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첫 번째 ‘환경회칙’인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했다.
지난 6월 18일 발표된 교황회칙에서는 ‘온전하게 작동하는 생태계’가 ‘정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며,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환경문제를 성찰하고 회개와 행동을 촉구했다.
모두 6장 24항으로 이뤄진 이 환경회칙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를 돌보면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나 개발자로 군림하는 태도를 버리라고 요청했다.
“피조물을 향한 인간의 무자비한 지배는 또한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들 사이에서 자행되어 왔으며, 이러한 사태에 대한 생태적 회심, 온전한 생태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교황은 환경 보호가 비용과 이익을 따지는 ‘금융적 계산’의 기초 위에서 다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바다에서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땅에서 메르스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는 실종되고 사람들은 ‘무관심의 세계화’에 젖어 있다.
<뜻밖의 소식>에서는 젊은 신학도에서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녹색연합의 황인철 씨를 만났다. 성북동의 가파른 언덕에 서있는 녹색연합 사무실 입구에는 “바람이 되어 새날을 열고 꽃이 되어 이 땅을 지킨다”는 서각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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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철은 피조물과 더불어 절망하고 희망한다.ⓒ한상봉 |
신학공부를 하다가 환경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가톨릭청년운동을 하다가 내 신앙의 근거를 찾기 위해 서강대 신학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지적인 호기심도 발동했던 거 같아요.
당시에는 <녹색평론>을 읽고, <오래된 미래>를 읽으면서 사회운동을 넘어서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장의 관심은 ‘신학’이었고, 평신도신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죠. 그래서 무작정 미국으로 갔는데, 버클리연합신학대학에서 교의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자로서의 가능성’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지요.
라너와 스코투스를 비교하면서 논문을 준비했는데,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오면서 환율도 높아지고, 경제사정 때문에 더 이상 미국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곰곰이 생각해 봤죠. 배운다는 게 뭔가? 하고 말이죠. 그동안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기[input]만 하고, 소비만 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는 만큼 실천[output]eh 해야 하잖아요. 결국 실력도 안 되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니 나까지도 굳이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귀국했어요.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일자리를 찾아보았는데 쉽지 않았고, 교회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모집공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녹색연합’이죠.
전혀 새로운 주제로,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여전히 신학적 갈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세계에서 실제적인 것을 더 많이 배우고 있는 셈이죠.
사대강 사업이 한창일 때 역할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처음엔 운영부서에서 일하다가 녹색연합 2년차에 4대강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가만히 자료를 찾아보면서 황당한 것은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밀어붙여야 할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거죠.
경제살리기, 강 살리기, 일자리 창출 그 무엇도 4대강과 상관이 없더라고요. 자본주의 논리로도 설득이 안돼요. 너무 말이 안 되는 사업이었고, 준설 현장을 보고서는 울컥하는 순간도 있더라고요.
한강만 보고 자란 도시내기라서 환경문제에 감이 좀 없는 편이었는데, 공사장에 포클레인이 들어가 시작부터 끝까지 강바닥을 파헤치고, 콘크리트를 때려 박는 것을 보고 사람을 묶어 놓고 난도질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건 생명에 대한 어마어마한 폭력이지요.
이명박 대통령이 비행기 타고 가며 강을 보면서 ‘동맥경화가 걸린 강이니 다 긁어내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모래톱이나 습지가 가진 수질정화 기능과 생태계 보존 능력에 대한 관심은 없고, 그저 노래를 긁어내서 골재로 쓰면 다 돈인데 이렇게 방치해 두면 안 된다는 계산만 갈려 있는 거죠.
결국 생명에 대한 감각과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가치관이 충돌한 것이 사대강 사업이죠. 이명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환경공부를 할 기회가 되었지만, 토건세력들의 무지에 여전히 한숨만 나옵니다.
환경문제는 결국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의 충돌이라고 했는데?
예전에 수업 중에 읽었던 매튜 폭스의 <원복 (Original Bressing)>이란 책이 생각나요. 해방신학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면, 단순히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해방만 이야기 하는 것으론 부족하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기 전에 본래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되죠. 왜냐하면 고통은 잃은 것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가치 없는 것은 잃어버려도 아프지 않아요. 인권문제가 중요한 것은 사람이 존엄하기 때문이죠. 이명박처럼 강의 가치를 모르면, 이런 사람들은 강을 파헤쳐도 아프지 않아요.
저도 처음에는 이런 생태적 감수성이 없었지만,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일을 하며 그런 감수성을 키우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아요.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동물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분들이 있어요.
야생동물 보호에 대한 관심이죠. 이런 접근도 뭐라 할 수 없지만 자칫하면 나이브해지기 쉬워요. 야생동물 아프다, 그러니 보호하자고 하면 모두가 공감해요. 정부에서도 뭐라 안 하고, 기업도 막 후원해요.
그런데 그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환경파괴가 결국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거죠.
4대강 문제에서 보았듯이 강이든 산이든 자연이든 이것들을 지배하려는 문제는 모든 권력의 속성이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입니다.
환경문제는 권력의 문제라는 것인가요?
그렇죠. 구약성경에 나오는 출애굽에 등장하는 재앙도 자연재앙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어요. 출애굽 당시 이집트에서 노예노동이 많았던 것은 운하사업 등 대규모 토건사업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러한 파라오 같은 정치권력의 불의에 대한 첫 번째 재앙이 나일강이 피로 물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의 오염이죠. 이걸 물고기들의 대량폐사와 적조현상 등으로 설명해요. 어쨌든 권력이 잘못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사인이 자연파괴라는 거죠.
강이 오염되자 개구리들이 먼저 튀어나오고, 개구리가 죽어나가자 모기들이 창궐하고, 결국 피부병으로 번지는 거죠.
고대 중국이나 유럽사회에서도 권력은 항상 산과 강을 이용하고 지배하려고 했어요. 나무가 있는 산은 에너지원이고, 농업사회에서 강은 먹고 사는 농업의 원천이죠, 이걸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중구애서도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제일 먼저 운하사업을 벌이죠. 이명박의 4대강 사업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요. 치수를 빌미로 토건세력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려던 거죠.
최근에 <녹색평론>에서 ‘민주주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저도 공감해요. 노동문제나 여성문제와 마찬가지로 환경문제도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의 문제를 다뤄야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강이 문제였는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산이 문제가 될 겁니다. 대표적으로 설악산 케이블카를 둘러싸고 말이 많은데,
청와대에서 환경부나 유관단체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들의 민원을 들어주려고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산지관광특구’를 지정해 리조트나 케이블카 설치를 마음대로 하도록 법을 만들려고 해요.
정부 관련부서가 아니라 이런 걸 청와대에서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며 압박하고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왜 이런 데까지 쓸데없이 참견하는지 모르겠어요.
한상봉 기자 / 뜻밖의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