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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18-22) 무리에서 벗어나 제자가 되었는가?
누가복음 강해 (47)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세자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9:18-22)
믿음의 오랜 고민
교회 안에 통용되는 신앙에 관한 속설이 하나 있는데, 흔히들 예수 믿은 지 처음 3년간은 기도 응답이 잘 되고 그 후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학급의 학생들이 똑같은 내용을 배워도 성적에 차이가 나듯이, 단순하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영원토록 한 치도 변함이 없으며 신자를 향한 사랑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자마다 기도 응답은 다르며, 한 신자라도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가 그 속설에 공감하는 이유는 갈수록 기도 응답이 안 되는 체험을 다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은 자라지 않고 오히려 퇴보한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믿음의 삶에 기쁨과 활력은 사라지고 형식적 의무적인 종교 활동만 지속합니다. 교회 다닌 연륜이 오래되어서 그런 고민을 주변에 털어놓을 수도 없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주님의 사역 현장에 함께 참석하여 똑같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삼 년의 공사역 기간을 지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은 소수였습니다. 훨씬 많은 이들이 세상으로 돌아갔는데 주님께 뭔가 크게 실망하고서 그 믿음에 힘이 빠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확히 깨달아서 자기 삶에 제대로 적용 실현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르친 셈이므로, 9장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이 문답을 세밀히 살펴보면 많은 신자의 그 해묵은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정체성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기 전에, 무리로부터 당신에 대해서 들은 바가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곧바로 제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백성들의 반응부터 물어본 이유가 궁금합니다. 주님이 인간적 욕심과 관점에 따라 백성들 사이에 당신의 인기도와 평판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궁금해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무리는 당신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어도 제자들은 반드시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이 제자들에게서 듣기 원하는 정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리가 누구인지 또 그 무리와 주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껏 주로 유대 사회에서 소외되고 천대받는 자들을 만나서 상담 위로 치유해 주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죄 사함을 받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의 말씀 한마디로 불치병을 고쳐 주고 귀신도 쫓아내었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도 살려내는 등 많은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그 후에 열두 사도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고서 전도 여행으로 내보냈습니다. (9:1) 제자들도 주님처럼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6절)
그때 분봉왕 헤롯이 그 모든 일을 듣고서 심히 당황했는데, 마태와 마가는 헤롯이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예수로 살아났다고 믿고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누가는 헤롯이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자기가 염려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음을 알고는 예수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했다고 기록합니다. (7-9절) 복음서 간의 기록이 조금 차이가 있지만, 헤롯이 지은 죄 때문에 예수가 다시 살아난 요한일까 봐 두려워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도 여행을 마친 사도들이 주님과 함께 벳세다로 옮겼는데도, 누가는 무리가 알고 따라왔다고 말합니다. (10절) 그러자 예수님이 직접 그들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며 병을 고쳐 주다가, 날이 저물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 기적 후에 주님은 따로 기도하고서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의 오병이어 기사에 ‘무리’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므로, 무리는 일차적으로 그 기적을 맛본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거기다 주님과 사도들로부터 병 고침을 받고 천국 복음을 전해 들은 유다 백성들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아닌 자들을 통틀어서 무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무리로 하여금 당신이 신적인 권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여러 이적들을 목격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궁금해졌지만, 말씀드린 대로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을 바로 세우려고 물어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리가 주님을 세례 요한, 혹은 엘리야, 아니면 다시 살아난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는 헤롯이 알아본 내용과 같은데 (7-9절), 그동안에 무리의 생각이 갑자기 바뀔 리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죽음을 맞지 않고 육신을 입은 채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왕하 2:1-11) 거기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도 믿고 있었습니다. (말4:5)그래서 광야에서 칩거하던 요한이 홀연히 요단강에 나타나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는 세례를 베풀자, 그 예언대로 엘리야가 다시 강림한 줄 여겼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조사단도 네가 엘리야인지, 그 선지자인지 밝히라고 추궁했습니다. (요1:21) 추가로 그 선지자인지 물어본 것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메시아로 보내겠다는 신명기 18:18의 예언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참수당해 분명히 죽었으며, 또 옛 선지자가 다시 살아온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유대인들의 당시 믿음과 상충됩니다. 거기다 요한이 살아있을 때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는 자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메시아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무리가 이런 불합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성경 신학적 지식이 얕은 데다, 당시는 자기가 들은 소문으로만 판단했기에 상황을 종합해서 합리적으로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무리의 생각은 구약 성경의 메시아 예언에 기반을 두었는데. 