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란지리도의 귀주와 신주 위주
조선이 왕을 칭하자, 그 뒤로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하여졌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전에 동호(東湖)에 볼모로 가 있을 적에 동호가 그를 매우 믿었는데, 돌아가서는 동호를 엄습하여 격파하고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1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서 만번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어서는 비가 진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하려 하지는 않았다. 비는 기자의 40세손인데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경진년 조선 연대ㆍ기년 미상(진(秦) 시황(始皇) 26, B.C. 221) 동사강목
진나라 왕이 황제를 칭했을때 고조선은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가 그대로 답습하여 자신들의 왕을 왕중의 왕인 태왕이라고 기록했다. 고조선이 붕괴되기 시작할때 마한의 경우 황제라는 칭호도 썼다. 그래서 백제왕이 마한황제라고 한 오오치가문의 족보에 기록이 있는 것이다. 윗글의 조선이 왕을 칭한다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 본국조선이 아니고 제후조선으로 보인다. 강력한 제국 고조선은 그 땅내에 개봉이 있을 만큼 엄청나게 컷다. 그러나 부여에게 천자국의 지위를 물려주고 1백개가 넘는 제후국으로 쪼개질때 주나라처럼 이미 붕괴직전이었다. 기자는 대명일통지에 개봉에서 그 묘가 있을 만큼 개봉일대를 다스렸는데 후에 왕험성인 하북성 광평부로 옮긴 듯하다. 산서성에 箕山이 여러개 존재하는 것을 보면 기자의 후손은 광평부를 수도로하고 산서성일대와 하북성 일부를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본국조선은 하북성 보정부에 수도가 있었다. 단군왕검의 직계후손들은 보정부외에는 통치영역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나라가 낙양외에는 별다른 통치구역이 없었던것과 비슷한 결과이다.
可汗州,清平軍,下,刺史。本漢潘縣,元魏廢。北齊置北燕郡,<一五>改懷戎縣。隋廢郡,屬涿郡。唐武德中複置北燕州,縣仍舊。貞觀八年改媯州。五代時,奚王去諸以數千帳徙媯州,<一六>自別為西奚,號可汗州;太祖因之。有媯泉在城中,相傳舜嬪二女於此。又有溫泉、版泉、磨笄山、雞鳴山、喬山、曆山。統縣一:
懷來縣。本懷戎縣,太祖改。戶三千。
요사
하간주 청평군은 본래 한나라 번현이다. 북제때 북연군을 두었다. 탁군에 속한다. 당나라무덕때 북연주로 복구했다. 정관8년에 귀주로 했다. 중략
만번한은 후대에 요사에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하간주에 대한 기록이다. 번현과 하간이란 말에서 만번한의 번과 한이라는 글자가 남아있음을 알수 있다. 이곳이 바로 만번한 즉 기자의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였던 것이다.
十一月,攻蔚、新、武、媯、儒五州,斬首萬四千七百餘級。自代北至河曲陰山,盡有其地。遂改武州為歸化州,媯州為可汗州,置西南面招討司,選有功者領之。其圍蔚州
요사
11월에 위 신 무 귀 유5주를 공격했다. 수급이14700여명이다. 대주의 북쪽 하곡음산으로 갔다. 중략 귀주를 하간주로 바꾸었다. 중략 위주를 포위했다.
요사에 하간주는 귀주라고 했고 그 위치는 대략 위주근처이다.

대청광여도상의 위주위치 위주아래에 수직으로 장성의 흔적이 있는 것을 기억하시라
《한서(漢書)》 지리지
“번한현(潘汗縣)이 요동군(遼東郡)에 소속되었다
기씨(箕氏)가 쇠하자,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조선의 서쪽 땅 천리를 탈취하여 만번한(滿潘汗) 지역으로 경계를 삼고 장성(長城)을 쌓았으며 조양(造陽) 상곡(上谷)에 있다. 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에 비로소 요동군(遼東郡)을 두었더니, 연(燕)이 망하자 진(秦)에 병합되었다
동사강목
1천리 혹은 2천리를 빼앗았다고 하는데 빼앗은후에 장성을 쌓아서 경계로 한것이고 그렇다면 지금도 그 장성 유적이 남아있을 것이다.마침 대청광여도에 위주 아래쪽에 수직으로 장성이 나있다. 이것을 명나라가 쌓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명나라가 거기에 장성을 새로 쌓을 이유가 있을까 명나라왕은 할 짓이 그렇게 없었을까 중국사이트에서도 이미 연장성이 대청광여도의 산서성에서 수직으로 내려간 장성이 맞다고 고장성유적까지 이미 발굴되었다. 연나라가 최초로 쌓았을때는 흙으로 쌓았던 모양이었다. 이후에 돌로 증축했던 것이다.
《위략(魏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후(朝鮮侯)가 죽은 뒤에 그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에서는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어 조선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2000여 리의 지역을 차지한 다음,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이에 조선이 결국 쇠약해졌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음에 연나라가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략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붙였다.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는 멀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여겨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고는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여 연에 소속시켰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630 진번의 위치 보정부와 대군의 사이
연나라가 기자의 조선의 땅을 빼앗아 위주근처까지 차지했지만 이후 진나라가 분열되면서 유방은 부여의 대군을 빌려 항우와 싸워 이겼다. 그때 한나라는 진나라의 옛땅을 포기했는데 위에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사실은 부여에게 뺏겼거나 도와준 대가로 상납한 것이다. 한서에는 동이와의 경계를 대군이라고 했다. 즉 대군동쪽은 동이족 부여혹은 조선의 경계였던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넌 다음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에 살았다. 그러고는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킨 다음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
위만은 패수인 영정하를 건너 산서성에 살았을 것이다. 이땅은 연나라의 땅을 차지한 진나라때는 그들의 땅이었겠지만 한나라때는 버린땅이 된 것이고 이곳에서 힘을 키운 위만은 기자조선의 변방장수로 활약하다 반란을 일으켜 기자의 후손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의 왕이 된 것이다. 그역시 황제국을 칭했음은 그의 신하중에 비왕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충분히 증명이 되며 쫓겨난 기자의 후손은 마한의 왕이 되었는데 그 역시 황제를 칭했음음 백제국왕이 마한황제를 칭한것을 보면 알수 있다.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중에 청주와 제주와 연결된다는 기록도 있다. 즉 하북성 광평부의 남쪽과 동쪽이 바로 청주와 제주가 아닌가

고조선이후 부여 백제 고구려 발해 요 금은 천자국이었으며 고조선의 옛영토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한족을 압도했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턱없이 약한 신라조차도 당나라군대를 가볍게 격파하여 민족의 위신을 세웠고 고려는 송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조선이 허리를 굽혓으나 태조와 태종 세조때 3번이나 명과 싸우려 했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