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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아프니 청춘이다
2023.5.16 김수형
드라마 닥터 차정숙
요즘 인기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새파란 20대 여자 레지던트가 40대 아주머니 레지던트 차정숙에게 “나이 많다고 대접받는 거 극혐!”이라 소리치며, 예의 없이 구는---우리는 이런 때 보통 “싸가지 없다”는 표현을 쓰는데, 드라마 작가는 품위를 지켜 잘 참았더군---장면에서, 차정숙이 한 마디 콱! 쏴주는 장면에, 내 속이 시원했다.
“나는 나이를 떠나 예절을 모르는 것들은 극혐이다! 개극혐이라고!”.
참다 못한 차정숙은 ‘개’자까지 붙여서 확인사살하듯 쐈다. 닥터 차정숙이 쌀쌀맞은 여자 쌀쌀이에게 “닥쳐!”라 외치는 것 같았다. 극중의 차정숙보다 30살은 더 먹은 나는 그 순간이 사이다였다. 젊은이들이 40대에게도 저러는데 70대에겐 얼마나 더할까 라는 걱정이 스쳤기 때문이 아니다. 저보다 20년은 더 산 어른에게 하인에게도 못할 언사를 퍼붓다니 그건 바른 행동이 아니다. 이런 일이 “가정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라 하여 애먼 저거 부모까지 욕먹게 만든다.
“나쁜 노무(놈 또는 놈의) 새끼!”라면서, 그의 부모를 나쁜 놈으로 규정하는 게 우리 한국사람이다. 머리 좋고 많이 배워서 의사자격증도 있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다 큰 애도 있고, 남편 뒷바라지는 물론 시부모까지 모시는 훌륭한 어른에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해대다니, 저런 싸XX 하고는!
나는 수십년 나이 차이 나는 젊은이들한테 몇 차례 수모를 당한 경험이 있어 오늘을 걱정한다. 내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렇지, 젊은이들이 내게 퍼부은 무례한 언사는 상대가 친군지 선밴지 할밴지를 가리지 않는 그 점, ‘인간 막나가는 것’이기에 우려하는 것이다.
위아래를 모르고 아무나 걸리면 후두래까기부터 하고, 폭언과 폭력부터 사용하는 것은 조폭 세계에서나 하는 일이니 말이다.
젊은이들의 비례는 수천년 전에도 있었던 문제라던데, 어느 시대이고 어느 사회에도 없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고개를 드는 게 희햔하다. 대체 왜 그런 겨? 2천5백년 역사를 가진 삼강오륜(三綱五倫)이 혹시 중국제라고(?) 저 구석에 처박아 둘 후진 관념이라는 건가?
그런데, 아무튼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요점은 싸가지나 예의가 아니다. 착한 차정숙이 그렇게 퍼붓고 뭐 마음이 편했을까? 이렇게 말하는 난들 마냥 사이다 맛을 느낄까? 그렇지 않다.
차정숙은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해주는 훌륭한 의사이니 당연히 그럴 리 없고, 나는 손주세대들과 세대차이를 좁히는 방법을 몰라서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니, 사이다 그거는 그 때만 잠시 느꼈을 뿐이다.
아프니까 청춘?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젊은이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눈물을 닦아주어 참 좋다. 어른이 젊은이들에게 해준 좋은 일 중 하나다. 그리하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 젊은이들을 위안시켜주는 말로 자리잡았다. 아프니까 청춘…. 뭔가 공감도 가고 낭만도 깃들어 있어 보이는 제목 참 잘 지었다.
그런데 내게는 청춘들의 마음의 아픔은 약간 어리광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아픔을 겪을 새도 없이, 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스무 살에 바로 취업하여(복받은 건가?) 어디 응석부릴 데도 없이 살았으니, 나도 책임이라는 것도 윤리라는 것도 잘 모르고, 때론 즉흥적으로 본능적으로 비뚤어진 욕망에 사로잡혀 많은 실수를 하며 살았음을 크게 뉘우친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은 바르게 살려고 조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저런 종류의 드라마를 볼 때, 또 실제로 예의를 모르는 막나가는 젊은이들을 직접 맞닥뜨리면서 그들에게 충고하고 싶어졌다.
“사람이 나이가 많은 것이 훈장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은 겪지 못한 다양한 삶을 산 사람은 나이 그 자체가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김난도 교수와는 다른 시각에서 “안 아프니 청춘이다”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청춘아, 니들이 아픔을 알아?”
