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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6.2.PM2시)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시방 보살들의 찬탄
화엄경 한 단락 공부하겠다. 오늘은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서북방 진실혜(眞實慧)보살의 찬탄이라.
8) 서북방 진실혜(眞實慧)보살의 찬탄
이시(爾時)에 진실혜보살(眞實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진실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중생을 이롭게 하다
영수지옥고(寧受地獄苦)하야 득문제불명(得聞諸佛名)이언정
불수무량락(不受無量樂)하야 이불문불명(而不聞佛名)이로다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하면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지는 않으리라.
우리 불자들이 생각해야 할 가치관에 관한 말씀이다.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부처님의 명호를 듣는다면 지옥의 고통을 받아도 좋다, 그러나 반대로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하면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지는 않으리라.
우리 불자들은 이런 마음이 있어야 된다. 부처님의 명호가 물론 중요하지만, 부처님의 명호를 듣는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안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깨닫는다는 의미까지도 부처님의 명호를 듣는다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 해설에 제가 이런 말을 써놓았다.
부귀공명으로 세속적인 즐거움을 아무리 많이 누린들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가난하게 살더라도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불교의 정법을 공부하고,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며 영광이며 보람이다. 그래서 필자는 문수경전연구회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는 일을 “금세기 최고의 축제 화엄경 강설 만일결사”라고 명명하였다.
‘금세기 최고의 축제 화엄경 강설 만일결사’ 근사하다.
그 인연으로 이렇게 강설을 집필하고 있다.
그 인연으로 이렇게 강설을 집필해서 책이 이미 나왔고, 내일모레는 우리 신도님들에게 81권째 책이 돌아간다. 한 7년 남짓한 세월 동안 매달 한 권씩 법공양을 올렸는데 어느새 마지막 81권째가 되었다. 너무 훌륭한 일이다.
화엄경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화엄경을 누구라도, 초등학생 이상이면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다 법공양을 올릴 수 있게 된 인연이 저에게는 더욱 자랑이고 보람이다.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아무리 어렵고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부처님의 명호만 듣고 불교 공부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고통받는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 반대로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하면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지는 않으리라
불교 공부를 못하고 화엄경 공부를 못한다면, 불교의 정법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부귀공명을 누린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의미 없고 보람 없고 가치가 없는 일이다. 참 이 단락은 우리 불자님들이 꼭 자기 인생의 관점, 가치관으로써 확실하게 세워야 할 대목이다. 대단하다.
소이어왕석(所以於往昔)에 무수겁수고(無數劫受苦)하야
유전생사중(流轉生死中)은 불문불명고(不聞佛名故)로다
그 까닭은 지난 옛적에
수없는 겁 동안 고통을 받으며
생사 가운데 유전함은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한 때문이로다.
왜 앞의 게송을 그렇게 표현했는고 하면
그 까닭은 지난 옛적에
수없는 겁 동안 고통을 받으며
생사 가운데 유전함은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한 때문이로다
깨달음은 맛도 못 보고,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눈을 뜬다고 하는 것, 지혜의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취생몽사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대목은 이렇게 펼쳐놓고 시간이 한 시간이 가든 두 시간이 가든 거기에서 음미하고 감동하고 읊조리고 해야 할 대목이다.
(2) 망(妄)을 깨닫고 진실을 증득하다
어법부전도(於法不顚倒)하고 여실이현증(如實而現證)하야
이제화합상(離諸和合相)하면 시명무상각(是名無上覺)이로다
법에 전도되지 아니하고
진실과 같이 환하게 증득하여
모든 화합한 모양을 여의면
그 이름이 위없는 가장 높은 깨달음이로다.
법에 전도되지 아니하고
진실과 같이 환하게 증득하여
모든 화합한 모양을 여의면
일체 세상은 전부 화합상(和合相)이라고 보니까 그것을 여의면
그 이름이 위없는 가장 높은 깨달음이로다
현재비화합(現在非和合)이며 거래역부연(去來亦復然)하니
일체법무상(一切法無相)이 시즉불진체(是則佛眞體)로다
현재는 화합한 것이 아니며
과거와 미래도 또한 다시 그러하니
일체 법이 모양이 없는 것이
이것이 곧 부처의 참된 체성이로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라는 일체 시간도 모두 진실한 모양이 아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도 물질과 같이 본래로 없는 공성(空性)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제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한 것이 이것이 곧 여래의 크고 원만한 깨달음이다.”라고 하였다.
