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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동물의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 /로마서 8:18-23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땅에 완성되는 영원한 천국, 즉 새하늘과 새땅에는 동물이 있을까요? 주께서 재림하신 이후 이 땅에는 동물의 세계가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면 하나님의 보좌 앞인 낙원에 들어가게 될 텐데 낙원에는 동물이 있을까요? 동물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성경적으로 답변하려고 합니다. 또한 동물의 세계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새하늘과 새땅의 관계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동물에 대하여 엄청난 양을 할당하고 있기에 풍성한 자원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원어 성경을 통해 상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 19, 20, 21, 22절에서 말하는 피조물이란 헬라 원어로 (크티시스)인데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의미하지만 전형적인 뜻은 동물을 말합니다. 본문은 어떤 묵시나 은유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피조물 중에 사람이 아닌 존재로서 “고대하고,” “굴복하고,” “자기 뜻이 있고” “종노릇하고,” “탄식하고 함께 고통하는” 존재는 동물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피조물을 동물의 세계로 보아도 하자가 없습니다. 물론 본문의 ‘피조물’은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 및 만물을 의미하지만 동물의 세계가 그 축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피조물’이라고 말한 부분을 잠시 동물의 세계로 바꾼 후에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 동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하게 될 미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20절: 자신들의 뜻과는 달리 모든 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고 있다.
21절: 동물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 가운데 완성되는 그날인데 그 날이 되면 동물의 세계도 인간의 죄로 인한 썩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
22절: 동물들은 죄가 들어온 그 때부터 지금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본문에서 현재의 동물계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제일 중요한 묘사는 21절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썩어짐”은 원어로 (후쏘라)라고 하는데 동물들은 (후쏘라)에 종노릇하는 상태로부터 자유하길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 가운데 완성되길 간절히 고대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날이 되면 죄의 저주들이 제거되면서 동물들 역시 완전한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테이스 후쏘라스), 즉, “썩어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원어 사전을 찾아 보니, (후쏘라)라는 “파멸, 부패, 썩음, 해체, 잡혀 죽음, 음식으로 죽음, 잡아 먹혀서 죽음”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 이 단어의 뜻은 사람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모든 피조계에 임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동물의 세계에 임한 저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물들이 볼 때 이 저주는 매우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기에 빨리 이러한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언제인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 날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체를 입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 역시 간절히 주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의하면 지금 이 땅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나타나는 새 땅은 동물의 입장에서 볼 때 연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연속성이 없다면 동물의 세계가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동물들은 주님의 오실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완전하게 완성될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데 그 이유는 바로 “썩어짐에 종 노릇하는”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날이 바로 그 날이기 때문입니다. 21절 후반부를 보면, 그 날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날로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완성되는 날인데, 그 때에 동물들도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새하늘과 새땅에는 동물들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은 전혀 의미가 없는 내용이 됩니다.
한편, (크티시스)라는 헬라어를 ‘모든 피조물’로 보아도 마찬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리는데 그 이유는 지금 죄로 인한 모든 저주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모든 피조물은 그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동참하여 자유롭게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새하늘과 새땅은 반드시 지금 이 땅의 피조물이 존재해야 본문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게 될 피조은 현재 이 하늘과 땅에 사는 피조물과 필연적인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은 거짓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부활체를 얻어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갈 것인데, 그때 사람들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표하는 모든 피조물들 역시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동물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새하늘과 새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불로 태우는 정결의 과정이 있고, 주 예수께서 수천년 동안 준비해 오신 놀라운 변화의 복이 존재할 것입니다. 곧, 우리의 존재도 지금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될 것이며, 피조물의 세계 역시 동물계를 포함하여 영광스러운 세계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본문의 (크티시스)라는 헬라어를 모든 피조물로 보든, 또는 모든 동물계로 보든 새하늘과 새땅에는 동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이 말이 됩니다.
창세기 3장은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장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때 동물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죄를 짓지 아니하였지만 피조의 세계가 피조계의 왕인 사람에게 속하였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람의 죄로 인한 저주를 함께 겪게 되었습니다. 마치 지구가 방사선에 노출되면 모든 피조물에게 엄청난 악 영향이 있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의 왕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죄의 결과가 모든 피조물에게 임한 것입니다. 특별히 동물의 세계에 임한 죄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3-14).
지금 이 말씀을 보면 “모든 가축과 모든 짐승”이 다 저주를 받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 받은 동물 중에 특별히 뱀은 ‘더욱’ 저주를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동물계를 향한 또 다른 저주는 창세기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창 9:2).
원래 동물들과 사람 사이는 매우 평화로우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관계가 깨졌다는 말씀입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원수처럼 되어버렸고 서로 두려워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동물을 잡아 먹게 되었습니다. 또한 동물들도 생존하기 위해서 각각 자기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고통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식물만을 먹고 살던 동물계는 이제는 서로 잡아먹으며 생존해야 하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튼 동물의 세계도 사람의 죄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여러 고생과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과 만물의 영장인 사람과 원수로 지내야 하는 것과, 나아가 병과 약함과 기형아와 불구와 돌연변이가 많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죄가 들어오기 전에 원래 동물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들이 동물들을 보살피고 사랑하고 동물들은 사람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는 화목한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동물이나 사람이나 풍성한 모든 채소와 풍성한 좋은 열매들을 먹으며, 함께 먹고 마시며 살고 있었습니다.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28-30).
