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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
최윤영** 대진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강사
< 차례>
1. 산대놀이의 성립배경
2. 과장별 주요 등장인물
3. 성격구축을 위한 구성요소
4. 僧과장의 역사적 전개와 변모양상
5. 연희사적 의의
<국문초록>
이 연구는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중’들의 유형과 특성을 고찰하고 이들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짚어보는데 있다. 이로써 <양주별산대놀이>의 성립배경인 산대 및 궁중 산대놀이와의 연관
성을 밝히고자 한다. 양주별산대를 위시해 현전 산대놀이의 전통은 궁중 산대놀이를 답습한 것으로
서 인조 즉위년(1623) 산대조설 폐지에 힘입은 바 크다. 산대조설 금지가 민간의 산대놀이패들을 탄
생시키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대놀이패 중에서 애오개(아현)산대놀이패는
<양주별산대놀이> 형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들의 출연이 특색을 이룬다. 대부분의 놀이마당에서 핵심적인 위치
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가면의 수도 과반수이상을 차지하는 까닭이다. 노장스님을 비롯하여 목중,
상좌, 옴중, 완보 등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무엇보다 양주산대 놀이마당 중에서 노장과장과 팔목
중과장은 다른 과장들에 비해 세부적인 놀이들로 짜여져 <양주별산대놀이>의 극적 구성을 다채롭
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양주별산대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성격을 구축하기 위해 가면,
의상, 소품, 춤, 묵극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완보의 관과 꽹과리, 옴중의 벙거지와 막대기 및 제
금에서와 같이, 소품과 의상 등이 등장인물 상호간의 극적 행동창출을 위한 동기를 부여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양주별산대놀이>에 중들의 등장이 현저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으
14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로 볼 수 있다. 이른바 ‘거사’ 및 ‘사당’이라 불리어졌던 무리들의 증가와 이들이 일삼았던 온갖 폐행
들이 놀이로 승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현전하는 봉산탈춤 제3과장 사당춤에서 사당과 거사가 나와
놀량 사거리를 합창하는 장면 및 양주별산대의 애사당 법고놀이마당에 등장하는 애사당과 직결되는
이유이다. 즉 거사와 사당의 행보가 오늘날 가면극 놀이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요인으로 궁중 산대놀이에 조설되었던 산대의 전통 중, 침향산에 진설되었던 중인형을 꼽을 수
있다. 침향산은 산대조설의 대미를 장식했던 것으로, <양주별산대놀이>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애오개본산대 놀이꾼들이 궁중 산대놀이의 연희자로 활약했을 당시 답습했던 산대로 볼 수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침향산대의 유풍을 기억하고 이를 모방하여 놀이판에 구현하였을 뿐만 아니
라, 당시 사회 문제점으로 지적된 거사들의 일상을 골계적 놀이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주제어 : 양주별산대놀이, 애오개(아현)산대놀이패, 노장, 팔목중, 상좌, 옴중, 완보, 산대, 산대놀이, 산
대잡상, 중인형, 거사, 사당, 반인
1. 산대놀이의 성립배경
한국 가면극은 전승지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황해도 해서지방의 탈
춤, 경상도 지방의 야류와 오광대, 서울‧경기지방의 산대놀이 등은 전승
지를 기준으로 한 가면극의 유형들이다. 이중 서울․경기지방의 산대놀
이는 경기도 양주와 서울 송파 등지에서 연희되는 가면극을 말한다. 산
대놀이에서 ‘산대(山臺)’는 대규모 궁중의례에 가설되었던 거대한 구조물
을 지칭한다. 산대가 신라 및 고려시대 팔관회․연등회를 비롯해 조선시
대 친경․친잠례 등에 이르기까지 행사공간에 설치되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대에는 다채로운 가무백희가 수반되었
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잡상들이 장착됨으로써 산대잡상들의 무대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산대놀이란 바로 이 산대를 중심으로 연희되는 놀이
풍습을 말한다. ‘산디놀이’ ‘산대희’ ‘산대잡희’ ‘산대잡극’ 등은 모두 산
대놀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산대 조설(造設)과 관계 깊다.
산대는 우리민족 특유의 산신신앙을 재현한 구조물로서 산의 형상을
본떠 제작되었다. 화산(火山), 금오산(金鰲山), 수미산(須彌山), 침향산(沈香
山), 봉래산(蓬萊山), 만세산(萬歲山) 등은 개별적인 명칭이 주어졌던 산대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15
로서 여타의 산대들 보다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산대를 통
해 궁중의례의 본질과 의미가 구현되었음은 물론이고, 의례 후 펼쳐지는
놀이판 중심에 축조되어 참여자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구심점이 될 수 있
었다.
이러한 산대조설의 전통은 인조(仁祖) 즉위와 함께 폐지된다. 선조대
(宣祖代)에 발발했던 임진왜란으로 인해 산대제작에 여러 가지 제약이 뒤
따랐기 때문이다. 산대조설에 드는 수천 명의 노동력과 산대목(木)․물품
비용 등을 충족시키기에 힘들었던 이유이다.1) 산대의 폐지로 궁중 산대
놀이의 전통이 사라지게 되고, 이에 관여했던 사람들도 흩어지게 된다.
이후 산대희(演戲)의 흥행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
고, 대규모의 무대(산대)를 축조하는 전통이 없어지게 된다.2)
그러나 궁중 산대놀이의 폐지는 민간 차원의 산대놀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른바 ‘가면극’3)이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공연 장르의
번성을 야기했다는 점이다. 특히 민간 산대놀이(가면극)의 놀이패들은 성
밖 서교(西郊)의 아현리(阿峴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다른 산
대놀이패들에 비해 애오개산대(阿峴山臺) 놀이패의 명성이 높았다고 한
다. 이 애오개 본산대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 성립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키바는 이들 연희가 동일한 것이며, 양주별산대 놀이가 산대
놀이의 최후 정착지임을 밝히고 있다.4) 이밖에도 구파발 산대놀이와 사
1) 최윤영, 「침향산(沈香山) 조설방식의 특성과 연행양상」, 구비문학연구제28집,
한국구비문학회, 2009. 6. 358면.
2) 秋葉 隆, 朝鮮民俗志, 東京; 六三書院, 1954年 影印本, 172면. “爾來演戲は專ら
彼等自ら發意による興行に委ねられて、大県りな舞台を造ることはなくなっ
た。”
3) ‘가면극’은 ‘가면희’ ‘탈놀이’ ‘탈춤’ ‘덧뵈기’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본고는 이를 ‘가면극’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4) 秋葉 降, 朝鮮民俗志, 앞의 책, 173면. “これに対して、京城から北方十五哩の
地にある楊州に數年前迄あった別 山臺(pyöl-sandi)は、阿峴山臺の旅興行に行っ
たのを模倣したものである。従って兩者は全く同一系統に屬し、陽州の別山臺
16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직골 딱딱이패에서 양주별산대놀이가 분화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5)
현전하는 본산대놀이 계통의 가면극에는 양주별산대놀이 이외에도 송파
산대놀이, 봉산탈춤, 은율탈춤, 강령탈춤 등이 있다. 중부지방 산대놀이와
해서지방의 탈춤은 과장의 구성이나 등장인물들이 유사하여 동일계열의
놀이에서 유래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사와 소품, 의상, 춤사위 등이
흡사한 양주별산대놀이와 봉산탈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경
기도 양주에 전해져오는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라는 지역적 특성을 살
려 산대놀이의 정착지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6)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들의 출연이 특색을 이룬다. 등장인물 과반수이상
이 중들로 구성되어있다. 팔목중과 노장스님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승려
의 형색을 하고 있지만 결코 중이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의 구성원들이
다. 이들은 판염불을 벌이고 일인 다역을 연기하며 무언극과 소품 등으
로 다양한 언어들을 구사해낸다. 곧 놀이판을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본 연구는 양주별산대 놀이과장들을 중심으로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중’들의 유형과 특성을 살피고 중과장의 역사적 전개와 변모
こそは山臺戱の最後の流をなすのであるが、”
5)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해, 1930년대에 양주를 현지 조사했던 송석하와
아키바 다카시는 애오개본산대놀이의 영향이라 보았고, 1930년에 필사된 양주
별산대놀이 김지연본(金志淵本)의 제보자인 조종순(趙鍾洵, 1929년 당시 62세)은
구파발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조동일 소장의 양주
별산대놀이 대본(1957년본)에서는 사직골 딱딱이패의 영향이라 보기도 한다. 이
와 같이 양주별산대놀이의 유래에 대해 여러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19세기 초
중엽에 본산대놀이 계통의 가면극을 본따 성립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난
다.”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389면.
6) 서울에서 북쪽으로 1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楊州 山臺는 지금으로부터 1
백여 년 전에 서울 城外에 있던 阿峴 山臺가 그 지방에 흥행을 갔었을 때에, 그
곳 官衙의 하층배들이 보고서 이것을 본받아 배운 것으로서, 이 양자는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 아현 산대의 아류인 양주 산대를 세칭 ‘별산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상수, 山臺․城隍神祭假面劇의 硏究, 成文閣, 1996, 89면.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17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로써 양주별산대놀이 성립배경인 ‘산대’ 및
‘궁중 산대놀이’와의 연관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현전 가
면극과 궁중 산대놀이와의 상관성 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으로 여겨진다. 덧붙여 공연자료로 2009년 5월 5일 정기공연 및 주말 상
설공연이 참조되었음을 밝혀둔다.7)
2. 과장별 주요 등장인물
양주별산대의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중의 등장이 두드러져있다. 채
록자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를 지니지만, 샌님과장과 신할아비․미얄할미
과장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과장에 중들이 나온다. 대부분의 마당
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가면의 수도 절대적이다. 22개
의 탈 가운데 승려가면은 모두 10개로8) 여타의 가면들에 비해 비중이 크
기 때문이다. 가면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작
용한다. 이외에도 인물 형상화를 위해 의상과 춤사위, 대사 등이 동원된
다.