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나이 많은 것의 자랑거리는, 갑작스러운 사고나 병에 걸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죽을지도 모를 병에 걸렸다가 병마를 떨치고 살아남았다는 것, 부모 친지들과 이별을 많이 겪은 그 자체가 아픔이니, 아픔을 많이 겪은 어른들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일 아니고 뭐냐 그거다.
그대들은 백신을 맞았으니 어릴 때 천연두고 홍역이고 걱정없이 컸지만, 나는 홍역에 걸려 이제는 더 못 산다고 웃 목에 밀어놓았는데, 밤새 어떻게 숨이 붙어 있더라네. 그래 여적지 살고 있다. 우리 또래들은 청년이 되어서는 백마부대, 맹호부대, 청룡부대의 월남전장에서 빗발치는 총탄의 사선을 넘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미국이라면 베테랑(Veteran 참전용사)이라 부르며 모든 국민이 존경하고 예우하는 불사의 전사들로 말이다.
전쟁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껴보지도 않았고, 죽도록 아파도 보지 못한 젊은이들아, 그대들은 안 아프니 청춘이 맞다. 한 번 죽도록 아파보고 나서야 내 말 뜻을 알아챌 텐가?
내 친구 하나는 폐암으로 두통이 너무 심하니까 “이렇게 큰 병원에서 두통 하나 못 고치는지, 빨리 죽고 싶다”고 말하던데, 결국 며칠 못 넘기고 가더라.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은 오래 살고 싶다는 절망의 절규 아니더냐? 그런 상황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행복한 거다.
젊은이들은 주로 무슨 일에 정신을 파는가? 게임? 코인? 주식? 복권? 부동산? 해외여행? 힐링?
그런 사행성 사회 분위기는 인간사회에 생겨나는 도도한 흐름이니 누구를 잘못했다고 말하기 어렵네. 그런데 ‘몰빵’이니 ‘영끌’이니 하여 영혼을 한 군데 쏟아붓다니 대체 이게 무엇이더냐?
이 나라의 먹고사는 문제는 노인들이 해결했다. 요즘은 시쳇말로 ‘밥 못 먹어 배고프면 소고기 듬뿍 널은 짜파구리 먹으면 되는(?) 세상’이니, 젊을 때 좀 거창한 일을 도모하면 어떻겠냐?
예를 들면, 다른 무엇보다도 암을 죽이 일, 암 백신 같은 것을 만드는데 열중해 주라는 거다.
‘헬조선’ 타령할 시간이 대체 어디 있냐고! 마음이 아픈 것만 아픔이 아니고, 정말로 육신이 아픈 건 낙담과 포기와 절망을 가져오는 것을 너희는 안 아팠으니 모르는 거다.
찌질이 감성 타령할 유약한 청춘은 No! 그런 데에 시간 낭비할 청춘이 아니다 그 말일세.
“노인들은 이 나라 가난퇴치에 일생을 바쳤으니, 그대들은 인류의 질병퇴치에 나서주라”.
살면서 들러붙는 것들과 떨어지는 것들
연륜이 깊을수록 노인들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성공과 환희, 추억과 실패들이 덕지덕지 붙었다. 60 무렵에 벌써 병으로 세상을 뜬 친구들도 있고, 70이 넘으면 대부분 한 가지씩 암이니, 고혈압이니, 당뇨니, 전립선이니, 갑상선이니, 임플란트니, 치매니, 무릎 관절이니, 난청이니, 뇌졸중이니, 골절이니, 낙상이니(많기도 하다) 해서 병에 걸리고 돈도 많이 들어간다.
저런 병(病)처럼, 나이가 들면 우리 몸에 아무짝에도 필요도 없는 것들이 들러붙는다. 주근깨도 생기고, 점도 많아지고, 저승반점도 생기고, 쥐젖 같은 것도 들러붙는다.
요즘은 왕조시대 용종(龍種)이 아니고, 필요없는 용종이 대장에 생겨서 2년마다 검사하여 잘라내고, 위장에는 헬리콥터도 아니고, 헬리코 박사도 아닌, 헬리코 박터 균도 들러붙는다. 그런 거 말고도 노인들 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풍만한 경험들은 또 좀 많아? 그대들은 노인만큼 겪지도 않고서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건가?
한 편으로 ‘떨어져나가는’ 것도 많다. 몸 밖으로는 이도 쌔갱이(이 새끼)도 엄청 붙었었고, 몸 안으로는 회충, 촌충, 디스토마 같은 기생충도 많이 붙다가, 세월이 좋아 약이 좋으니 다 떨어져 나갔지. 그대들은 전혀 곡조를 모르는 옛 노래에도 ‘떨어지는’ 것들이 나온다.
“돈 떨어져 신발 떨어져 애인마저 떨어져…”.
