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陽향토사탐방 -16 - 감천낙안오씨종택(감호헌)
*명 칭 : 낙안오씨종택(감호헌)(樂安吳氏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1리 379번지
*건축시기 : 1800년대
*소 유 자 : 낙안오씨(樂安吳氏) 종중(宗中)
<낙안오씨樂安吳氏 문중이야기>
시조 오사룡(吳士龍)은 도시조 오첨의 32세손으로 고려 때 삼사좌윤을 지냈다. 그는 북쪽의 합단과 일본의 침입을 토벌할 때
김방겸과 함께 참전했다. 당시 포로를 원제에게 돌려보내고 금비옥대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낙안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낙안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시조의 묘소는 전북 완주군 봉림산에 있다. 을축보(1985년)에 의하면
16개파로 구성되어 있다.
경북 영양에는 국헌(菊軒) 수눌파(受訥派)가 분포하고 있다.
8세손 오척지(吳陟之)가 경연관을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오척지의 아들 오백안(吳伯顔)은 이조참판,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손자 오원로는 통훈대부에 올라 광주목의 교수를 지냈다.
국헌 오수눌(1565-1648)은 오시준(吳時俊,1527-1613)의 둘째 아들로, 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영해부사의 창의에 가담하여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수십 명을
참수하였다. 문집『국헌실기』가 있다. 관련 유적으로 연소정(蓮沼亭)이 영양읍 감천1리 394-1번지에 있다. 이곳은 칠원현감을
지낸 오시준이 관직을 마치고 돌아와 소요하던 정자이다.
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1리 835번지에 있는 화수재(花樹齋)는 낙안오씨 감천 입향 시조인 오원로(吳元老)를 기리기 위해 1687년
에 건립한 재실이다.
오일도 생가 뒤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약 5백여 년 동안 화수촌을 이루고 있다.
송산재(松山齋)는 영양읍 감천1리 768번지에 있다.
정재(精齋) 오병훈(吳秉勳)은 저서로 정재유고(精齋遺稿)가 있다. 간재의 제자인 그는 1870년(고종 7 경오) 3월 29일 전북 완주군
화산면 화평리에서 태어나 1946년(병술) 3월 18일 작고했다. 서문은 구영건, 발문은 심의원, 행장은 오형선, 묘갈명은 심진원이
썼다. 모두 6권을 한 책으로 묶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1년이 지난 1976년 3월 주변의 143인이 출간비를 모아 만들어낸 책이다.
스승인 간재에게 올린 편지와 질문 내용도 많다.
항일시인 오희병(吳熙秉,1901-1946)은 영양읍 감천동에서 천석 거부였던 아버지 오익휴(吳益休)와 어머니 의흥박씨 사이에 태어
났다. 호는 일도(一島), 서예가 오희태의 동생이다. 생가(生家)는 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에 있으며 그의 조부인 오시동
(吳時東)이 1864년(고종 1)에 건립하였다. 오일도는 1925년 문예월간지인『조선문단』에 처녀작인 ‘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
하여 민족의 한을 달랜 시인이다. 14세까지 고을의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한 뒤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않았다. 일본 동경의 리쿄대학 철학부를 1929년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
(덕성여중 전신)에서 무보수 교수로 근무하던 중에 맏형 오희태로부터 사재를 얻어 1935년 2월에 시 전문잡지인『시원(詩苑)』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발행이 중단되었다. 오일도는 이헌구, 김광섭 등과 가까이 지냈고, 『을해명시선
(乙亥名詩選)』(1936년)과 시인 조지훈의 형 조동진(趙東振)의 유고시집『세림시집』(1938년)을 출판하였다.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자 1942년에 낙향하여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집필하면서 칩거하였다. 광복 직후 바로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
하면서 『시원』의 복간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모사고 그 이듬해 2월에 타계했다.
