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모어는 M18A1(한국화약) 이라는 제식명칭이 있다. 도폭약은 콤포지션 C4. 파편은 쇠구슬(철제볼) 700발이 들어 있다. 확산도는 수평각 60도이다. 높이는 2m까지 가능하다. 크기는 21.6X3.0X13.6cm. 살상반경은 50m, 유효반경은 100m, 위험반경은 250m이다. 사용시 주의할 점은 후폭풍거리인 16m 이상의 안전거리를 확보하여야 한다. 비산각 120도. 비산각이란 흩어져 날아가는 각도, 즉 폭파할 때 안에 쇠구슬이 흩어지는 각도를 말한다. 60도는 폭파할 때 직선거리로 나가는 각도다.
제 원
중량: 1.6kg
크기: 가로 21.6cm
세로 13.7cm
두께 3.0cm
유효살상거리 : 50m
준살상거리 : 100m
후폭풍의 위험반경: 16m
비산각 120도
클레모어는 폭약이 아니라 대인지뢰의 일종. 지상폭풍형의 지뢰와는 달리 일 방향 지향성 지뢰로 지뢰의 제한적인 살상력을 대규모 살상력으로 만든 것으로 후폭풍이란 총의 반동처럼 크레모어가 작동되면서 뒤쪽으로 에너지가 발생하여 충격파가 생성되는 것이다.
KM18A1는 살상거리 250m, 후폭풍 16m,실제 살상거리는 50m이지만, 파편과 폭약의 충격파가 이 정도 거리에서는 인간이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 파편이 아니더라도 충격파로 사망한다. 살상범위 가로 120도 세로 60도, 비전기식과 전기식이 있고 전기식은 일반적인 사용 비전기식은 부비트랩으로 사용한다.
격발기는 전기식으로 도전선은 30m짜리 구형과 50m짜리 신형이 있다. 구슬(파편)은 700~800개 정도이며 집탄력은 없지만 확산력은 있다. 크레모어는 다른 지뢰와 달리 제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적의 노획이나 자체 제어기능이 없는 단점이 있어 대간첩작전이나 방어 목적 혹은 정찰 또는 특수전 부대의 작전지역 방어용으로 사용된다.
폭약은 콤포지션 1.5파운드로 파괴 공을 만들어 보통 20파운드이상을 수군데 혹은 수십군데(지지 기둥)에 설치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있으며 건물의 크기에 차이가 있지만 클레모어를 설치하고 한발을 격발하면 바로 앞에 10m도 안되는 인명 타겟에 불과 10발이 채 안들어 간다. 물론 두개를 설치해도 20발이 안된다. 크레모어를 정조준했을 때에도 판잣집 파괴조차 힘들다. 클레모어는 폭파가 목적이 아니라 파편으로 인한 인마 살상용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파편을 날려보내기 위해 제작 되었고 파괴용으로 개발 되어 있지 않아 일반 주택 경우 10개를 설치해도 파괴하기 힘든 것이다. 500파운드 짜리 폭탄으로 비행기에서 투하해도 건물을 단번에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클레모어는 경미한 피해만 주는 정도이다.
묘소 건물 트여져 폭발 피해 줄어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아웅산 묘소 건물의 구조가 사방이 바깥으로 터져 있었으므로 더할 참사를 그 정도로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묘소 건물이 밀폐돼 있었다면 엄청난 폭풍압으로 해서 고막 파열은 물론이고 내장 파열 등 치명적인 상처를 더 많은 사람들이 입었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런 기술적 면에서 이번 암살 사건은 1944년 7월20일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 기도 사건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날 히틀러는 소련 육군의 대공세에 대비하기 위한 독일 국방군 수뇌 회의를 동프로이센의 총통 사령부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장에 폰 슈타펜베르그 대령은 시한폭탄이 든 가방을 들고 들어갔다. 그가 검색을 받지 않았던 것은 슈타펜베르그 대령이 독일 육군 참모 본부에선 신화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트 장교로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왼눈, 왼손을 잃었고 두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그래도 그를 예편시키지 않았던 것은 이 백작 출신 대령의 천재적인 참모 능력을 산 때문이었다. 그는 폭탄이 든 가방을 슬그머니 히틀러 다리 밑으로 밀어 넣고는 회의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회의장을 빠져 나왔다. 이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 슈타펜베르그 대령은 신관의 목 부분을 으스러뜨려 놓았었다. 그것은 조그마한 유리 공에서 흘러나오는 산이 용수철을 녹여 10분 뒤 격철을 움직여 폭발토록 한 동작이었다.
슈타펜베르그 대령이 나간 뒤 다른 장교가 그 자리에 섰다가 발끝에 부딪치는 서류 가방을 옆으로 옮겨 놓았다. 목제 탁자의 다리 부분 차폐물이 히틀러의 하체와 가방을 떼어 놓게 되었다. 낮 12시 42분 폭탄은 작열했다. 지붕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마루 바닥엔 큰 구멍이 뚫렸다. 4명의 장교가 즉사했다. 20명이 부상했다. 그래도 히틀러는 가벼운 화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왜냐? 첫째는 장교가 가방을 차폐물 뒤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회의가 목조 건물에서 열린 덕분이었다. 당초 회의는 지하 방공호 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더울 것 같다고 해서 목조 건물로 옮겼는데 이것이 히틀러를 구한 것이었다. 목조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면서 폭풍 압의 김을 빼버렸던 덕분이었다.
폭약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아웅산 묘소에서 터진 폭탄이 원격 조종 시스템의 고성능 정밀 폭탄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폭발 진동을 1·6㎞ 떨어진 위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면 TNT로 환산, 1t의 위력에 상당한다는 계산도 나왔다. 6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지난 77년11월의 이리역 대 폭발은 TNT 30t이 터진 사고였다. 그러나 묘소 천장에는 1t이나 되는 TNT를 설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군사용으로 쓰이는 RDX, HMX 등 고성능 폭약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원격 조종으로 보는 이유는 폭발 시각이 이계철 대사의 입장과 일치했기 때문.
