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서림사지(襄陽 西林寺址)
삼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석조비로자나불좌상(강원도 문화재자료)
- 걍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 (상평초등학교 현서분교장 교정)
1965년 논에서 발견, 이곳 학교로 옮겼다.
석탑은 고려후기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 안정감이 없으며 빈약하다.
석불, 머리는 없어졌다 몸도 많이 상했다.
위 받침돌(상대석) 여덟 면에 돋을새김이 있다. 향로 1구, 보살상 7구이다.
가운데 받침돌(중대석) 형식은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에서 볼 수 있다.
아래 받침돌(하대석)은 기초석 위에 네 조각 석재로 각 면마다 사자상을 돋을새김하였다.
팔각형 대좌 일부가 없어졌지만 매우 우수한 석불이다.
(안내문 등 인용 정리)
석불이 만든 시기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 서림사는 언제 처음 지었는지 기록은 없고 조선시대엔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있다.
서림사가 있었던 지역도 어디라고 분명하게 밝힐 수도 없지만 탑과 석불이 발견된 논 주 위가 아닐까?
약사여래입상(금동불상) 한 점도 발견, 국립춘천박물관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양양군 서면, 현서 분교장에서 곧장 가면 구룡령이다.
길이 눈에 익다. 점봉산 가려면 이곳을 지난다. 예전에 이곳을 지난 적이 있다.
서림사지에서 선림원지, 지도상에는 가깝다. 산을 넘으면 가깝게 갈 수 있지만 현실은 도로를 따라 가야 한다.
선림원지는 '국립미천골자연휴양림' 안에 있다. 입장료를 내야 한다. 문화재만 보고 나오겠다고 하니 그냥 보내준다. 감사!
미천골은 선림원(절)에서 쌀 씻은 물이 하얗게 흘러 미천(米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옛날 절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양양 선림원지(강원도 기념물)
- 강원도 양양군 서면
9세기쯤 건립, 900년대 산사태로 절이 무너진 것으로 본다. 이후 폐사 상태로 지금까지 왔다.
1948년 선림원지에서 나온 범종 명문에 신라 애장왕 5년(804) 순응법사(順應法師)가 선림원 건립에 간여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출토된 기와나 유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선림원에 머문 홍각선사(弘覺禪師)가 다시 지은 것으로 여져진다.
1985년~1986년 발굴조사에서 금당터와 조사당터를 발굴하였다.
2015년~2018년 발굴조사에서 승방 등 여러 건물터를 발굴, 금동불, 금동, 풍경, 정병, 와당 등이 나왔다.
(안내문 인용하여 정리함)
순응법사는 이름이 낯설지 않아 찾아보기를 하니 합천 해인사를 처음 지은 승려다.
홍각선사는 낯설다.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위, 아래 받침돌(두 기단) 위에 몸돌(탑신)을 세 층으로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탑이다.
위 받침돌에 팔부중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진전사 삼층석탑에 비하여 가늘어 보인다. 전체 균형미가 조금 떨어지지만 나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오른편에 승탑, 멀리 석등과 탑비가 있다. 탑비 옆엔 건물터가 있다.
양양 선림원지 승탑(보물)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파손된 것을 1965년 11월에 수습하여 현재 자리에 복원하였다.
원래 위치는 산 중턱으로 추정하고, 바닥돌과 받침돌만 있었는데 2015년 발굴 때 지붕돌로 여겨진 유물이 발굴되었다.
가운데받침돌은거의 둥그스럼한데 여기에 돋을새김한 용과 구름무늬는 정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밑받침돌은 2단, 사자 한 쌍씩 네 면에 새겨 장식, 그 위의 단은 연꽃잎을 돋을새김하였다.
양양 선림원지 석등(보물)
높이 약 3m, 화강암, 홍각선사 탑비와 같이 신라 헌강왕 원년(886) 세원진 것으로 보인다.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보물)
귀부(받침돌)와 이수(머릿돌)만 있었고, 몸돌(비신)은 파편만 있었으나 2005년 몸체를 복원하여 세웠다.
몸체 파편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다. 글씨는 왕희지체다.
선림원지, 이곳에서 보물 네 점을 보았다. 다음 기회엔 바쁘지 않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입장료를 내고 미천골을 즐겨야겠다. 내년 가을에 다시 올까? 몸보다 그래도 가을색이 곱지 않을까? 아름다운 곳이다. 발걸음이 쉬게 떨어지지 않았다.