제행무상일체공(諸行無常一切空), 그런 이치를 여기서 또 밝혔다.
약능여시관(若能如是觀) 제법심심의(諸法甚深義)하면
즉견일체불(則見一切佛)의 법신진실상(法身眞實相)이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한다면
일체 부처님의
법신의 진실한 모양을 보게 되리라.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한다면
모든 존재의 깊은 뜻, 우리 눈에는 시간도 공간도 모두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지만 거기에 한 눈 더 뜨고 보면, 좀 지혜의 눈을 뜨고 본다면, 시간성도 공간성도 어떤 물질도 다 텅 비어 없다고 하는 안목이다.
불법에서 말하는 이런 것은 얼른 이해는 안 가는데 정작 어떤 사물에 대한 견해의 차원들은 얼른 이해가 간다. 예를 들어서 진품명품에서 자주 보듯이 거기에도 가짜 물건이 많이 등장하는데 안목이 있는 사람의 눈과, 안목이 없는 사람의 눈은 천양지차가 된다. 같은 사물을 두고, 눈에 뻔히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사물을 두고도 그렇다. 제가 가끔 비유를 드는 것이 고려청자와 개밥그릇 또 스테인리스 그릇 이런 이야기를 한다.
고려청자를 두고도 고려청자인 줄 모르니까 개밥을 주는 개밥그릇으로 쓰는 사람, 또 그 스테인리스 그릇을 훨씬 고려청자보다 더 가치 있게 보는 안목이 있는가 하면, 개밥그릇이라도 수억짜리 고려청자로 척 보고 아는 사람도 있다.
사물을 보는 데도 그렇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은 사람이 세상사를 보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 그와 같이 확연한 이치다. 알고보면 그와같이 확연한 이치인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어떤 소견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못 본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한다면
일체 부처님의
법신의 진실한 모양을 보게 되리라
이런 이치는 우리가 무수히 듣고 읽어왔어도 쉽게 고려청자와 개밥그릇과의 관계처럼 확연하게 알지 못한다. 모르는 사람은 쥐어줘도 모른다. 아무리 그것을 개밥그릇으로 사용을 하더라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가 자꾸 접해서 안목을 높여 가야 된다.
(3) 깨달음으로 비춰보다
어실견진실(於實見眞實)하고 비실견부실(非實見不實)하야
여시구경해(如是究竟解)일새 시고명위불(是故名爲佛)이로다
진실에서 진실함을 보고
진실이 아닌 데서 진실이 아님을 보나니
이와 같이 끝까지 이해할새
그런 까닭에 이름이 부처라네.
진실에서 진실함을 보고
진실이 아닌 데서 진실이 아님을 보나니
이와 같이 끝까지 이해할새
그런 까닭에 이름이 부처라네
(4) 깨달음이 아니나 깨달음이라고 한다
불법불가각(佛法不可覺)이라 요차명각법(了此名覺法)이니
제불여시수(諸佛如是修)일새 일법불가득(一法不可得)이로다
부처님 법은 깨달을 수 없는지라
이것을 아는 것이 이름이 법을 깨달음이니
모든 부처님은 이와 같이 닦았을새
한 법도 얻을 수 없네.
부처님 법은 깨달을 수 없는지라
부처님의 법은 우리가 ‘깨달음 깨달음’ 하지만 깨달을 수 없는 경지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이름이 법을 깨달음이니
그런 것을 아는 것이 오히려 법을 깨달은 것이다. 깨달을 수 없는 도리를 아는 것이 법을 깨달은 것이다. 묘한 말씀이다.
모든 부처님은 이와 같이 닦았을 새
한 법도 얻을 수 없네
지이고중(知以一故衆)이며 지이중고일(知以衆故一이니
제법무소의(諸法無所依)하야 단종화합기(但從和合起)로다
하나로써 여럿을 알고
여럿으로써 하나를 아나니
모든 법이 의지한 데 없어
단지 화합을 좇아 일어나도다.