노장, 목중(먹중)9), 상좌, 옴중, 완보 등은 양주별산대 놀이판의 핵심적
7) <양주별산대놀이>가 2009년 5월 5일 정기공연을 시발점으로 본격적인 공연체
제에 들어갔다. 길놀이를 시발점으로 탈고사, 본놀이가 연행되었다. 이날 본 놀
이는 모두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제2과장 상좌와 옴중/제3과장 옴중과
먹중/ 제5과장 3경 애사당법고놀이/제7과장 1경 의막사령놀이/제7과장 2경 포도
부장놀이/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가 그것이다. 이외에도 초청공연으로 유
양초등학교 어린이산대놀이, 북청사자놀이 등이 연희되었다.
8) 秋葉 降, 朝鮮民俗志, 앞의 책, 174면.
9) 목중 혹은 먹중에 대한 표기는 채록자별로 차이를 나타낸다. “김지연 본(1930년
본)․아키바 다카시 본(秋葉 隆, 1929년 본)․이두현 본(1958년 본)․김성대 본
(1968년 본)은 목중이라 표기하고, 현지인 본(1957년 본)은 묵승(墨僧)이라 표기하
였다. 또한 최상수 본(1950년 말)은 먹중이라 표기하고 있다.” 정형호/글․서헌
18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인물들로 승려의 행색을 하고 있다. 놀이판에 나오는 승려들은 소무(少
巫), 취발이 등과 같은 등장인물들과 대립구도를 만들며 극을 전개해나가
는 반면, 서로 단합하여 큰스님(老杖)․샌님(양반)과 같은 인물들을 희롱
하기도 한다. 이들은 “부역을 피하기 위해 승복을 입고 중 행세를 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무리들을 형상화한 것”10)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의
기록, 곽우록(藿憂錄)에 의하면 “서울을 벗어나 4, 5백 리만 나가면 승복
을 입고 국역을 피하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자식이
셋 이상이면 그중 하나가 중인 것이 예사였다11)고 한다. 별산대놀이에 중
이 주를 이룬 까닭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 스님이 아니라 부역과 조
세의 부담에서 벗어나 정처 없이 떠도는 이들의 세태를 풍자한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노장과장과 팔목중과장은 중이 나오는 대표적 과장이다. 아
래 표1은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중의 출연 과장을 포함한 전과장을 정리한
것이다. 표1은 채록자에 따른 과장분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마당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나눈 것이다. 따라서 최상수의 분류
는 전 8과장으로 구성된 것이며, 김지연 채록본은 11과장, 이두현 채록본
은 8과장으로 이루어졌다. 아키바의 경우는 전 10과장으로 구성되었다.
단지 채록자간의 비교를 위해 편의상 과장을 나열한 것임을 밝혀둔다.
그밖에 김성대 채록본은 8과장으로 이를 분류했다.12)
이중 팔목중과장과 노장과장은 다른 놀이마당들에 비해 세부적 놀이
강/사진, 양주별산대놀이, 화산문화, 2000, 50면. 본고에서는 이하 ‘목중’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10) 정형호, 「탈놀이의 八먹중과 불교의 八部衆 神將의 관련성 고찰」, 韓國民俗學
38, 2003. 12. 465면.
11) 윤광봉, 유랑예인과 꼭두각시놀음, 밀알, 1994, 75면에서 재인용.
12) 김성대 채록본은 제1과장 상좌춤을 필두로 옴중춤, 목중과 옴중, 연닢 눈끔쩍이,
八목중춤, 老丈춤, 샌님춤, 신할아비와 미얄할미의 8과장으로 구성되었다. 김성
대, 「陽州別山臺놀이 演戱本」, 창작과 비평, 1973년 여름호(통권28호). 특히
(故)김성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 보유자이기도 하다.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19
아키바 김지연 이두현 최상수
제1과장(상좌) 상좌1, 상좌2 상좌1․2 상좌1, 상좌2 상좌1, 상좌2
제2과장(옴중) 옴중, 상좌1,2 옴중, 상좌 옴중, 상좌 옴중, 상좌
제3과장
(목(먹)중/옴중)
목중, 옴중,
상좌1,2
묵승, 옴중 목중1․2․3․4, 옴중 먹중, 옴중
제4과장
(연잎․눈끔적이)
연잎,눈끔적이, 상
좌1․2, 먹중, 옴중
연잎,눈꿈적이,상
좌1․2,옴중,묵승
연잎, 눈끔적이,
목중1․2․3․4, 옴중
연잎,눈끔적이,상
좌1․2, 먹중, 옴중
제5과장(팔목중)
제1경;염불놀이
제2경;침놀이
제3경;북놀이
완보이하8명의 중
(이하 팔먹중)
상좌1․2, 옴중, 중
1․2․3․4, 완보, 관쓴
사람(이하관중) ,
신주부,
상좌1․2,목중1․2․3․4,
옴중,완보
먹중1․2․3․4․5․6
冠쓴먹중, 완보
팔먹중, 신주부,
病者3명
상좌2, 옴중, 목
중1, 말뚝이(목중),
완보, 신주부
먹중1․2․3․4,
완보,신주부,洞里
아이,病者3명
팔먹중, 왜장녀,
애사당
상좌1․2,목중1․2․3․4,
옴중,완보,왜장녀,
애사당
먹중1․2․3․4․5․6
冠쓴먹중, 완보,
왜장녀, 애사당
제6과장
(애사당)
중들,관중,묵승,완
보,왜장녀,애사당
제7과장(노장)
제1경;먹중놀음
(파계승놀이)
제2경;소무놀음
제3경;신장수놀음
제4경;취발이놀음
팔먹중, 노장,
상좌, 소무1․2
노장,상좌,중들,
묵승,완보,옴중,
소무1․2
목중들,노장,상좌
2,완보,옴중,소무1․
2
먹중1․2․3․4․5․6
冠쓴먹중,완보,
노장,상좌,소무1․2
노장, 소무1․2
신장수,노장,원숭
이, 소무1․2
신장수,노장,원숭
이, 소무1․2
취발이,노장,소무
1․2,해산모,취발이
(인형)
취발이,노장,소무
1․2,해산어멈,마당
(인형)
들로 짜여 있어 양주별산대놀이를 풍요롭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모
두 중들이 주체적으로 활약한다. 팔목중 과장이 펼쳐지기 전에 연희되는
상좌과장․옴중과장․옴중 및 목중과장도 중들이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
하는 놀이마당이다.