만월산 명주사(滿月山明珠寺) /전통사찰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1009년(고려 목종 12)에 혜명(惠明)과 대주(大珠)가 창건, 이름 한자씩을 따서 '명주사'라 하였다고 한다.
1123년(인종 1) 산내 암자인 청련암(靑蓮庵)과 운문암(雲門庵)을 세웠다.
1673년(숙종 2) 수영(秀瑩)이 향로암(香爐庵)을 지었다.
1701년에는 법당 맞은편에 벽옥루(碧玉樓), 1781년(정조 5)에는 연파(蓮坡)가 원통암을 짓고 관음보살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1849년(헌종 15), 1860년(철종 11)에 불로 타버리고, 1861년 월허(月虛)와 인허(印虛)가 중건하여 만일선회(萬日禪會)를 개설.
향로암을 서쪽으로 옮겨 중건하여 보련암(寶蓮庵)으로, 1879년(고종 16) 불탄 뒤 1880년에 일봉(日峯)이 중건하였다.
1897년 다시 불타자 산내 암자였던 원통암(圓通庵)으로 옮긴 뒤 '명주사'라 하였다.
1899년 향로전을 짓고, 1906년 사역을 확장하여 중건하였다.
1917년 주지 김백월(金白月)이 크게 중건, 1923년 주지 윤설호(尹雪昊)가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때 폐허, 한동안 방치, 1963년 수룡(壽龍)이 법당과 삼성각,추성각(秋聲閣)을 중건, 1979년 마근(麻根)이 중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주사 안내문 인용하여 정리함)
처음엔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화엄종 계통의 절이었다고 한다.
어성전리, 7번 국도를 다니면서 많이 본 마을 이름이지만 와보기는 처음, 높은 산은 멀리 보이지만 골이 깊다.
어성전리 가는 길에서 이정표를 보니 진부와 정선이 나온다. 고개는 비포장이라고. 다음 기회에 지나 가야겠다.
현재 명주사가 있는 자리는 산내 암자인 원통암 자리이다.
명주사가 있었던 터는 어딘지 알 수 없으나 원통암에서 500m 떨어진 곳, 지금 부도군이 있는 곳 아래쪽이다.
(명주사에 있는 스님한테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접근성이 안 좋다고 하니, 스님이 웃는다.
평소에 신도가 찾질 않는다고 한다. 초파일에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올 때, 초파일에 신도가 온다고.
마을 신도, 80대 고령, 걸어서 올 거리는 아니다. 이동 수단이 불편하니.....
현 지주는 얼마 전가지 본사인 신흥사 주지를 하셨던 분이라고 한다.
일주문
양양 명주사 부도군(강원도 문화재자료)
부도 열두 점, 비석 네 점, 모두 조선후기에 세웠으며 명주사 주위에 있던 것을 한 곳으로 모았다.
경남지역에 잘 볼 수 없는 형식이 몇 점 보인다. 탑신(몸돌)이 타원형이다.
당호가 분명하게 보이는 승려는 내가 이름을 아는 분들이다. 책 동사열전에 나오는 분들이다.
설봉당
동사열전엔 설봉거일, 설봉완점, 설봉회정 등 이름이 나오지만 이분들 회정은 행적이 있다.
비문을 해석한다면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설봉 회정(雪峯懷淨), 숙종 4년(1678) 태어남. 영조 14년(1738) 해남 미황사에서 입적.
추암당
연파당
연파 혜장(蓮坡惠藏), 설봉 회정의 증손자뻘 제자.
전남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 연파 34세, 정양용 44세, 이 두 분의 우정이 두텁다.
세수 40세, 대둔사(해남 대흥사) 북암에서 입적.
이렇게 적으니 의심이 든다. 옆 비석을 해석한다면 분명하겠지만, 전남에서 활동한 승려가 강원도 이 골짜기까지?
인곡당 탑비, 월허당 탑
무?당(? - 내 실력을 읽을 수 없음)
중봉당(좌)
중봉 혜호(中峯彗皓), 동사열전 승려 '남호 영기; 행적이 이름이 나온다.
양양 명주사 동종(강원도 유형문화재)
1704년(조선 숙종 30) 만들었다.
극락전
삼성각
폭포 이름은 모른다. 나와 이야기한 스님이 나한테 보고 가라고 권하였다. 위에 쌍폭, 아레는 조금 더 높은 폭포.
요사
이곳이 원래 절터였을까?
2023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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