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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째
답사를 할 때는 아무리 편한 호텔이라도 푹 잠을 자기 어렵다. 답사 전부터 며칠 간 밤에 잠을 자지 못했기만, 5시 이전에 잠에서 깼다. 아침에 아내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장인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답사여행 2주 전부터 췌장암으로 입원하신 탓에, 며칠 간 밤샘간호를 해드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아내와 통화해 아내를 위로했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여행의 리더였기 때문에 당장 귀국할 수는 없었다. 그저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가는 것 뿐. 호텔에서 절을 올리고 마음을 다시 잡았다.
홍찬수 선생님이 아침일직 호텔에 오셔서 내게 책 2권과, 차, 그리고 모자를 선물로 주셨고, 전체 일행을 위해 백주 12병을 선물로 주셨다. 백주는 식당에서 먹을 수가 없어서, 차 안에서 한~두병을 개봉해 결국 어느 틈엔가 금방 사라졌다. 백주를 마셔본 답사 일행들은 이후 저녁 식사 시간에는 어김없이 백주를 시켰다. 그 탓에 분위기는 좋아진 듯하다. 술을 잘 마시기는 하지만 즐겨 먹지는 않는 나도 답사 기간 중 거의 매일 술을 마셔야 했다.
버스를 타고 석붕산 고인돌을 이동을 했다. 가는 도중 홍찬수 선생님의 안내로 예정에 없던 웅악성(熊岳城-遼寧省 營口市 鮁魚圈區 熊岳鎮 소재)의 수덕문(綏德文)을 보았다. 청나라 때인 1778년에 만들어진 성문이다. 고조선 옛터에 남은 웅악이란 말이 영 낯설지가 않다. 우리가 성을 찾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 곳은 번화가였고, 성문 안은 매우 한적한 시골처럼 느껴졌다. 성 밖은 번화가가 되고, 한때 번화했을 성 안이 한적한 곳이 되었다. 이것이 개벽이구나 싶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석붕산 고인돌로 향했다. 차량 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서서, 고인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걸었다. 중국 시골의 한적함을 엿볼 수 있었다. 현지 중국인들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황해도 은율군 고인돌, 여수시 율촌면 고인돌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꼽히는 석붕산 고인돌을 막상 보자,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지만, B.C 1천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을 보고 놀란 것은 정교하게 돌을 가공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고인돌 덮개돌 밑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지만, 후대 것이라서 그리 감응은 없었다. 하지만 크기가 8.6m*5.7m*0.5m에 달하는 거대한 덮개돌을 가공해서 옮긴 것은 고대 사회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갖게 만든다. 무게는 얼마나 될까? 장군총이나 태왕릉 호석보다 크고, 장군총 묘실 덮개돌(9.5m*7.45m*0.8m)보다는 작지만, 엄청나게 큰 돌을 어떻게 고임돌(支石) 위에 올려놓았을까? 아이들 그림책에 나오는 것처럼 굴림대를 이용해 힘으로 당겨서 올려놓았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인데..... 고구려 시대에는 도르래를 이용해 덮개돌을 올렸겠지만, 그보다 1500년 이전에 사람들은 과연 이것을 어떻게 올렸을까? 고조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고인돌 앞에서 뭔가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은 탓에, 원하는 사진은 충분히 얻었다. 다시 차를 타고 개주시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식당이름은 덕명교자왕(德明餃子王) 즉 만두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만두가 아닌 일반 음식을 먹었다. 10여 년 전 심양에서 정말 맛있는 만두를 먹었던 경험이 생각났다. 여행의 재미가운데 하나는 현지의 맛난 음식을 먹는 것. 중국의 교자를 먹는 경험을 답사단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부탁해 비용이 더 들더라도 이번 답사에서 만두를 먹을 수 있게 식당을 바꿔 달라고 요청해, 2일 후인 집안시에서 만두를 먹을 수 있게 조치했다.