모든 것은 인연 화합에 의해서 이렇게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우리 몸이 그렇고 내 마음이 그렇고 일체 세상 존재가 전부 화합으로 좇아서 이렇게 형성되어 있다.
무능작소작(無能作所作)이라 유종업상생(唯從業想生)이니
운하지여시(云何知如是)오 이차무유고(異此無有故)로다
짓는 이도 지을 것도 없고
오직 업의 생각을 좇아 생김이니
어떻게 이와 같은 줄을 아는가.
이것과 다른 이치는 없는 까닭일새.
짓는 이도 지을 것도 없고
오직 업의 생각을 좇아 생김이니
모든 것이 각자 업에 의해서 그렇게 보고, 업의 의해서 판단하고 느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와 같은 줄을 아는가
이것과 다른 이치는 없는 까닭일새
묘한 가르침이다. 화엄경의 이런 게송, 수미정상게찬품에서 이런 게송들은 한 게송만 하더라도 그 속에 무궁무진한 뜻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열 번 스무 번 읽고 천착하고 분석해야 할 일인데 그것은 각자 해야 할 공부다. 이 공석상에서는 이 정도로 음미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일체법무주(一切法無住)라 정처불가득(定處不可得)이니
제불주어차(諸佛住於此)하사 구경부동요(究竟不動搖)로다
일체 법이 머무는 데 없어
정해진 곳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이 이런 이치에 머물러
끝까지 동요하지 않네.
일체 법이 머무는 데 없어
정해진 곳이 없으니
무주(無住)다. 항상 변화무상하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무상한 것으로 못 본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야 ‘참 허망하구나 허망하구나’ 그렇게 이야기한다.
부처님은 그대로 돌덩이를 앞에 두고도 현재 그대로 그것이 푸석돌이 되어서 깨어져 있고, 나중에 흙으로, 모래로 돌아간 상태로까지 본다.
우리가 컵을 사용한다. 컵이 이미 깨어져 있는 것으로 보고 사용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이 이런 이치에 머물러
끝까지 동요하지 않네
그것이 실망하거나 그럴 까닭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깨어져 있다고 보고 우리가 사용하면 어느 날 깨어진다 하더라도 ‘아 본래 깨어져 있는 것인데 그동안 그대로 완전한 상태로 사용한 것, 참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9) 하방 무상혜(無上慧)보살의 찬탄
이시(爾時)에 무상혜보살(無上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무상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동서남북 그다음에 네 간방, 하방 상방 이렇게 해서 시방이라고 한다. 열 개의 방향을 완벽하게 이야기한 것은 불교다. 세속에서는 팔방까지는 이야기하지만 상방 하방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인데, 이런 것 한가지만 보더라도 깨달음의 안목이 다르다.
깨달은 안목은 동서남북처럼 하방도 상방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1) 무상혜라는 이름
무상마하살(無上摩訶薩)이 원리중생상(遠離衆生想)하야
무유능과자(無有能過者)일새 고호위무상(故號爲無上)이로다
무상혜보살 마하살이
중생의 생각을 멀리 여의어
그보다 능히 지나갈 자가 없을 새
그런 까닭에 이름이 위없음이라네.
무상혜(無上慧)라 하네, 그런 뜻이다. 무상혜란 이름을 가지고 표현한 것이다.
(2) 제불의 소득
제불소득처(諸佛所得處)가 무작무분별(無作無分別)하시니
추자무소유(麤者無所有)며 미세역부연(微細亦復然)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얻은 것은
지음도 없고 분별도 없어
거친 것도 없고
미세한 것도 또한 다시 그러하네.
얻은 것이 없다. 지음도 없고 분별도 없다. 그러므로 거친 것 미세한 것 이런 것도 또한 없다는 뜻이다.
모래를 가지고 시멘트를 섞어 건물을 지어놓으면 크다. 아주 큰 것이다. 거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세한 가루, 먼지 같은 시멘트가 뭉쳐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을 미세하다고 해야 할지 큰 것으로, 큰 덩어리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그런 관계다.
