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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심 시조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이상야
경남문학 108호 –2014년 가을 .집중조명
하순희 약력
1953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남명 조식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리는 덕천 서원이 있는
마을에서 부 하용보와 모 정도년의 사이에서 육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남.
1976년 진주교육대학 졸업, 그 해 부산에서 김의암 시인의 지도로
한국 여성시 창간동인으로 활동함.
1980년 경남교원 백일장 시조부 장원을 하면서 시조를 쓰기 시작함.
1983년 경남시조 문학회의 전신인 마포 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함.
1989년 시조문학 여름호 천료, 작품 「길목에서」.
1990년 한국아동문학연구소 신인상 동시조 당선, 작품 「어머니」(심사위원 서벌).
1991년 경남신문신춘문예 당선, 작품 「길목에서·2」(심사위원 김상옥).
1992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작품「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심사위원 정완영, 김제현).
1998년 시집『별 하나를 기다리며』(동학사),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의 문예진흥기금 받음.
2001년 경남시조문학상 수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수상
2004년~시집『적멸을 꿈꾸며』(태학사),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 선집 발간.
2004년~2005년 경남여류문학회회장 역임
2006년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2009년 마산시 문화상수상.
2011년 창원시불교문화상 수상.
2012년~2013년 경남시조시인협회장 역임
2006~ 시조전문지 화중연火中蓮 편집장.
경남시조시인협회,경남문인협회,경남아동문학회,마산문인협회,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
한국문인협회평생교육위원,한국여류문학부회장, 현대불교문협 경남이사,
경남여류문학회장 역임, 오늘의 시조시인협회 집행위원.
<시인의 말>
서늘대는 바람에 칡꽃 향기가 실려 온다.
무시로 밀려오는 공허, 까닭 모를 슬픔이 가슴바닥을 훑고 간다.
적요로 가득한 산사의 한밤. 미닫이문을 밀고 내려선 뜨락엔 삼라만상이 고요한 가운데 장명등의 불빛만이 은은하다. 환한 불빛 대신 인등의 촉수 낮은 빛이 새어나오는 대웅전은 사람들로 가득하던 한낮의 에너지와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들을 품어 안고 적요 속에 충만하다.
적멸, 사라져 없어짐. 곧 죽음을 이르는 말, 세계를 영원히 벗어남 또는 그런 경지에 이름 이라고 사전에 적혀 있으나 내게 있어 진정한 적멸의 의미는 완전한 완성. 깨달음. 번뇌의 해탈, 새로운 나아감, 더 나은 세계로의 기원, 적정한 평안, 열반, 비운 뒤의 충만 등으로 언감생심 일지라도 가 닿아 이루고 싶은 삶의 길이다.
한 때는 쓰지 않고는 못 살 것 같던 열망이,
느리지만 조바심내지 않고
묵묵히 가고 있다.
“모든 일은 지나간다”
“지나간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에 얻어야 할 것만을 따라 바른 지혜로 최선을 다할 뿐,
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래를 향한 마음을 달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근심걱정 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 잡아함경-
내 마음의 경구요 스승이다.
글을 쓰는 것도 바른 삶을 살아내기 위한 방편이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가 닿아 또 다른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범사에 감사하며 천수천안의 보살행을 이룰 수 있기를 염원하는 날이다.
벽오동 이파리가 서걱거리며
힘내라고 일러준다.
<대표작>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
한 획 등뼈처럼 내리그은 화필 끝에
언 땅을 노려보는 잠들 수 없는 눈빛
삭혀도 되살아나는
어쩔 수 없는 멍울인가
네 네 뿔이 이고 있는 군청(群靑)의 하늘 아래
주 주린 창자 안고 가는 흰옷 입은 이웃들과
뒤 뒤틀린 발자국 같은
배 배리(背理)의 길도 있었지.
나눠 지닌 궁핍 앞에 바람막이로 버티면서
묵 묵묵히 네가 갈던 이 땅의 묵정밭에
오 오늘은 또 다른 문명이
짙 짙은 그늘 딛고 섰다.
