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에 있었던 일본 국적 민항기 요도號 납치사건에 대해 당시 관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요도號는 일본 적군파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김포공항에 착륙했는데 우리 군경이 납치범들을 검거하는데 실패하고 결국은 월북하고 말았죠. 아쉽습니다. 對테러특공대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다면 민항기를 납치한 빨갱이들을 박살낼 수 있었을텐데....
이하 2003년 월간조선 7월호 기사입니다.
●『중앙정보부장이란 사람이 전화로 김포유인 지시』 ●『조종사에게 평양공항이라고 속였다. 조종사는 지시를 잘 따랐다』 ●『해주 상공 지날 때 북한軍이 고사포 발사』 ● 金浦에서 승객 전원 풀려나다 ● 金浦 착륙 유도 지시자는 아직 不明
<1970년 3월31일 일본의 좌익 과격단체 赤軍派(적군파) 9명은 도쿄(東京)발 후쿠오카(福岡)行 항공기 「요도號」와 승객ㆍ승무원 129명을 납치, 북한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기장은 범인들을 속이고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했으나, 이를 알아차린 범인들이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3일간 한국 軍警(군경)과 대치했다. 범인들은 결국 일본 정무차관을 대신 인질로 잡고 승객들을 풀어준 뒤 4월3일 김포를 떠나 평양에 도착했다. 범인 9명은 이후 국제수배됐으나 북한은 이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상이 인천공항이 2002년 발간한 「세계 항공 보안 사건 사례집」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 「요도號 사건」에 대한 공식기록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기장은 범인들을 속이고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했다」는 대목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납치범들은 3일간 기내에서 당국과 대치하다 야마무라(山村) 신지로 당시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잡는 대신 기장과 승무원 3명을 제외한 승객 전원을 풀어줬다. 북한은 9명 전원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했고, 4월5일 야마무라 차관과 승객,항공기를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다)
요도號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이 지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조차도 「왜 평양으로 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김포에 내리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30일, 기자는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요도號 사건」 당시 자신이 요도號를 관제해 김포공항에 내리게 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관제사를 만났다. 蔡熙錫(채희석ㆍ63) 前 공군 제7항로보안단 소속 관제사. 蔡씨는 33년이 지난 당시의 일들에 대해 『국가의 체모가 손상될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항공관제사로서 관제범위인 40마일 반경을 넘어선 구역에 들어가 요도號를 관제한 것은 분명한 越權(월권)이고 항공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마치 의사가 자기 전공분야가 아닌 환자를 받아 수술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왜냐하면 조종사에게 해당지역의 정확한 기상정보와 고도, 활주로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에 비행기를 山에 부딪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蔡씨는 『평양으로 향하고 있던 요도號를 평양관제소로 위장해 서울의 김포공항에 내리게 한 것은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공중 납치당한 일본 비행기를 한국 정부가 다시 공중 납치한 셈이라고 했다. 그는 30년이 넘게 간직해 온 누렇게 빛바랜 요도號 조종사와의 통화기록 문건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이 문건은 「랩컨」(RAPCONㆍRadar Approach Control ㆍ 레이더 진입유도 관제 시스템)의 리코딩 테이프를 타이핑한 것으로 A4용지 3장 분량이다. 이 문건은 테이프, 근무일지 등과 함께 「사건」 발생시 관제사의 역할을 증언해 주는 것으로서 비행기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건 첫머리에는 「Any station, Any staion, this is JAL 8315 (어떤 공항이든 응답하라. 여기는 일본항공 8315)」라는 첫 문장이 긴박했던 당시 요도號 조종사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 3월31일 발생한 요도號 사건이 엊그제일 같다며 입을 열었다.
지난 3월31일 이른 아침 하네다(羽田) 공항에 모인 9명의 적군파들은 각자 후쿠오카(福岡)行 일본항공 351편에 탑승했다. 사용기종은 보잉 727, 「요도號」였다. 요도號는 일본항공 8315의 애칭으로, 요도(淀)는 오사카 근교에 있는 江이다. 당시 일본의 항공기에 붙인 애칭은 요도號 사건 이후 사라졌다. 당시 금속탐지기도 몸수색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적군파들은 무기를 몸에 숨겨 機內(기내)에 갖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항공기 납치 방지법」을 제정해 금속탐지기와 수하물의 엑스선 검사가 의무화했다. 이날 후쿠오카行 일본항공 351편이 실제로 하네다 공항을 이륙한 것은 정각보다 10분 정도 늦은 오전 7시21분이었다. 이륙 후 10분이 경과했다. 기체가 급상승을 마치고 후지山 상공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우리들은 적군파다! 北朝鮮으로 가자!』 