일이다. 이에는 이웃 대구 칠곡의 정도사5층탑기와 비교연구도 요구된다. 이번 답사는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직접 현장을 보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가진다.

  • 26.08.09 14:33 새글

    개심사 석탑기는 우리나라 기록 중 '향도" 라는 기록이 보이는 가장 빠른 최초의 금석문은 673년에 작성된 전의현 미륵불상조상기 입니다. 이는 백제유민이 중심이 된 불사를 향도라고 한 첫 사례입니다.(노중국교수 설). 그런데 그 향도의 기록은 상세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철원 토피안사 철조불상을 만드는 1500명이 향도가 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고고시대의 자료로는 이 개심심사 5층석탑기에 나오는 명문입니다.
    이에는 미륵향도와 '추향도'가 있습니다. 미륵향도는 그 개념이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다음에 나오는 "椎香徒"의 발음을 '치향도; 또는 '추향도'로 읽고 있는데 이는 추향도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椎'자는 자전에 음이 두가지이고 그 뜻이 다릅니다. 이글자의 첫째는 음은 '치'이고 그 뜻은 "치다". "순박하다". "어리석다"의 뜻이고 이를 '추'로 읽을 경우. 그 뜻은 "상투", "등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척추라고 할 때 이 글자를 씁니다.
    그래서 이 향도는 중심되는 향도라는 뜻으로 "추향도"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이아이에게 물어보니 "치향도"로 읽는 데 이는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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