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신대학 의학부’의 설립과 박병래의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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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5월 성모병원 개원 20주년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 왼쪽부터 노기남ㆍ라리보 주교, 박병래. 당시 박병래는 공군 군의감으로 전역해 성모병원장과 제3대 성신대학 의학부장을 맡고 있었다. |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전쟁으로 한참 발전을 거듭하던 성모병원도 큰 타격을 입는다. 박병래와 간호 수녀들을 포함한 직원들은 아예 피란 갈 생각조차 못 했다.
성모병원은 인민군이 장악했고, 일반 환자들 대신 인민군 전상(戰傷) 환자들 치료하는 내무성 산하 군병원이 되었다. 젊은 인민군 군의관이 원장을 맡았고 박병래는 부원장으로 그들 지시에 따라 인민군 전상 환자를 치료해야 했다.
박병래는 수녀들에게 수녀 복장 대신 일반 평복으로 갈아입도록 했으며, 수녀들의 안전을 위해 집에도 가지 않고 진료실 한구석에 군용 목침대를 놓고 살았다.
키가 작은 박병래는 어떻게든 인민군들에게 좀 더 위엄 있게 보이려고 이때부터 한동안 콧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다행히 그런 생활은 3개월로 끝이 났다. 9월 28일 서울이 유엔군의 참전으로 다시 국군의 손에 수복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길로 국군은 북으로 진격을 계속해 11월에는 평양까지 회복했다.
9·28 수복과 평양 진료, 그리고 입대
박병래는 그냥 서울에만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북한에는 아무런 민간 의료 시설이 없을 것을 염려한 박병래는 성모병원 의사 2명과 간호 수녀 등 7명으로 ‘가톨릭 의료 봉사단’을 꾸려 국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
1950년 11월 11일 평양에 도착한 가톨릭 의료 봉사단은 임시 진료소를 마련하여 환자들의 진료를 시작했는데 불과 20여 일 사이에 6000명이 넘는 환자가 몰려와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국제(?) 진료 활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금방 한반도를 통일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12월의 혹한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은 후퇴해야 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1ㆍ4 후퇴다. 다시 서울로 온 박병래는 병원을 잠시 다른 후배 의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공군 군의관으로 입대한다.
그때 박병래는 47세나 되어 군에 입대할 나이가 아니었지만, 전쟁터에서 다치고 죽어가는 군인들을 위한 의사 수가 절대 부족이라는 얘기를 들은 박병래는 공군 중령 계급을 달고 군의관으로 입대한다.
군대에 있는 동안 박병래는 부산과 마산 공군병원장을 거쳐 4년 뒤 대령으로 진급하여 공군 군의관의 최고 책임자인 군의감(軍醫監)까지 맡아 지도력을 발휘한다.
제대 후 성모병원 복귀와 새로운 도전
박병래는 1956년 3월 제대하게 되는데, 마침 그해 5월은 성모병원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박병래는 6월에 다시 성모병원 병원장에 취임하게 되고, 동시에 그가 군대에 있던 1954년에 설립된 성신대학 의학부 부장(지금의 가톨릭의과대학 학장)직도 겸하게 된다.
그러나 환자 진료와 대학행정을 책임지게 되고, 무엇보다 새로운 병원 설립 문제 등을 고민해야 하는 일이 박병래에게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1954년에 설립된 성신대학 의학부와 성 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현재의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 설립에는 당시 노기남 주교의 지원을 받아 일을 추진한 의사 유을준(兪乙濬, 1912~1993?)의 역할이 크다.
유을준은 원래 중국 연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와서 1938년 의사 검정고시를 통해 의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다. 1950년에는 개신교 신학교도 졸업했으나 목사 안수를 거부하고 곧장 천주교에 귀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로 개종한 이후로는 오직 교회 정신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며 일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와 함께 부산에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여 불과 2년여 만에 대형 종합병원으로 발전시킨다.
유을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곳에 의과대학을 설립하려고 시도하지만, 수녀회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고 오히려 이 일로 수녀회와 갈등을 빚게 된다.
이때, 유을준과 수녀회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던 노기남 주교가 유을준에게 서울교구에 와서 일해 줄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1954년 1월에 서울로 올라온 유을준은 놀랍게도 불과 2개월 남짓 사이에 교육부로부터 성신대학 의학부와 성 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낸다. 그러나 유을준의 역할도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의학부 설립 이후 성 요셉 병원 원장과 의학부 교학감(敎學監)직을 맡으면서 자신이 모든 운영을 책임지겠다고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그는 다음 해인 1955년 2월에 의학부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뒤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유을준은 1993년경 부산 변두리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가족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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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된 새 성모병원 신축 기공식 장면. 제10대 경성대목구 노기남 주교와 뉴욕대교구 스펠만 대주교가 병원 신축을 위한 첫 삽을 뜨고 있다. |
성모병원을 떠나는 박병래
다시 성모병원과 의학부 교육을 책임지게 된 박병래는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직면한다. 무엇보다 그때 막 의대 본과(本科)에 진입한 학생들을 위한 강의와 실습 공간 확보부터 어려웠다.
교구청 구내 건물 한 동을 사용코자 교구에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다해 보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그는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학과 재단 일부에서는 의과대학 운영에 대한 회의론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결국, 1956년 말경 재단은 의과대학 운영을 포기하기로 하고 고려대학교와의 합병을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본과 1학년에 진급한 학생들이 합병에 반대하여 20여 일간 수업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학부형들로 구성된 후원회에서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고대와의 합병 건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이때 마침 미국 뉴욕에 파견 사목 중이던 양기섭(梁基涉, 1905~1982) 신부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제4대 의학부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고려대학교와의 합병을 무산시키는 한편 적극적인 모금 운동을 펼쳐 우선 성모병원 신축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새 병원 신축을 위한 기공식에 당시 뉴욕대교구 스펠만 대주교를 초청하고 그에게서 적잖은 후원금까지 받아낸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1961년 12월에 완공한 지하 2층 지상 6층의 ‘명동성모병원’(지금의 ‘가톨릭회관’ 건물)이다.
그러나 양기섭 신부 또한 새 병원을 짓는 과정에서 많은 사채(私債)까지 써야 하는 등 무리한 모금으로 인한 잡음 때문에 잠시 병원을 떠나 있어야 했다. 오늘의 성모병원이 있기까지 겪어야 했던 힘든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재단의 결정에 따라 추진하던 고려대학교와의 통합이 무산되고 대학 운영에 자신감을 잃은 박병래는 결국 성모병원 복귀 반년 만인 1957년 1월에 성모병원장과 의학부장직을 사임한다.
충분한 준비 없이 시작한 의과대학의 초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박병래가 모두 짊어진 셈이다. 후에 박병래는 성모병원을 떠날 때의 심정을 “고향을 떠날 때 느끼는 참담한 심경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사실, 성모병원을 기반으로 해서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박병래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1945년 12월 미 군정청 학무국이 우리나라 의학교육 발전과 의대 신설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조선의학교육평 의회’를 구성한 일이 있는데,
이때 총 9명의 평의회위원 중 8명이 당시 국내 의과대학 학장들이었고, 박병래가 유일하게 당시 대학과 무관한 성모병원장 자격으로 여기 참여했던 일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발간한 「한국의학인물사」에는 1957년 박병래의 성모병원장 사직에 대해 “가톨릭 의사 중에 그만큼 의료계와 의학 교육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도 없었고,
그만큼 신망이 두터운 사람도 없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사직은 의외의 일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