이 대사는 버마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입장했고 먼저 도열했던 수행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교환했다. 그의 용모도 안경을 낀 것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멀리서 보면 전대통령 의 도착으로 오인하기 쉬운 점들이 많았다. 특히 때 이른 진혼나팔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나팔수도 이 대사를 전대통령으로 오인하고 나팔을 불다가 실수 했음을 알아차리고 중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나팔수가 폭파범과 미리 내통하여 폭발 신호로 나팔을 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나팔소리가 작위든 부작위든 원격 조종 폭파범의 행동을 촉발시켰음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원격 조종은 먼 곳에서 폭파 현장을 관찰하다가 타이밍을 잡아 초단파 조종 버턴을 누르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초단파는 폭탄에 장치된 수신 장치를 통해 음극과 양극을 합선, 격발시키는 것이다. 원격 조종의 거리는 초단파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뜻하는데 중간에 차폐물이 없어야 한다. 통장 1㎞안에서 원격 조종이 가능하다. 폭파범은 묘소를 내려다보는 그 어디에서 보턴을 눌렀을 것이다.
제2부 수사「코리안」, 차례로 체포되다
미얀마 당국은 사고 직후 랭군시내에 비상망을 펴고 검문을 강화했다. 미얀마 육군과 경찰은 지난 30년 동안 공산 및 소수 민족 반란군들과 격전을 거듭해 온 오랜 실전 경력으로 하여 베트남군과 함께 동남아시아에선 최강의 경찰 및 군대로 꼽히고 있다. 이 미얀마 치안 당국이 10일 밤 첫 성과를 기록했다. 랭군 포트 구의 파준다웅 샛강에서 머리만 물위로 내어 놓고 헤엄쳐 가는 사람을 주민들이 발견,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경찰이 즉시 출동, 이 괴한에게 접근하자 괴한은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 폭발로 미얀마 경찰 2명이 다쳤으나 괴한 자신도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다음날 11일 새벽 랭군 북서쪽 16㎞ 지점에 있는 타크후트핀 마을 주민들이 또 2명의 수상한 외국인이 달러를 가지고 물건을 사려는 듯 서성거리고 있다고 신고해 왔다. 즉각 경찰이 출동했다. 이 괴한 2명은 수류탄을 던지며 반항했다. 경찰도 응사, 그 가운데 한 명을 쏴 죽였으나 다른 한 명은 달아났다. 버마 경찰도 세 명이 크게 다쳤다. 미얀마 경찰은 이 시점에서 신중한 표현을 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일엔 괴한의 신원을 「아시아인」이라고 하더니 11일엔 「코리안」이라고 했다. 또 중상을 입고 체포된 사람과 사살된 사람의 소지품이 같았다고 발표, 그들이 일당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한국 대사관에선 체포된 자가 「코리안」이란 발표에 따라 우리 교민들의 소재를 점검 했던 바 모두 무사함을 확인하였다. 버마 경찰의 「인간 사냥」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12일 아침 9시25분께 엔 전날 새벽 놓쳐버렸던 괴한 1명을 추가로 체포하였다. 체포 과정에서 괴한은 왼팔 일부가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고 버마 경찰 3명이 죽었다. 미얀마 경찰은 범행 조직을 가려내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생포할 것을 엄명, 체포 과정에서 경찰의 피해자도 많이 났다. 당초엔 블랙 박스인양 만큼이나 막연할 것 같아 보이던 수사는 급전직하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물증인 폭발물에 대한 조사, 범인 일당의 추적 등 2대 수사 방향이 착실하게 제자리를 잡아나가면서 그 외곽의 「음모 상황」도 안개를 헤치고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폭파 직후엔 범행 집단과 동기를 놓고 여러 가지 설이 오고 갔다.
①북괴의 사주를 받은 미얀마 내 반정부 단체 또는 국제 테러리스트의 범행
②북괴 특수 부대에 의한 직접 범행
③소수 민족 게릴라 등 반정부 단체의 단독 범행
④한국계 반정부 단체의 소행 등등.
이 네 가지 설 가운데 미얀마 내 반정부 단체에 의한 단독 범행은 미얀마 내 여러 갈래 반정부 게릴라들이 버마 공산 게릴라를 제외하곤 단체로 우익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암살 목표를 한국 대통령에게 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불렀다. 아웅산 묘소 참배에는 버마 정부 실력자들은 가지 않도록 벌써부터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폭발 당시 대부분의 버마인들은 묘소 건물 바깥에 있었으므로 테러의 표적이 버마인이 아니란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던 것이다. 반체제 단체에 의한 범행 설은 일부 외국에서 제기된 바 있었으나 한국의 반체제 단체는 철저한 비폭력주의란 점에서 단번에 묵살되었다. 이렇게 되면 이 사건은 북괴와의 관련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논리적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2부 수사 동건호는 왜 떠도는가?
첫날부터 북괴와의 관련을 암시하는 정보들이 세계의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북괴 화물선 동건호가 전 대통령의 랭군 도착 직전 랭군 항에 기행 했다가 출항, 다시 전대통령의 방문 예정지인 스리랑카의 콜롬보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보안상의 이유에서 스리랑카 당국으로부터 출항 명령을 받았다는 콜롬보로부터의 외신 보도가 10월10일 북괴 음모설에 대한 최초의 자료로 등장하였다.