요도號로부터 공중납치됐다는 긴급 연락이 지상관제탑으로 온 것은 3월31일 오전 7시30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기장 이시다 신지(石田眞二)는 국내선 여객기였던 요도號가 평양까지 가려면 후쿠오카의 이다즈케(板付) 공군기지에 착륙해 給油(급유)를 해야 한다고 범인들에게 말했다. 오전 7시40분, 비행기는 나고야 상공에 접어들고 있다. 7시50분 나고야(名古屋) 고마키(小牧)기지에서는 자위대 정찰기가 일본 방위청의 연락을 받고 긴급 발진, 요도號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7시53분, 일본항공 항로과에는 요도號로부터 다음과 같은 무선 연락이 들어왔다. 『후쿠오카에 착륙결정. 납치범들은 폭탄을 보유. 실패할 경우는 자폭한다고 말하고 있다. 후쿠오카에서 연료보급 중에는 다른 것은 일체 다가오지 못하게 할 것. 보급 후에는 평양으로 향한다. 지도 ㆍ 나침반을 부탁한다』 오전 8시59분, 요도號는 후쿠오카 이다즈케 공항에 착륙했다. 9시42분, 「중학교用 지도라도 좋으니 북한지도를 넣어 달라」는 교신이 날아왔다. 국교가 없는 북한으로의 비행은 요도號 승객 ㆍ 승무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본 경찰과 일본 항공 측은 機體(기체)가 북한으로 가게 되면 반환교섭이 힘들어진다며 급유를 지연시켜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전북 익산 출신의 蔡씨는 이리 남성高를 졸업하고 경기大 영문과 1학년 재학 중인 1963년 공군에 입대했다. 당시 공군 7항로보안단은 김포공항의 관제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부대였다. 그는 1966년 2월 오산 비행장 관제사로 파견근무를 하게 된다. 그는 1968년 美 연방항공국(FAA)으로부터 항공관제사 면허를 취득했다고 한다. 당시 김포공항은 美 5공군 2146통신전대가 미군 작전機를 통제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었다. 1968년 1ㆍ21 사태와 북한 원산항 앞 公海上(공해상)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號)가 북한의 해군초계정에 의해 납치된 사건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군 측은 당시 高價 레이더 장비인 「랩컨」을 갖추게 된다. 美 2146통신전대는 한국 공군에 영어를 잘 구사하는 한국 공군 관제사를 추천해 달라고 의뢰한다. 여기에 선발된 蔡씨는 1968년 3월 공군7항로보안단에서 2146통신전대로 파견근무를 가게 됐다. 한국인 중에서 「랩컨 관제사」 1호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요도號가 후쿠오카에서 給油를 하고 있던 그 시각, 蔡관제사는 공군 지프를 타고 김포공항에 있는 「랩컨」에 도착했다. 그는 그 시각을 오전 11시30분 정도로 기억했다. 그의 원래 근무시각은 낮 12시였다. 「랩컨」에 들어서니 김포 통신 대대장인 켈러(Keller) 대위와 착륙관제사 이모 준위, 보조관제사인 홍모 상병, 미군 서너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한국 공군 헌병(대위) 두 명도 서 있었다. 蔡씨는 켈러 대위 등 실제로 「랩컨」을 책임지고 있는 미군들이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랩컨」은 통상 근무조장(Watch supervisor ㆍ 미군) 밑에 40마일을 관제하는 진입관제사(Approach controller), 20마일을 관제하는 패턴 관제사(Pattern controller), 10마일을 관제하는 착륙관제사(Final controller), 보조관제사(Assistant controller) 등 5명이 한 조로 구성돼 24시간 4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다. 주한 美대사가 켈러 대위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공군 관제사 중에서 요도號를 관제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고, 켈러 대위는 『한국 공군에서 관제허가(Rating)를 갖고 있고, FAA(美 연방항공국)에서 관제사 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서 蔡熙錫씨를 지목했던 것이다. 주한미군이 평양으로 날아가는 요도號 관제를 포기한 이유는, 「랩컨」의 최대 관제 거리가 40마일이기 때문에 평양으로 향하는 요도號를 자신들이 관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미군도 정당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관제조장 자리를 일시적으로 제게 넘기고 뒤로 한 발 물러섰던 것입니다. 요도號는 「랩컨」에서 관제할 수 없는 비행기였던 것입니다. 평양에 내리려는 비행기를 원산 근교에서 잡아 김포에 내리게 한 것은 바꿔 말하면 「도둑질」입니다』 『미군은 제게 요도號를 김포에 내리게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랩컨」이라는 레이더 관제 시스템을 제게 전적으로 위임한 것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작전권」을 위임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미군이 이 사건에 개입됐다면 절대로 제게 마이크를 주지 않았을 겁니다』 蔡씨는 「랩컨」 규정상 40마일만 관제할 수 있는 접근 관제 시스템으로 관제할 수 있는 최대범위인 200마일까지 채널을 사용해 관제에 들어갔다. 그는 『미군이 규정상 할 수 없는 일을 한국 정부가 떠맡은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한국 정부가 「요도號를 꼭 서울로 데려와야겠다」는 의지가 없이는 이런 결정이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12시30분경 「랩컨」에 있는 레이더 스코프(radar scope·電波映像鏡)를 바라보고 있던 蔡씨에게 보조관제사가 공군에서 전화가 왔다며 바꿔 주었다. 『나, 중앙정보부장인데… 자네 누구야?』 『관제조장입니다』 『이건 각하의 지시야. 납치된 비행기가 지금 후쿠오카 이다즈케 공군기지에 있는데, 이유 불문하고 비행기를 김포공항에 내리게 해! 비행기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조종사에게 서울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아!』 