20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제8과장
(말뚝이)
말뚝이, 노장,
원숭이, 소무1․2
말뚝이,노장,원숭
이,소무1․2
제9과장
(취발이/취바리)
취바리, 노장,
소무1․2, 공석어멈,
취바리아기인형
취발이,노장,소무
1․2,공석어멈,취발
이아해(인형)
제10과장(샌님)
제1경;말뚝이놀음
제2경;포도부장놀
음
샌님,샌님의 두아
이,말뚝이,의막사
령,소무,포도부장
말뚝이,샌님,서방
님,도련님,쇠뚝이,
소무,포도부장
말뚝이,샌님,서방
님,도령님,쇠뚝이
말뚝이,샌님,서방
님,도련님,쇠뚝이
포도부장,
샌님, 소무
포도부장,
샌님, 소무,
제11과장
(신할아비․미얄할
미)
신할아비,미얄할
미,독기,독기누이
신할애비,미얄할
미,도끼,도끼누이,
소무
신하라비,미얄할
미,도끼,도끼누이
신할아비,미얄할
미,도끼,도끼누이
<표1> 채록자별 과장 분류 및 등장인물
먼저 상좌는 어린 중(少僧)으로 상좌과장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상좌는
사승(師僧)의 대를 이을 여러 제자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을 말한다.13)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2명의 상좌가 출연한다. 이들은 놀이판 중심에서
축역을 위한 사방치기를 연출한다. 사방치기는 영남지방 오광대놀이에
나오는 오방신장무와 유사한 기능의 춤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지
는 옴중 과장에서 상좌의 성격은 반전된다. 놀이판의 역귀를 쫓고 탈판
을 정화시키던 신성한 승려에서 옴중과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로 전이되
는 까닭이다. 옴중은 팔목중 중의 한 명으로 얼굴에 옴이 난 중이다. 옴
중은 상좌과장과 옴중과장 및 목중․옴중과장을 연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대에 먼저 나와 춤을 추고 있는 상좌를 쫓고 놀이판을 독차지하
지만 곧이어 목중의 등장으로 퇴장 당하게 된다. 곧 상좌-옴중-목중의 대
립구도 속에서 중간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3) 정형호/글․서헌강/사진, 양주별산대놀이, 화산문화, 2000, 136면. 또한 김성대
본에 의하면, 첫째 상좌는 8,9세 된 어린 중을 칭하며, 둘째 상좌는 15,16세 된
소년 중을 말한다. 김성대, 앞의 책, 582면.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21
연잎․눈끔적이 과장은 이들 3명의 인물들 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신
적인 존재이다. 연잎․눈끔적이 과장의 연잎과 눈끔적이는 옴중과 목중
들이 접근조차 못하는 무서운 인물로 자리한다. 갈등이 일어나기도 전에
모두들 놀라 도망가는 이유이다. 연잎은 연꽃의 잎을 말한다. 따라서 연
잎은 불교를 상징하는 초자연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연잎의 무대의상
에 수놓인 학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학은 십장생 가운데 하나로 불
로장생을 의미하는 동물이다. 연잎 의상에 수놓인 학은 사찰에서 연희되
었던 사찰학춤과도 연결된다.14) 연꽃과 학은 모두 사찰문화와 직결되는
매개체인 것이다. 반면 연잎과 함께 등장한 눈끔적이의 의상에는 호랑이
가 수놓아져 있다. 이는 우리민족이 신성시했던 동물 가운데 하나로 사
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놀이판에서 연잎은 하늘
을 향하고 눈끔적이는 땅을 향해 연희한다.15) 연잎․눈끔적이 과장의 연
잎과 눈끔적이는 하늘과 땅을 지칭하며 각각 천신(天神, 天殺星)과 지신
(地神, 地殺星)을 뜻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탈 놀이판의 부정한
기운을 쫓고 정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팔목중 과장은 8명의 목중들이 나와 제각기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장
이다. 여타의 탈놀이와 다르게 양주별산대 팔목중 과장에는 4명의 목중
들(최상수本은 6명)이 등장한다. 이들 4명의 목중들을 포함하여 옴중과
완보 그리고 상좌 1,2가 팔목중 과장의 인물들이다. 팔목중 과장은 다시
염불놀이․침놀이․애사당북놀이로 세분된다. 팔목중들은 염불놀이에서
14) 학은 가면극 놀이판의 등장인물 의상에 수놓아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상징
하는 춤으로도 표현되었다. 특히 사찰에서 연희되던 사찰학춤은 학(鶴)의 동작
을 모방하여 승려의 법복(가사와 장삼)이 움직이는 자연스러움과 불교의 교화
방편에 조류인 학의 상징성을 접목시켜 춤으로 표현한 연례작법(宴禮作法)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백성스님, 학춤(鶴舞) 연구, 도서출판 한림원, 2004, 60
면.
15) 諏訪春雄, 「日中韓の假面劇」, 日中比較藝能史, 東京; 吉川弘文館, 1994, 127면.
“蓮葉は天を向き、ヌンクムジェギは大地を向いて演じる。"
22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침놀이와 애사당북놀이에서는 다른 인물들과
어울려 놀이판을 이끈다. 침놀이 장면에서는 말뚝이(목중)와 신주부가 만
나고 애사당북놀이 장면에서는 왜장녀와 애사당이 팔목중과 어울린다.
실제 애사당북놀이에서 상좌들은 제금과 꽹과리를 치고 목중들은 북(법
고)을 든다. 이로써 팔목중들이 악사의 역할을 함은 물론이고 북을 들어
법고의 모양새를 만드는 무대배경의 역할도 수행한다.
여기서 애사당은 사당패 놀이꾼의 구성원으로 거사(居士)와 관계 깊다.
즉 사당패를 구성하는 남자가 곧 거사이며 여자는 사당(社堂)인 것이다.16)
양주별산대에서 애사당은 왜장녀의 딸로 등장한다. 어미인 왜장녀가 오
입쟁이 말뚝이에게 돈을 받고 딸을 팔고 말뚝이와 애사당은 성적 유희를
즐긴다. 팔목중 과장은 양주별산대놀이 놀이마당들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연희자들이 수(數)적으로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연출시간도
길기 때문이다.
노장과장의 노장(老長)은 극 전체에 등장하는 중들 가운데 제일 우위
에 존재한다. 노장의 등장으로 팔목중들이 깜작 놀라고 그의 비위를 맞
추기 위해 타령도 하고 그 앞에서 춤을 추는 등의 동작을 연거푸 보이는
이유이다. 그러나 노장의 정체는 완보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발각되고 팔
목중들에게 희롱당하는 신세로 전락된다.
노장과장은 채록자에 따라 이견이 분분한 장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
노장과장 안에 먹중놀음(파계승놀이)․소무놀음․원숭이놀음(신장수놀
이)․취발이놀음의 네 가지 놀이가 포함되기도 하지만,17) 이를 각각의 독
립된 거리로 나누기도 한다. 즉 노장과장․원숭이/신장수과장․말뚝이과
장․취발이과장으로 분류된다.18) 노장과장은 양주별산대놀이의 절정에
달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노장이 2명의 소무(小巫)와 춤추는 장
16) 송석하, 「社堂考」, 韓國民俗考, 日新社, 1960, 101면.
17) 최상수 채록본(최상수, 山臺․城隍神祭 假面劇의 硏究, 成文閣, 1996).
18) 秋葉 隆 채록본(秋葉 隆, 朝鮮民俗志, 앞의 책).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23
면은 예술적으로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연희자 중 가장 기능이 뛰어난
사람이 연출할 정도로19)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한편 노장의 상대배역으로 등장한 2인의 소무는 어린 여자들로 노장뿐
만 아니라 취발이, 샌님, 포도부장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취발이
놀이에 나오는 소무는 노장과의 싸움에서 이긴 취발이의 아이를 출산하
고, 샌님과장의 포도부장놀이에서는 샌님과 포도부장 사이를 오가는 인
물로 나온다. 결국 힘센 포도부장에게 자신을 맡기고 샌님을 버리는 등,
놀이판에 등장하는 남자배역들과 다중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는 애사
당북놀이의 애사당․왜장녀 장면과도 비견된다. 소무와 애사당의 상대역
은 목중들, 말뚝이(목중), 노장(늙은 중), 취발이(술 취한 중)20), 샌님(늙은
유생), 포도부장 등으로 파계승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소무와 애
사당은 대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무언의 동작들로 상대역과 소통한다.
단지 춤을 추거나 법고놀이에서와 같은 움직임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다. 마치 상좌과장의 상좌들처럼 침묵의 언어로 놀이판에 등장해 상대
연희자들과 극을 전개해나간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대미를 장식하는 과장은 신할아비․미얄할미 과장
이다. 신할아비․미얄할미 마당은 무속적 색채가 짙은 것으로 양주별산
대를 맺는 마당이다. 이 장은 가족들 간의 갈등과 재결합을 묘사한다. 미
얄할미의 죽음이 도끼와 도끼누이의 등장을 초래하고 흩어져 지내던 가
족들을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굿이라는 매개체가 효과적으로 사
용된다. 특히 미얄할미의 자식인 도끼누이는 무당으로 미얄할미의 죽음
에서 진혼굿을 주관한다. 도끼누이는 노장과장의 소무와도 연관된다. 물
19) 秋葉 隆, 앞의 책, 177면.
20) 반면 취발이를 술 취한 중이 아니라, 파계한 노장을 벌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취발이는 도시 가면극에서 가장 부각되는 강하고 패기만만
한 민중 대변인으로서, 농촌 가면극에서는 볼 수 없고 도시 가면극에만 나오는
인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송파산대놀이, 도서출판 피아,
2006, 71-72면.
24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론 도끼누이는 할미를 위한 사령제의에서 이를 주제하는 적극적인 입장
을 고수하는 반면에 소무는 조무(助巫)의 역할을 하는 어린 무당이라는21)
차이점을 갖는다. 도끼누이는 빙의상태에서 미얄할미의 넋을 받아 가족
들에게 생전 못했던 말들을 해주는 등,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진오기굿
을 한판 벌인다. 이어 목중들이 들어와 할미의 시체를 들고 나간다.22) 신
할아비․미얄할미 과장은 여타의 과장들 보다 여성의 비중이 큰 마당이
다. 대부분의 과장들이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에 비해 신할아비․미
얄할미 과장은 도끼누이(무당), 곧 여성을 주축으로 전개되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양주별산대 전체 놀이마당들 중에서도 독립적인 구조를 지
닌다. 독자적인 플롯과 극적 구성이 탄탄하게 짜여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역할도 명백히 제시되어있어 다른 과장들과 차이를 보인다.
양주별산대놀이를 비롯한 중부지방 산대놀이의 배역 가운데 하급관속
이나 중인 및 상인 계층이 등장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23) 침놀이의 신
주부와 신장수(원숭이)놀이의 신장수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는 산대
놀이가 일반 서민의 삶을 반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신장수는 비단 양
주별산대놀이뿐만 아니라, 황해도 탈춤과 송파산대놀이 등에도 등장하는
평범한 장사꾼이다. 반면 샌님과장에 나오는 샌님과 ‘포도부장’24)은 신분
21) 양주별산대 소무에 관한 견해는 학자들 마다 입장을 달리한다. 특히 전경욱의
경우, 가면극의 소무를 나례에 등장하는 소매(小妹, 小梅)로 바로잡고 있다. 1920
년대 후반 학자들이 가면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소매’를 무당으로 오인해 소
무(小巫) 또는 소무당(小巫堂)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다양한
사료와 증언들을 토대로 이를 살피고 있어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414-416면. 그러나 이에 대한 고찰은 차후 稿를
달리해 논의하고자하며, 본고에서는 소무의 표기를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소무
(小巫)로 하고자 한다.