더구나 이 배의 승무원39명 중 26명이 全대통령의 방문 예정 장소 중의 하나인 스리랑카 칸디시에 들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넘길 수 없는 용의 점을 던졌다. 이 동건호란 배는 외신을 통해 「통곤호」(Tong Gon)로 처음에는 알려졌으나 곧 그 정체가 내외 통신에 의해 밝혀졌다. 북한 정세에 정통한 서울의 내외 통신은 동건호가 6천t급으로 북괴의 대남 공작부가 무역선으로 위장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족보를 살펴보면 이 배는 지난 76년 조총련 상공인 문동건(조선화보 사장)이 기증한 화물선으로 북괴는 이를 「동건 애국호」로 이름 붙여 특수공작 임무 수행 선박으로 개조, 고성능통신 시설 등을 갖추어 일본, 홍콩, 싱가포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등지에 취항시켜 왔다는 것이다. 13일 랭군에 파견된 연합통신 기자는 「정보 소식통」을 인용, 북괴가 랭군 앞바다 시리암 섬에 있는 주석 제련소를 범행 기지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제련소는 4년 전 북괴가 지어 준 것으로 북괴 기술자 7∼8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통신에 따르면 전 대통령의 랭군 방문 직전, 동건호는 소형 선박을 이용, 시리암 섬으로 원료 수송을 하는 것처럼 꾸며 폭파 전문 특수 요원 5명을 잠입시켰다는 것이다. 이 범행 시나리오에 따르면 폭탄 전문 요원 2명과 원격 조종 폭발 전문 요원 3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아웅산 묘소에 접근, 폭탄조 2명이 폭탄을 천장에 가설하고 기지로 철수한 뒤 폭발조 3명이 9일의 원격 조종 폭발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원격 조종 폭발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파준다웅 샛강을 통해 달아나던 중 10∼12일 사이 체포, 또는 사살된 「코리안」이 바로 이들 3명이라는 것이 이 소식통의 말이었다.
다른 소식통은 북괴 동건호가 침투시킨 특공 요원은 30명이고 이들 중 상당수는 폭발 사건 뒤 탈출에 성공, 공해상에 대기중인 모선(동건호)으로 돌아갔고 세 명이 체포, 사살되었다고 했다. 이들 정보들은 특공대 숫자에서 서로 엇갈리고 있을 뿐 아니라 스리랑카 정부 소식통이 지난 10월10일까지 문제의 동건호는 랭군항과는 동떨어진 콜롬보 근해에 정박 중이라고 확인했던 점과도 상치되고 있어 범행 시나리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10월15일 현재 불확실한 상황이다. 「코리안」 두 명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10월14일 현재의 수사는 북괴의 관련을 구체적 물증으로써 확인해 가는 단계에 있으므로 범행 과정 파악은 그 다음 단계의 일일 것이다. 북괴는 이번에 꼬리를 밟힐 만한 여러 가지 단서들을 남겼다. 더구나 수사도 미얀마, 한국 합동으로 진행되어 그 결과는 공신력이 클 것이다. 그들의 관련이 결정적으로 드러날 경우, 국제 사회에서 북괴는 국가로서의 윤리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테러 집단으로 낙인 되고 말 듯하다.
그들이 남긴 물증은 소이탄과 불발탄, 3명의 「코리안」, 그들이 갖고 있던 40점의 소지품, 한국 측 부상자들의 몸속에서 빼낸 아연 성분 탄알 등등이다. 그리고 한국인 이면 잘 아는 그들의 행태-잠수 도망, 들키면 발악적 저항, 그리고 자폭-가 물증의 존재 여부를 떠나 심증을 굳히는 것이었다. 10월13일 미얀마 경찰은 3명의 「코리안」으로부터 압수한 40여점의 소지품을 공개했다. 소지품은 무전기, 트랜지스트 라디오, 쌍안경, 우산, 달러화, 실탄10발, 미싯가루, 다도, 화약, 가공 식품, 통조림 등등이었다. 우리측 조사단은 12일 랭군의 한 경찰서에서 보관중인 이들 소지품들을 확인한 결과, 통상 북괴 간첩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유형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제2부 수사 「암살의 토양」은 미얀마 내전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번 폭파 사건은 미얀마라는 토양으로 해서, 미얀마라는 인화물질로 해서 비로소 가능했다. 미얀마 측에 공범자 또는 하수인이 있으리란 추리는 처음부터 나왔다. 10월13일 미얀마 당국자는 아웅산 묘지의 경비 관계자 11명을 일단 용의자로 구속,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이들은 아웅산 묘소에 대해 경호 관계자들이 사전 점검을 할 때 「성역」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금속 탐지기 사용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폭발물을 설치하는 데 있어서 묘소 경비자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직무 유기를 했으리라는 추리는 그런 「성역」에 고성능 폭발물이 세 개나 장치돼 있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수상한 진혼나팔, 2주 전의 도색 작업, 사전 답사 성격도 지녔던 것으로 보이는 지난 8월25일의 북괴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의한 아웅산 묘소 참배 등등 북괴 공작대와의 공모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항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사건 당일 아침의 참배 현장 사전 점검에서 어떻게 당연한 체크 지점, 즉 외국 국가 원수가 설 자리 바로 위의 천장 부분이 그냥 넘어가게 되었는지가 용의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북괴는 미얀마에서 파괴공작을 꾸미기에는 안성맞춤인 조건들들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그들은 미얀마 와 오랜 유대 관계를 이용, 미얀마 정부 기관 내부에 동조자를 심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미얀마 내부의 복잡한 반정부 무장 단체를 테러에 활용할 수도 있었을 터이다. 미국 쪽에서는 한때 미얀마내 반정부 소수 민족 게릴라들이 이번 사건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북괴의 가담 혐의가 굳어지자 이번엔 미얀마 게릴라 조직과 북괴의 공동 작전 가능성을 말하는 정보통도 나타났다. 미얀마 는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오랜, 가장 치열한, 그러면서도 가장 적게 알려진 내전국이다. 영국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미얀마 족과는 인종, 언어, 때로는 종교가 다른 카친, 카렌, 카레니, 샨족 등 소수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켜 여태까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미얀마 북동쪽 지역, 전국토의 약3분의 1이 이 내전에 휘말려 있다. 18만 명의 미얀마 육군은 한 달에도 수백 명씩 희생되고 있다. 여기에다가 버마 공산당(BCP)의 게릴라들이 준동, 미얀마는 중앙 정부와 소수 민족 게릴라들과 공산 게릴라 등 3대 세력권으로 분할돼 있는 상황이다.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확실하게 미치고 있는 곳은 랭군 부근의 도시 지역인데 지난해부터는 이곳에서도 게릴라들의 폭파 사건이 잇따랐다. 게릴라들의 병력은 5∼6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얀마 공산당 게릴라들이 약2만의 병력을 확보, 가장 강력하다. 소수 민족 게릴라들 가운데는 카렌 민족 해방군이 4천, 카레니족이 1천여명 정도의 병력을 가진 비교적 큰 그룹으로 꼽힌다. 이 정글 전선에 올해 들어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근까지 공산당을 멀리하던 샨과 카친족 게릴라 그룹이 공산 게릴라와 연합 작전을 펴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여세를 몰아 버마 공산 게릴라들은 우익 카렌 게릴라들과도 동맹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 민족 게릴라들은 우익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아직도 강하게 보여 주고 있지만 전술 면에선 공산 게릴라와의 동맹거부란 과거의 터부를 점차 벗어 던지고 있다. 미얀마 공산당 만이 중공으로부터 약간의 무기원조를 받고 있을 뿐 이들 게릴라 그룹은 타이와의 밀무역 에 매기는 세금을 주요 수입원으로 하여 자력으로 버티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전술을 변경, 정글에서 랭군으로 전선을 옮길 것이라고 한다. 이번의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 에서 북괴가 이러한 최근의 정세 변화를 교묘하게 이용, 미얀마 공산군이나 민족 게릴라 들을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서방 정보 소식통에선 보고 있다.