蔡씨는 「이타즈케」라는 당시로서는 낯선 기지 이름과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직함에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이러한 지시는 항공관제사로 볼 때 「넌센스」입니다. 왜냐하면 평양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 그것도 130여 명의 승객을 태운 민항기에게 기상, 고도 등 잘못된 정보를 준다는 것은 자칫 무고한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후 1시40분. 후쿠오카에서는 갑자기 요도號로부터 노인과 어린이 23명이 석방되었다. 사태는 이것으로 해결로 향하는 것으로 보여졌으나 그것은 「신사협정」에 지나지 않았다. 給油(급유)를 마친 요도號는 승객 99명을 태운 채 오후 1시59분 후쿠오카 공항을 이륙했다. 이시다 기장이 일본 귀환 후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때 후쿠오카 공항 항로과에서 요도號에 넣어 준 지도는 항공지도가 아닌 중학생用 학습지도 한 페이지를 복사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蔡씨는 중학생用 학습지도로는 평양 공항에 착륙할 수 없다고 했다. 항공지도라야 해당국의 공항위치와 각종 활주로 정보가 들어있어 비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시다 기장이 일본에 돌아가서 회견한 내용을 보면, 일본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관제사와 조종사 간의 대화를 범인들이 이어폰을 연결해 다 듣고 있기 때문에 韓日 간 물 밑 협의가 있었다고 해도 조종사에게는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없었겠지요. 조종사는 무조건 평양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만약 일본 정부가 범인들을 自國內에서 체포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타즈케 공군기지에서 급유를 하는 동안 「작전」을 했어야 합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이타즈케에서 노약자 23명을 내린 「신사적 협상」 이외에는 더 이상 진전이 없자 평양行을 사실상 「OK」해 준 것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가 이 사건을 자국내에서 해결하려 했다면 이타즈케 공군기지의 관제사가 「can not take-off(이륙금지)」을 선언하면 됩니다. 조종사는 공중에서 가장 弱者(약자)입니다. 승객들을 보호해야 하고, 범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평양으로 가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평양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조종사라고 해도 평양으로 갈 후쿠오카 공항을 떠난 지 35분이 지난 오후 2시32분경, 요도號의 機體는 일본해를 북상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이시다 기장은 北北西로 진로를 변경했다. 요도號는 대구 항공관제소(ARTC·Air Route Traffic Center)에 비행기의 위치 및 고도를 보고했고, 항공관제소에서는 김포의 蔡씨에게 요도號의 위치 및 고도를 통보해 주었다. 요도號는 「한국 방공 식별 구역」(KADIZ·Korea Air Defence Identification Zone)에 들어오면서 대구 항공관제소에 『고도를 2만8000피트로 해달라』고 요구했고,항공관제소에서는 이를 「승인」 했다. 機體는 천천히 선회해 방향을 바꿨다. 그때였다. 조종석 오른쪽으로 전투기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 공군 전투기의 스크램블(scramble · 긴급출격) 비행이었다. 기자는 당시 우리 공군의 요도號 스크램블 출격을 확인하기 위해 孫周鉉(손주현·72) 당시 제30방공관제단장(준장)을 만났다. 그는 요도號가 후쿠오카에 있을 때, 우리 정부에서 요도號가 공중납치된 사실을 알았다고 증언했다. 『오산의 제30방공관제단, 일본 요코다(橫田)의 駐日 美 5공군, 하와이의 지역통제센터(Regional control center) 간에는 긴밀한 공중 작전사항에 대한 정보교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전 10시경, 美5공군 공군 작전 통제 센터로부터 「일본항공기가 공중납치됐는데 범인들이 평양行을 원한다. 대비하기 바란다」는 연락이 왔어요. 駐日 美 공군을 통해 온 협조 의뢰 사항이었고, 한국 공군은 통상적인 작전범위內에서 통제를 한 겁니다』 3월31일 오후 2시20분경, 후쿠오카를 이륙한 요도號가 우리의 「한국 방공 식별구역(KADIZ)」에 들어오면서 오산에 있는 공군방공관제단(AC&W ㆍ Aircraft Control & Warning)본부에 있는 지휘소에서 요도號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물론, 요도號는 비행계획(Flight Plan)에 나와 있지 않은 비행기지만, 日本 美 5공군에서 비행기의 정보를 통보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未확인 비행물체」는 아니었다. 孫장군은 『우리는 민간항공기라고 해도 他국적이고, 비행계획에도 없으면 「전술적」으로 취급한다』면서 『비행기를 식별하기 위해 당시 스크램블을 띄웠다』고 했다. 孫周鉉 장군은 『당시 10전투비행단과 11전투비행단에서 각 2대의 F-5A 팬텀기가 스크램블 비행에 가담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30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명확치 않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공군의 스크램블 비행은 「한국 방공 식별 구역」을 넘어오는 순간부터 38선을 넘어갈 때까지 계속됐다고 했다. ─스크램블 비행을 지시하신 겁니까. 『스크램블 비행은 제30방공관제단장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전실 책임자(영관급 장교)가 未식별 항공기가 있다면 스크램블 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북한 측은 요도號에 대항하는 전투기를 띄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앙정보부로부터 요도號의 김포착륙에 대한 지시를 받지는 않았나요. 『요도號를 김포에 강제착륙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전술적으로 작전면에서 공군에서 개입한 일이 없습니다』 ─스크램블을 위해 전투기 몇 대가 떴습니까. 