이처럼 에덴 동산에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사람들을 위하여 동물을 지어주셨습니다. 분명하게 우리가 아는 것은 동물의 세계는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시작인 에덴 동산에 동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하늘과 새땅에도 동물을 두시겠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에덴에서 동물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동물들은 사람과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사람과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그 증거로 창세기 3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뱀이 나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 3:1).
여기서 “간교”로 해석된 히브리어 (아룸)은 부정적인 의미로는 “간교한” “약삭빠른” “속이는”이란 뜻이 있지만 좋은 의미로는 “지혜로운, 영리한, 똑똑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지금 창세기 3장 1절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 사탄이 뱀을 이용하여 미혹하는 순간입니다.
사탄이 뱀에게 들어와 그를 통해 말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히브리어 (아룸)은 “매우 간교한, 속이는”이란 뜻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을 배제하고 뱀을 동물로서만 볼 때는 “지혜로운, 영리한, 똑똑한”이라는 뜻이 가능합니다. 특히 3장 1절에서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고 말할 때 ‘가장’이라는 말은 비교급의 최상급이기 때문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하면 모든 동물이 다 간교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간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간교하다는 뜻보다는 “영리하다, 똑똑하다”는 뜻이 맞습니다. 죄와 거짓으로 간교한 존재는 오직 사탄일 뿐입니다. 또한 아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뱀 그 자체를 간교한 존재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절은 “모든 동물들이 똑똑하지만 그 중 뱀이 가장 영리하였더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즉, 인류가 타락하기 전, 그리고 사탄이 뱀을 이용하여 타락의 도구로 사용되기 전, 뱀은 다른 동물보다 더 똑똑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 같고 가장 아름다웠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뱀에게 들어갔을리 만무합니다.
또한 창세기 3장은 역사적 기록(historical narrative)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상징이나 비유로 볼 수 없습니다. 즉, 본문에서 뱀과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진술에 대해 실제로 뱀과 사람이 대화를 한 것이지 비유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진술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와와 뱀의 대화를 보면 뱀의 지능이 매우 뛰어나고 논리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이 뱀이 아담과 하와가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과 뱀이 대단할 정도로 소통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설득력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뱀 뒤에서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뱀은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기 전에 사람과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와는 자신이 뱀과 소통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어떤 외부 세력이 뱀에게 들어온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하와가 평소에도 뱀과 많은 대화를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사람과 소통했던 동물이 뱀 뿐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뱀이 사람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다면 다른 동물들 중에도 많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고 똑똑했다는 것입니다. 뱀이 가장 영리했고 다른 동물들도 영리하여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타락한 이 세상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동물과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합니다. 물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슬픔, 기쁨 등을 표현하고 사람에게 배우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알고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동물들이 지닌 이러한 기능은 동물과 사람 사이에 원래 대화가 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잔재들입니다.
사람과 수십년을 가까이 지낸 영리한 개들을 보면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요. 어떤 사람의 고백을 들어보면 자신이 키우는 개가 너무 똑똑하고 지능이 높아서 마음까지 통하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창세기 2장 19절을 보면, 동물계가 피조된 이유는 사람들의 위로와 즐거움을 위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동물들을 빚어 만드십니다.
[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동물도 사람처럼 호흡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만이 사람처럼 숨쉬는 생명들입니다(참조, 창 6:17, 7:15, 22). 심지어 동물과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같은 날에 지어졌고 둘 다 흙으로 빚어 만들어졌습니다. 영적인 부분, 곧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진화론자들은 사람과 동물 사이에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으니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헷갈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2장 19절에는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짓는 내용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8절입니다.
[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외롭지 않고 심심하지 않도록 아담을 위하여 동물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기신 문명과 문화의 사명을 돕도록 동물을 지어주셨다는 점입니다.
재미난 것은 성경에는 아담이 식물의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에 관한한 동물의 이름을 짓고 있습니다. 히브리 개념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뜻은 그 동물의 속성을 정확히 보고 있다는 뜻이요 동물은 아담의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동물들이 사람과 어떤 특별한 관계적인 사귐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들과 같이 놀고 같이 웃고 같이 한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는데 동물들에게도 영혼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사람에게는 영과 혼이 있지만, 동물에게는 영은 없고 혼만 있다고 대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영혼과는 물론 다른 차원이지만 동물에게도 지.정.의가 있습니다. 즉, 사람과 유사한 어떤 기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능을 “동물의 혼”이라고 부릅니다. 즉, 동물들도 배울 줄 알고 감정 표현도 하고 의사 표현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의 혼은 사람처럼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그 영혼에 있어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피조되었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형상의 특성 중에는 영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한번 피조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몸과 영혼이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몸과 영혼이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부활과 함께 우리의 몸과 영혼은 영원하지만 동물에게는 영이 없고 오직 혼만 있기 때문에 그들의 혼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
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 3:19-21).