뉴욕 타임즈는 10월 13일 「북한이 랭군 폭파 사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자제하고 무력 보복을 하지 말 것을 전 대통령에게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레이건 정부가 걱정하고 있는 보복방식은 군사 응징이나 대규모 특공대 공격이라고 했다. 이런 보도는 랭군에서의 수사 진전이 북괴 범행설로 굳어가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한국민의 국민적 감정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북괴의 이번 암살 폭파 만행은 호랑이의 꼬리를 건드려 화만 나게 한, 역효과의 실패작이었던 것 같다. 테러전술의 목적은 상대를 공포로 제압하는 것인데 지금 한국민은 오로지 분노로 떨고 있을 뿐이다.
아웅산 폭탄테러범 유일생존자 강민철 신병 확보하라"
"과거사진상조사위에서 강민철을 조사하여 진상규명하라"
북한은 1983년 10월 9일 동남아 국가 순방을 위해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암살하기 위해 테러 전문요원들로 하여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테러를 자행, 당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요인들과 수행기자 등 21명이 사망 (한국인 17명, 미얀마인 4명)하고 46명이 부상하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처참한 테러참변이 발생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서석준 부층리 , 이범석 외무장관, 함병춘 비서실장, 김동휘 상공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 등 고위인사가 순직하였음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당시 미얀마 관계당국의 수사결과 범인들은 북한의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의 특수부대 소속 장교 3명으로 확인, 이중 신기철 (대위)은 도주 중 미얀마 경찰에 의해 사살 되었으며 진 모(某) (소좌, 소령)와 강민철(대위)은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진 모(某)는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강민철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유일하게 생존, 23년이 지난 현재까지 복역 중에 있다. 제3국에서 한국의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수뇌부를 한꺼번에 제거하려 했던 동 사건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국가 주도의 테러사건이며, KAL기 폭파사건 등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대표적인 국제테러 전형으로 손꼽히고 있는 반인간적 잔혹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여태까지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범행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미얀마 당국은 동(同) 사건 직후 북한과 단교(83.11월)라는 극단적인 조치와 함께 1년 뒤인 84년 유엔총회에 공식 제출한 사건 조사결과에서 "이번 사건은 북한 당국의 명령에 따라 북한인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고 확인했음에도 북한 측은 "한국과 미얀마가 공모해 날조한 자작극"이라는 등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날조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지금까지도 그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어느덧 우리 사회도 이 사건에 대해 점차 잊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북한정권의 폭력성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으며, 심지어 북한체제의 인권탄압 사례 등을 적시하면 ´냉전적 사고´라거나 ´반민족적·반통일적´ 또는 ´색깔론´이니 하는 공세도 서슴지 않는 상황마저 목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3년 9월 23일 발매된 주간조선 1772호(10월 2일자)에 따르면, 상기 북한 공작원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민철(50, 양곤 북부 인세인 교도소 수감 중)은 미얀마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 중 “북한에 속았으며 석방된다면 제3국이 아닌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는 뜻을 수차례 밝힌 바 있다고 한다. 또한 미얀마 형법에 따르면 무기수가 최소 13년 6개월을 복역하면 행형실적에 따라 언제든지 석방될 수 있으며 현지 변호사는 "이미 20년 이상 복역하고 있는 강민철은 미얀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석방해도 아무 문제가 없으나 남북한 관계를 고려, 석방을 미루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관계로 강민철의 신병을 인도받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태 국회는 지난 2005년 5월 3일 여야 합의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 을 통과시켰고 동(同)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은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 인권유린, 폭력, 학살, 의문사」에 해당하는 ‘진실규명 범위내’ 사건에 명백히 해당할 뿐 아니라 23년 전 북한정권이 이 엄청난 테러를 자행한 목적이 한국을 불안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으려는 의도 하에서 행해졌다는 점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생존자 테러범인 강민철을 우리가 송환함으로써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 누가 지시했는지 등 관련 진상을 샅샅이 파헤쳐 이를 온 국민들에게 알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따라서 관계당국 에서는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역사적 산증인인 강민철의 신병을 신속히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함과 동시에 국정원 과거사 조사위원회에서 전대미문의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만약 정부가 테러범 강민철을 한국으로 송환시키지 않는 실질적 이유가 강민철을 받아들일 경우 김정일을 자극할까 두려워서라면 이는 세계의 조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001년
1962년 혜화동 성당에서 결혼식후
1972년 둘째 김승회의 돌 기념 가족사진
1972년 미국 유학시절 둘째 아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1977년 시어머니를 모시고 찍은 가족사진
1980년 집에서 남편과 함께
1982년서울대교정에서 남편과 함께
1987년 자택에서
1996년 Stanford University 김재익 추모 세미나실 개관 기념식후 가족과 함께
2001년 새해아침 손자와 함께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이순자 명예교수(79.3~2001.1)는 아직도 매년 10월 9일만 되면 그 날의 아픔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1983년 10월 9일. 이 교수의 부군이자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이었던 고 김재익 수석은 그 날은 평소와 조금 다르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집을 나섰다.