『이때는 2대가 번갈아 떴지만, 스크램블의 최소단위는 2대이고 짝수로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기본단위를 2대로 하는 것은 요격을 위한 전술행동을 취할 때 한 대는 엄호를 하고 나머지 1대는 식별을 합니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전투기들은 赤軍派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비행했을 겁니다』 오후 2시45분경, 김포공항 「랩컨」 안에 있던 공군 헌병 대위 두 사람이 다가와 권총을 빼들었다. 蔡씨는 긴장이 됐다. 포항 상공 부근을 날고 있던 요도號를 감시하던 蔡관제사에게 요도號의 음성이 들렸다. 요도號는 평양 부근 관제탑을 필사적으로 불렀다. 『Any station, Any station, this is JAL 8315, JAL 8315, 121.5, do you read me? (어떤 공항이든, 어떤 공항이든 응답하라. 여기는 일본항공 8315, 일본항공 8315, 비상주파수 121.5 메가 사이클, 잘 들리는가? )』 蔡♥熙錫 관제사는 순간적으로, 진입관제 주파수 버튼을 돌렸다. 『JAL 8315, this is Seoul app control, go ahead. (일본항공, 여기는 서울접근관제소, 말하라)』 불과 0.1초 차이였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만일 요도號가 평양을 찾는 소리를 北에서 먼저 듣고 주파수 버튼을 눌렀다면 요도號는 평양의 공항에 착륙했을 것이다. 蔡씨는 조종사가 통상적인 SOS인 「Mayday(메이데이)」 대신 「Any station」을 부른 것에 주목했다. 『조종사가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상식적으로 「Mayday」라고 했어야죠. 「Mayday」를 부른 비행기에 대해서는 관제사들이 「우선권(priority)」을 줍니다. 인근 하늘에 있는 비행기를 깨끗하게 치워 줍니다. 요도號는 조난신호인 「Mayday」를 외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요도號가 조난신호를 해서 우리 정부가 서울로 데려왔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겁니다. 조종사는 평양 착륙을 위해 평양의 관제탑을 애타게 불렀던 겁니다』 『첫 교신에서 조종사는 자신의 위치를 「we are approx position is rad 030 degrees from Seoul, 80 NM(대략 서울 기점 30도, 80해리 지점)』이라고 보고했다. 이것으로 미뤄 조종사는 38선을 훨씬 넘어 원산 근방에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蔡씨는 축척 1만5000분의 1 지도를 펴놓고 각도기와 30cm 자(尺)로 그 지점(강원도 安邊 부근)을 정확하게 찍어 주었다. ─왜 38선을 넘기 전에 요도號를 유도하지 않았나요? 『상식적으로 38선을 넘기 전에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항공관제에서는 관제사는 조종사를 먼저 부를 수 없습니다. 조종사가 비상주파수로 이야기해야 그때 주파수를 맞춰 교신을 하는 겁니다. 요도號는 한국 방공 식별 구역을 넘어오면서 대구 기지에 高度 승인 요청을 한 번 했을 뿐 평양行을 위해 北으로 곧장 올라가 38선을 넘었던 겁니다』
蔡씨는 요도號 조종사가 『여기가 평양 접근 관제소인가?』라고 물었을 때 가장 식은땀이 났었다고 회고했다. 조종사에게 거짓으로 서울 김포공항의 주파수(134.1 메가 사이클)를 평양 주파수라며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蔡씨를 더 가슴 졸이게 만든 것은 『서울 진입 관제』라고 말한 직후에 같은 목소리로 『여기는 평양 접근 관제소』라고 한 것을 조종사가 혹시 알아차리면 어떡하나 하는 점이었다. ─왜 처음부터 평양이라고 하지 않고 서울 진입 관제소라고 했나요? 『조종사가 부른 긴급 주파수 121.5 메가사이클은 어느 공항 관제소나 다 들을 수 있어요. 그러니 그 긴급 주파수를 평양관제사도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평양」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서울이라고 교신하게 한 다음, 서울 진입관제 주파수인 134.1메가사이클을 「평양」이라고 하고 준 것이죠. 그래야 의심을 안 할 것 아닙니까? 그다음부터는 제가 평양으로 위장하고 관제를 한 겁니다. 다행히 조종사도 잘 따라왔고요』 ─관제사가 조종사에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라디오 체크입니다. 내 말이 잘들리는지 말의 감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반드시 기상상태를 일러 줘야 합니다. 김포공항의 구름, 視程(시정), 러닝(활주로 길이), 海拔(해발) 등입니다. 저는 요도號 기장이 요구하는 평양 공항 정보를 주지 못하고 서울 공항 정보를 준 겁니다. 관제사로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는 요도號가 평양의 활주로 방향(각도)을 물어왔을 때가 가장 난감했다고 한다. 『만일 범인들이 사전에 평양 공항의 활주로 방향을 알아두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 쪽의 교신을 끊어버렸을 겁니다. 얼마나 섬뜩해요. 식은땀이 났지만 배짱으로 밀어붙였어요. 그때 파일럿의 음성에 웃음이 묻어나며 「탱큐, 써」 하더군요. 그때 안심했지요』 ─조종사가 어떤 일이 있어도 평양으로 가겠다면, 만약 교신하는 곳이 서울 관제소라는 것을 알게 되면 교신을 일방적으로 끊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것 때문에 勞心焦思(노심초사)했습니다. 조종사가 일방적으로 교신중단(Radio-out)을 선언하면, 저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왜 비행기를 놓쳤느냐」는 추궁을 받았을 것이고… 아무튼 조종사의 음성에서 웃음이 묻어나기에 저는 안도했습니다. 無線(무선)이라도 감정은 살아 있더군요. 조종사들은 젖먹이가 엄마를 찾듯 관제사에게 매달립니다. 새떼, 돌풍 등에 대해서는 아무리 베테랑 조종사들이라도 겁이 나거든요』 그는 1970년 3월31일자, 동아일보 「호외」를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제목은 「被拉 JAL機 金浦 비상착륙」이었다. 