(3) 제불의 소행
제불소행경(諸佛所行境)이여 어중무유수(於中無有數)라
정각원리수(正覺遠離數)하시니 차시불진법(此是佛眞法)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행하신 경계여
그 가운데는 수효도 없어
정각(正覺)은 수효를 멀리 여의었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라네.
모든 부처님이 행하신 경계여
그 가운데는 수효도 없어
부처님이 행하신 경계가 수효라는, 어떤 숫자로써 헤아릴 문제가 아니다.
정각(正覺)은 수효를 멀리 여의었으니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그 깨달음 자체도 무슨 숫자로써 말할 바가 아니다. 물론 경전에서 법수라고 해서 숫자를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각이라고는 것은 그런 것을 다 떠난 경계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라네
(4) 상을 보내고 이치를 나타내다
여래광보조(如來光普照)하사 멸제중암명(滅除衆闇冥)하시니
시광비유조(是光非有照)며 역부비무조(亦復非無照)로다
여래의 광명 널리 비추어
온갖 어둠 소멸하시니
이 광명은 비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다시 비춤이 없는 것도 아니네.
묘한 말씀, 아주 훌륭한 말씀이다.
여래의 광명, 지혜의 광명이 널리 비추는데 그 지혜의 광명으로써 온갖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다 소멸한다. 광명은 그렇다.
그런데 광명은 비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비춤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태양광이라고 하자. 태양은 저렇게 태양으로서 존재할 뿐이지 무슨 따로 비춘다, 비추지 않는다, 그런 것이 없다. 그것은 다만 중생들이 중생의 입장에서 그것을 비춘다, 비추지 않는다, 태양이 떴다, 태양이 넘어갔다, 이렇게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 것에서도 우리가 벗어나야 되는데.
어법무소착(於法無所著)하야 무념역무염(無念亦無染)하시며
무주무처소(無住無處所)하사대 불괴어법성(不壞於法性)이로다
법에 집착함이 없고
생각도 없고 물들지도 않아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지만
법의 성품을 깨뜨리지도 않네.
법에 집착함이 없고
생각도 없고 물들지도 않아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지만
법의 성품을 깨뜨리지도 않네
법의 성품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 집착도 없고, 생각도 없고, 물들지도 않고,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다.
그것이 전부 편의상 우리가 지어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차중무유이(此中無有二)며 역부무유일(亦復無有一)이니
대지선견자(大智善見者)가 여리교안주(如理巧安住)로다
이 가운데는 둘도 없고
또한 다시 하나도 없으니
큰 지혜로 잘 보는 이
이치대로 공교하게 안주하였네.
이 가운데는 둘도 없고
또한 다시 하나도 없으니
큰 지혜로 잘 보는 이
이치대로 공교하게 안주하였네
아주 교묘하게 안주하였네. 법성은 무너지지 않는 상태니까 그렇다.
무중무유이(無中無有二)며 무이역부무(無二亦復無)라
삼계일체공(三界一切空)이 시즉제불견(是則諸佛見)이로다
없는 것에는 둘도 없고
둘이 없음도 또한 다시 없는지라
삼계 일체가 공(空)이니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견해로다.
없는 것에는 둘도 없고
둘이 없음도 또한 다시 없는지라
없는 데는 둘이 없고, 둘도 또한 다시 없다.
삼계 일체가 공(空)이니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견해로다.
삼계일체공(三界一切空) 시즉제불견(是則諸佛見) 부처님의 견해다. 없는 것에는 둘도 없다.
불이법문(不二法門) 둘이 아닌 법문이라고 해서 큰절에는 일주문 다음에는 으레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둘이 아닌 이치를 알라고 해서 불이문이다. 불이법문은 유마경에서 미세하게 잘 밝혔다.
우리는 둘로 나눠놓고 보고 분별하고 차별한다. 둘로 나누기 시작하면 셋으로 넷으로 다섯으로 여섯으로 여당이니 야당이니 동이니 서니 남이니 북이니 너니 나니 그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해서 천차만별로 벌어진다.
현상은 그렇게 천차만별로 벌어져 있더라도 그 본질에는 삼계가, 일체가 다 공(空)하다. 공하면 텅 비었으니까 하다다. 그것이 부처님의 견해다.