"승회, 아빠 없더라도 엄마하고 형 말씀 잘 듣고 있거라."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 대양주 공식방문 출국에 수행원 자격으로 대동한 김 수석이 가족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은 그렇게 짧디 짧았다. 한국시각으로 10월 9일 오전에 당도한 버마(현재의 미얀마) 의 성지인 아웅산 장군 묘소에 도열한 우리 수행원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김동휘 상공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 대사, 심상우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이기백 합참의장이 묘소 맨 앞줄에 서 있었다. 아직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지 않은 시점이었고, 수행원들은 대통령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옷매무새를 고치기 시작했다. 당시 주변을 경호중이던 천병득 청와대 경호계장이 버마측 고적대 앞에가서 영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버마인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였고, 대통령이 온다는 신호 로 잘못 해석, 팡파레를 울리기 시작했다.
천 계장은 그런 버마인의 태도에 곤혹스러하는 찰나에 갑자기 묘소 지붕이 붕 뜨더니 이내 가라앉으며 요란스러운 폭발음을 내기 시작했다.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우리 수행원들의 모습은 커다란 철근에 깔려 모습조차 보이지도 않았다. 폭탄이 묘소 천장에서 터져 피해자들의 모습은 참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가장 체구가 컸던 이범석 외무장관의 입에선 피가 솟구쳐 나왔고, 다른 수행원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 이기백 합참의장만이 유일하게 수행부관의 손에 의해 기적적으로 묘소 밖으로 구출되어져 중상에 그칠 수 있었다. 김재익 수석 또한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앞줄에 선 수행원들 보다는 훨씬 덜 참혹하게 세상을 등졌다.
이순자 교수는 라디오에서 이 소식을 처음 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첫 방문지인 버마에서 대통령 암살을 기도 한 폭탄테러가 발생했으며...수행원 전원이 사망한 것..."
그 자리에서 실신한 이 교수는 동생들의 품에 이끌려 겨우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과 국민학생 인 두 아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이역만리 땅에서의 남편의 죽음...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이 교수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 였다. 김 수석의 동서이자 이 교수의 제부인 한승주 교수(전 외무 장관)가 김 수석의 사망을 최종적으로 알려왔고,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이 교수는 절망의 눈물을 흘린다...
테러는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났으며 북한군의 진모, 강기철 등이 곧바로 체포되었다. 훗날에 와서 밝혀졌지만, 이는 김정일이 제3국가와의 외교를 시도한 전두환 정부에 앙심을 품고 저지른 비인간적 테러임에 백일하에 드러났다. 아직도 김정일은 이에 대해 어떠한 입장표명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최은희 신상옥 부부를 납북해서 사상교육을 시키던 중 우연치 않게 김정일이 이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고 최, 신 부부는 이것을 몰래 녹음해 와 폭로하였다.
순직한 인물들을 보면 면면히 최고의 엘리트 그룹들이었으며 만약 이들이 그렇게 비명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정치, 경제, 외교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서석준 부총리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엘리트였으며 전두환 대통령의 안정기조정책에 일조한 최고의 엘리트 였다. 김재익 수석과는 서울대 동기동창으로 서로 파트너십 이 돈독했다.
서석준(徐錫俊)
1938∼1983. 관료·행정인. 경상북도 성주출생.
성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해 1960년에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 2년간 AID장학금을 받아 미국 밴드빌트대학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해인 1959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1962년 3월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관료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주로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1967년 물가정책과장,
1969년 물가정책국장, 1973년 경제기획국장, 1974년 차관보, 1977년 차관(1980년에 다시 차관)을 역임하는 등
중요한 직위를 두루 거쳤다.그러면서 우리나라 물가정책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종래의 개별품목을 대상으로 가격을 안정시키는 물가정책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종합적인 물가수급대책으로 물가안정을 꾀하는 합리적인 물가정책을 도입하였다.
이밖에도 1973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부단장, 1979년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1980∼1982년 상공부장관, 1982년 한국개발연구원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상공부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을 마무리하고,
수출 200억달러의 실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1983년 잠시 미국 하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에 가 있다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발탁되어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부총리가 되었다.