그는 『우리 공군 관제사가 요도號를 誘導해 김포공항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착륙시킨 것이기 때문에 「비상착륙」은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했다. ─서해안으로 빠져나간 요도號가 機首(기수)를 인천 쪽으로 틀 때, 北측에서 요도號를 향해 고사포를 발사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요도號가 평양을 지나 南浦를 거쳐 서해안으로 빠져나올 때 270도로 회전을 했습니다. 이때 오산 방공사령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해주 근방에서 고사포가 발사됐다구요. 나는 비행기가 안전하게 인천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고했어요』 ─ 관제기록에 보면 「스콱(Squawk)」이란 지시를 많이 하시던데요. 『스콱은 관제사가 자신이 관제하는 항공기를 레이더 스코프(radar scope)에서 더 잘 식별할 수 있도록 조종사에게 계기를 조작하라는 지시입니다. 관제사는 「레이더 컨택」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이 관제하는 비행기를 레이더 스코프에서 확인하려고 노력합니다. 당시 40마일만 볼 수 있는 진입 관제 레이더 스코프를 최대 200마일로 넓혀 놓고 항공기를 확인하려니까 점이 너무 약해 다른 비행물체들과 혼동됐습니다. 그래서 노말(Normal), 아이덴(Ident), 스탠바이(Standby)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비행기의 위치를 알리게 한 겁니다』 ─관제사에게 「레이다 컨택(radar contact)」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레이더 스코프上에서 관제사가 해당 항공기를 완전하게 식별해 관제사의 책임하에 관제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레이더 컨택을 선언하니까 요도號 조종사가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謝意를 표시하는 것도, 「당신의 비행기는 이제부터 내가 책임지고 공항에 착륙시켜 주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지요. 레이더 컨택은 쉽게 말하면 이제까지는 비행기를 스콱킹으로 확실하게 식별한 후에 「넌 내거야!」를 선언하는 겁니다』 「레이다 컨택」이 선언되면 조종사가 일방적으로 교신을 끊는 행위를 할 수 없고 관제사의 유도에 따라 착륙에 진입하게 된다. 따라서 관제사는 「레이다 컨택」이 되면 이전까지는 비행기의 방향(각도)만 조종했지만, 이때부터는 항공기의 高度까지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순간부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관제기록을 보면, 「일본항공 8315, 200도 방향과 9500피트 고도 계속 유지하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데. 『관제규정에는 30초 동안 진입 관제사와 조종사가 서로 대화를 하지 않거나, 착륙관제사와 착륙을 앞두고 마지막 10마일 지점에서 5초 이상 대화가 끊기면 「異狀관제(missed approach)」라고 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라도 반복을 해야 합니다』
3월31일 오후 2시52분, 하네다 공항을 떠난 지 7시간 30분. 요도號는 38도선 비무장지대를 넘었다. 오후 3시경, 요도號는 동해를 북상, 좌회전하여 북한 상공을 가로지른 뒤 南浦방향으로 빠져나가 산동반도 못 미친 지점에서 선회해 드디어 김포 상공에 도달했다. 요도號는 蔡관제사의 유도에 따라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여기는 평양 착륙관제, 150도 방향으로 선회해서 降下를 시작하라. 바람은 280도 방향에서 8노트의 속도로 불고 있다. 착륙을 허가한다」 이시다 기장은 고도를 내려 착륙태세에 들어갔다. 지상이 조종석 목전에 다가왔다. 기체의 「쾅」하는 충격이 전해졌고 제동을 걸었다. 요도號가 미끄러지듯 김포공항에 착륙했고, 3000m 활주로 南端(남단)까지 간 후 誘導路(유도로)에 조금 機首를 밀어넣으면서 미군 기지 가까운, 일반인들과 격리된 장소에 정지하게 되었다. 오후 1시59분 후쿠오카를 이륙해 약 1시간 20분이 경과한 오후 3시19분이었다. 「랩컨」에서도 환호성이 울렸다. 뒤에 있던 미군들은 蔡씨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You’re hi─jacker, today is your day!(당신이 최고의 하이제커야! 오늘은 당신의 날이다!)』라며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기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北朝鮮에 도착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범인 중 하나가 마이크를 잡고 승객들에게 인사말을 했고 승객들도 안도의 환성을 질렀다. 드디어 평양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체는 얼마후 트랩이 설치됐다. 그러나 범인들이 문을 열려고 할 때 『이곳이 평양이 아니다!』라는 비명이 터졌다. 범인 중 하나인 고니시 다카히로(小西隆裕)가 외제차와 미군 비행기를 발견한 것이었다. 조종석 밖으로 노스웨스트 항공기 꼬리 부분에 마크도 보였다. 미제 지프와 흑인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蔡관제사는 요도號가 안전하게 착륙하자, 관제를 타워(Tower)로 넘기고 요도號 기장에게 주파수 118.1 메가 사이클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요도號 기장은 타워로 가지 않고 김포 진입 관제소의 주파수(134.1 메가 사이클)를 계속 사용했다. 요도號가 도착한 직후, 김포공항을 평양의 공항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原色(원색)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꽃다발을 든 20여 명의 여인들과, 지프에 붉은 마크를 그리고 인민군 복장에 다발총을 든 군인들도 오갔지만 그것으로 범인들을 평양 공항이라고 믿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蔡씨는 『중앙정보부에서 김포를 평양으로 해도 좋다는 등 착륙을 위해 모든 권한을 부여해 주었지만 현재 요도號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를 보고해 달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서 『후쿠오카에서 1시간20분 만에 무사히 도착하니까 공항 僞裝(위장)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범인 중 하나가 에자키(江崎) 부기장의 뒤에 난 창문으로 상체를 내밀어 요도號에 다가온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일본어로 『여기는 평양입니까』하고 물었다. 