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4.日. 나흘째로군요, 미세먼지농도 수치가 60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05월14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지난 3월말 서울불교박람회를 서산, 당진, 평택, 수원 등 각지에서 상경한 도반님들과 함께 돌아보고 온 다음 주인 4월 초순경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요법회 뒤 공양간에서 점심공양을 마치고 난 다음 행자님이 갑자기 질문을 해왔습니다. 저어~ 벨라거사님, 동영상으로 법륜스님 법문을 보았는데 법륜스님은 윤회가 없다고 하던데 윤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행자님뿐만이 아닙니다. 윤회에 대한 질문은 절에 참배를 오신 신도님들이나 등산을 왔다가 우연히 절에 들른 학생들에게도 이따금 받아보는 질문입니다. 전생前生이나 내생來生, 그리고 윤회輪廻에 관한 내용들은 소위 말하는 과학적인 방법이나 객관적인 사실로서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 궁금하고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이것들은 신앙을 대상으로 한 개인적 믿음이나 종교적 신념과 성향에 따른 지극히 개인적 체험에 관련된 영역이라 각자 종교에 접근하고 받아들이는 형태에 따라 그 내용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용어를 써가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풀어서 써놓았지만 간단히 말하면 객관적인 설명이나 논리적 입증이 상당히 난해한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일요법회에서 빠알리 경전 낭독 부분은 108쪽의 ‘부처님 육신을 위한 마지막 예식’ 이었습니다. 107쪽이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고, 108쪽이 ‘부처님 육신을 위한 마지막 예식’ 이라는 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대목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자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라한과 비구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밑 모를 슬픔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감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만약에 머지않아 자신에게 죽음이 온다면 어떻게 그 상황을 받아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윤회를 믿습니다. 그래서 ......” 라고 길은화보살님이 첫 번째 토론자가 되어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점잖고 묵묵하고 잠잠하게 앉아있는 우리들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왜 예전처럼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를 하지 않느냐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도 법당 안의 숙연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잠시 후 두 번째로는 지명을 받은 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윤회와 내생과 바로 연결이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윤회와 내생에 대해 어떤 이해와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질 것입니다. 나도 윤회를 믿습니다. 불교의 진리체계로도 그렇고 개인적인 믿음으로도 그렇습니다.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오 비구를 대상으로 한 초전법륜인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에 이어서 부처님께서 두 번째 담마의 바퀴를 굴리신 것이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가르침인 삼법인 사상이었습니다. 삼법인三法印 사상의 일체무상一切無常, 일체고一切苦 일체무아一切無我 중에서 일체무아一切無我에 해당하는 무아론無我論 사상思想은 불교의 업설業說과 윤회전생輪廻轉生을 지지支持하는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만약 윤회가 없다면 업설業說이 없는 것이고, 업설業說이 없다면 일체무아의 무아론無我論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불교진리의 체계상으로 본다면 중요한 사상인 무아설에 근거해서 윤회는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윤회를 역시 믿습니다. 그런데 기존 윤회관輪廻觀이 제시하는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아니라 생명이 죽으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그 생명의 근원 안에 형성된 기운으로 존재하고 있다가 다시 계기가 되면 또 다른 생명을 부여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발전소에서 생성된 전기가 각 가정의 전구를 통해 빛을 발하다가 전구가 수명을 다하게 되면 빛은 멈춰지지만 전기는 발전소에 저장되어 있다가 새 전구를 끼우거나 새로운 집을 지어 전구를 설치하면 다시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업業이란 선과 악 등 행위의 쌓임이라기보다는 상황이나 여건에 의해 형성된 기운의 흐름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도량의 마당 가장자리에 길고 예쁜 화단도 만들고, 패랭이꽃과 여주도 심고, 고추밭에 지지대를 설치를 하는 등 오후 내내 울력을 하느라 고생들을 했다면서 백운스님을 모시고 밖에서 함께 저녁공양을 하기로 했습니다. 해미로 갈까, 서산으로 갈까, 칠곡으로 갈까, 어디로 갈까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두어 번 우리스님을 모시고 저녁공양을 한 적이 있던 서산 시내 골목골목집인 영양 돌솥밥집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을 못하신 분과 다른 일정으로 바쁘신 분 등을 제외하고 백운스님을 포함해서 모두 여덟 분이 시간을 내주었습니다. 먼저 차를 김화백님 작업실 주차장에 주치시켜놓은 다음 차량 두 대를 이용하여 음식점으로 향했습니다. 돌솥밥을 먹을 때마다 생각해보는 일이지만 논에 물을 대어 벼를 기르는 수도작문화手稻作文化 권인 동북, 동남아시아와 인도, 네팔, 그리고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 중에서 돌솥밥이라는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이 또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닭요리가 존재하고 있지만 삼계탕을 만들어먹는 곳은 우리나라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혹시 돌솥밥도 우리나라의 독특한 식단은 아닌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돌솥에 담겨있는 밥을 먼저 퍼서 먹은 뒤에 돌솥 안에 남겨있는 누룽지는 물을 부어 눌은밥으로 끓여서 먹는 두 번에 걸쳐 즐기는 돌솥밥 식사의 묘미는 웬만한 호식가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주는 풍성하고 세련된 식사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두 김화백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오늘은 대체로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로 거론되었고, 영적인 기운과 신령스러운 것과 인간이 아니지만 어쩌다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이런 저런 재미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에 농사일 때문에 집으로 먼저 돌아갔던 팔봉거사님과 무량덕보살님이 마늘종을 한 부대나 뽑아와 보살님들이 돗자리를 펴고 모여앉아 정성껏 다듬어서 모두 한 봉지씩 나누어가졌다. 집에 돌아와서 서울보살님이 마늘종 조림을 해주었는데 달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것이 봄날 밥반찬으로 그만이었다. 팔봉거사님이 아침에 절에 가져다놓은 상추와 여래자보살님이 차안으로 넣어준 상추까지 씻어서 그릇에 담아놓자 며칠 동안 우리집 식탁이 그린~ 그린~ 으로 풍성했다. 그래서 김화백님 작업실에서는 열 분 도반님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9시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거의 팔구 개월 만에 일요법회에 참석을 한 길은화보살님은 점심공양을 마치자마자 오늘 밤 집에 제사가 있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무진행보살님은 집에 어머님께서 계셔서 먼저 들어가셨고, 예천동보살님은 어머님 간호 차 천안에 머무르고 있어서 일요법회에 참석을 못하셨다. 물론 우리스님께서야 칠곡에서, 서울에서, 의성에서, 그리고 어딘가에서 수행과 정진을 잘하고 계실 것이다. 아, 우리스님을 한번 뵈러 일요법회 도반님들과 일정을 상의해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태평거사님께서도 슬그머니 운을 떼는 것 같던데 모두 시간을 맞춰 6월 중에는 칠곡에 신바람 나도록 씽씽~ 다녀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