22) 채록본에 따라 이 절차(진오기굿과 목중들의 탈상행위)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전하는 양주별산대놀이(전수회관) 놀이마당에서의 공연은 이 부분을
강화시켜 연희한다. 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을 향한 공수와 덕담도 채록본대로
하지 않고 새로 각색해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23) 정형호, 양주별산대놀이, 앞의 책, 145면.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25
이 높은 인물을 형상화했다. 유형도 매우 대조적으로 묘사되었다. 샌님이
힘없고 성적으로 무능한 늙은 유생인 것에 비하여 포도부장은 젊고 성적
능력이 강한 인물로 그려졌다. 곧 샌님과 포도부장은 양주별산대 놀이판
에서 지체 높은 인물들로 다른 역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상에서 고찰한 양주별산대놀이 과장들은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축귀 성격의 과장과 해학과 풍자를 연출하는 세속적 성격의 장 그리
고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지닌 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상좌과장, 연
잎․눈끔적이과장 등은 의식무적 특색을 지니며, 반면에 노장과장과 샌
님과장 등은 당대 사회적 문제점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신할아비․미얄할미 마당은 제의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
제점까지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등, 앞서 지적한 특징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3. 성격구축을 위한 구성요소
양주별산대놀이의 중(僧) 과장은 다른 지방에 비해 팔목중들의 등장과
역할이 두드러져 있다. 팔목중과장과 노장과장은 이들이 나오는 대표적
놀이마당이다. 이 두 과장은 여타의 과장들에 비해 세부적인 놀이들로
구성되어 양주별산대놀이의 극적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동시에 관람객들
은 다채로운 볼거리들을 제공받게 된다. 팔목중 과장에 나오는 목중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속세를 유랑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이들은 중의 형
색을 하고 있으나 도(道)를 연마하는 스님이 아니라 비승비속의 인물들인
24) 포도부장이란 원래 도성을 지키는 종 5품에 해당되는 직급이 높은 무관이다.
그러나 산대놀이와 해서탈춤에 나오는 포도부장은 포교(捕校), 또는 포도군관
(捕盜軍官)이라고 불리는 군교(軍校)를 지칭한다. 정형호, 양주별산대놀이, 앞
의 책, 159면. 따라서 비교적 낮은 신분의 관리로 볼 수 있다.
26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것이다. 이처럼 중이 놀이판에 등장한다는 설정은 선비가 놀이판에 등장
하는 경우보다 극적 표현의 보다 풍부한 소재를 제공할 수 있다.25) 대체
로 팔목중의 구성은 상좌1, 상좌2, 목중1, 목중2, 목중3, 목중4, 옴중, 완보
를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목중 4명과 관(冠) 쓴 중이 포함된다고도 하고,
또는 완보와 冠쓴 중은 같은 것이라고도 하며, 반면 여러 목중을 가리키
는 범칭”26)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들 팔목중은 각각의 놀이마당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존재이다. 팔목중들은 한 가지 역할만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과장마다 다른 배역을 맡아 연기한다.
샌님과장에서 취발이 가면을 쓴 연희자가 쇠뚝이 역을 겸하고,27) 팔목
중 과장의 침놀이에서는 목중들이 병자(病者)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양
주별산대에 나오는 중들은 일인 다역을 연기한다. 말뚝이의 경우, 신장수
역할을 맡아 원숭이를 업고 놀이판에 등장하기도 하며 신할아비(미얄할
미) 과장에서는 신할아비의 아들인 도끼로 분한다.28) 말뚝이는 바로 팔목
중 마당인 염불놀이에서 ‘판염불’29)을 벌이고 질탕하게 노는 목중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말뚝이는 다른 팔목중들과 어울려 북을 치고 타령을
부르고 춤을 추지만, 아래 예문의 신장수(원숭이)놀음에서는 신장수로 분
장해 신발을 판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신발을 파는 말뚝이는 일반서
25) 조동일, 탈춤의 원리 신명풀이, 지식산업사, 2006, 207면.
26) 이두현 채록본(이두현, 韓國假面劇, 서울大學校出版部, 1995). 본 연구는 팔목
중의 범주를 목중1․2․3․4, 옴중, 완보(冠쓴 중), 상좌1, 상좌2로 보고자 한다.
27) 김지연 채록본(조동일, 탈춤의 원리 신명풀이, 지식산업사, 2006).
28) 김지연 채록본. 특히 말뚝이는 놀이판에서 많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오늘날
현전하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말뚝이는 2명 혹은 그 이상의 연희자들이 담당
한다. 말뚝이의 역할인 목중, 신장수, 도끼 등을 교대로 분담하여 연기하기 때
문이다.
29) 판염불은 불교 수행법중의 하나인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이 아니라, 사당패의
놀이꾼들인 거사와 사당들이 놀이판을 만들고 부르는 염불을 말한다. 이는 판
굿과도 비견될 수 있다. 판굿은 무당이 주관하는 굿이 아니라, 사물놀이패 혹은
풍물패 놀이꾼들이 벌이는 선반을 지칭하는 이유이다. 판염불의 레퍼토리로는
놀량, 산타령, 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 꽃방아타령 등이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27
민의 모습 그대로이다. 앞서 연기했던 목중과는 완연히 다른 인물로 비
춰지기 때문이다.
신장수(말뚝이) (원숭이를 보재기를 씌워 업고 등장하여 물건 파는 소리
를 왼다.) 진피 발막에 부녀신 사려-.
(…중략…)
노장 (부채를 번쩍 들어 보인다.)
신장수 네, 물건을 사시려구요? 물건을 살 것 같으면 몇치 몇치 쓰시렵
니까?30)
신장수 말뚝이는 신발값 대신 노장이 데리고 있는 소무를 유인해 뺏으
려고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소무를 사이에 둔 노장과의 대립에서
패배함으로써 퇴장 당하게 된다. 반면 취발이는 노장과 대립하여 소무를
뺏고 아이까지 낳게 된다. 결국 노장은 소무 한명만 데리고 놀이판을 떠
난다. 소무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싸움에서 말뚝이는 패배하지만 취발
이는 승자로 남게 된다. 이러한 대립구도는 비단 말뚝이-노장 및 취발이-
노장과의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옴중과장은 옴중과 상좌가, 목
중․옴중과장에서는 목중과 옴중이 맞서게 된다.
특히 각각의 과장마다 극중 인물들이 지닌 소품은 상대방과의 대결에
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한다. 예문은 취발이놀음에서 취발이와 노장이 대
결하는 장면이다.
노장 (취발이 앞으로 걸어나와서 부채를 홱 편다.)
취발이 (놀라서 물러서면서) 네밀헐 것 술 서너잔 먹어 얼굴이 지지버얼
거니깐두루 상봉 독수리가 꾸미자반인 줄 알구 훅훅 넘나들구
이거 깨딱하다간 얼굴 잃어버리겠다. (사방을 기웃기웃하면서 독
30) 이두현 채록본.
28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수리를 쫓는다. 노장 앞에 가서) 오려-이-익!
노장 (부채를 다시 홱 편다.)
(…중략…)
노장 (타령조에 맞추어 취발이와 맞춤을 춘다. 취발이 허리잡이 춤을
추는데 노장은 부채꼭지로 취발이를 후리친다.)
취발이 아 얘 딴은 중놈이 억세기는 억세다. 그러니깐두루 계집 둘 씩
데리고 놀지, 그렇쟎음 제가 계집 하나도 어려운데 참 억세다.
이눔 내 너한테 한 번 맞기는 맞았다마는 참새가 죽어두 짹 한
다구 한번 해 보자.31)
취발이가 노장의 부채에 반응을 보인다. 여기서 노장이 든 부채는 상
대방을 위협하고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물건이다. 앞서 제시된 노장과
신장수(말뚝이) 장면에서도 노장의 부채는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
으로 이용된다. 단지 제스처와 춤으로만 이야기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소
품을 사용해 상대방과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묵극(默劇)을 통
한 상대배역과의 의사소통에서 노장의 부채가 노장 자신의 의사전달 매
개체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파계승놀이에서 노장이 목에 걸었
던 염주를 소무들의 목에 걸어서 놀이판을 도는 장면은 소품을 활용한
메시지 전달의 극치를 보여준다. 목중들에게 둘러싸여 희롱당한 노장이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일어나지만 결국 소무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
한다. 끝내 소무들로 인해 파계되는 중의 모습이 목에 건 염주를 통해 표
현되고 있는 것이다. 염주는 예불시 번뇌와 업을 지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이를 벗어서 소무 목에 거는 행위는 노장이 타락한 중임을 자명
하게 해준다.
노장(老長)은 놀이판에 등장하는 중들 가운데 가장 큰 스님을 말한다.
일설에 노장스님은 고려시대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신돈(辛旽)과 관련되
31) 이두현 채록본.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29
어 있다고도 한다.32) 부채와 지팡이 그리고 염주를 목에 걸고 등장한 노
장은 시종일관 무언으로 자신을 가시화한다. 노장의 무언극 중,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으로 물을 퍼서 좌우로 손을 움직여 이를 닦는 제스처를
하고 다시 같은 방법으로 양손으로 물을 퍼서 얼굴 아래위를 문지른 후
물 묻은 손을 털어 버리고 왼손으로 오른쪽 장삼을 잡아당겨 얼굴의 물
을 닦아내는”33) 장면은 소무를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 서두를 의미한다.