부처님은 그렇다고 멍청하게 모든 것을 두루뭉술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낱낱이 세밀하게 분별해서 보는 안목도 있고, 그다음에 또 일체가 공해서 텅 빈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일체지(一切智) 또는 일체지지(一切智智) 이렇게 표현한다. 그것이 뭔가? 일체를 다 꿰뚫어 아는 지혜다.
부처님은 하나로 통일된 공(空)한 이치도 알고, 낱낱이 차별한 현상도 누구보다도 세밀하게 아시는 분, 그래서 일체를 아는 지혜, 공한 면과 차별한 면, 평등한 면과 차별한 면 이것을 그대로 여실히 알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서 적재적소에 잘 쓴다는 것이다.
(5) 법에 머무는 바가 없다.
범부무각해(凡夫無覺解)일새 불령주정법(佛令住正法)하야
제법무소주(諸法無所住)케하시니 오차견자신(悟此見自身)이로다
범부는 깨달음의 이해가 없으니
부처님께서 정법에 머물게 하여
모든 법에 머무는 바가 없게 하시니
이것을 깨달으면 제 몸을 보리라.
자기 몸을 본다. 자기 몸의 진실함을 본다.
범부는 깨달음의 이해가 없으니
범부는 깨달음의 이해가 없다. 깨달음의 이해가 있으면 부처라 하지 않겠는가.
부처님께서 정법에 머물게 하여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화엄경을 설해서 정법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모든 중생을 정법에 머물게 한다고 하는 것이 실재는
모든 법에 머무는 바가 없게 하시니
머물되 머무는 바가 없는 경지까지 그런 뜻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제 몸을 보리라
비신이설신(非身而說身)하시며 비기이현기(非起而現起)하시니
무신역무견(無身亦無見)이 시불무상신(是佛無上身)이로다
몸이 아니나 몸을 말하고
일어난 것이 아니나 일어남을 나타내나니
몸도 없고 또한 보는 것도 없음이
이것이 부처님의 가장 높은 몸이시네.
몸이 아니나 몸을 말하고
일어난 것이 아니나 일어남을 나타내나니
출흥(出興) 부처님이 세상에 오셨다. 오신 것도 아니지만 오셨다, 라고 말하고
몸도 없고 또한 보는 것도 없음이
이것이 부처님의 가장 높은 몸이시네
(6) 공덕을 진실혜보살에게 미루다
여시실혜설(如是實慧說) 제불묘법성(諸佛妙法性)하시니
약문차법자(若聞此法者)는 당득청정안(當得淸淨眼)이로다
이와 같이 진실혜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묘한 법의 성품 설하시니
만약 이 법을 듣는 자는
마땅히 청정한 눈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진실혜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묘한 법의 성품 설하시니
이 게송에서 부처님의 묘한 성품, 법의 성품을 설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법을 듣는 자는
마땅히 청정한 눈을 얻으리라
우리가 방금 읽어온 게송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잘 이해하면 아주 청정한 눈을 얻는다, 그랬다.
10) 상방 견고혜(堅固慧)보살의 찬탄
수미정상게찬품의 마지막 보살이다.
이시(爾時)에 견고혜보살(堅固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견고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부처님을 찬탄하다
위재대광명(偉哉大光明) 용건무상사(勇健無上士)여
위리군미고(爲利群迷故)로 이흥어세간(而興於世間)이로다
위대하셔라, 큰 광명이시여.
용건하셔라, 무상사(無上士)시여.
미혹한 군생들을 이익하게 하시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도다.
위대하셔라, 큰 광명이시여
용건하셔라, 무상사(無上士)시여
미혹한 군생들을 이익하게 하시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도다
위대하셔라, 큰 광명이시여
용건하셔라, 무상사(無上士)시여
미혹한 군생들을 이익하게 하시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도다
(2) 중생의 고통
불이대비심(佛以大悲心)으로 보관제중생(普觀諸衆生)이
견재삼유중(見在三有中)하야 윤회수중고(輪廻受衆苦)하시나니
부처님께서 큰 자비심으로
널리 모든 중생 살피시어
삼유(三有) 가운데 윤회하며
온갖 고통을 받고 있음을 보시도다.