비, 우체국
난 한 촉 벌고 있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이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갯벌매립 공사장, 왼종일 등짐을 져 나르다
식은 빵 한 조각 콩나물 국밥 한술 속으로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 강물로 뒤척인다.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치로폼 사이에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
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살구 살구 개살구
길을 가다 문득 살아온 날 돌아보니
그리워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구나
적요로 시린 앞섶은
때깔 좋아 환하다
적멸을 꿈꾸며
해진 신발을 끌며 가야 할 길 남아있어
난타하는 북소리 온몸으로 받으며
몸 하나 깨끗이 사룰
장작 한 단 마련키 위해
눈감아도 젖어오는 흐린 날 강둑에서
흩뿌리면 그만인 이름 없는 늑골들
적멸에 들고픈 홀씨
바람결에 날아간다
그릇
산산이 부서져라 한 점도 남기지 말고
부서져 어느 도공의 손끝에 다시 가 닿아
수만도 불길 속에서 끓는 물이 되거라
어쩌지 못해 지녀왔던 못난 삶의 언저리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져 형체 모두 지워버린 채
티끌로 먼지로 변해 흙으로 돌아가라
하얀 피 철철 흘려 깨어지는 아픔 있어도
풀잎 돋고 뿌리내린 나무 밑의 한줌 흙으로
몇 억겁 바람이 불어도 그 세월 이기거라
그런 날 인연 닿는 어느 도공의 눈에 띄어
시린 마음을 담아 데워서 건네주는
이 지상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 되거라.
어머니 설법
내 몸에 상처진 것들 뜨락에 꽃으로 핀다
발목 걸고넘어지던 무수한 일들도
생명을 실어 나르는 나뭇가지 물관이 되어
“한세상 살다보믄 상처도 꽃인기라
이 앙다물고 견뎌내몬 다 지나가는기라
세상일 어려븐 것이 니 꽃피게 하는기라
그라모 니도 모르게 다아 나사서
더께져 아물어진 헌디가 보일기다
마당가 매화꽃처럼 웃을 날이 있을기다”
<신작>
제3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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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 같은 큰언니를 제3의 나라에 내버렸다
바람 차운 춘삼월 산비탈 뒤로 한 채
이것이 고려장이로구나
어룽지는 굽잇길
“시상에 이리 좋은 디가 어딨노?
밥 주제, 씻겨 주제, 귀경도 시켜 주제
이담에 니도 오거라이 암 것도 걱정 말고”
그 밤에 기도했다 꿈속에도 꿈이기를
물뱀이 길을 막는 논두렁 외길 위에
오동꽃 내 마음처럼
뚝뚝 지고 있구나
늦은 밤
부모님 내 나이 무렵 나는 무얼 했었나
초임지 근무하느라 부르튼 신혼 살이
가만히 되짚어 보니
세상 물정 모른 천치
사는 내내 허둥지둥 내 코가 석 자라서
헤아리지 못한 정 마음 빚만 깊어가고
늦은 밤 텅 빈 창가에
붉은 시만 목이 멘다
로또 방송을 보며
무심코 돌린 채널
“쏘세요. 하나, 둘, 셋”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카운트 하고 있는
한평생
누군가에게 나는
횡재였나
등짐이었나
순정, 지상의 단 하나 결 고운 그릇
-하순희論
홍성란
하순희 하면 ‘이중섭의 흰 소’가 떠오른다. ‘비와 우체국’ 이미지가 떠오른다. 199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 바로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이고, 2001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작이 바로 「비, 우체국」이다. 뭐니 뭐니 해도 하순희 시인 하면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가 떠오른다. 하순희는 동심을 지켜오던 초등교사로서 고운 미소와 맑은 시심을 지닌 순정純情한 시인의 표상이다. 순정한 시인의 표상이되 단아한 형식으로 반성적 성찰을 담는 심중하고 맛깔스런 시조미학을 견지하고 있다.
긍정과 자비의 시학
출세작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를 음미하며 그녀의 영지 깊숙이 걸음을 옮기자. 부언할 필요는 없으나 화가 이중섭(1916~1956)은 개명한 일본인 아내 이남덕과 두 아들을, 한국전쟁 뒤 극빈을 피해 일본으로 보내고 그리운 가족을 소재로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시인이 소재로 삼은 ‘흰 소’는 1954년 그렸다는 이중섭의 대표작이다. 중섭은 ‘흰 소’에 선 굵고 힘찬 터치와 꽉 찬 구도로 전후의 암울과 분노를 여실히 투영했다.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 는 그 절망의 시대상을 그려내되 그를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배면에 깔고 있다.