이처럼 무언극으로 소무를 취하는 장면들은 노장과장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들로 볼 수 있다.
의상과 가면이 등장인물의 성격을 파악하게 해주는 주된 요인으로 작
용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완보의 경우 머리에 ‘관(冠)’을 쓰고 꽁무니에는
꽹과리를 찼다.34) 관과 꽹과리가 말해주듯이, 완보는 팔목중 가운데 지체
높은 신분으로 판을 이끈다. 놀이판에서 팔목중들에게 백구타령과 같은
노래를 시키기도 하고, 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면 자신의 꽹과리로 가락
을 넣어 공연장의 흥을 돋운다. 일설에 완보는 원래 여덟 번째 목중인 八
32) 高橋 亨, 「山臺雜劇に就いて」, 朝鮮第261號. 昭和12年 2月. 22면. 및 최상수,
앞의 책, 1996. 61-63쪽. 승려들의 타락상은 고려 말엽에 와서 극심하였는데, 특
히 공민왕 때의 간승(奸僧) 신돈(辛旽)은 유부녀 간음을 비롯한 온갖 사행으로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 이로써 신돈과 같은 파계승들을 풍자하는 놀음을 통해
맘껏 비웃게 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 노장과장에서, 속세에 내려온 타락한 중
을 여러 사람이 모여들어 엎어 놓고 떡치듯 하기도 하고, 또는 토막을 쳐서 먹
는 장면이 있는 것은 백성들의 파계승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반면, 김일출은 이 노장과장 자체를 고래(古來)의 처용무
와 같은 연극적 구성에 황진이(黃眞伊)와 지족선사(知足禪師)와의 고사가 결부
되어 형성된 무용극으로 보았다. 김일출, 조선 민속 탈놀이 연구, 한국문화사,
1998, 109면.
33) 김난현, 「韓國假面劇에서 老杖科場의 舞踊劇 構成 硏究」, 경희대학교 체육학과
박사학위논문, 2003, 78면 참조.
34) 완보는 채록자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는 인물이다. 완보를 관(冠) 쓴 중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를 다른 인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본 연구에서는 완보를 관(冠)
쓴 중으로 보고자 한다.
30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目인데, 金完甫라는 사람이 팔목 춤을 잘 추었기 때문에 팔목을 완보라
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35) 완보의 성격은 침놀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산대놀이를 구경하다 병이 난 말뚝이 자손들의36) 병을 고쳐주
기 위해 완보의 진찰이 시작된다. 이윽고 완보의 처방이 내려진다. 술병,
주당살, 상문살을 맞았고 모두 신명에 체했으니 신명풀이를 해야 한다며
꽹과리를 치면서 백구타령을 부른다. 말뚝이는 완보의 명령에 순순히 응
한다. 여기서도 시종일관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완보의 캐릭터가 부각된
다. 파계승놀이에서도 이를 살필 수 있다. 다른 목중들은 노장을 보고 놀
라서 도망가지만 완보만이 노장과 맞대결하여 희롱하는데 앞장선다. 마
찬가지로 완보의 일면을 고찰할 수 있는 장면인 것이다.
옴중은 얼굴에 옴이 난 중이다. 옴이 난 가면을 쓴 옴중이 목중과 싸움
을 한다. 이때 싸움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것이 옴의 벙거지와 가면이다.
옴중이 자신이 쓴 벙거지가 지체 높은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며 목중 앞
에서 한껏 자랑을 하다가 마지막에 빈대떡이라고 한다. 그러자 목중은
이를 먹으려 하고 이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또다시 옴중이 목중
의 가면을 트집 잡자 이번엔 목중이 옴 가면을 비하하면서 둘 사이에 싸
움이 붙는다.
목중 (옴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보고) 예끼 이 잡놈 같으니라고. 어디가
진옴을 잔득 올려가지고 와설랑은 뭐 호구별상이 전좌했느니 어송
화니 옥누니 개수작 다허고 이 멀쩡한 알도둑 녀석아 어디 가 아주
진담을 올렸구나 진짜 담을. (전신을 긁적긁적 긁으며) 에이쿠 가려
워 아이구 가려워.
옴 네밀할 놈, 남의 얼굴을 가지고 용천지랄을 하고 뺏다 박았다 개지
랄을 허더니 이젠 허다 못해 헐 말이 없으니까 이놈, 날더러 옴을
35) 조동일, 앞의 책, 216면.
36) 여기서 말뚝이 자손들은 상좌2, 옴중, 목중1이 맡아서 연기한다.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31
올랐다구? 여봐 쭝!
목중 왜 그랴.
옴 (분해서 소매를 걷고 싸움을 하러 덤빈다.) 뭘 올려.37)
대립은 목중․옴중 과장뿐만 아니라, 옴중 과장에서도 일어난다. 무대
에 나와 있는 상좌가 옴중의 물건인 막대기와 꽁무니에 찬 제금을 뺏으
면서 싸움이 벌어진다. 이에 화가 난 옴중이 의상인 장삼자락으로 상좌
를 위협한다. 마치 목중과 옴중이 옴중의 벙거지와 옴 얼굴(가면)을 두고
다투는 것처럼 옴중과 상좌 사이에 막대기와 제금이 다툼의 원인을 제공
해준다. 이와 같이 양주별산대놀이는 뺏고 빼앗기기의 반복동작을 통해
극의 흐름을 이어나간다. 빼앗긴 자는 퇴장당하고 뺏은 자는 남아서 다
음 장면의 인물과 연결된다. 여기에 소품․의상․가면이 등장인물의 극
적 행동 창출을 위한 동기를 부여해주고 있다.
반면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은 거드름춤과 깨끼춤이 주를 이룬다. 춤사
위는 극중 인물의 성격을 묘사해 줄뿐만 아니라 장면과 장면을 이어주는
이음새 역할을 한다. 첫째 과장인 상좌과장과 둘째 과장인 옴중과 상좌
과장 사이에서 상좌2는 염불장단에 따라 ‘거드름춤’38)과 팔뚝잡이춤을
추고 타령장단에 맞춰 ‘깨끼춤’39)을 춘다. 또한 둘째 과장과 셋째 과장의
37) 이두현 채록본.
38) 거드름춤은 ‘거들먹거린다’ ‘거드름피운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느린 6박의 염
불장단에 의해 몸 마디마디의 멋을 풀어감듯이 다져가며 몸 깊이 스며 있는 기
를 찾아내는 종교성이 있는 몸짓으로 일종의 몸부림과 생명의 꿈틀거림으로 해
석된다. 이 춤의 특징은 도무(跳舞)가 없이 주로 팔을 벌리고 느린 염불장단에
맞추어 사방을 향해 추는 것이며 거드름춤은 춤사위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깨끼춤을 동반하게 된다. 또한 그 동작이 느릿하면서도 무겁고 발을 벌
리고 장삼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잽이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동작이 주이
며 뛰는 동작은 없고 무폭이 큰 것도 거드름춤의 특징이다. 거드름춤으로는 사
방치기, 용트림, 합장재배, 부채놀이 등이 있다. 정병호, 韓國의 民俗춤, 삼성
출판사, 1993, 172면. 179면.
39) 깨끼춤은 산대놀이춤의 기본형인 바, 반드시 4박 타령장단에 맞추어 춘다. 현지
32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이음새인 옴중과 상좌 장면 마지막에도 옴중과 상좌가 춤을 춘다. 상좌
와 옴중이 한참동안 맞춤을 춘 후, 옴중이 장삼소매로 상좌를 후려쳐 내
쫓고 다시 용트림을 비롯한 거드름춤(염불장단)과 깨끼춤(타령장단)을 춘
다. 곧이어 목중이 등장하고 목중과 옴중의 대결이 시작된다. 이렇게 춤
사위는 인물들의 등․퇴장시 이용되어 극의 흐름을 원활하게 할뿐만 아
니라 대사 도중에도 들어가 인물의 심리상태를 표출해준다. 염불놀이에
서 팔목중들이 대사와 노래 사이사이에 연출하는 춤사위들은 이를 대변
한다. 나아가 두 사람이 대립구도를 형성할 때에도 춤이 활용된다. 서로
견주는 대무(對舞) 후에, 승자는 남고 패자는 퇴장하게 된다. 혼자 남은
승자는 혼자서 독무(獨舞)를 한다.
춤사위를 이용한 사건 전개는 시청각적 측면에서 메시지 전달의 효율
을 증진시킬 수 있다. 여기에 인물 성격을 강조하는 소품과 의상들이 조
화를 이루어 관객들의 참여도를 높이고 있다. 이는 양주별산대놀이가 야
외에서 진행되는 야외극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전달의 약
점을 보완시키기 위해 춤과 음악을 비롯해 소품․묵극․의상 등을 적극
적으로 개입시킴으로써 야외무대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있음이다.40) 인물
들의 다양한 역할 전환이 두드러진 점도 이에 기인한다. 등퇴장이 관람
인의 말로는 깨끼춤의 깨끼라는 말을 ‘깨낀다’ ‘깎는다’ ‘깎아내린다’ ‘깍아 없
앤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춤의 특징은 매듭매듭이 절도가 있으며
마치 무사가 적을 방위하거나 격파하는 듯한 무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라 하겠다. 깨끼춤은 그 움직임이 손을 내놓고 추는 것이기 때문에 손짓 동작
으로 된 춤사위가 많으며 춤동작의 매듭매듭 하나하나가 확실하고 섬세하며 무
폭이 작고 간사스럽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정병호, 앞의 책, 172-173면.