식사 후 건안성 답사를 했다. 2003년에 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서 고구려 요동방어망의 중심이라고 엄청나게 강조했던 건안성. 건안성 답사는 이번에 3번째였지만, 앞서 두 번의 답사는 겉핥기에 불과했음을 이번에 깨달았다. 홍찬수 선생님의 안내로 건안성 북벽을 걷기 시작했다. (서벽인줄 알았으나, 방위를 잘못 알았다) 산능선을 따라 한참을 걷고 또 걸으면서, 성안을 둘러보았다. 둘레 5,744m인 수원화성에 버금갈 정도로 커다란 건안성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저기는 기병대가 머무는 곳이고, 저기는 건안성 욕살이 머무는 지휘소일 것이고, 저기는 보병들이 훈련받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문터까지 한참을 걸으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건안성은 주변에 염전과 철광산이 있다. 또 요동에서 고구려 내지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청석령을 넘기 위한 방어성 역할도 하고 있다. 또 요하 하구를 막는 수상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서문에서 가까운 성벽에서 보면 멀리 바다도 보인다. 이렇게 교통과 경제적 요충지였던 곳에 최소 2만 이상이 머무는 큰 성이다 보니, 645년 당나라 영주도록 장검과, 수군제독 장량이 두 번이나 이곳을 공격해왔었다. 고구려군은 이들을 모두 격퇴했다. 기록에는 건안성 성주가 늙어서 당태종이 이끄는 당군이 쉽게 함락시킬 수 있는 곳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결코 만만한 성이 아니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건안성이 신성, 요동성과 함께 요동방어의 중심성이라는 나의 학설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능선에는 돌로 성벽을 쌓은 구간도 있고, 동문지와 서문 주변에는 판축으로 성벽을 쌓은 구간도 있었다. 동문지로 내려와서, 높은 산능선으로 된 남벽을 오르는 것은 포기하고, 성 내부를 걸었다. 성 내부를 걸으면서 성안이 엄청나게 넓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성 중간에 금전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지휘소라고 한다. 이곳에 오르는 길을 놓친 탓에 직접 오르지는 못하고, 일행 중에 심충성님이 올라서 찍은 사진을 보았다.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문터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 시대 우물을 발견했다. 현지 중국인이 나와서 우물 뚜껑을 열어주고 사진을 찍도록 해주었다. 남문터로 가는 길도 알려주었다. 예전에 건안성에서 사진을 찍던 고구려 연구자가 중국인의 신고로 사진기를 뺏겼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현지 중국인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나의 소심함이 부끄러워졌다. 남문 주변 성벽에서 만난 중국 소녀와 아이들은 천지난만하고 상냥했다.
남문터를 시작으로 서벽을 따라 다시금 산행을 했다. 예전 건안성 답사에서 본 성벽은 이 부분이 전부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벽답사가 주가 아니었다. 서벽의 길이는 북벽에 비해서 많이 짧았다. 그럼에도 볼 것이 많았다. 성벽 중간 중간에 네모난 구멍 뚫린 곳이 보인다. 이 구멍의 용도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낭아박(狼牙拍)이나 야차뢰(夜叉雷), 쇠뇌와 같은 성 방어용 무기를 설치하기 위한 지지대를 설치하기 위한 구멍이라고 생각되었다. 3시간 넘게 답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답사를 오래한 사람과 먼저 도착한 사람 사이에 시간 차이가 있었음에도, 기다려준 일행들이 너무 고마웠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이런 것도 있었군요 하면서 호기심을 발동해준 일행들 덕분에 이번 답사를 정말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건안성 답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성과가 큰 답사였다.
영구시에서 거주하는 홍찬수 선생님은 건안성 답사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우리 일행과 헤어졌다. 여권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시 경계를 넘어서면 버스나 열차표를 살 수가 없어서 여행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홍 선생님 덕분에 즐겁고 유익한 답사가 될 수 있었다. 영구시 주변 고구려 유적과 지역에 대한 설명은 큰 도움이 되었다. 홍찬수 선생님과 헤어진 후, 버스를 타고 해성시 석목성 고인돌을 보러 갔다. 석목성 고인돌은 석붕산 고인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약간 작다. 반면 높은 고지대에 우뚝 서있어, 종교적 제단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고인돌이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엎드려서 찍고, 울타리에 올라가서 찍고, 언제 또 이곳에 올까 하는 심정으로 셔터를 눌렀다.
저녁은 요양시에 위치한 코리아구이라는 곳에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남원 출신 한국분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는 정말 좋았다. 모든 음식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하루 많이 걸어서 배가 고팠고, 너무 맛난 음식을 만나니 자연스레 포식하게 되었다. 식사 후 요양 호텔에 도착했다. 재작년에 숙박했던 호텔은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한적한 곳이었는데, 이번 호텔은 요양 시내여서 이동 시간이 대폭 절약되어 좋았다.
호텔에서 밤 시간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거나, 조용히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날은 좀 달랐다. 이민수님이 자신이 쓴 논문을 봐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논문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또 하나의 이유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일행 중 조길현 목사님이 오늘 저녁 때 대련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요양호텔까지 오기로 한 것이었다. 중국말을 못하는 조목사님이 무사히 호텔까지 올 수 있을까? 여행사에 미리 의뢰를 하여 대련에서 요양까지 운전할 택시기사를 수배해두기는 했지만, 요즘 같은 한중 관계로 볼 때 처음 중국을 여행하는 개인의 여행 안전이 어떨지 내심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기우였다. 중국인 택시 기사는 말이 통하지 않은 조 목사님을 4시간 넘게 안전하게 택시를 운전해서 호텔방까지 모셔왔다. 고마웠다. 친절한 중국인 기사 덕분에 이제 답사단 20명이 모두 모일 수 있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첫댓글 답사기간중에 장인께서 돌아가셨군요.삼가 조의를 보냅니다. 안타까운 답사기 감사합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