한 획 등뼈처럼 내리그은 화필 끝에
언 땅을 노려보는 잠들 수 없는 눈빛
삭혀도 되살아나는
어쩔 수 없는 멍울인가
네 뿔이 이고 있는 군청(群靑)의 하늘 아래
주린 창자 안고 가는 흰옷 입은 이웃들과
뒤틀린 발자국 같은
배리(背理)의 길도 있었지.
나눠 지닌 궁핍 앞에 바람막이로 버티면서
묵묵히 네가 갈던 이 땅의 묵정밭에
오늘은 또 다른 문명이
짙은 그늘 딛고 섰다.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 전문
중섭이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극빈에 시달리다 1952년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뒤 단 한 차례, 부두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일본 처갓집을 방문하고는 1956년 간암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언 땅/ 멍울/ 주린 창자/ 뒤틀린 발자국/ 배리/ 궁핍/ 묵정밭’이 표상하는 가난과 그리움과 궁핍과 불만의 “이 땅”에서 중섭이 이를 이기는 것은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가 산생된 90년대에 시인은 이미 “또 다른 문명이/ 짙은 그늘 딛고 섰다”고 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흰옷 입은 이웃들”을 생각하고 그들 아니 우리네 “궁핍”은 “나눠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꺼이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 중섭의 “흰 소”처럼 “묵묵히” “이 땅의 묵정밭”을 “갈”며 “버티어” 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시인의 인식을 이 작품은 배면에 깔고 있다. 시인의 자비심이 도출한 긍정의 시학이다.
난 한 촉 벌고 있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이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갯벌 매립 공사장, 왼종일 등짐을 져 나르다
식은 빵 한 조각 콩나물 국밥 한술 속으로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 강물로 뒤척인다.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치로폼 사이에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
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비, 우체국」 전문
“애비”는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으로 “왼종일 등짐을 져 나르”며 번 “꼬깃꼬깃 접”힌 “세종대왕” 지전을 “소액환”으로 바꾸고 있다. 바꾸었으나 “글을 씰 수 없”는 “애비”는 필경 시인에게 “이것 좀 대신 써 주소”하고 부탁했으리라.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치로폼 사이”에도 “냉이꽃”은 피듯이 유아지경有我之境,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을 한 시인. 시인의 눈에 “식은 빵 한 조각”에 “콩나물 국밥 한술”의 생활일지라도 “끝나지 않”는 “삶의 고리”는 “하얗게 피”어야 할 “꽃”이다. 하루하루 삶이 전쟁이어도, 아무리 고단하고 팍팍한 전장이어도 우리 삶의 물기, 꽃은 피어왔다. “난 한 촉이 벌고 있”고 “냉이꽃이 하얗게 피”어나 듯. 자비와 긍정과 연민의 시학이다.
길을 가다 문득 살아온 날 돌아보니
그리워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구나
적요로 시린 앞섶은
때깔 좋아 환하다
-「살구 살구 개살구」 전문
“적요로 시린 앞섶”이 “때깔 좋”은 “개살구”라니. “그리워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니. 무엇이 “문득 살아온 날 돌아”보게 한 걸까. 적요. 쓸쓸하고 고요한 날 “살아온” 길 “돌아보”니 그 “아무 것도” “그리워할” 것 없다는 인식. 평생을 이루어 온 명색名色은 종부요, 교사요, 시인이다. 이 막중하고 아름다운 소임과 직분 뒤에 “때깔 좋아 환하다”는 겸허는 다만 겸허일 뿐인가.