부처님께서 큰 자비심으로
널리 모든 중생 살피시어
삼유(三有) 가운데 윤회하며
삼유는 곧 삼계다.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윤회하며
온갖 고통을 받고 있음을 보시도다
그래서 부처님이 수행하셔서 성도하시고 80 노구를 이끌고 열심히 진리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펼쳐 보인 것이다.
유제정등각(唯除正等覺) 구덕존도사(具德尊導師)하고
일체제천인(一切諸天人)은 무능구호자(無能救護者)로다
오직 정등각을 이루시고
덕을 갖춘 높은 도사(導師)를 제하고는
일체 모든 천신과 사람을
능히 구호할 자 아무도 없네.
부처님 말고는 일체 천신과 어떤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능히 우리 중생을 구호할 사람이 없다. 중생은 삼계에서 윤회하면서 별별 인과를 모르고 함부로 살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을 원인을 지어서 고통을 받는다.
그러한 이치를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낱낱이 그런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모든 존재의 인과의 원리를 낱낱이 설명해서 그나마 바르게 살도록 고통을 멀리하면서 살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일체 모든 천신과 사람을
능히 구호할 자 아무도 없네
(3) 승보(僧寶)를 찬탄하다
약불보살등(若佛菩薩等)이 불출어세간(不出於世間)이면
무유일중생(無有一衆生)도 이능득안락(而能得安樂)이로다
부처님과 보살님들
세간에 나오시지 않으셨던들
한 중생도 능히
안락을 얻을 자 없었으리라.
한 중생도 능히
안락을 얻을 자 없었으리라
부처님도 필요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간 전달로서 좀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공부해서 전달하는 보살들, 그들이 세간에 나오시지 않으셨던들 한 중생도 능히 안락을 얻을 자 없었으리라.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래도 알뜰하게 열심히 공부해서 그저 원력 하나로, 그저 원력 하나로 이 화엄경을 널리 전하면, 여기서 그 속속들이 제가 깊은 이치를 말씀드리진 못한다 하더라도, 각자가 화엄경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는 길이 있을 것이다. 저는 그런 꿈을 가지고 이렇게 자꾸 인연이 닿을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엄경을 소개하고 있다. 화엄경을 ‘소개’하는 정도다.
저마저 없었더라면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은 부처님 모실 절을 짓기 위해서 황금을 그 넓은 땅에다가 다 깐 이도 있었는데 나는 화엄경으로써 이 세상에 다 깔겠다’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한다.
형편이 되고 인연이 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더라도 책으로 된 화엄경이지만 화엄경도 전하고 또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 화엄경과 인연을 맺어드리고 화엄경의 이치 하나라도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찰에서는 조석으로 예불을 올릴 때 반드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에게 절을 올린다. 중생들을 교화하여 안락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다. 실로 생각해보면 그 은혜는 태산보다 높으며 바다보다 깊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제가 그것을 해설로 써 놓았다.
여래등정각(如來等正覺)과 급제현성중(及諸賢聖衆)이
출현어세간(出現於世間)하사 능여중생락(能與衆生樂)이로다
여래 정등각과
모든 현인 성인들
세간에 출현하시어
중생들에게 즐거움 주셨도다.
여래 정등각과
모든 현인 성인들
문수보살 용수보살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리불 목건련 10대 제자를 위시해서 그동안 내려오면서 역대 전등 제대조사 달마로부터 내려오면서, 우리는 말세에 사니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지 2600년 2700년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부처님과 인연이 되고 부처님 법을 배워서 이 세상에 많은 중생들에게 눈을 뜨게 해준 성인 현인 선지식 보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을 다 한꺼번에 여기서 포함하고 있다.
여래 정등각과
모든 현인 성인들
세간에 출현하시어
중생들에게 즐거움 주셨도다
화엄경이야말로 정신적인 즐거움을 준다. 이보다 더 넉넉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밑에다 해설에 썼다.
“지심귀명례 문수 보현 관음 지장보살마하살”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10대제자 16성 5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지심귀명례 인도 중국 대한민국 모든 세계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 미진수 제대선지식”
이런 모든 분들의 은혜에 감사하고 지심귀명례합니다, 이런 뜻이다.