40) 양주별산대놀이에 사용되는 가면의 형태도 대사전달의 불리함을 자아내는 커
다란 요인이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의 형태를 살펴보면 절반가량이 대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으며, 대사를 하는 탈의 경우에도 입이 작고 턱이 고정되어 있
어 말소리가 관중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로 된 까닭은 놀이의
표현방법이 기본적으로 대사에 크게 의존하지 않은 상태로 전승되어 왔음을 입
증해준다.” 서연호, 山臺탈놀이, 열화당, 1997, 57면.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33
가면 의상 소품 대사
노장
검은바탕,흰점과붉은
점,깊은주름의눈,높은
광대뼈
호랑이를새긴회색장삼,
회색행전,붉은띠,송낙
지팡이,부채,긴 염
주, 작은 염주
투전
無
옴중
자주색바탕,흰바탕의
붉은색점들(옴),이빨
용을새긴장삼,회색행전,
옴벙거지,새끼띠
제금, 막대기2개 有
완보
(冠쓴 중)
붉은바탕,양볼에 곡선
주름
용을새긴장삼,붉은띠,
관
꽹과리 有
목중1
주홍색바탕,상하 흰선
과검은선들
용을새긴장삼,
회색행전,
붉은띠
有
목중2․3․4
주홍색바탕,상하 흰선
과검은선들
주홍색,갈색,연갈색쾌자 有
취발이
붉은바탕,눈꼬리처짐,
양볼․이마주름,혀,황색
머리털
학을새긴연두색쾌자,연
두색행전,붉은띠
귀롱나무가지
有
말뚝이
(신장수)
자주색바탕,얼굴에녹
색점,코․볼․입술에녹색
및검은점,벌린입,양볼
연두색쾌자,연두색행전,
붉은띠,패랭이갓
채찍
有
객들에게 노출되어 있어 사실적이고 섬세한 인물묘사가 불가능한 까닭
이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특성을 표현하는 대표적 소품들이 개입되고 그
에 수반되는 행동들이 발생한다. 완보의 관과 꽹과리, 옴중의 막대기․제
금 및 장삼 그리고 노장의 지팡이․부채․염주 등은 이를 잘 표현해준
다.41)
41) 표2는 인물들의 대표적 특징들만 요약한 것임을 일러둔다. 세부적인 사항들은
생략되었다. 말뚝이와 취발이의 경우, 팔목중 범주에 들어가지 않지만 노장과
의 대결 장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므로 이를 정리했다.
34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에큰점
상좌1
흰색바탕, 눈꼬리끝
붉은점, 붉은탈보
쾌자,흰도포,붉은띠,흰
고깔,흰행전
無
상좌2
흰색바탕,눈꼬리끝 붉
은점, 검은탈보
쾌자,흰도포,붉은띠,흰
고깔,흰행전
無
<표2> 노장과 팔목중의 소품․의상․가면 대조표
4. 僧과장의 역사적 전개와 변모양상
양주별산대놀이의 노장과장과 팔목중과장은 연극적 요소들을 풍부히
지니고 있는 놀이마당들이다. 파계승놀이(노장과장)에 오면 이제까지 다
투던 팔목중들이 서로 단합을 한다. 이들은 속세에 내려온 큰스님 노장
을 연평바다에서 잡아 올린 큰 물고기에 비유하여 노장의 머리와 몸뚱이
를 토막 내어 먹는 시늉을 하며 온갖 짓거리로 혼절시킨다. 실제 사원에
서 노장과 팔목중들은 사제지간 혹은 그 이상에 견줄 만큼 신분차이가
크지만 놀이판에서는 오히려 판을 주동하는 인물로 전복된다. 그런가 하
면 염불놀이에서는 염불을 불경하게 외워가며 서로 다툰다. 애사당북놀
이도 마찬가지이다. 목중 2명이 손에 북을 번쩍 들고 애사당이 이를 북채
로 치는 장면은 실제 사원에서 스님들의 법고 치는 행위를 속되게 묘사
한 것이다. 팔목중들이 놀이판에서 큰스님을 잡아먹고 염불을 저속하게
변형시키고 법고 치는 것을 풍자하는 행위 등은 사원에서 일어나는 일상
을 희화시킨 것들이다.
특히 염불놀이의 팔목중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무대공간을 점유한
다. 이들은 염불을 외우고 춤을 춘다. 또는 불림을 하며 반주음악에 따
라42) 타령을 부른다. 여기에 완보의 꽹과리 반주가 보태진다. 염불놀이는
42) 양주별산대놀이의 악기편성은 삼현육각이다. 삼현육각은 주로 무용반주음악으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35
이전에 전개되던 첫째과장에서 넷째과장에 이르는 분위기와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이들의 출연은 본격적 놀이마당으로의 진입을 뜻한다.
팔목중들의 개입으로 놀이판 분위기가 상승되기 때문이다. 단독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둘, 셋 혹은 그 이상 떼를 지어 이동하면서 놀이판 이곳
저곳에 흥을 창출한다.
앞서 밝혔듯이 팔목중의 구성은 채록자에 따라 이견이 있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양주별산대에서는 4명의 목중들이 나와 놀이판을 이끌어간
다. 여기에 상좌1, 상좌2, 옴중, 완보가 보태진다. 이에 비해 봉산탈춤은 8
명의 목중들이 등장한다. 봉산탈춤의 목중들이 한사람씩 나와 개인기를
뽐내는 반면, 양주산대에서는 목중들끼리 극적 전개를 위한 사건을 일으
키고 이로 말미암아 대사, 노래, 불림, 춤이 진행되는 차이점을 보인다.
양주산대의 팔목중들은 팔목중과장은 물론이고 다른 놀이마당에서도 주
체적인 존재로 열연한다. 이들은 목중 역할을 비롯해 말뚝이, 신장수, 도
끼, 도련님, 서방님 등의 일인 다역을 소화시켜 다른 인물들을 형상화하
고 상대 배역과의 맞대결을 통해 놀이판을 주도해나가는 연희자이기 때
문이다.
그렇다면 이 팔목중들은 어디서 연유된 것이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
가? 먼저 팔목중의 행보를 쫓기 위해 ‘거사패’라는 무리들을 살피고자 한
다. 여말선초에 이르면, 사원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여러 가지 문제점들
이 발생하게 된다. 이에 대대적인 정비를 촉구하는 상소들이 잦았다. 사
원은 더 이상 불도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었다. 조세와 부
로 쓰이는 악기편성법으로 향피리2, 대금1, 해금1, 장구1, 북1로 편성된다. 삼현
육각은 관악기 중심의 편성이므로, 대[竹]풍류라고도 한다. 대풍류와 삼현육각
이라는 용어는 그 음악이 감상 위주일 경우에는 대풍류라고 하고, 그 음악이
무용반주와 관련지어질 경우에는 삼현육각이라고 한다. 양주별산대에 사용되는
곡은 주로 경기대풍류의 긴염불(염불타령)과 중허튼타령․잦은허튼타령이다.
원혜진, 「양주별산대놀이 반주음악의 연구」, 韓國音樂史學報제30집, 韓國音
樂史學會, 2003. 6. 521면.
36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역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호적도 없이 떠도는 무리들로 연일 고충을
겪었다. 이른바 ‘거사’라고 불리어졌던 무리들이다. 성종실록에서 거사
(居士) 혹은 사장(社長)으로 불리어졌던 패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접할 수 있다. “사(社)를 대도(大都) 閭閻(여염) 속에 짓고서 염불소(念佛所)
라 칭하며, 생업도 버리고 분연히 무리를 모아 검은 옷을 입고 검은 冠을
쓴 남녀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그 모양을 보면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
니며, 그 거처를 보면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닙니다. 아침에는 시장의 이익
을 독점하고 저녁에는 佛에 귀의하며, 기이한 형태와 괴상한 형상으로
잡답하게 두루 돌면서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너울너울 춤추고 뛰니 거
리의 아이들과 부녀들이 둘러보며 흠모합니다.”43) 이는 거사패들의 일상
을 기록한 것이다. 주시해야할 곳은 기괴한 형상으로 몰려다니며 악기연
주와 춤을 추었다는 부분이다. 거사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놀이를 벌
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거사는 사당(社堂)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들은 부부관계를
맺기도 하고 가무와 소리를 하며 놀이판을 주도하였다. 판소리 <박타
령>44)에 보면, 사당과 거사가 나와 판염불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으며45)
43) 성종실록2년 6월 己酉. 사헌부 대사헌 韓致亨이 올린 상소문. 권신재, 「居士
考」, 韓國人의 生活意識과 民衆藝術,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4, 460
면이 참조됨. 이외에도 정조실록10년, 2월 丙申條에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居士라는 것은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자로서, 編籍에서 이름이 빠지고 身役
이나 軍布가 없으니, 떠돌아다니는 백성들 중에 가장 수상한 자입니다. 더군다
나 근래에 흉측한 무리들이 이 무리들 속에서 발각되었으니, 우환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이 할 수 없습니다.”라는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앞서 살핀
성종실록기사와 상당한 간극을 갖는다. 이는 거사패들의 존속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최윤영, 「산대놀이 팔목중에 관한 일고찰」, 문헌과 해
석48, 문헌과 해석사, 2009, 115면에서 재인용.