그만큼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들판에서 오병이어 기적으로 떡을 배불리 먹여준 주님을,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었던 모세에 대입했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 선지자로 모세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세 명 다 죽음을 뛰어넘었으므로, 주님이 이 땅의 살아있는 어떤 인간도 갖지 못한, 신령하고 엄청난 권능을 실현한 분으로서 메시아일 가능성이 있다고 시인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무리의 반응을 전해 들은 주님은 이제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도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가 나서서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20절)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라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바꾼 것입니다. 백성들의 반응과 내용상으로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분명하게 자기 입술로 ‘그리스도’라 고백했다는 것은 믿음의 신실성과 무게감에서 많이 다릅니다. 누가는 생략했지만, 마태는 이때 베드로가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덧붙여서 고백했다고 증언하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백성들도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말씀에 서기관들과 같지 않은 권세가 충만해서 크게 놀랐습니다. (마7:28,29, 막1:22) 당시 모든 랍비는 모세 오경을 인용하면서 여호와가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당신이 주체가 되어서 천국이 가까웠으므로 죄 사함을 받아서 평안을 누리라고 선포했습니다. 당신께서 직접 구원을 베푼다는 뜻이므로 당시에 어떤 랍비도, 유대 대제사장마저도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뜻을 가르쳐 준 것이고 당연히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었기에 백성들에게 큰 영적 찔림을 준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그런 가르침까지 꼬투리 잡아서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여서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베드로가 인간 스승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차원이므로, 무리의 반응과 달리 아주 담대한 고백으로서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무리보다는 주님의 권세를 더욱 풍성하고도 다양하게 체험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런 고백을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도들이 무리와 유일하게 달랐던 점은 주님의 권능을 나눠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나눠준 권세를 사용해서 불치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눅9:11) 오병이어 기적에서도 제자들이 떡과 물고기를 무리에게 나누어 주니까 새로운 물고기와 떡이 바구니에 계속 생겨났습니다.
그 정도와 능력에서 큰 차이가 나지만 주님이 베푸신 기적과 비슷한 모습으로 초자연적 권세를 발휘하는 인간은 있습니다. 엘리야를 필두로 구약 선지자들이 그랬고, 심지어 출애굽 때 애굽의 주술사와 나중에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 보듯이 사탄의 종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당신의 임의대로 당신이 택한 자에게 나눠주어서 당신과 똑같은 결과를 맺게 만드는 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습니다. 열두 해나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 나갔지 않습니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갑절의 권능을 물려받긴 했지만,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답 이전에 광풍이 치는 호수를 주님이 꾸짖자 바람과 물이 잔잔해지는 기적은 제자들만 봤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라고, 즉 인자인 스승이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주었기에 놀라며 두려워했습니다. (눅8:25) 그 때 이미 스승이 단순히 메시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라는 인식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에서 놀랍고도 신기하게 자기들도 주님과 똑같은 권세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한 지혜와 능력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나눠주는 공급자이자 그것을 실현하게 만드는 집행자라고 인식한 것입니다. 결국 무리는 주님을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라는 데까지만 어느 정도 인정했고, 그에 반해 제자들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짜 그리스도
주님이 이 질문을 하신 더 중요한 이유가 정작 따로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니까, 주님은 그에 대해 어떤 평가도 첨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또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후에 이 질문을 한 것부터 베드로가 그렇게 대답하리라고 충분히 예상하셨다는 뜻입니다. 질문하기 전에 기도하신 이유도 제자들이 당신께서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이 간섭하고 인도해 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당신의 정체성에 관해선 설명하지 않는 대신에 곧바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했습니다. 무리와 달리 당신의 제자라면 당신의 정체성을 반드시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해서 분별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서 제자들이 담대하게 입술로 고백할 만큼 당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들은 그 후로도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런 확신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수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지금 단계의 제자들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오늘날도, 그것도 성경을 다 배우고도 그런 신자가 많습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에 찌들어서 자기를 최고로 높이려고 하나님보다 위에 두거나, 그분을 아예 거부 대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그 죄를 도무지 씻을 수 없고, 그전에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죗값을 감당하는 제물로 성부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길 외에는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인간 랍비가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지면 그 영웅적 희생만 돋보일 것이며, 또 똑같은 죄인이라서 다른 이의 죄를 절대 대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류를 대신해 죽으시며 흘린 보혈만이 우리 모두의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그런 고백이 이미 네 번이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가장 