인간사 정떨어지는 것도 참 괴로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죽을 땐 정 떼고 간다지?
이제는 신체가 노화되니 각질이나 탈모가 생기고, 먼 발치가 아니라 가까운 발치(拔齒)도 있지만, 총명과 판단력 저하, 기억력 감소와 상실, 면역성과 근육량 감소들은 사람을 참 쓸쓸하게 만든다. 너희들을 두 팔로 번쩍번쩍 쳐들어 “서울 봤나?”하며 얼레고 달래던 강인했던 팔뚝의 근육이 줄어들어, 이제는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니 작대기를 짚기도 한다.
상실 중에 미련이 남는 것은 권력과 권위의 소멸이고, 가장 쓰린 상실은 자식으로 살면서 부모님께 뭣 좀 해드릴만 하니 다 돌아가신 일이다. 시골에 사시는 늙은 어머니가 집 밖의 화장실에 다니시기 불편하다 생각하여, 방 하나를 수세식 화장실로 바꿔 욕조도 놓아드려야지 하다가, “에이, 이제 뭐 얼마 더 사실 거라고…” 하면서 포기했는데, 그게 돌아가실 날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족집게처럼 알아 맞힌 예지가 아니라, 얼마 더 못 사신 그 동안이라도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구나.
부부로서 쓰린 것은 배우자를 잃는 일이고, 형제로서 안타까운 일은 부모 슬하에서는 소문난 형제애도 결혼들 하면 어찌 그리 어그러져버리는지 이산 아닌 이산의 아픔을 겪기도 하고, 게다가 자식을 앞세운 이들은 얼마나 쓰린 가슴 안고 통곡했으랴!
친하던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멀어져 떨어지거나, 사회인으로서 직장에서 입었던 실패와 상처도 컸다. 그 때마다 노인들은 갈등과 회한과 싸우며 삶의 정글을 서툴게 비틀거리며 헤쳐나왔다.
드디어 점점 더 가까이 느껴지는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하면 담담하게 받아들일지 그 지혜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다. 욕심을 얹어 장난삼아 “초등학교 다니는 손주 결혼할 때까지 살아야지” 하기도 하고, 내가 왜 오래 살아야 하는지 억지 이유를 대 보다가 일찍 간 친구들 보기 미안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어려운 일에는 “그저 팔자거니”하며 살았고, 즐거울 때는 “이 영광 조국과 자손 만대에!”라며 살았다.
노인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이 많은 인연들, 그대들은 노인만큼 엮이지도 못하고서 어찌 노인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거냐?
‘나’라는 화살
노인이나 젊은이나 다같이, 어머니로부터 탯줄이 잘리던 그 순간이 곧 하늘을 향해 ‘놓은 화살’이 된 거다. 노인들도 청춘일 때는 하늘 꼭대기를 날며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몸이 아플 때마다 “’나라는 화살’이 무게를 느끼는 게지?”라 생각하면서, ‘중력의 법칙’에 따라 화살이 땅에 떨어지는 시점이 언제일지 두려워하게 되었구나.
중력(重力)의 법칙.
그래. 무게를 지닌 것은 시간이 흐르면 다 밑으로 내려간다. 젊을 때 그대 아빠를 설레게 만들던 그대 엄마도 아빠 눈에는 신사임당이었는데, 가슴도 처지고 뱃살도 처졌다. 그대 아빠도 한 때는 소녀들의 첫사랑이었던 적이 있지만, 이젠 눈꺼풀이 처져서 짝눈이 되고, 머리는 백발이 됐다. “할아버지는 왜 머리가 하얘?”라고 손주가 물으면 “너무 많이 감아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나 더. 탄성한계(彈性限界).
그려. 우리의 그 곱고 패동패동하던 뺨도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베개를 베고 잘 때 얼굴 피부가 수없이 접히다 보니 피로가 쌓이고 쌓여 그 자리가 접혀서 다시 펴지지 못하는 탄성한계를 넘어 항복점에 이르니 주름이 된 것이다.
내 어머니는 환갑이 훨씬 넘었던 내게 나이를 물어보신 후 하신 말씀이 있지.
“아이고 아범아. 나이 먹지 마래이”
어머니는 정색을 하고 당부하셨는데, 1살도 더 안 먹지 못하고 벌써 80을 바라보게 되었네. 그런데 저 법칙과 저 한계가 내 또래와 선배들에게만 통용되는 진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어느새 늘상 어리게 보던 동생들도 언제 벌써 70을 넘겼다는 소릴 듣고, 기가차서 하이고 웃고 말아야지 뭐. 허허.