44) “놀보가 하릴없이 제 손수 눅이것다. “나오던 중 상이로다. 너희들 장기대로 염
불이나 잘하여라.” 사당의 거사 좋아라고, 거사들은 소고 치고, 사당의 절차대
로 연계사당(軟鷄寺堂)이 먼저 나서 발님(발림)을 곱게 하고, ...” 신재효著․강한
영譯, <박타령>, 한국판소리전집, 서문당, 2007, 207면.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37
현전하는 봉산탈춤의 제 3과장인 사당춤에서 사당과 거사가 나와 놀량
사거리를 합창하는 장면과도 상통한다. 나아가 양주별산대의 애사당 법
고놀이마당에 등장하는 애사당과 연결되고 있다. 즉 거사와 사당의 행보
가 오늘날 가면극 놀이판에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중들은 겉은 중의 형색을 하고 있지만 불
도에 매진하는 스님이 아닌, 바로 이 거사패의 후예들로 볼 수 있다. 그
렇다면 파계승에 대한 풍자라기보다는 이들의 일상 중 한 부분을 드러내
는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거사패들은 유랑연희패들 중의 하나로 거사패
의 구성원인 거사와 사당들은 탈놀이판의 거사 및 사당과 직결된다. 실
제로 사당과 거사가 등장하는 “봉산탈춤,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는 관청 소재지나 주요 장시(場市)를 배경으로 전승된 읍치(邑治)탈놀이
의 형태로 이들 지역은 유랑예인들이 주요 활동 거점”46)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곧 거사들의 일상이 놀이판에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팔목중
과장은 이를 대변한다.
앞서 이들이 놀이판에서 사원의 일상과 거사패의 일상을 형용하고 있
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거사패가 그들 삶을 극중 공간에 표출하는 것
에 대해, 거사패 스스로가 행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제3의 인물들이
개입해 표현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바로 ‘반인(泮人)’이라는 무리들이다.
반인은 궁중 천역(賤役)에 종사하던 하층민으로서 산대도감(山臺都監) 혹
은 나례도감(儺禮都監)에 예속되었던 이들을 지칭한다. 반인은 ‘궁중 산
45) 이른바 사당패(社長輩)라 부르던 非僧非俗 집단의 남녀들은 특이한 복장을 하고
항간에 나와 북을 울리고 춤을 추고 염불을 하며 시주를 걷던 놀이패를 말한다.
이들 사당패는 본디 염불을 메기고 받는 사람들이었다. 사당패소리를 念佛 또
는 판念佛이라 일렀으며, 雜歌之類에서와 같이 男女和唱하는 가요였음은 주지
의 사실이다. 이보형, <선소리 산타령>, 문예진흥100,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5. 8. 163-164면.
46) 정형호, 「탈놀이의 八먹중과 불교의 八部衆 神將의 관련성 고찰」, 韓國民俗學
38, 한국민속학회, 2003. 12. 465면.
38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대놀이’47)의 연희자로서 활동하였다.48) 이후 인조 즉위(1623년)와 함께 산
대조설의 전통이 폐지되어 산대를 축조하는 일이 없어지자 그들 자체적
으로 산대놀이를 행하게 된 것이다.
산대조설 금지와 함께 이른바 본산대놀이라 불리어지는 놀이패들이
생겼지만, 그중에서도 애오개(아현)산대놀이패가 주목을 받았다. 양주별
산대 형성에 애오개 본산대놀이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
이다. 본산대놀이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이에 관한 관련 자료로 <남성
관희자(南城觀戱子)>를 살펴볼 수 있다. <남성관희자>는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이 10살 때(1778년) 산대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시(詩)이다. 이중
양주별산대의 노장과장을 연상시키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49) 이 시는
오늘날의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과 동일한 배역이 상당수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애오개(아현)의 본산대놀이를 구경하고 지은 것으로 추정된
다.50) 따라서 산대조설 폐지 년도인 1623년과 155년이라는 시간상의 거리
를 지닌다. 이 거리는 산대 및 궁중 산대놀이의 폐지 후, 경기지방 산대
놀이가 형성되어 발전한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51)
47) 궁중 산대놀이의 규모는 방대한 것이었다. 산대의 규모만 보더라도 대붕(大棚,
대산대)은 길이 75척 너비 60척, 중붕(中棚, 중산대)은 길이가 60척 너비가 40척
에 달하였다. 최윤영, 앞의 책, 358면. 나아가 궁중 산대놀이에 동원된 연희자들
의 규모 또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위의 사람들이 이에 관여되었다.
48) 秋葉 隆, 앞의 책, 172면.
49) 노장스님 어디서 오셨는지?(老釋自何來), / 석장을 짚고 장삼을 걸치고(拄杖衣袂
裕). / 구부정 몸을 가누지 못하고(龍鍾不能立), / 수염도 눈썹도 도통 하얀데(鬚
眉皓如鷺). / 사미승 뒤를 따라오며(沙彌隨其後), / 연방 합장하고 배례하고(合掌
拜跪屢). / 이 노장 힘이 쇠약해(力微任從風), / 넘어지기 몇 번이던고?(顚躓凡幾
度). / 한 젊은 계집이 등장하니(又出一少妹) / 이 만남에 깜작 반기며(驚喜此相
遇). / 흥을 스스로 억제치 못해(老興不自禁), / 파계하고 청혼을 하더라(破戒要婚
娶). 임형택譯, 李朝時代 敍事詩(하), 창작과 비평사, 1992, 304면.
50) 전경욱, 앞의 책, 385면.
51) 김일출의 경우, 경기지방의 산대놀이가 고려시대 이래로 전해져온 산대잡극(山
臺雜劇)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각 지방의 가면극을
고려시대 대표적 공연양식이었던 산대잡극에 결부시켜 이를 통시적으로 고찰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39
그러나 사원의 질서와 중들의 형용을 골계적으로 희화해 놀이 대상으
로 삼은 것은 비단 가면극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정현석의 교방가요를
보면, 교방정재 중의 하나로 <승무(僧舞)>가 연행된 것을 알 수 있다. 흡
사 가면극의 노장과장을 연상시킨다. 그림1의 <승무>에는 노장과 상좌,
기생과 젊은 남자(선비)가 등장한다. 이는 무언극형태의 극무(劇舞)로 가
면을 쓰지 않고 연희된다는 점에서, 양주별산대 파계승놀이와는 사뭇 거
리가 있다. <승무>는 기생과 노승, 선비가 서로 서로 희롱하다가 종국에
는 모두 음란해지고 미치광이가 된다는 내용의 춤이다.52) 교방가요는 정
현석이 김해부사를 지냈던 시절(1870 - 1873)에 완성된 것으로 시대상으로
보아 양주별산대 놀이의 성립보다 앞선다. 반면 본산대놀이를 관극한 것
으로 추정되는 <남성관희자>(1778년)보다는 더 나중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1> 승무(僧舞)
<사진1> 파계승놀이
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김일출, 앞의 책, 109면.
52) 정현석著․성무경譯註, 敎坊歌謠 -조선후기 지방 교방(敎坊)의 악․가․무(樂
歌舞), 보고사, 2002, 220-223면.
40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본 연구의 주제와 관련지어 노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이외에 취
발이, 소무(소매) 등, 현전 산대놀이 가면극의 인물들이 <남성관희자>
<승무> <희무대타령>53) 등에 등장한다. 무엇보다 노장은 양주별산대에
서 묵극과 춤으로만 성격을 구축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희자들
중에서도 노장역은 상당한 수련기간을 지낸 노련한 연기자들이 도맡는
다. 노장은 팔목중들이 노는 곳에 개입하여 극의 흐름을 상승시키는 주
요한 인물이다.
노장을 비롯해 양주별산대 놀이판에 중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은 궁중 산대놀이에 조설되었던 산대의 잡상인형들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궁중 산대놀이에서, 산대에 장치되었던 산대잡상 인형들 가운
데 중들이 특색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시대 산대인 침향산(沈香
山)과 신라시대 산대인 만불산(萬佛山)에 중인형들이 장치되어 산대에 성
격을 부여해주었다. 이에 필자는 한국가면극, 특히 중부지방 산대놀이에
중과 중과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산대에 진설된 잡상들 속에 중인형들이 존재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점이 산대놀이에 다수의 중들이 출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
다. 여기에 시대적인 상황, 즉 거사패들의 증가와 그에 따른 온갖 폐행들
이 반영되어 이를 놀이로 승화시켰다는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곧 산대
의 중인형들과 거사들의 일상이 僧과장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는 점이다. 아래 예문은 중인형이 장착되었던 산대를 인용한 것이다.