먼저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천사들이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목동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눅2:11) 두 번째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가 성전에 결례를 행하려고 올라가자,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 평안하게 죽을 수 있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눅2:22-30) 세 번째는 주님이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읽고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즉 주님이 스스로 당신을 그렇게 호칭했습니다. (눅4:14-21) 마지막 네 번째는 주님이 가버나움에서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들이 사람들에게서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눅4:38-41) 이 네 고백은 모두 영적인 차원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아기 예수만 만나본 시므온과 달리 예수님의 공사역을 지켜본 인간 중에 최초로 자기 입술로 동일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마태도 그래서 주님이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마16:17) 베드로 본인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고백을 받자마자 제자들에게만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엄숙하게 예고했습니다. 비로소 당신께서 앞으로 그리스도로서 무슨 일을 행할지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 줄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도 그래서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한 “이때로부터” 주님이 십자가 수난을 예고했다고 말합니다. (마16:21)
그렇다면 무리가 십자가 죽음이 빠진 채로 인식한 예수님의 정체성은 가짜 그리스도를 본 셈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풀자면, 그들이 당신께 기대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행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배불리 먹여주는, 현실적 축복만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역의 전환점
누가는 마태와 달리 주님이 베드로의 고백 후에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한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은혜를 전할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교회를 설립한 과정을 사도행전에 아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대신에 누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은 오직 하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사역하는 초점도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예고한 전과 후로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삼 년간의 공사역을 본문 사건 전과 후 둘로 나눠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앞에서 설명해 드린 대로 사역의 초점을 당신의 권능을 실현함으로써 인간 랍비와 다른 당신의 신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에 맞췄습니다. 복음도 함께 가르침으로써 당신의 권능에만 주목하지 말라고 주의시켰습니다.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으려고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당신을 찾아오자, 주님은 그들을 물리치고서 다른 동네에 복음부터 전하려고 떠났습니다. (막1:38) 오병이어 기적을 맛보고는 백성들이 주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시도할 때도 혼자 산으로 피신해 버렸습니다. (요6:15)
주님은 지금 십자가 수난을 처음 예고한 후로는 제자들에게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후에 그 의미를 잘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한 후에 제자들을 당신의 계승자로 세우려는 뜻입니다. 요컨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는 제자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로선 스승의 십자가 죽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부터 절대 그럴 수 없으며,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나도 자기가 목숨 걸고 스승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사탄에 넘어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님께 야단만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자 그 아들이라고 고백은 했지만, 십자가를 몰라서 무리처럼 스승을 온전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 상태와 당시의 그 모든 사정을 꿰뚫어 아시는 주님은 ‘이 말을’, 즉 당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무리에게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명했습니다. (21절) 무리는 가뜩이나 현실 문제와 고난에서 구해주는 정치적 메시아로만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라는 랍비가 정말로 그리스도가 맞다면, 당장 로마에서 조국을 해방하려는 독립운동을 일으키면서 그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십자가 대속 구원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 사회를 종교적으로 개혁하는 운동을 막 시작하려는 판에 제자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분명 유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당신을 죽인다고 말했으므로, 그 내용부터 제자들이 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차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십자가 처형까지 몇 달 남지 않은 때로 추정되는데 더 늦기 전에 제자들로 빨리 십자가 복음을 집중적으로 교육해 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문답 후로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여정을 잡아서 가는 길 내내 제자도에 관해서 가르쳤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이 문답을 주고 받은 장소는 다른 복음서에 따르면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190킬로미터 북서쪽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50킬로미터 떨어진 헤브론산 근처의 성읍입니다. 그곳의 토착민들은 가나안의 바알 신 우상 숭배에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헤롯 대왕과 그 아들 빌립이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려고 황제의 신전을 지어놓은 곳입니다. 그래서 도시 이름도 황제인 가이사랴에 빌립을 합쳐서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곳에서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문답을 나누며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지금 주님 외에는 누구도 십자가 구원은 신경도 쓰지 않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주인으로 이방인들은 우상을, 로마 제국 시민들은 황제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종교적 기득권이 줄어들까 봐 예수님을 감시하면서 박해하고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그저 매일의 현실 삶이 풍요로워지기만 바랍니다. 