서예가 오희태(吳熙台,1888-1966)는 오희병의 맏형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개화기 교육에 힘쓴 선구자이다. 고향에서
사립 감호서숙(鑑湖書塾)을 세워 지방 청년교육에 공헌했다. 일제강점기에 도평의원과 연초조합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로 거처를
옮겨 만년에 오세창(吳世昌)과 더불어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또 다른 서예가(書藝家) 오병용(吳秉用)이 있다. 그의 묘비문에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에서 3년 동안 종이 만장을 썼다."고
했다.'해서'와 '초서'는 한석봉(한호)체이고 잠두마제(蠶頭馬蹄) 필법이라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글씨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오빈(吳賓) : 문과(文科) 명종4년(1549) 식년시 병과(丙科), 오수민(吳壽民, 1719 己亥生) : 문과(文科)
영조41년(1765) 식년시 병과(丙科), 오백안(吳伯顔, 1719 己亥生) : 문과(文科) 세조11년(1465) 춘당대시 병과(丙科), 오중남
(吳仲男, 1588 戊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오봉길(吳奉吉,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오언남(吳彦男, 1608 戊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오율(1601 辛丑生) : 무과(武科)
인조14년(1636) 별시 병과(丙科), 오두상(吳斗相, 1660 庚子生) : 무과(武科) 숙종12년(1686) 별시 병과(丙科), 오수겸(吳受謙,
1555 乙卯生) : 무과(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병과(丙科), 오담희(吳淡希, 1576 丙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62명이 있다. 문과 3명, 무과 8명, 사마시 9명, 역과 37명, 의과 2명, 음양과 3명이다.
항렬자는 15世 한(漢), 16世 표(標) 림(林), 17世 환(煥), 18世 수(壽), 19世 흠(欽), 20世 동(東), 21世 휴(休), 22世 희(熙),
23世 목(睦), 24世 현(鉉), 25世 택(澤) 호(浩), 26世 상(相) 수(秀), 27世 찬(燦) 열(烈)이다. 세(世)와 대(代)는 다른 것으로
세(世)에서 1을 뺀 값이 대(代)가 된다. 예를 들면 58세손(世孫)의 경우 57대손(代孫)이다.
본관 낙안(樂安)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樂安面)·외서면(外西面)과 보성군(寶城郡) 벌교읍(筏橋邑) 일대를 통칭하던 지명
이다. 백제 때에는 분사군(分沙郡: 分嵯郡·夫沙郡·波知成)이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분차주(分嵯州)를 설치하고
귀차(貴且)·수원(首原)·고서(皐西)·군지(軍支)를 영현으로 두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분령군(分嶺郡)이라 했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낙안군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나주(羅州)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낙안현으로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으며, 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부사(浮?)·낙천(洛川)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낙안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낙안군이 되었다. 1908년(융희 2)에 군면 폐합
이 실시되어 낙안군이 폐지되고, 내서·외서·동상·동하·초상·초하·읍내 등의 면은 순천군으로, 남상·남하·고상·고하 등의 면은
보성군으로 나누어 편입되었다.
낙안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낙안김씨(樂安金氏), 낙안오씨(樂安吳氏)가 있다.
집성촌은 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동, 경북 영양군 영양읍 삼지리,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등이다.
낙안오씨종택(樂安吳氏宗宅)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1리 379번지에 있다. 오시준(吳時俊)의 종택으로 문중에서
1800년대에 건립한 건물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낙안오씨는 1985년에는 총 1,774가구 7,410명, 2000년에는 총 2,787가구 9,13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1천여 가구, 2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656명, 부산 298명,
대구 174명, 인천 223명, 경기 551명, 강원 74명, 충북 718명, 충남 394명, 전북 1,102명, 전남 1,507명, 경북 585명, 경남 101명,
제주 27명이다. 전남과 전북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2,010명, 부산 367명, 대구 241명,
인천 447명, 광주 946명, 대전 307명, 울산 75명, 경기 1,387명, 강원 80명, 충북 788명, 충남 182명, 전북 1,012명, 전남 598명,
경북 480명, 경남 160명, 제주 55명이다. 서울, 경기, 전북, 광주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종택건축 이야기>
낙안오씨종택은 낙안(樂安)인 오시준(吳時俊)의 종택으로 문중에서 1800년대에 건립한 건물이다.
<종택건축 특징>
낙안오씨종택은 ㄷ자형의 정침과 일자형 고방채가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불천위 사당인 충효사(忠孝祠)는 종택과
동떨어져 토석담장 안에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정침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종택건축 구성>
낙안오씨종택은 정침과 고방채, 충효사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콘리트로 50cm의 가단을 만들고 사각형의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다.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5량 가구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전면 1칸은 퇴칸을 두었다. 동쪽 첫 번째 칸은 안채로 통하는 진입문이다. 어칸 2칸에는 사분합문과
미닫이문을 2중으로 설치하였고, 서쪽 1칸에는 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서쪽편 어칸에 ‘감호헌(鑑湖軒)’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는 좌측 2칸은 부엌으로 통칸이다. 대청은 따로 없고, 부엌에서 오른쪽으로 방과 고방, 건넌방이 차례대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얹은 고방채가 위치한다. 그래서 정침과 고방채가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고방채와 정침은 판벽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진입문과 접하고 있는 판벽에는 독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판문을 만들었다.