(4) 보고 들음의 이익
약견여래자(若見如來者)는 위득대선리(爲得大善利)니
문불명생신(聞佛名生信)하면 즉시세간탑(則是世間塔)이로다
여래를 보는 자는
크고 좋은 이익 얻나니
부처님 명호 듣고 신심 낸다면
이것이 곧 세간의 탑이라네.
세간탑 그랬다. 부처님 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래를 보는 자는
크고 좋은 이익 얻나니
화엄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주 좋은 정신적인 이익, 청복을 누린다.
부처님 명호 듣고 신심 낸다면
화엄경 한 구절을 듣고 거기서 ‘아 이건 정말 괜찮은 가르침이다’‘아 신심난다, 환희심난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님 탑이다.
이것이 곧 세간의 탑이라네
우리 몸이 그대로 탑이라는 것이다. 세간의 탑.
돌로 아무리 탑을 크고 훌륭하게 깎아서 놓은들 사실은 뭘 하겠는가? 살아있는 사람이 탑 역할을 해야 한다.
부처님을 잘 이해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이 수승한 화엄경 같은 것을 깊이 이해하면 이것을 또 깊이 이해는 못 한다 하더라도 환희심을 내고 신심을 내고 그 가운데 한 구절만이라도 듣고 ‘아 참 그렇다’라고 무릎을 친다면 뭐라고 했는가? 세간의 탑이다.
부처님 명호 듣고 신심 낸다면
이것이 곧 세간의 탑이라네
이런 말씀도 있다. 아 참 화엄경, 훌륭하다.
아등견세존(我等見世尊)은 위득대이익(爲得大利益)이니
문여시묘법(聞如是妙法)하면 실당성불도(悉當成佛道)로다
우리들이 세존을 뵙는 것이
큰 이익을 얻은 것이니
이와 같은 미묘한 법을 들으면
다 마땅히 부처님의 도를 이루리라.
우리들이 세존을 뵙는 것이
좋다. 우리들이 화엄경을 만난 것
큰 이익을 얻은 것이니
정말 이것은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린다.
우리들이 화엄경을 만난 인연 큰 이익을 얻는 것이니
이와 같은 미묘한 법을 들으면
다 마땅히 부처님의 도를 이루리라
’대방광불화엄경‘ 한 번만 들려줘도 축생의 보를 면한다고 우리 불자들은 믿고 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축생을 만나면 ‘대방광불화엄경’ 한다. 소는 내가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는지 ‘저 소 참 잘생겼다’ 이렇게 하는지 ‘참 소 어지간히 추하고 못났네’ 이렇게 하는지 그 말은 못 알아 듣는다. 그런데 말에 담겨 있는 마음은 전달된다. 정신이 전달된다. 뜻이 전달된다.
말은 못 알들어도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전달된다 하는 것이다. 동물은 더 말할 것 없고 식물도 알아듣지 않는가? 물도 알아듣지 않는가? 물을 떠놓고 거기에다가 물에 대해서 아주 좋은 이야기를 한다든지, 음악을 들려준다든지 하면 우리 정신의 파장이 거기에 전달된다.
물이 무슨 말을 알아듣겠는가?
그런데 말 속에 담겨 있는 사람의 정신이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물을 마신 사람도 효과를 본다.
식물도 ‘아주 훌륭하다 훌륭하다 잘생겼다 잘생겼다’ 하는 것하고 또 한 쪽 화분에는 그 반대의 말을 하는 것 하고 나중에 일주일만 지나서 보니까 그 성장하는 것이 전혀 다르더라,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세상에 너무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식물도 알아듣고, 마음의 파장을 전달받고, 흘러가는 물도 한 컵을 떠놓으면 거기에 마음이 전달되는 것을 지금은 다 잘 알고 있다.
하물며 동물이겠는가. ‘동물에게 그걸 말하면 알아듣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알아듣는다. 동물도 너무 잘 알아듣는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동물들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대방광불화엄경’하고 화엄경 제목을 한번 일러줌으로 해서 그 마음의 파장이 그 사람에게, 그 동물에게 전달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축생보를 면하는 도리가 있다. 틀림없다.