제자들마저 스승을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자 그 아들로 믿었으나, 조국의 독립을 이끌어주기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골고다 십자가에서도 아무도 남지 않고 혼자서 그 고통을 당하셨듯이, 지금도 주님의 곁에 제자들은 많아도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무엇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안타깝게 여기는지, 그래서 매일 새벽 한적한 곳에서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시인해도 모두가 그저 오병이어처럼 배불리 먹여주는 하나님이 돠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앞으로 몇 달 후에 골고다의 십자가로 당신께서 기꺼이 올라가서 모든 피를 흘리시고 죽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삼 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너희 모두에게 참된 구원을 베풀겠노라고 약속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수난받는 구세주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인간은 아무 소망 없이 흑암 가운데서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이 문답을 진행한 까닭도 베드로를 비롯해 어떤 제자도 당신의 그 깊고도 풍성한 사랑에 대해서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라도 반드시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해서 분별 판단하도록 이끌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승리
이 문답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되는 첫째 의미가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무리와 제자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주의할 사항은 무리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모세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일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메시아가 수난받을 것이라고 예언해 놓은 이사야서 후반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서, 현실적 형통과 풍요를 보장하는 메시아만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소망하고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닌 것 같아서 주님을 따라다녔던 많은 무리가 떠나버리고 나중에는 거꾸로 멸시 대적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무리보다 더 분명하고 진전된 인식을 가졌으나, 정작 주님이 앞으로 이 땅에서 이루실 일에 대한 지식이 없기는 무리와 같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십자가 구원에 대한 제자 훈련을 받았어도 여전했습니다. 모두가 연약하고 진토 같은 체질인 데다 원죄의 본성에 묶여서 정작 골고다 십자가를 보고는 비겁하게 도망쳤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먼저 찾아오셔서 지난 잘못을 다 용서해 주시고 진리의 영인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경륜을 정확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받았던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는 막상 자기들 구원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었으나 이제 구원받아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담대하게 예수님의 사역을 대행할 수 있는, 즉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지혜와 권능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인간 중에 가장 먼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도 막상 자기 목숨이 걸리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는 성전 한 복판에 서서 담대하게 십자가 복음을 전파해서 하루에 삼천 명을 회심시켰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사역하다가 끝내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순교했습니다. 반면에 무리는 여호와를 알고 성전에서 율법대로 열심히 종교 활동을 했지만, 예수 믿는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그려낸 가짜 그리스도만 소원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교회 출석한 지 삼 년 정도 지나면 기도 응답이 잘 안되어서 실망하는 까닭은 간단합니다. 자기 믿음으로 이루려는 목표가 자신과 자기 주변의 고난과 문제를 해결해서 무사 무탈한 삶을 살겠다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제자가 되지 못한 무리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신적 권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만 인정했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자신과 특별히 자신의 죄와는 연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종교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이 거듭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 실제적인 교제와 동행이 없으니, 삶에 활력과 기쁨이 생길 리가 없고, 그동안 교회 다닌 세월이 아까워 형식적 의무적으로 종교 생활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하려고 자기 대신에 죽었다는 확신이 있는 신자는 다릅니다. 사나 죽으나 자기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때로는 현실적 어려움에 지쳐서 힘이 빠질 때는 있으나 자신과 함께하는 성령이 절대 그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금방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와서 그분을 증거하는 자로서, 십자가 군병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 교회 사도들이, 아니 신자들이 현실 형편이 나빠진다고 해서 그 믿음까지 시들해지고 의무적 형식적으로 믿었겠습니까? 당시는 조직체 교회도 거의 없었고, 정기적인 예배도 없었으며,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질시 비방 핍박만 받았습니다. 그럴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늘어나니까 같은 소망을 가진 성도끼리 모이는 일이 너무 기뻤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 멸시되었으나, 오히려 믿음은 더욱 강건해지고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리와 예수님의 제자 둘 중 어디에 속합니까? 무리에서 제자가 되는 길은 자기 인생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에 온전히 의탁하는 순전한 믿음 하나뿐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천하의 죄인이었던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절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후로도 자기 삶에서 뭔가 갈급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문제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님만이 나에게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이요 끝임을 확신하는 바탕에서 살아가야 그분의 제자입니다.
(8/16/2026)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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