취임한 지 3개월 만인 1983년 10월, 당시의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을 수행하여 17박18일간의
서남아시아·태평양 6개국 순방길에 나섰다가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시내 아웅산묘소에서
북한의 공작원이 장치한 폭탄이 폭발하여 순국하였다.
그동안 홍조근정훈장(紅條勤政勳章), 자유중국 일등경성훈장(一等景星勳章),
벨기에 대십자훈장(大十字勳章), 룩셈부르크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이범석 외무장관은 선이 굵고 억센 외교관료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를 맡으면서 세간에 이름을 알렸고, 전두환 대통령 또한 그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사 통일원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에 중용한 외교 엘리트였다.
국제신사 이범석 장관… 재기 넘치는 화술의 대가
12대 주한 미 대사 리처드 워커(Richard L. Walker 81.8~86.7)
역대 주한 미국대사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4일 주한대사로 지명한 토머스 허바드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는 정부 수립후
한국에 부임하는 제17대 주한 미대사가 된다.
49년 초대 주한미대사로 부임해 6.25 전쟁을 겪은 존 무초 대사로부터 지난 2월 이임한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까지 그동안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인사는 총 16명.
물론 이임 등에 따른 공백기간에 `대사대리'직을 맡았던 인물까지 합치면 이보다는 많지만 정식 대사로 부임한 인사는 허바드 지명자가 17번째가 된다.
주한미대사는 6.25 전쟁, 4.19, 5.16혁명, 유신, 10.26과 12.12 사태 등 우리 현대사의 이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온게 사실이다.
4.19 혁명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을 두차례 방문해 하야를 권유했다는 월터 매카나기(5대) 전 대사의 일화는 유명하기도 하다.
과거 한때는 주한미대사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어렵지 않게 면담하기도 했지만 최근들어서는 미 대사의 역할도 점차 실무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허바드 대사도 전형적인 외무관료 출신.
거물급 정치인이 주로 임명돼온 주일대사와는 달리 그동안 주한대사는 관료, 직업외교관, 학자 등 다양한 인사들이 임명돼왔다.
80년대 이후 주한 미대사의 경력을 살펴보면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시절 대사를 지냈던 제임스 릴리(13대), 도널드 그레그(14대) 대사는 중앙정보국(CIA) 출신이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들어서는 순수 학자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제임스 레이니(15대) 전 에모리대 총장이 임명됐다.
이어 지난 2월 이임한 스티븐 보즈워스(16대) 전 대사는 필리핀, 튀니지 대사를 역임한 국무부 관료 출신으로, 9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대북경수로 공급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뤄왔다.
역대 주한 미 대사
▲1대 존 무초(John J. Muccio) = 49.4-52.11(이하 재임기간)
▲2대 엘리스 브리그스(Ellis O. Briggs) = 52.11-55.5
▲3대 윌리엄 레이시(William S.P. Lacy) = 55.5- 56.7
▲4대 월터 다울링(Walter C. Dowling) = 56.7-59.7
▲5대 월터 매카나기(Walter P. McCaunaghy) = 59.12-61.4
▲6대 새뮤얼 버거(Samuel D. Berger) = 61.6-64.7
▲7대 윈드롭 브라운(Winthrop G. Brown) = 64.8-67.5
▲8대 윌리엄 포터(William J. Porter) = 67.8-71.8
▲9대 필립 하비브(Philip C. Habib) = 71.10-74.8
▲10대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L. Sneider) = 74.9- 78.6
▲11대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 78.7-81.6
▲12대 리처드 워커(Richard L. Walker) = 81.8-86.7
▲13대 제임스 릴리(James Lilley) = 86.11-88.1
▲14대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 89.9-93.2
▲15대 제임스 레이니(James T. Laney) = 93.11-97.2
▲16대 스티븐 보즈워스(Stephen Bosworth) = 97.12-2001.2
▲17대 토머스 허바드 지명 = 2001.5
87년 1월 주한 미 대사 임기를 무사히 마친 나는 아내 세니와 함께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임무완수 보고를 한 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서울에서 가재도구 등 이삿짐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 무렵 이범석 장관의 부인 이정숙 여사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고, 우리는 1월19일 컬럼비아 공항으로 그녀를 마중 나갔다. 당시 우리 집은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썰렁했지만 그녀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았다.
다음날인 1월20일 아침 마침내 이삿짐을 실은 차량이 도착했다. 우리는 이 여사에게 이삿짐 목록을 점검하는 일은 물론 가재도구의 배치와 집안정리 등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우리 부부가 이런 부탁을 한 것 자체가 이 여사 사이에 특별한 우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실내장식에 대해 그녀와 아내 세니는 서로 뜻이 잘 통하는 사이였다. 우리집 현관 계단에서 이삿짐 목록을 체크하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나는 이범석씨를 66년 처음 만났다. 그는 첫 만남 때부터 강한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당시 그의 직함은 외무부 의전국 사무국장이었다. 그때 외무부를 방문한 나는 그와 만날 기회를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함께했다. 나는 이 박사를 「범」(Bum)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딕시」(워커 전 대사 애칭)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로 죽이 맞았다. 나는 이내 그가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또 과장됨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능력을 타고 났다. 영어에도 능통했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에는 지성이 번득였다. 나같이 오랜 세월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본 사람들은 흔히 강의도중 학생들을 죽 훑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눈빛만 봐도 누가 학생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씨는 확실히 보통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는 70년대 초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으며, 남북 적십자회담의 남측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이 대표와 그 부인은 고향이 평양이었다. 서울로 유학 오기 전 평양고보를 졸업했던 그는 46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72년 8월 대한적십자사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관리들은 이(고)모를 포함한 친척들을 동원해 그를 매수하려고 했다. 이는 명백히 그를 포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내게 북한 관리들의 서투른 공작과 자신을 협박하려고 친척들을 이용한 수법에 대해 말했다.