『네, 평양입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라고 공항 직원은 일본어로 대답했다. 『지금 북한에서는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있을 텐데 올해가 몇 년째냐』라고 물었다. 그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그들은 金日成 초상화를 가져다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우리 측에서는 신속히 대응을 하지 못해 초기 「위장 작전」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범인들의 지시로 요도號 조종사 이시다가 관제사 蔡씨에게 교신을 시도했다. 『A/C: JAL 8315, We saw the black people upon hill. Is that the Pyung Yang? (요도號: 일본항공 8315, 언덕위에 흑인들이 보인다. 평양이 맞는가?) Con: Affirmative. Those black people are Russian. (관제사: 맞다. 흑인들은 러시아인들이다) A/C: Radio out.(요도號: 교신 차단) 진입 관제소와 요도號 사이에 교신 두절된 지 15분 정도 경과되었고 요도號로부터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A/C: JAL 8315, we do need air. (요도號: 일본항공 8315, 기내에 공기가 필요하다) Con: This is Seoul approach control, open the door. Once again, open door. (관제사: 여기는 서울 접근 관제소, 탑승구를 열어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탑승구를 열어라)』 蔡씨는 이때 비로소 「서울 접근 관제소」라는 말을 했다. 범인 중 한 사내가 승객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들은 속았다! 하마터면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덫에 빠질 뻔했다. 일본 정부는 자기들이 처리해야 할 문제를 한국 정부에 떠맡기려고 하는 비열한 책동에 나섰다. 이곳에 일주일, 한달을 잡아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北으로 간다는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저항하는 자에게는 철저하게 제재를 가하겠다』 범인들은 韓日 양국 정부가 공조해 요도號를 김포공향에 유도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결국, 김포에 착륙한 요도號의 승객ㆍ승무원들은 좁은 기내에서 3박4일 동안 감금당하게 됐다.
蔡熙錫씨의 주장대로 요도號의 김포 착륙은 한국의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을까? 蔡씨는 사건 직후 언론에 일절 등장하지 않았다. 신문 인터뷰에 등장한 관제사들은 요도號를 관제하지 않았던 「타워」의 관제사들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중앙정보부에서 그에게 요도號 관제 사실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4월3일 오후 6시30분 요도號를 북한으로 보내는 것으로 요도號 사건을 마무리했던 蔡씨는 그의 美軍 친구들이 『당신이 만일 공중 납치당한 미국 비행기를 유인해 김포에 내리게 했다면 백악관에 초청됐을 것이다』라며 『왜 일본 비행기를 유인해 가택연금을 당하느냐』고 했을 정도였다. 그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전역을 신청했으나, FAA 관제사 면허를 소지하고 있던 그를 공군은 놓아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듬해인 1971년 6월30일, 8년7개월의 軍생활을 마감했다. 대한항공, 노스웨스트 등에서 「운항관리사」로 일하려던 그의 꿈도 동기생보다 늦게 전역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다고 한다. 그는 판문점內 기념품점을 운영중이다. 지난 6월8일, 기자는 일본을 방문 중인 丁來赫(정래혁ㆍ78) 당시 국방장관을 전화로 연결했다. 丁장관은 인명존중을 첫 번째로 하라는 朴대통령의 지시를 근거로 한국 측의 메시지를 직접 작성해 관제탑을 통해 무선으로 요도號에 전달함과 동시에 오후 8시, 機內(기내)의 적군파에게도 직접 전달했던 인물이다. 공항의 최고 관리책임자는 본래 교통부 장관이었지만 비상사태에 들어간 공항은 軍이 관리했던 것이다. 丁장관은 요도號가 김포공항에 착륙하도록 한 것은 국방부가 지시한 것 아닌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지시한 바 없다』고 했다. ─국방장관이 지시하지 않았다면, 누가 요도號를 김포에 내리게 했다는 말인가. 『중앙정보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난 공군에서 스크램블 나간 것도 보고받지 않았습니다』 ─요도號가 공항에 착륙했을 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청와대에 있을 때 요도號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를 받았어요. 나는 놀라서 朴正熙 대통령에게 사태를 보고했고, 朴璟遠(박경원) 내무부장관 차에 동승하고 김포공항으로 향했지만, 요도號가 먼저 김포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미 공항에서는 위장공작으로 인한 혼란이 시작되어 있었어요』 ─어떤 지시를 내렸습니까. 『비행장 주변에 F-86 미군 전투기와 美軍들이 보이는데 몇 사람이 「작전」을 한다며 난리를 피웁디다. 범인들이 이미 서울인 줄 다 아는데 작전이 성공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작전은 안 먹힐 뿐 아니라 나라의 수치니까 당장 집어치우라고 했습니다』 당시 교통부 장관이었던 白善燁(백선엽ㆍ84) 장관을 만나 그때의 상황을 들었다. 