다시 금과 옥을 새겨 물려 술과 기폭이 달린 일산이며 향기로운 과실
나무들과 각양 화초들이 장엄하였으며 군데군데 누각과 정각과 전각들이
53) 황성신문 1900년 8월 9일 논설란에 <희무대타령(戱舞臺打令)>이란 글이 실려
있어 이목을 끈다. 이는 본산대놀이의 관극을 홍보하는 글로, 특히 “小巫堂과松
納長衫老長僧이라”라는 구절은 노장과장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41
대체로 작기는 하지만 그 기세는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빙빙 산돌이 하는 중 인형이 1천여 개가 있고 아래는 자줏빛 금으로 만든
쇠북 세틀을 벌려놓았는데 종각과 종을 다는 고리쇠와 고래형상으로 된
종치는 고가 모두 있었다. 바람이 불어 종소리가 울리면 산돌이 하던 중
들이 모두 바닥에 닿도록 엎드려 절을 하면서 은은히 불경 외우는 소리가
들렸으니 이것은 대체로 쇠북 속에 나사기계가 들어있음이다.54)
이는 신라시대 조설되었던 만불산의 형용을 묘사한 것이다. 만불산(萬
佛山)이라는 명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중인형이 특색을 이루는 산
대이다. 만불산은 신라 경덕왕(제35대)때 축조된 것으로 당대 산대조설의
풍속을 잘 드러내준다. 중인형이 1천개나 진설된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소리와 불경외우는 소리가 들리
도록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흡사 염불놀이와 애사당법고놀이의 한 장면
을 연상시키게 한다. 기술력 또한 조선시대와 비견될 만큼 우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산대놀이와 시간적으로 상당한 격차를 지닌
다. 그러나 신라의 산대조설 유풍이 고려시대에 그대로 답습되었고 나아
가 조선시대로 이어져왔음을 상기할 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은
조선의 침향산(沈香山)을 기록한 것이다.
나무로 산 모양을 만들고 전면과 후면에는 피나무[椴木]로 봉만(峯巒,
뾰족한 산봉우리)을 조각하여 붙이고, 사탑(寺塔)․승불(僧佛)․미록(麋鹿,
고라니와 사슴) 등 여러 가지 모양[雜像]을 만들어 산골짜기에 깃들이고
모두 채색한다. (…중략…) 밑에는 바퀴통[輪桶] 4개를 달아 침향산을 끌
수 있게 한다.55)
조선시대 침향산에도 산대잡상들 중에 중인형이 장착되었음을 알 수
54) 최윤영, 앞의 책, 354면에서 재인용.
55) 최윤영, 앞의 책, 339면에서 재인용.
42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있다. 특히 침향산은 산대조설이 금지되기 전 가장 많이 사용된 산대인
동시에 산대조설의 대미를 장식했던 가설 산이다. 따라서 애오개본산대
놀이꾼들이 궁중 산대놀이의 연희자로 활약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본산대놀이 후예들이 산대 및 궁중 산대놀이 전통의 계승자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궁중 산대놀이의 놀이꾼으로 참여했을 당
시 침향산의 유풍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산대 및 궁중 산대놀이의 전통을 기억하고 이를 답습하여 놀이판에 구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문제점으로 지적된 거사들의 일상을 골
계적 놀이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연희시기도 이를 뒷받침해준
다.56) 양주별산대가 연희되었던 사월초파일은 신라, 고려시대 때 가장 큰
규모의 산대가 가설되었던 지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친경례, 친잠
례, 나례 등을 비롯한 궁중 행사시에 대규모의 산대가 조설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즉 궁중 산대놀이의 전통이 시기적으로도 영향을 주었
다는 것이다.
5. 연희사적 의의
양주별산대놀이는 화려한 의상과 춤사위를 비롯해 극을 구성하는 요
소요소에 단아한 형식미가 스며들어 있다. 등장인물(가면) 또한 다양하게
구성되어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가면극으로 자리하고 있다. 각각의 과장
56) 양주별산대의 연희시기는 국가에 경사스런 일이 있거나 관아의 나례로서 행해
졌다. 뿐만 아니라 3월3일 상사의 절구, 4월 8일 국사당의 제사(마쓰리), 5월5일
성황당의 제사(마쓰리), 9월9일 단풍놀이 같은 읍락의 연중행사 때에도 행해졌
다."それは國家の慶事の場合や、官衙の儺禮として演じたのみならず、三月三
日上巳の節句、四月八日國師堂の祭、五月五日城隍堂の祭、九月九日丹楓の遊
といふやうな、邑落の年中行事の際に演じ、" 秋葉 隆, 앞의 책, 173면.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43
들은 인물 형상화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다.
팔목중과장과 노장과장은 불교를, 연잎․눈끔적이는 불(佛)․도(道)․유
(儒)의 요소를 그리고 신할아미․미얄할미 과장은 무속 문화의 특징을 지
닌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소품 및 가면, 의상, 묵극, 춤
사위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극중 인물의 형상화를 도모한다. 옴중의
막대기와 제금, 완보의 관과 꽹과리, 노장의 묵극과 춤사위 등은 이를 대
변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등장인물들의 극적 행동 창출에 개입되어 연기
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에게도 인물의 성격을 쉽게 파악시
켜주는 방편으로 활용된다. 무엇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각 계층에 속한
인물들의 삶과 이들 삶에 젖어든 애환을 양주산대 특유의 해학적 언어로
구사해냄으로써 관람객과 연희자들을 하나로 엮어내는데 효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는 궁중 산대놀이의 전통을 답습한 본산대놀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궁중 산대놀이는 산대를 가설하고 노는 연희
풍습으로서 역대 왕조들 모두 이를 중요시 여겼다. 나례도감 혹은 산대
도감 등은 이를 관장했던 부서로 산대제작에 따른 수천 명의 노동력과
대단위의 목재와 물품 등을 주관하였다. 산대는 왕권을 상징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신신앙을 재현한 구조물로서 놀이풍습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다. 본산대놀이는 바로 이러한 산대 유풍을 답습한 것으로서 산대조설이
금지된 이후 번성하게 된다. 이는 산대폐지 후, 산대놀이의 놀이꾼들을
주축으로 본산대놀이의 분화 및 발전이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
다. 궁중 산대놀이에서 활약했던 애오개본산대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가
만들어지는데 막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또한 궁중산대놀이의 놀이꾼들이
애오개본산대 놀이꾼이었다는 점에서, 양주별산대놀이는 궁중 산대놀이
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희로 평가될 수 있다. 나아가 양주별산대놀이가
우리민족 고유의 산대조설 유풍을 계승해 이를 다시 새로운 민속 놀이문
44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화로 거듭나게 하였다는 점은 연희사적 측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과제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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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外国語抄錄
<楊州別山臺ノリ>を中心とする
僧科場の登場人物と歴史的展開に関する小論
崔尹榮
この研究は<楊州別山臺ノリ>に登場する僧侶たちの類型と特性を考究し、そ
の歴史的展開の様相を考察するものである。さらに<楊州別山臺ノリ>の成立背
景である山臺および山臺ノリとの連関性を明らかにしようとする。楊州別山臺を始
め、現在まで傳わる山臺ノリの伝統は宮中の山臺ノリ流風を踏襲したものであり、
それは仁祖の卽位年(1623)の山臺造設の禁止に起因する。山臺造設の禁止が
民間の山臺ノリを誕生させた重要な要因として作用したためである。このような山臺
ノリペの中で、阿峴山臺ノリぺは楊州別山臺ノリの形成に絶對的な役割を果し
た。
京畿道の楊州を中心に伝わった<楊州別山臺ノリ>は僧侶たちの出演が見所
である。彼らは、楊州別山臺のほぼ全てのノリマダンで重要な位置を占めるだけ
でなく、その仮面の数も22個にのぼる。老僧を始めモクチュン、オムチュン、上
佐、完甫などはその代表的な人物である。何よりも楊州別山臺のノリマダンのなか
で老僧科場とパルモクチュン科場はほかの科場たちに比べ、繊細なノリで構成さ
れ、<楊州別山臺ノリ>の劇的構成を多彩にする主な要因として作用している。登
場人物たちは役所の性格を作り上げるために仮面だけでなく、衣装、小道具、
舞、パントマイム、などを積極的に活用している。
このように<楊州別山臺ノリ>で僧呂たちの登場が特別な意味をなすことは当時
の時代的な背景を反映させたためである。いわゆる'居士''祠堂'と呼ばれる
人たちの增加、そしてこの人たちがしでかした弊風がノリとして昇華されたのであ
<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최윤영 47
접 수 일 : 2009년 8월 31일
심사기간 : 2009년 9월 1일〜9월 19일
게재결정 : 2009년 9월 19일
る。このことは現傳する<鳳山タルチュム>第3科場(祠堂踊り)の祠堂と居士お
よび<楊州別山臺ノリ> エサダンプクノリに登場するエサダンに連結される。即
ち、居士と祠堂の足跡が現時の仮面劇ノリパンに影響を及ぼしたのである。
また、ほかの要因として、宮中山臺ノリで山臺に陳設されだ僧呂の人形があげ
られる。特に沈香山は山臺造設の最後を飾ったもので、<楊州別山臺ノリ>形成
にとって決定的な役割をした<阿峴山臺ノリ>演戱者たちが宮中山臺ノリの演者と
して活動した時代の踏襲した山臺だと見られている。従って、<阿峴山臺ノリ>
演戱者たちが沈香山の流風に慣ってこれをノリパンに再現させただけでなく、当時
の社会の問題點として指摘されている居士たちの日常を滑稽的なノリの対象にした
のである。
キーワード:楊州別山臺ノリ、阿峴山臺ノリ、老僧、パルモクチュン、上佐、
オムチュン、完甫、山臺、山臺ノ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