이듬해인 73년에는 북한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들은 방문기간 동안 박 정권 아래에서 10여년 동안 진행돼 온 서울의 발전상과 변화, 근대화를 관찰하는 잊지 못할 기억들을 갖게 됐다. 이때 벌어진 북한 대표단과 이범석 대표간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만큼 인구에 회자됐다.
북한측 대표는 판문점에서부터 이 수석대표와 같은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북측대표는 서울시내 수많은 차량과 대한민국의 생동감 넘치는 현대화의 현장들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본 게 분명했다.
이는 대부분 거리가 텅 비어 있고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도 드문 북한의 실정과는 극명히 대비됐다. 그렇지만 북한정권은 평양에 손님들이 도착할 때면 방문객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를 마련하는 조직력을 과시했다. 서울 시민들을 북한의 경우처럼 동원된 사람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북한 대표단장은 이범석 대표에게 『대단하신 분들이군요. 우리에게 발전상을 보여주려는 뜻은 좋지만, 전국에 있는 차량을 여기 다 가져다 놨군요』라고 했다.
이범석 대표는 즉각 『네... 차는 기름만 넣으면 굴러오니까 참 가져다 놓기 쉬웠는데, 빌딩들은 너무 무거워서 가져다 놓는데 애를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운전사와 그 옆좌석에 있던 경호요원도 이들의 대화내용을 들고 매우 재미있어 했다. 이 이야기는 이내 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83년 서울을 방문한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장관이 이범석 장관과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나를 포함한 미국 대표단과 한국 대표단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이장관의 열렬한 팬이 된 슐츠 장관은 그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이 장관은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국 대표단의 두 사람이 즉각 『맞습니다, 그건 사실이예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말을 듣고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81년 여름 내가 미 대사 신임장을 제출할 당시 이범석씨는 통일원 장관이었다. 69년 통일원 창설 무렵부터 통일원 최초의 외국 고문을 지낸 나는 이 부처의 역할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이 장관을 방문했고, 양쪽 가족들도 곧 만났다.
그는 통일원 장관에서 물러난 뒤 청와대로 자리를 옮겨 몇달동안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리고 82년 5월의 개각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그를 외무장관에 임명했고 이 덕분에 우리 부부는 이범석 장관부부와 더 잦은 만남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82년 9월20일 외무장관 공관에서 열린 만찬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범석 장관과 그의 아내의 상징처럼 굳어진 몇몇 이미지들은 내 가슴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다. 정원이 새롭게 단장됐던 공관은 언제나 개방돼 있었다.
공관이 산뜻하게 변신한것은 이범석씨가 6년부터 80년까지 4년동안이나 인도주재 대사를 지낸 경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칼럼니스트들은 정부가 이범석씨를 인도로 보낸 것은 시간낭비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인도 대사직을 맡기에는 너무 똑똑하고 재능도 많았다. 그는 인도대사 시절 그곳 북한 대표들과 접촉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고, 대화채널을 유지했다.
공관에서 나눈 대화는 외교적 관심사 같은 딱딱한 내용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자유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청와대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이 장관은 청와대에서도 4∼5개월 정도 비서실장을 지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를 잘 알았다.
9월20일의 만찬에서는 주한 아룬다티 고스 인도 대사를 만났다. 그녀는 매력이 넘쳤으며 성격이 무척 쾌활했다. 나와 아내는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매료됐다. 이 장관 부부는 고스 대사와 뉴델리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다. 이 장관 부부는 특히 여성이 인도처럼 큰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실에 대해 대단히 흡족해했다.
이 장관이 이날 만찬에서 부인을 위한 건배를 제의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남편들이 대사관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내조하고 있는 많은 외교관 부인들에게도 건배를 제의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고스 대사와 같은 여성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건배를 계기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와 문화, 여성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장관 부인은 여성에게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또 제대로 평가하지도 않는 한국적 풍토는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장관도 공감을 표시했다.
이후에도 우리 네 명은 수시로 한국 여성이 처한 문제들을 얘기했다. 나는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이경숙 여사가 외무위 의원이 된데 대해 항상 자부심을 가졌다.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막중한 자리를 맡은 선구적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지금 숙명여대 총장을 맡고 있다. 이범석 장관 부부와 잦은 접촉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부부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다.
우리 네 사람은 82년 10월 부산 유엔 묘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다. 이번 행사에는 한국전 참전 장병들을 둔 다른 유엔 회원국 대표들도 참석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이장관의 옆 좌석에 앉았고 세니와 여사도 이 장관 부인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모든 행사를 마친 뒤에도 이 장관 부부의 호텔방에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2월에는 주말을 이용해 제주도로 놀러간 적도 있다. 그 여행은 정말 오붓한 가족 나들이였다. 그 즈음에는 우리 네 사람이 자식들과 그들의 미래와 기대,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 등을 털어놓고 의논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이 장관과 나는 당시 한미 관계를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변화들의 의미를 짚어보기도 했다. 우리는 전두환 정권 반대 세력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던 반미 감정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다.
이 장관은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진정한 친구였고, 한미 관계 발전을 열렬히 기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외무장관으로서 필요한 초연함은 잃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신념과 믿음,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해 공감했다.
나는 그가 대통령을 수행하고 캐나다와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유엔을 들를 때, 아니면 외무장관 자격으로 순방 때, 그리고 다른 볼 일로 외국에 갈 때마다 늘 공항까지 달려갔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외국 방문길에 오를 경우 서울의 모든 외교관들이 대통령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야 했다. 이 장관은 그러나 내게 농담조로 『딕시, 나는 당신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가 돌아올 때도 공항에서 그를 맞이했다. 한국 언론과 친구들도 우리 두 사람이 보통으로 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정도였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게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우리의 돈독한 관계는 83년 소련 전투기에 의해 대한항공(KAL) 007편이 격추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빛을 발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우리는 한미 동맹 30주년을 기념하는 한 학술회의에서 헤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소련 전투기가 영공을 침범하지 않은 한국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뉴스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전해졌다. 이 여객기에는 미국인 탑승객도 많았다.
