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8장 9-15, 21장 5-6절
설교제목 : 쓴웃음을 넘어 찐웃음으로
웃음에 대한 단상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많은 비를 뿌린 후 더위가 꺾여서 비로소 가을을 체감하게 됩니다. 나라 안팎을 살펴보면 한숨짓게 하는 일들이 많은 듯합니다. 저명한 원로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염려하며 시국선언을 하였습니다. 비정상을 정상이라 우긴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EBS에서 방영된 지식채널e에서 웃음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웃음이 지닌 효과를 각종 실험을 통하여 보고하였습니다. 크게 웃고 난 후, 혈액을 체취하여 검사했을 때, 병균을 막는 항체가 200배 증가했습니다. 웃음을 통해 질병의 면역력과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제 나름대로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웃는 순간, 콤플렉스의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듯 합니다. 미국 불 메모리얼 병원의 보고에 따르면, 하루에 15초 이상 웃으면, 수명이 이틀 더 연장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10초 이상, 하루에 10번을 웃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 들수록 웃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 의과대학의 보고에 의하면 어린이는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 반면에, 어른들은 15-20번 정도 겨우 웃을까 말까 합니다. 하루에 한번도 웃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울증이 생기면, 대표적으로 무정서와 무기력이 주증상으로 발현되는데, 이는 어떤 감정과 맛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웃음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좋은 유익을 줄 수 있는지 일러주는 연구결과들입니다. 때로 지키고 고단해도 우리의 삶이 웃음과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웃음을 잃은 사라
낯선 세 방문객이 아브라함을 찾아왔고, 아브라함은 신성한 방문자인 그들을 극진히 환대합니다. 낯선 것들을 환대할 때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고, 막혔던 인생길이 펼쳐지고, 기대할 수 없었던 축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시중을 들고 있을 때 세 사람은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가 어디에 있는지 찾습니다. 그리고 그 세 방문객은 아브라함에 약속합니다. “내년 이맘 때에 너를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장막 뒤에서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18:12)”
사라는 속으로 주님의 약속을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와 자아의 생각으로 판단하며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내비쳤던 쓴웃음이었습니다. 사실 사라는 웃음과 기쁨을 잃어버린 삶을 산 여인이었습니다. 사라의 인생을 뒤집어 보면, 나이 90이 넘도록 아이를 잉태하지 못했던 불임여성이었고, 목축업으로 끝없이 떠도는 남편을 따라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비겁하게 행동하는 남편 아브라함의 요청 때문에 애굽왕의 아내가 될 뻔했고, 한 번도 모자라 또다시 아비멜렉 왕의 여자가 되는 수모를 당할 뻔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수치스러움에 자신의 몸종을 스스로 남편의 품에 안겨줘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자 그 몸종으로부터 멸시를 받아야 했던 한이 많은 여인이 바로 사라였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었어도, 삶은 여전이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8장 12절의 사라의 고백은 자신의 삶엔 이젠 더 이상 즐거움도, 기쁨도, 웃음도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나이 90에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사라에게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불임은 더 이상 웃을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근원적 아픔이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아이를 잉태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아이는 미래이자 가능성, 잠재력, 희망을 가리킵니다. 모든 삶의 가능성이 차단되고 더 이상 미래를 전망할 수 없는 상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태가 불임입니다. 살다보면 미래의 불확실함이 내 가슴을 갑자기 조여올 때가 있습니다. 삶의 가능성과 희망에 대하여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을 만큼 지치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의 미래와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지 못할 때, 쓴웃음을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살아있음을 경축하며 노래할 수가 없게 됩니다.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창조력을 잃은 삶을 뜻합니다. 불임의 상황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런 삶의 정황은 때때로 경험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삶이 체바퀴 돌아가듯 무의미한 반복 운동이라고 느껴질 때, 삶이 무료하고 따분하고 권태로워질 때, 무언가 생산적인 삶을 살지 못할 때, 매너리즘에 빠져 자꾸 고집스러워지고 불평이 늘어갈 때가 바로 창조력을 잃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불임의 상태로 쓴웃음, 헛웃음, 비웃음을 지으며 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내 삶의 미래와 가능성을 노래할 수 없는 사라와 같은 모습이라면, 생산적이지 못하고,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라와 같은 모습이라면, 우리 안에 기쁨과 웃음을 뜻하는 이삭을 다시 잉태하는 삶의 여정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찐웃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어떻게 사라가 진정으로 찐웃음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사라로 하여금 웃음을 찾게 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분명하게 일러주는 본문이 있습니다. 21장 1-2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대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니’, ‘약속하신 바로 그때가 되니’라고 하시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정개정판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을 세 번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아들을 낳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임의 상황을 임신으로 바꾸시고, 새로운 생명력을 회복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수 차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능성에 대하여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약속하신대로 사라를 방문하여 돌보셨고, 사라를 위해 일하시고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21장 6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웃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쓴웃음을 찐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미래의 불확실함, 삶의 곤고함에 허덕일 때,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분이 세상의 권력자나 나의 실력과 힘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라의 일생을 통하여 너무나 분명한 진리를 일러줍니다. 진정으로 저와 여러분을 웃게 하실 분이 누구인지를 힘주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에 새 희망을 주시며 진정으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사야 63장 3절에 선포됩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는 불임의 상태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내가 참으로 너를 웃게 하고 진정한 기쁨을 주시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희망과 미래의 가능성이 사라진 사라를 웃게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굳게 붙들고 우리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
사라가 웃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21:6, 개역개정)”
사라가 진정으로 웃게 되자 듣는 사람들이 웃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라를 통하여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 웃음의 꽃이 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로 웃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로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웃음을 회복하고, 기쁨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웃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살아나면 내 주위가 잔치의 삶이 됩니다.
마포에 가면 동방정교회 채플이 있습니다. 거기에 교육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런 푯말이 서 있습니다.
“평화를 찾으라 그러면 내 주위에 수천의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Find the peace, and thousands around you will be saved.”
내가 변화되었을 때 내 주위가 사랑과 평화, 구원의 역사로 놀랍게 물들어 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웃음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헛웃음 짓게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진정한 함박웃음과 기쁨의 소리를 찾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질주의와 과학만능주의가 숭상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은 설자리를 잃고 웃음을 상실했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발전하고 편리해졌지만, 깊은 우울과 불안, 강박이 삶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찐웃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신성한 성품인 웃음을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지난 주 어떤 분의 꿈에 아이들이 1층 베란다를 통하여 밖으로 나왔고, 놀고 떠드는 내용이었습니다. 정해진 문이 아닐지라도 아이처럼 웃고 떠들고 즐겁게 노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웃으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의 중요한 단면을 시사하는 꿈이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이것이 집단적 체계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마음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찐웃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진정한 웃음이 회복되어 내 삶의 주변이 진정한 웃음으로 잔치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