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교동에 있는 학인당(學忍堂)은 궁궐의 건축양식을 민간주택에 적용한 67평의 대형 한옥이다. 서울 북촌 윤보선 고택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가대형한옥으로 알려져 있다. 학인당은 수원백씨 인제공파의 종택이다.
전주에 학인당의 수원백씨가 터를 잡은 것은 조선 숙종 때인 1700년대다. 백시흥(白時興)이 전주최씨 부인을 맞이하여 처가인 전주로 이주하면서 부터다. 백시흥의 후손들은 200여년 동안 6대에 걸쳐 전주에서 자리를 잡았다.
후손 백진수는 경복궁 중건 때 거금을 헌납하면서 고종으로부터 대저택을 지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 뒤 백진수의 6남 백낙중(1883-1929)은 1905년 장자 백남혁(1905-1981)의 출생을 기념하여 저택을 짓기로 했다. 백낙중은 당시 < 아들에게 만석꾼의 재산보다는 자자손손 수백 년을 물려줄 저택이 중요하다 >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고종황제의 측근무관이던 백남신(白南信.백낙중의 둘째형)과 상의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고 궁중의 일류 목수들을 지원받아 궁중양식의 학인당을 건립한 것이다.
학인당 본채는 총공사비 4,000석(8000가마)을 들여 압록강과 오대산에서 최고급 목재를 구해왔다. 건축에 참여한 도편수와 대목장 등 연인원 4,280명이 투입됐다.
학인당이란 당호는 백낙중의 장자 백남혁(1905-1981)이 부친을 기리어 후손들에게 선대의 후덕함과 효심을 배우라는 의미에서 백낙중의 호 인제의 가운데 글자인 인(忍)자를 넣어 지었다.
백낙중은 전주부에서 내려오던 대사습 경연이 조선조말 중단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학인당의 대청을 판소리 공연장으로 만들어 예술인들의 공연과 교류의 장으로 사용했다.
백남혁은 부친의 서거로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1930년 이후에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예술인들의 후원에 적극 나섰다. 스승인 전북 서화사(書畵史)의 정신적 지주 효산(曉山) 이광열(李光烈) 선생을 모시고 효산 선생이 창설한 한묵회(翰墨會)를 중심으로 근대 서화가인 심농(心農) 조기석(趙沂錫), 유당(酉堂) 김희순(金熙蕣), 성재(惺薺) 金台錫(김태석), 설송(雪松) 최규상(崔圭祥), 소파(小波) 송명회(宋明會), 중당(中堂) 김근진(金瑾鎭), 성산(惺山) 이순재(李舜載) 등과 교류하면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력을 바탕으로 예술인들을 적극 후원했다.
그의 친구 가운데는 한국화가로 청전(靑田) 이상범, 금추(錦秋) 이남호(李南鎬),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이 있다. 소리꾼으로는 전주시 전동에서 행원이란 기방을 운영한 남전(藍田) 허산옥(許山玉)을 중심으로 하여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박녹주(朴綠珠),김연수(金演洙), 박초월(朴初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시대에 학인당에서 친교를 맺었다. 해방 후에 학인당은 도내 중요 행사의 만찬 행사장과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학인당은 건축 당시 99칸집으로 2000여평 규모였다. 현재는 본채, 별당채, 솟을대문 , 서사랑채, 뒷채, 창고채, 동사랑채 등 7채에 520평 규모로 줄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안채와 안사랑채, 행랑채, 사당, 정자, 별채2동, 후원 등은 매각되고 없어졌다. 학인당에는 지금도 돌로 쌓아 만든 땅샘이 있다. 정원의 돌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물맛 좋은 샘이 있어 한여름에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냉장고 대용으로 쓰인다.
전북도와 전주시는 지난 2006년부터 학인당 보수복원 사업에 나섰다. 그러나 공사가 늦어지고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일부 공사는 마무리 지었으나 아직도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특히 본채 공사가 너무 지지부진하면서 관광객들의 불만의 소리가 높다.
설계도면이 전체적으로 초보적인 점도 문제다. 줄자로 실측을 하는 것부터 시정되어야 한다. 측량기로 전체적인 실측을 해야 건물의 배치도를 정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인당 보수공사를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된다. 특히 본채 보수를 마치고 일반인에게 개방하기 위해서는 당국의 특단의 배려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