낭만 덩어리 노인들
우리, 노인들이 겪었던 모든 일들을 포괄적으로 ‘낭만’이라 부르면 어떨까?
산전수전 풍만한 삶을 살며 씩씩하게 살았지만, 고아도 되어보지 못한 그대들은 그대들을 어려워하는 어른들을 함부로 대할 게 아니라, 부러워해야 하고 존경해야 하느니. 허허 그렇지 않으냐?
『빨간 머리 앤』에 명대사가 나오더라.
“망가진 물건은 슬프고도 아름답지. 그 오랜 시절의 많은 사연과 승리와 비극이 녹아 있으니, 아직 살아보지 못한 새 물건보다 훨씬 낭만적일 수 있어”
낭만이라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세밀하게 관찰한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벌써 100여 년 전에 깨달은 고귀한 인생철학이 낭만이지.
오늘 신문에도 어떤 책 소개 글에 나왔더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 같고, 냄새 나고, 사람들이 곁에 다가가기조차 꺼리는 개똥은 민들레에게는 필요한 존재고, 개똥은 비오면 몸이 부서져 거름이 된다.
몸에서 냄새도 나고, 거동도 느리고, 한 마디 말로는 잘 알아듣지 못해 되묻기 일쑤이고,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노인들, 아직도 쓸모 없는 개똥 같은가?
그런데 이제는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지독한 고독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 노인이라는 퇴물에게 도무지 저 ‘낭만’이란 이름이 어울리겠는가?
쓰라린 회상이 많았건, 영광스러운 일들이 많았건, 지난 일은 모두 다 소중하다. 다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개개인의 독특한 낭만이다. 가슴 떨리던 사랑의 순간도 있었고, 구덩이에 처박히고 싶은 과오도 떠오르고, 영광의 순간에 받은 박수소리도 귀에 들리는데, 그 많은 것을 겪은 ‘노인은 모두 낭만 덩어리’다.
안 아프니 청춘
나이들어 아파봐라. 걱정이 많아진다. 드러누워 벽에 똥칠하거나, 자식인지 아내인지 구별도 못하고 치매에 걸려 욕이나 퍼붓든지, 병원비가 많이 들어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는데…하면서, 그저 2-3일 아프다가 4망한다는 2-3-4를 갈구하게 된다. 늙어서도 자식들 생각이라니까 글쎄. 사는 문제 중에 자식 걱정도 큰 문제인데, 요즘 청춘들은 자식도 없으니 그런 걱정 안 해서 되겠네.이 말이 비꼬는 걸로 들릴까?
나처럼 아들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입대할 때 논산훈련소 입소대대까지 데려다 주고 헤어지는 순간, 연병장에서 부모석을 향해 첫 거수경례를 받던 순간의 아빠의 마음을 그대들은 모를 거 아니야?
지난 달에, 어제까지 공연을 했던 노 가수가 이튿날 부엌에서 쓰러져 돌아가셨지? 애석한 일이지만, 이 나이 된 사람들은 그 가수에게 “어쩌면 살아서는 뭇사람들의 환호를 받더니, 나이들어서도 죽는 복까지 타고 났네”라고, 겉으론 말 못하지만 속으로는 참 부러웠단다.
일전에 친구가 큰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하더라.
“얼마 안 되는 재산이지만, 동생은 지가 살만하다고 형에게 다 주라 하던데, 너도 동생에게 다 주라 하니, 참 고맙다. 두 자식이 훌륭한 품성을 가지고 잘 커준 것만으로도 부모로서 여한이 없다. 그렇지만 그건 둘이 똑같이 나누는 게 좋겠다. 그리고 화장을 하면 화장장에서 유골까지 다 처분하고, 그 자리에서 탈상까지 마쳐 손 털고 나서라. 따로 납골당이니 수목장이니 49재니 절대 하지 마라. 당연히 제사는 지내지 말고, 혹여 내 기일에 기억이 나거든 식사할 때 오늘이 할아버지 기일이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어쩜 친구도 똑같이 했는지, 우린 ‘천생친구’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대들은 생각하는 것까지 딱 맞는 그런 친구 하나 있니?
20~30대여! 만 3년을 꽉 채워 군 복무를 하면서 이 나라 저 삼팔선 비무장지대 DMZ를 원망하던 노인들에게 언제부터 MZ가 다 뭐냐?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꺼려지는 D(비)M(무장)Z(지대)를 연상하게 하는데, D자 마저 빼버린 MZ(무장지대) 젊은이들은 더 거리감이 생기네. 허허.
지난 선거 때 여론조사를 봐도 20대와 70대는 선호도가 북극과 남극이었지?