김포공항은 「서울 지방 항공국 김포 관제소」로 교통부의 소관이었으나 白 前 장관도 요도號가 어떤 경위로 김포에 오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 白 前 장관은 1970년 4월4일, 납치된 요도號 승객의 석방교섭을 위해 4월1일 내한한 하시모토(橋本) 일본 운수상으로부터 『일본이 한국에 신세를 많이 졌는데 갚을 방법이 없겠느냐』는 말을 듣고 『지하철 건설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 사안은 그해 7월21일 열린 제4차 韓日 정기각료회의에서 일본 측의 한국 원조 계획의 하나로 포함되기도 했다. 요도號가 평양으로 직접 가지 않고 한국의 유도로 김포에 내림으로써 일본 정부는 한국에 「정치적인 빚」을 지게 된 셈이다. 일본 사토 에이사쿠(佐藤藥作) 일본 수상은 6월3일, 朴正熙 대통령에게 電文을 보내 『납치된 JAL機 승객의 석방을 위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보여 준 협조에 대해 日本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 사의를 표한다』고 했다. 기자는 일본 측이 요도號를 김포공항에 내려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없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쓰카모토(塚本) 당시 駐韓 일본대사관 무관에게 전화를 했다. ─요도號가 공중 납치되자 한국 정부에 「김포에 내려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나. 『없습니다. 공중납치된 요도號가 후쿠오카에 있을 때, 가네야마(金山) 주한 일본대사가 外務省(외무성)에 전보를 쳤습니다. 「韓日관계를 고려해 볼 때 절대 요도號가 한국에 내리면 안 된다」는 내용을 외무장관에게 보냈습니다. 가네야마 대사는 요도號 비상착륙이 미칠 韓日관계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조종사와 부조종사에 대해 서울에 내린 경위를 조사했습니까? 『조사했어요. 그들은 한결같이 김포를 평양이라고 생각하고 내렸다더군요』 ─조종사들은 어떻게 그곳이 평양이라고 생각했나요? 『강릉을 지나고 보니 이북에 온 줄 알았답니다. 요도號가 「평양이냐」고 불렀더니, 한국 측 관제탑이 일본 비행기가 평양에 내릴려고 하는 것 아닌가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서울로 유도한 것이라고 봅니다. 일등공신은 관제탑입니다. 평양이라고 한 것은 중앙정보부의 위장일 것입니다』 관제사 蔡熙錫씨의 증언대로 중앙정보부장이 지시한 것일까. 만일 관제사 蔡씨가 개인적인 판단으로 김포에 내리게 했다면 그는 처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기자는 지난 6월10일 당시 金桂元(김계원·80)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평양으로 향하고 있는 요도號를 김포에 내리도록 한 일,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으로 위장하라는 지시를 내린 일은 결코 없다』고 했다. 金 前 부장은 관제사와 통화한 것도 부인했다. 요도號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 관제사 蔡씨의 관제기록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평양으로 향하는 요도號를 김포에 유도ㆍ착륙시킨 이상, 누가 관제사에게 김포 유인 착륙을 지시했는가가 가려져야 할 것이다. 요도號를 조종한 기장 이시다 신지(石田眞二)는 일본으로 돌아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에게서 표창을 받는 등 「영웅」이 됐지만, 요도號를 자유 대한의 품에 내려놓은 한 관제사는 「정신적 연금」상태에서 아직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 글 : 오동룡 · 吳東龍 기자 月刊朝鮮 2003년 07월호 | |
| | 蔡熙錫(채희석ㆍ전 관제사) | | 전북 익산 출신의 蔡熙錫씨는 이리 남성高를 졸업하고 경기大 영문과 1학년 재학 중인 1963년 공군에 입대 했다. 당시 공군 7항로보안단은 김포공항의 관제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부대였다. 그는 1966년 2월 오산 비행장 관제사로 파견근무를 하게 된다.
그는 1968년 美 연방항공국(FAA)으로부터 항공관제사 면허를 취득했다고 한다. 당시 김포공항은 美 5공군 2146통신전대가 미군 작전機를 통제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사건의 핵심인물인 공군 항공관제사 蔡熙錫씨는 33년간 침묵으로 지내다가 재작년 차를 타고 가던중 1970년 3월말의 요도호 납북사건에 관한 방송을 듣고 그때의 역사적인 진실이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된 보도내용이라 생각던 끝에 그 긴박했던 상황을 월간조선기자를 통해서 공개하게 된다. 곧 이어서 일본의 유명출판사 문예춘추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에 '요도호사건 122시간의 진실 (요도호 JAL기 조종사의 진술/2003/6/9)' - 를 오동룡 월간조선기자가 소개했고, 일본 NHK와 TBS TV방송국 등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직접 채희석씨의 증언을 토대로 1시간 10분짜리 특집 다큐먼트로 방영되기도 했다. 부언해서 1970년 같은시기(국방부장관 정래혁 / 제11전투비행 단장 옥만호준장)에 김포 제11전투비행단에서, 같은 공군 제7항로보안단 소속이며, 본 관리자의 공군 동기생으로서, 채희석씨는 항공관제사로 본인은 항공기상예보자 로 군복무중이었음. 그일이 있은후 요도號 일본조종사는 총리로부터 표창도 받았으나 채희석씨는 그사건의 함구령과 함께 오산으로 전속조치되었고, 테러리스트들에게 hijack(공중납치)된 항공기에서 129명의 인명구조는 물론 일본당국이나 한국정부의 유리한 외교적인 메리트 등등...의 그 공로는 무시되고 은폐돼 왔으며..., 도리어 오늘날까지 음지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왔다. 이 취재를 마친 요미우리의 한 일본인 기자는 채희석씨에게 큰절을 하며 일본인을 대신해서 감사의 마음를 표하기도 했다한다.(홈페이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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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적군파 1970년 3월 적군파는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평양으로 가려다 한국 김포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적군파란?