해진 신발을 끌며 가야 할 길 남아있어
난타하는 북소리 온몸으로 받으며
몸 하나 깨끗이 사룰
장작 한 단 마련키 위해
눈감아도 젖어오는 흐린 날 강둑에서
흩뿌리면 그만인 이름 없는 늑골들
적멸에 들고픈 홀씨
바람결에 날아간다
-「적멸을 꿈꾸며」 전문
인생고해. 종국에 예외 없이 떠나야 할 우리 앞의 생은 “해진 신발을 끌며 가”는 길이다. 가기는 가되 “흩뿌리면 그만인 이름 없는 늑골들”인 우리는 “몸 하나 깨끗이 사룰/ 장작 한 단 마련키 위해”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지도 모른다. 꽃 지듯 사람 지는 것이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일기日氣는 “눈감아도 젖어오는 흐린 날”이 많아 때때로 일체의 번뇌를 벗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길은, 일체의 번뇌를 벗고 적멸 곧 ‘완전한 완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산산이 부서져라 한 점도 남기지 말고
부서져 어느 도공의 손끝에 다시 가 닿아
수만도 불길 속에서 끓는 물이 되거라
어쩌지 못해 지녀왔던 못난 삶의 언저리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져 형체 모두 지워버린 채
티끌로 먼지로 변해 흙으로 돌아가라
하얀 피 철철 흘려 깨어지는 아픔 있어도
풀잎 돋고 뿌리내린 나무 밑의 한줌 흙으로
몇 억겁 바람이 불어도 그 세월 이기거라
그런 날 인연 닿는 어느 도공의 눈에 띄어
시린 마음을 담아 데워서 건네주는
이 지상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 되거라.
-「그릇」 전문
“온몸 가득/ 가시 세워// 낭자하게 피 흘리며// 사는 일 까마득하여 소리 내어 울”던 날이었을까(「엉겅퀴」). “어쩌지 못해” 놓쳐버린 “못난 삶의 언저리”만 같은 “그릇”이 “산산이 부서져” “형체 모두 지워버”린 날이었을까. 차라리 “티끌로 먼지로 변해” 다시 “한줌 흙”으로 돌아가 “바람”부는 “억겁” “세월 이기”고 “이 지상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 되”기를 염원한 날이 있었다. 산산이 부서져 마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세상 한편 언덕에” 버려진 것 같던 날이 있었다(「엉겅퀴」).
“그릇”의 적멸은 “산산이 부서”지는 일일까. ‘시인의 말’에 따르면 시인이 이루고자하는 적멸은 ‘완전한 완성’이나 ‘깨달음’, ‘번뇌의 해탈’, ‘비운 뒤의 충만’, ‘적정한 평안’ 등을 뜻한다. 그러니 산산이 부서지고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그릇도 마음의 ‘완전한 완성’에 이른 시인이고 “하얀 피 철철 흘려 깨어지는 아픔”도 시인을 표상한다.
인고의 세월 이기고 이 지상에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길 염원한 이 작품은 2001년 경남시조문학상 수상작이다. 염원처럼 자기암시처럼 마음의 ‘완전한 완성’에 도달한 시인은 “시린 마음 담아 데워서 건네주는/ 이 지상의 단 하나 결 고운 그릇이 되”었다. 이미 우리에게 자애로운 미소와 자비심을 지닌 넉넉하고 결 고운 그릇으로 각인 되었다.
순정한 마음
우리에게 들려오는 고향의 연로하신 혈육이나 친지들의 방언은 다 진실로만 들린다. 설법으로 들린다. 심정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이 심정적으로 즉물적으로 직방으로 와 닿는 말이 진실이다. 순정한 마음이다. 순정한 사람의 귀에 순정한 말씀이 들린다.
내 몸에 상처진 것들 뜨락에 꽃으로 핀다
발목 걸고넘어지던 무수한 일들도
생명을 실어 나르는 나뭇가지 물관이 되어
“한세상 살다보믄 상처도 꽃인기라
이 앙다물고 견뎌내몬 다 지나가는기라
세상일 어려븐 것이 니 꽃피게 하는기라
그라모 니도 모르게 다아 나사서
더께져 아물어진 헌디가 보일기다
마당가 매화꽃처럼 웃을 날이 있을기다”
-「어머니 설법」 전문
“상처”가 “꽃”이 된다는 〈어머니 설법〉이다. 상처가 꽃이 된다는 말은 소위 체험적 진실이다. 어머니는 자식 사랑하는 순정한 마음에서 “세상 어려븐 것이 니 꽃피게 하는기라” 가르치신다. 어머니의 연륜에서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말씀은 진실이고 순정한 마음이고 한편의 시다. 상처가 꽃이 된다는 지혜의 설법. 군더더기 다 덜어내고 아픈 데만 건드리는 시. 나를 “걸고넘어지던 무수한 일들”이 “내 몸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가 “더께져 아물어진 헌디”를 낸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헌디가, 상처가 꽃이 된다고 가르치신다. 세상 어려운 일들은, 내 발목을 걸고넘어지던 일들은 다 내가 꽃 피우게 하려고 생기는 일이다. 상처가 마른 “나뭇가지”에 생명을 실어 나르는 “물관이 되”게 하려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우는 것이다. 그러니 상처가 아물기까지 “이 앙다물고 견”디면 “마당가 매화꽃처럼 웃을 날이 있”을 거라고, 나도 그렇게 살아왔노라고 어머니는 체험적 진실을, 순정한 마음을 설파하신다.