이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3년 10월9일에는 미얀마 랭군 폭탄 테러사건이 벌어졌다. 이 테러로 세계는 유능한 외교관이자 훌륭한 국제 신사(이 장관)를 잃게 됐고, 한국 국민들도 유능한 최상급 공직자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물론 나도 정말 소중했던 친구들을 여의는 쓰라린 고통을 당했다. 나와 아내 세니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세니는 추도식 이후에도 꾸준하게 이 장관 부인과 그 가족을 방문했다. 이 장관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랑은 우리 부부도 존중할 만큼 각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느 미국인, 또는 한국인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사려 깊고 조그만 제스처일지라도 언제든 부인에게 애정을 표했다. 이처럼 금슬이 좋았던 이 장관 부부는 정말 천생연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를 추도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나는 지금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 장관 가족을 만나고 있다. 이 장관 부인도 미국에 있는 자녀를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우리 집에 들르곤 했다.
나는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없다. 공식초청을 받은 적도 있고 한번은 방북하는 미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방문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 생각엔 북한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랭군 테러를 자행해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은 앞으로도 세련되고 각별한 나의 친구인 이범석장관 같은 정치인들을 계속 배출해내는 한 미래에 대해 자신을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김동휘 장관은 정통 외무관료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균형 감각과 발군의 영어솜씨로 전두환 대통령의 신임이 돈독 했던 인물이었다. 비록 상공분야에는 문외한이었으나, 전 대통령이 통상교섭에 있어서의 제 1조건은 영어실력이라 며 그를 상공장관에 중용하였다.
서상철 장관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상목 전 국회의원의 친형으로 두 형제가 모두 수재라는 평판을 들었다. 서 장관 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내각에 차출되었고, 전 대통 령은 그의 인품을 매우 높이샀었다.
함병춘 비서실장은 함태영 전 부통령의 아들로 미국 노스 웨스턴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예일대 에서 교수를 할 정도로 국제감각이 특출난 학자이자 엘리트 관료였다. 박 대통령 시절엔 대통령 정치외교특보와 최연소 주미대사 를 맡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이었으며, 전두환의 5공 정부 가 출범 한 후 당시로서는 갈 수 없었던 소련에 몰래 잠입 해 북한 몰래 공산권 국가와의 채널을 연 주역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Time》이 '1980년대를 움직일 세계의 100 명 중 한 사람'으로 뽑힌 적이 있을만큼 국제적 명성이 드높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계철 대사는 유엔대표부 대사를 지낸 인물로 초대 버마 대사를 맡아 비동맹권 외교에 주역으로 뛰어난 균형감각의 소유자였다.
심상우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은 개그맨 심현섭씨의 아버지로 온화한 인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던 사람으로 기억되고있다. 심현섭씨도 사석에서 '나는 선친의 유머감각 을 물려 받았다"고 말할 정도이다.
김재익 수석은 서울대 외교학과와 미국 서부의 최고 명문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천재로 미국 유수의 경제학자들은 김재익을 가리켜 "동방의 천재"라 경탄 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그를 자국의 학자로 수입하려고 애썼다. 부인 이순자 교수는 1992년 정초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에 새해인사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어르신, 택시를 타고 오는데 택시운전기사가 요즘 경제가 너무 안 좋다며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차라리 경제기획원 장관에 전두환씨를 앉히자 이런 말까지 하더라고요. 5공이 다른건 몰라도 물가 하나는 확실히 잡지 않았느냐? 라는 말도 덧붙이면서요." "에이-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세요. 김재익이라도 살아 있어서 비서실장이라도 해주면 모를까, 나 혼자 어떻게 되겠어요" 그만큼 전두환-김재익의 만남은 유비와 제갈공명의 만남 만큼 극적인 것이었다. 전두환은 그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과 함께 경제에 전권을 쥐어주었다.
(2007.10.8 조갑제닷컴)
'아웅산' 순직 김재익 前경제수석 추모식
1980년대 한국경제의 밑그림을 그린 김재익(金在益)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의타계 20주기를 기리는 추모식 및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20주기추모집’ 출판기념식이 6일 오후6시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렸다.
42세의 나이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발탁된 김 전 수석은 당시 우리 경제의 고질병이었던 연 15%의 고 인플레이션을 잡았을 뿐 아니라 저성장과노사 갈등, 유가 불안 등의 어려움을 딛고 우리 경제를 견실한 성장 기반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그를 깊이 신임했다.
특히 김 전 수석은 개발독재의 유산이 짙게 깔려 있던 당시에는 혁명적발상이나 다름없었던 ‘안정, 자율, 개방’의 경제철학을 실천한 ‘용기있는’ 관료였다는 것이 주위의 회고다. 국적 항공사의 경쟁 체제를 도입한 것도 그의 공이다. 김 전 수석은 그러나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테러사건’으로 안타깝게 순직했다.
이번에 나온 회고집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사공일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재무부 장관), 김기환 골드만삭스 국제고문 등고인과 함께 일했던 관료 및 학자들과 부인 이순자 전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등 9명이 고인과의 일화 및 고인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공동저술하고 삼성경제연구소가 출간했다.
남 전 총리는 머리말에서 “정치는 싸움판이고, 노조는 타협보다 투쟁을내세우며, 기업은 실의에 빠져 있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에서뚜렷한 리더십까지 없으니 공무원들은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며“김재익 같은 공직자가 지금 청와대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