일본의 테러집단. 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학공투회의(전공투)가 해체되면서 일본 학생운동은 각 노선에 따른 분열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69년 발족한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는 "혁명은 전투적 대중운동이 아니라 조직된 폭력, 즉 훈련된 군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고 주장했으며,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를 주장하였다. 적군파는 해외 거점을 확보, 군사 훈련을 거친 후 일본은 물론 세계 동시혁명을 겨냥한다는 '국제 근거지론'에 근거하여 일본 항공기 '요도호'의 북한으로의 납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중 가장 급진적 단체인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과의 연대를 통한 군사 훈련과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 싱가포르·네덜란드·말레이시아 등지에서의 국제 테러를 활발히 진행해왔으나 국제 경찰의 추적과 조직 이탈 등에 의해 현재 거의 와해되었다.
요도호 사건이란?
'요도호 사건'이란 일본의 극좌단체인 적군파의 대원 9명이 1970년 3월31일 도쿄 하네다(羽田) 공항발 후쿠오카행 항공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승객과 승무원 129명을 인질로 삼아 북한행을 요구한 일본 최초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다. 해외 기점을 확보, 군사훈련을 거친 후 일본은 물론 세계 동시혁명을 겨냥한다는 '국제 근거지론'에 따른 행동이었다. 기장은 범인들을 속이고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으나 이를 알아차린 범인들은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3일간 한국 경찰과 대치했다. 범인들은 결국 일본 정무차관을 대신 인질로 잡고, 기장 등 3명을 제외한 모든 승객들을 풀어준 뒤 4월 3일 김포를 떠나 평양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은 범인 9명을 국외이송목적약취 혐의 등으로 국제수배했다. 북한에 도착한 범인 9명 가운데 3명은 숨졌고, 2명은 귀국한 뒤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나머지 4명은 무죄로 인정받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이전 입장을 바꿔 최근 무조건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왜 문제가 되는가?
요도호 납치범 4명의 일본 귀국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요도호 납치범 귀환'이 미국에 의한 '북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지난 5월 '국제테러 유형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포함한 7개국을 15년째 테러지원국에 재지정하면서, 북한의 경우 테러행위자인 요도호 납치범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납치범 귀환을 통해 북한이 테러지원국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 차관 등의 재정지원과 식량원조 등을 받을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된다.
언론의 반응
이번 요도호 납치범 일본 귀국 문제에 대해 한겨레신문은 7월 10일자 사설 '적군파 귀국설과 미국의 대북정책' 을 통해 미국 국무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묶어 놓은 결정적인 족쇄가 풀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할 것을 촉구하였다. (전략)...우리는 적군파 요원의 일본 귀국을 계기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받아 들이게 되며, 이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더욱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클린턴 행정부 때와는 달리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들을 들어 테러지원국으로 계속 남겨둘 경우 미국의 필요에 의해 잣대가 쉽게 바뀐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후략) (한겨레신문 7월 10일자 사설 '적군파 귀국설과 미국의 대북정책' 中)
반면 조선일보는 10일자 '北, 테러지원국 벗어나기 안간힘' 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통해 남은 적군파원들의 일본 귀국을 9.11 테러 참사 후 미국의 강력한 반테러 정책, 부시 행정부의 '악의축' 발언 등 일련의 대북강경책, 서해교전 이후 악화된 북-미 관계 등에 부담을 느낀 북한의 의도적 행동이라고 분석하였다. | | 1970년대 활동한 일본의 좌파 테러단체.
적군파는 1948년 형성된 일본학생운동의 통일체인 전일본학생자치회연합이 60년대 안보투쟁을 벌인뒤 분열되자 이중 마오쩌둥식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동맹에서 분리, 1969년 발족했다. 400여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를 주장하였다.
지난 1970년 일본 적군파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출발,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요도호 사건'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1972년 적군파 내의 온건파 14명을 처형하고 경찰과 대치한 연합적군사건이 있은 뒤, 폭력 대상을 해외로 돌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과 유대를 맺고 70~80년대에 공동테러를 벌여왔다.
1974년 이후 시게노부 후사코를 두목으로 하여 텔아비브공항 습격사건(1972), JAL 소속 여객기 하이재킹(1973), 싱가포르 셸 석유 습격사건(1974), 쿠웨이트 일본대사관 점거사건(1974), 헤이그 프랑스대사관 습격사건(1974), 콸라룸푸르대사관 습격사건(1975), 그 밖에 다카사건(1977) 등을 일으켰다.
적군파는 그러나 80년대 이후 국제경찰의 추적과 조직 이탈로 조직이 거의 와해되었다.
시게노부는 2000년 11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본 적군파 대원 3명이 주네덜란드 프랑스대사관을 점거, 대사 등 11명을 인질로 잡고 프랑스에 수감된 대원을 석방시킨 1974년의 헤이그사건 등 국제테러를 주도한 혐의로 국제 수배중이었다.
현재 수감되어 복역 중인 시게노부는 여성혁명가로서의 삶과 모성을 토로한 옥중수기인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한편 적군파는 2001년 5월, 결성 40년만에 조직을 해체하고 합법단체로 거듭날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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