그런 사례들을 제가 한때 많이 이야기했다. 화엄경 영험록 같은 데도 보면, 화엄경 영험록이 엄청나게 두꺼운 기록들이 있다. 그런 데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아주 부지기수로 있다.
우리들이 세존을 뵙는 것이
이렇게 화엄경을 인연 짓는 것이
큰 이익을 얻은 것이니
이와 같은 미묘한 법을 들으면
다 마땅히 부처님의 도를 이루리라
제보살과거(諸菩薩過去)에 이불위신력(以佛威神力)으로
득청정혜안(得淸淨慧眼)하야 요제불경계(了諸佛境界)라
모든 보살들이 과거 세상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청정한 지혜의 눈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알았도다.
모든 보살들이 과거 세상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청정한 지혜의 눈을 얻어
우리도 화엄경을 통해서 청정한 지혜의 눈을 얻는다.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알았도다
금견노사나(今見盧舍那)하야 중증청정신(重增淸淨信)이로다
이제 노사나 부처님 뵙고
청정한 믿음 더욱 증장하리라.
(5) 부처님의 덕이 다함이 없다
불지무변제(佛智無邊際)라 연설불가진(演說不可盡)이니
부처님의 지혜 끝이 없는지라
아무리 연설해도 다함이 없도다.
그렇다.
부처님의 지혜 끝이 없는지라
아무리 연설해도 다함이 없도다
화엄경 절대 양이 많다고 하지 말라. 절대 양이 많은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연설해도 다함이 없는데 이 화엄경이 얼마나 된다고.
내일모레 신도님들에게 화엄경 81권을 마지막으로 전하려고 81권 책이 저에게 돌아왔다.
내가 거기에 후기를 썼는데 이런 말을 썼다.
‘화엄경이 많다고 절대 생각할 것이 아니다. 이보다 열 배 스무 배 많아도 좋겠다. 설사 저 백사장에서 모래를 세는 일이라 하더라도 훨씬 더 많아서 모래를 세세생생 세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뜻으로 후기에 썼다.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81권이 사실은 얼마 안 된다.
우리가 꾸준히 하기만 하면 한달에 한 권씩 법공양을 올렸는데 이제 마지막 권이 벌써 되었지 않은가.
7년 남짓, 중간에 코로나 때문에 여러 달 빠지기는 했었는데 그것을 다 계산해봐야 미처 8년이 채 안 된다.
8년이라 하더라도 그 8년 동안에 벌써 끝났다.
끝나서 그다음에 또 무슨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법공양을 올릴까, 저는 몇 달 전부터 그 연구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주변에서 좋은 법공양거리가 많이 눈에 들어왔다.
부처님의 지혜 끝이 없는지라
아무리 연설해도 다함이 없도다
부처님의 지혜 끝이 없는지라
아무리 연설해도 다함이 없도다
승혜등보살(勝慧等菩薩)과 급아견고혜(及我堅固慧)가
무수억겁중(無數億劫中)에 설역불가진(說亦不可盡)이로다
승혜 등 보살과
저와 견고혜보살이
무수한 억겁 동안에
말한다 하여도 또한 다함이 없으리라.
승혜 등 보살과
승혜 보살 그 외 온갖 무수한 보살들이
승혜 보살 그 외 온갖 무수한 보살들이
저와 견고혜보살이
무수한 세월동안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공덕, 부처님의 은혜, 부처님의 자비,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내용들을
무수한 억겁 동안에
말한다 하여도 또한 다함이 없으리라
그렇다. 어찌 그런 부처님의 경지를 우리가 다 알 수 있으며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수미정상게찬품은 여기까지 대충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다음부터는 십주품 공부에 들아가도록 하겠다.
오늘 오신 분들을 살펴보겠다.
지금 딱 100분이 동참하고 계신다.
원만한 숫자다.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하면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지는 않으리라]
불자 누구에게나 박혀 있는 생활 철학이지요..
부처님의 지혜 끝이 없는지라 아무리 연설해도 다함이 없도다.
고맙습니다.
_()()()_
여래의 광명 널리 비추나 온갖 어둠 소멸하시니 이 광명은 비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다시 비춤이 없는 것도 아니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녹취록 읽는 시간
가장 소중한 시간!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