정침과 고방채는 기와를 얹은 토석담장이 경사진 지형으로 인해 계단식 모양으로 정면을 제외한 3면에 둘러 있다.
정침을 나와서 우회하여 토석담장을 따라 20m가량 걸어가면 오수눌(吳受訥) 내외를 모신 불천위사당인 충효사(忠孝祠)가 있다.
충효사로 진입하는 사주문은 1칸 규모로 자연석 주춧돌에 사각형의 기둥을 세우고, 사당 쪽으로 문을 열수 있도록 2짝의 판문을
달았다. 문은 판벽이 없고, 하인방 아래에는 석회와 돌을 섞어서 칸을 메웠다. 맞배지붕을 얹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맞배지붕을 얹고, 지붕의 양 옆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자연석 돌을 2층으로
40cm가량 쌓고 그 위에 석회로 마무리 하였다. 맨 앞줄의 툇기둥은 원형으로 깎은 주춧돌에 원형 기둥을 세웠고, 사당 본 건물은
사각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어칸에만 두 짝의 문을 달고, 양쪽에는 1짝의 문을 달았다. 각 칸마다 장석으로
계단을 만들었는데, 어칸에는 2단, 나머지는 1단으로 만들고, 어칸과 진입문은 석회와 돌을 섞어서 신도(神道)를 표시하였다.
사당건물의 측면에는 상인방과 중인방 사이는 흙벽을 바르고, 중인방과 하인방 사이는 벽돌로 꾸몄다.
사당과 진입문은 정침과 별도로 기와를 얹은 토석담장이 사각형으로 두르고 있다.
<현판 >
-감호헌(鑑湖軒)
정침 사랑채의 어칸에 걸려 있다.
-충효사(忠孝祠)
불천위 사당의 이름으로, 사당의 어칸에 걸려 있다.
< 영양읍 감천1리 >
- 영양읍 감천리는 뒷산이 청기리와 연접해 있고, 31번 국도에서 맞은 편 산기슭에 자리한다. 큰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기
때문에 감들내 혹은 감내,감천(甘川)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영양읍 읍내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남면의
지평동과 하풍동을 합쳐 감천동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오일도 시인의 시비(詩碑)와 범바위 위에 있는 폭포, 근처의 절벽과 측백나무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오일도
시비는 국도 앞동산에 마련되어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폭포는 마을의 서편 산 위, 백여 척 되는 범바위
안에 있다. 또한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바위 절벽 주위에는 측백나무가 무리지어 숲을 형성하고 있다. 이 측백나무는 절벽의
바위틈에 신기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절벽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5개의 자연 마을이 감천리 한 동으로 묶여 있다.
가짓들,지평골,지평(芝坪)은 토질이 비옥하고 살기 좋아 가짓들이라 불린다. 한양조씨 문중의 조규(趙?)가 입암면 연당리
임천에서 이곳으로 집을 옮겨와 가짓들을 사서 집과 묘우를 세워 삼수당(三秀堂)이라고 하였다. 조규가 삼수당을 지은 뒤부터
마을 이름을 지평이라 불렀다고 한다.
감내,감들내,동곡(桐谷),지곡(地谷)은 큰 시내가 마을 앞을 감돌아 흐르는 모양에서 이름을 땄다. 처음에는 지곡이라 불렀는데
4백년 전 오시준(吳時俊, 1527~1613)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동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 산기슭에 맛이 단 물이 솟는다고
하여 감천(甘泉)이라고 부르다가 감천(甘川)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괴박골,괘벽(掛壁)은 바위가 벽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감천 1리의 뒤쪽 골짜기로, 현재 대여섯 가구가 흩어져서 살고 있다.
이곳에 깨밭이 많아서 ‘깨’가 ‘개’나 ‘괘’로 비슷하게 발음한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진마골(陳馬谷),진막곡(鎭幕谷),김막곡(金幕谷)은 마을 입구 오른쪽 능선에 있는 산성에서 마을명이 유래한다.
하풍(河豊),합풍(合風)은 가짓들 아래쪽에 있고, 입암면과 경계를 이룬다.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바람도 이곳에 머물렀다
가는 좋은 산세를 지녀 합풍이라도 한다. 높은 산기슭에 자리하면서 샘이 풍부하여 하풍으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