엄니 같은 큰언니를 제3의 나라에 내버렸다
바람 차운 춘삼월 산비탈 뒤로 한 채
이것이 고려장이로구나
어룽지는 굽잇길
“시상에 이리 좋은 디가 어딨노?
밥 주제, 씻겨 주제, 귀경도 시켜 주제
이담에 니도 오거라이 암 것도 걱정 말고”
그 밤에 기도했다 꿈속에도 꿈이기를
물뱀이 길을 막는 논두렁 외길 위에
오동꽃 내 마음처럼
뚝뚝 지고 있구나
-「제3의 나라」 전문
생로병사. 죽기 전에 늙고 병들면 자식에게 부담주지 않기 위해 양로원이나 요양원 같은 곳에 가야 한다고 시인의 세대는 공공연히 말한다. 아마 자식을 돌보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에게 부담주지 않으려는 시인도 베이비붐 세대다. “엄니 같은 큰언니를 제3의 나라”에 모시고 “산비탈” 내려올 때 모시는 게 아니라 “내버”리는 거라는 죄의식과 생별의 슬픔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프다. “이것이 고려장”이라는 탄식이 아프다.
그러나 엄니 같은 큰언니는 “시상에 이리 좋은 디가 어딨노?/ 밥 주제, 씻겨 주제, 귀경도 시켜 주제” 하면서 “이담에 니도 오거라이 암 것도 걱정 말고” 한다. 그렇다. 의식주가 해결되고, 손수 못하면 돌보아주는 이가 있고 참 좋은 세상 되었다. 그렇게 좋은 곳에 보내드리는데 왜 이다지 슬플까. 생별의 아픔도 아픔이거니와 우리 인생사가 그렇다는 걸 알기에 슬프다. 나도 그 인생사의 와중에서 한 치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슬프다. “꿈속에도 꿈이기를” “기도”하지만 “제3의 나라”는 우리 모두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현실이 되었다. 이 현실을 아파하는 “오동꽃”이 “물뱀이 길을 막는 논두렁 외길 위에” “내” 눈물처럼 “뚝뚝 지고 있”다.
큰언니는 아파하지 말라고, 산다는 게 이런 거라고 우는 나를 달랜다. 아예, “이담에 니도 오거라이 암 것도 걱정 말고.” 능청인지 당부인지 태연하게 말한다. 큰언니의 말은 현실이고 진실이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이고 나를 생각하는 순정한 마음이다.
부모님 내 나이 무렵 나는 무얼 했었나
초임지 근무하느라 부르튼 신혼 살이
가만히 되짚어 보니
세상 물정 모른 천치
사는 내내 허둥지둥 내 코가 석 자라서
헤아리지 못한 정 마음 빚만 깊어가고
늦은 밤 텅 빈 창가에
붉은 시만 목이 멘다
-「늦은 밤」 전문
초임지 근무하느라 “부르튼” 내 손발 같이 바쁘고 고됐던 “신혼 살이.” “내내 허둥지둥 내 코가 석 자”였다. 그러고 사는 동안 부모님은 늙어가고 마음 쓰지 못한 부모님 그 “정”이 이제야 생각난다. “마음 빚만 깊어”간다. 아파보니 아픈 사람 알 것 같고, 살아보니 “내 나이 무렵” “부모님” 살아오신 일을 알 것도 같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부모님 삶이 보인다. “부모님 내 나이 무렵 나는 무얼 했었나.” 내 나이 무렵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셨나.