그대들은 말이 너무 짧고 노인들은 말이 너무 길지? 한 마디라도 더 길게 말하고 싶은 노인에게 그대들은 무정하게 짧게만 말해. 뭔 말인지 잘 안 들려서 “응?”하면 퉁명하게 대답하거나 짜증이 섞이지.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서 옛날얘기 듣던 손주들은 가족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요즘은 왜 그렇게 달라진 걸까?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가 거리를 좁힐 수는 없을까?
사실 노인들은 말이야, 사이가 나빠도 자식뻘인 50대하고 나빠야지 손주뻘인 20대하고 나쁠 일은 없지. 50대는 아들딸 세대이니 당시에 해줄 걸 잘 해주지 못한 것도 많고, 또 아빠 역할이 무척 서툴렀던 때였잖아? 그래도 가족부양이라는 책임을 완수하려고 모진 풍파를 헤쳐내고 이제 할아버지 되었잖아? 손주 세대는 다르다. 이제는 아빠 경력이 오래 붙어 할아버지 되었으니 손주들에게는 잘해줄 수 있는데…. 어려운 세상 서툴게 살지 않을 얘기도 들려줄 수 있는데…
좋은 생각 바른 생각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도 두 사람이 좋은 사이로 결말이 나기를 우리 함께 바래보지 않을래?
나와 내 친구처럼, 서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 가까워지게 될 것 같은데?
나와 내 친구도 처음에는 친구라는 상대적 역할이 서툴러서 서로 독특한 개성이 있는가 생각도 했지. 그러다가 점차 호의를 베풀다 보니 우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내 생각을 바꾸고, 한 발씩 물러서니, 대부분의 의견에 충돌이 없어지더라. 충돌이 없어지니 친하게 되고, 친하니 더 자주 만나고, 그러니 절친이 되었다.
요건 MZ들에게만 들려주고 싶은 중요한 ‘우정을 만드는 비밀’인데, 귀 좀 가까이 대봐요.
“다른 무엇보다 둘 다 ‘좋은 생각, 바른 생각’을 하니까 매사에 두 사람 생각이 거의 같아지더라. 알겠지? 어디 가서 ‘우정의 비밀’을 함부로 폭로하고 다녀도 그건 용서해줄게”.
그러니 우리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고, 좋은 생각, 바른 생각을 하여 친구처럼 지내자.
우리는 한창 때 조직과 계급의 질서에 순응하면서도 고리타분한 권위는 싫어 했으니, 꼰대정신은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부대끼며 겪어서 알고 있다.
그대들 마음에 흡족하지는 않겠지만, 꼰대짓 안 하려고 무진장 노력하고 있다. 나이 대접 안 받아도 된다고 마음 다잡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매일 메일이나 카톡으로 노인이 취해야 할 행동이나 갖춰야 할 지성에 대해 좋은 글을 보내주어 많이 공부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더 잘 이해하고, 쉰 내 안 나는 ‘요즘 노인’이 되고 싶어서 한 번이라도 더 씻는다.
종심(從心)이라 해서, 수 천년 전부터 ’나이 70이 넘으면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노인 특권인 자유가 허락되어 있다. 말이건 행동이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이 특권을 마음껏 향유할 생각보다는, ‘70 넘으면 모든 언행이 사리에 맞게 인격이 높아져야 한다는 말’로 새겨듣고, 더욱 조심하고 있다.
그러니, 어른들 지나다니는 큰 길 가에서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요구는 하지 않겠지만, 노인들 지나가면 몸이라도 슬쩍 옆으로 돌려 피우는 정도의 작은 매너는 갖는 게 좋다는 말은 하고 싶다. 노인들이 넘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부축해주는 것은 그대들이 잖니? 그걸 고마워한다.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애써 감추려는 듯한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디. 노인들은 짐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부담을 갖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매우 낭만적인 말인데, ‘노인은 낭만 덩어리’라고 말한 내가 “안 아프니까 청춘이다”라 하니 너무 낭만이 없지? 그런 것 같네. 그려 미안해. 차정숙처럼 확 쏟고 나니 시원한 게 아니라 오히려 어른스럽지 못해 민구스럽네.
그러지 말고 우리 좀 잘 지내보자.
저 무정한 세월이 노인들에게만 ‘쏜 살’이고, 내 어머니가 내게 가지셨던 바람처럼 그대들에게는 중력과 탄성이 적용되지 않기를 부탁하면서, 또한 울울창창 그대들의 젊음이 오뉴월처럼 짙푸르기를 바라면서, 화해의 악수를 내미니, 힘찬 악력으로 노인의 손이 아프도록 꽉 잡아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