“가만히 되짚어 보니/ 나는 세상 물정 모른 천치”였다. 이 “늦은 밤” “텅 빈 창가”에 앉아 “목이 멘” 울음 운다. 소리도 못 내고 운다. 손 내밀어도 손잡을 수 없는 어머니. 불러도 대답 못하고 울어도 듣지 못하는 아버지. 그 울음이 시가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온 천치가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다.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효도하려니 효도할 부모님은 가고 없다. 나를 다 내려놓고 부모님께 달려가지 못한 나를 이제 와서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인생이다. 늦은 밤, 나를 돌아보는 순정한 시간이다.
무심코 돌린 채널
“쏘세요. 하나, 둘, 셋”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카운트 하고 있는
한평생
누군가에게 나는
횡재였나
등짐이었나
-「로또 방송을 보며」 전문
동서고금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 왔고 살아갈 것이다. 오늘을 안락하게, 이 불확실한 미래를 좀 더 안전하게 살고 싶지 않은 이 있을까. 이 황금만능시대를 사는 동안 누구나 “로또”를 꿈꾼다. 로또 한번 사보지 않은 이 있을까. 로또는 “횡재”다. 뜻밖에 재물을 얻는 일. 예기치 않은 행운. 그런데 횡재橫財나 행운이 누구에게나 술렁술렁 찾아오는 건 아니다. 횡재나 행운이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로또가 내 건 상징 곧 예기치 않은 행운, 횡재를 얻으려고 로또를 산다. 그러나 로또 역시 “불확실한 미래”의 상징이다. 쏜다고 해서 내가 산 로또의 번호가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엉뚱하게도 큰돈을 쓰면, 로또에 당첨 됐냐고 묻는 걸 보면 로또는 정말 안 되고 잘 안 풀리는 일의 반어反語다.
“나”라는 로또는 “누군가에게” “횡재”였을까, “등짐”이었을까. 내가 누군가에게로 가서 꽃이 되듯 내가 누군가의 횡재가 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내가 누군가에게로 가서 등짐이나 된다면 또 얼마나 슬픈 일일까. 부디 내가 당신의 횡재이기를 바라노니, 당신도 나에게 예기치 않은 행운으로 다가 와주시기를 빌어보는 것이다. 맛깔스런 시다.
화두, 반성적 성찰
우리는 지금까지 자애로운 미소와 맑은 시심으로 우리시대 순정純情한 시인의 표상이 된 하순희의 대표작 7편과 신작 3편을 함께 읽었다. 하순희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자비와 연민을 바탕으로 긍정의 시학을 축조하고 있다(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 종부요, 교사요, 시인이라는 막중하고 아름다운 소임을 겸허하게 받아 안고 사는( 「살구 살구 개살구」) 인고의 세월( 「엉겅퀴」) 속에 일체의 세속적 번뇌를 벗고 싶은 시정詩情을 형상하기도 한다( 「적멸을 꿈꾸며」). 이러한 시정은 「그릇」에서 이 지상의 단 하나 결 고운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길 염원한다. 이 염원이 자기암시가 되어 시인은 이미 우리에게 보살과 같은 미소와 자비를 지닌 넉넉하고 결 고운 그릇으로 각인 되었다. 「어머니 설법」 이나 「제3의 나라」에서는 혈육의 방언이 직방으로 와 닿아 우리의 심금을 건드린다. 순정한 사람의 귀에 순정한 말씀이 들리고 진정을 아는 이가 진정을 듣는다. 「늦은 밤」은 만시지탄晩時之歎, ‘나’라는 천치를 발견하고 순정한 울음을 듣는 시간을 우리에게 권한다. 「로또 방송을 보며」는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로또라는 반어를 들려준다. 나라는 존재가 부디 누군가에게 횡재이기를 축원하는 시인의 반성적 성찰이 담긴 심중한 의미의 맛깔스런 시다.
하순희 하면, 이영도의 단아한 자태와 결곡한 작품들이 떠오른다. 하순희는 순정과 진정을 아는 지상의 단 하나 결 고운 그릇이다. 항시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성찰에 잇닿은 하 시인의 시조세계는 어떤 작품이거나 하나의 화두를 던지는 깊은 시조미학에 닿아 있다.
<홍성란 약력>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황진이 별곡』 『따뜻한 슬픔』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춤』. 현대시조100인선 『겨울 약속』. 시조선집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 한국대표명시선100 『애인 있어요』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 중앙시조대상 ·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부문) · 한국시조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유심』 상임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