사람은 죽음 직후에 그 영혼이 영원하기에 주께로 가거나 또는 하나님과 완전히 차단된 음부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동물의 혼은 그의 죽음과 함께 땅으로 내려가니 그 혼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낙원 또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천사가 호위하여 낙원에 들어가 천사들과 우리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지만 그곳에는 동물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지옥에 떨어진 부자처럼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도 동물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낙원에 있던 자들은 영광의 부활체를 입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죄의 저주에서 자유롭게 된 새로운 동물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들어간 영혼들은 수치의 육체를 입게 되면서 영원한 불못에 떨어질 것인데 그곳에는 동물이 없을 것이며 오직 마귀들과 악령들만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으시는 기사를 보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은 사람 하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다음의 차선의 선물로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동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영적인 요구는 오직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만이 채워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인 욕구가 결코 불신자를 통해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부분은 결코 동물들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 외로움이랄지 심심함이랄지, 이러한 감정적인 부분 및 사회적 또는 관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동물이 많은 부분을 메꾸어 줄 수 있음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서 동물의 위치는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위치였으며 동물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는 대상이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 다음으로 Companionship, 곧 관계적인 교류의 기쁨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과 매우 가까운 동물들은 그 주인과 함께 관계적인 교제가 가능합니다. 주인이 슬퍼할 때 동물들도 슬퍼합니다. 주인이 웃으면 신기하게도 동물도 즐거워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랫동안 정든 개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코메디언은 “눈치 빠른 개가 어리석고 고집 센 아내보다 훨씬 좋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무튼 모든 동물들은 죄가 들어 오기 전에는 한결같이 사람과 좋은 관계에 있었습니다. 각 종의 동물들은 사람과의 소통이 가능하였고 또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나아가 사람을 향해 완전하고 철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특히 성경은 사람과 동물의 연대성을 말하고 있는데, 요나서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회개를 원하실 때 사람들만 베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베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또한 십계명에서도 주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킬 때 동물들로 그 계명을 지키게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여인들이 결혼을 통하여 한 남자에게 속한 것 같이 동물들도 사람에게 속한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동물들은 사람에게 속하는 연대성을 지니고 있으며 같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예표하기 위해 사람의 죄를 사하는 증거로서 오직 순결한 동물로 제사를 드리게 했다는 점입니다. 비록 예표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죄는 오직 동물의 피로만 용서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동물의 피는 죄없는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는 적어도 다른 피조물이 아닌 사람에게 가장 가까웠던 동물의 생명이 죽어야 한다는 점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물고기로 사람의 죄를 대속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벌레로 사람의 죄를 대속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어린 양과 송아지와 염소 등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러한 구약의 제사 제도를 볼 때에도 동물의 존재는 사람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때 우리는 동물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주의 재림과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패턴은 구 세상에서 지금 세상으로 이어진 패턴과 유사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 세상에서 지금 세상으로 넘어온 노아 시대의 홍수와 방주를 참조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를 보면 노아의 방주에 동물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람이 들어갑니다. 방주에는 노아 및 그의 가족 7명이 들어갔고, 그리고 모든 동물이 각 종대로 암수 한 쌍씩 들어갔습니다. 물론 거룩한 동물은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일곱 쌍이 들어갔습니다.
[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창 6:18-20).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께서 구세상을 전부 물로 심판 하실 때에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땅과 하늘을 영원히 과거로 보내고 방주에 탄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새로운 땅과 하늘을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의 이 땅과 하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류가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어질때 사용되는 방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때는 온 지구 상에 하나님의 불 심판이 있을 것이며 오직 주 예수님께 속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 9-17의 기록을 보면 동물들도 과거의 땅과 하늘로부터 노아 홍수 이후의 땅과 하늘,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과 하늘로 이어지듯,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새하늘과 새땅이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우리는 부활하여 부활체를 입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갈 것이지만 우리에게 속한 동물들 역시 변화하게 되면서 우리와 함께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때 동물들의 변화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동물들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변화가 될 것이며, 죄의 결과로 오염된 잘못된 품성들, 잔인함, 약육강식 등의 모든 저주들이 제거될 것입니다. 그 이후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원래 창조되었을 때 지녔던 동물의 모든 장점들과 아름다움이 회복될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선한 것들이 최고의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서 5장을 보면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죄의 결과들이 들어왔고 또 다른 한 사람이며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은혜와 복이 이 땅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이 회복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그 모든 복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직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피조물이 겪는 모든 죄의 결과들은 제거될 것이고 나아가 원래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의도하셨던 계획이 완전하게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동물들도 원래 지어진대로 회복될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될 것이며 사람과 소통하는 기능, 사람을 돕는 기능, 사람을 향한 철저한 순종이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더욱 동물들을 사랑하며 지내게 될 것이요 함께 장난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 65:25)
또한 요한계시록 21장 5절은 새하늘과 새땅에 관해 언급하는데 그곳에서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계 21:5)
여기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에는 반드시 동물의 세계를 포함합니다. 즉, 동물의 세계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새하늘과 새땅은 사람과 동물들을 위한 천국입니다. 모든 동물들은 더 향상되고 완성되어서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하늘과 새땅에는 구원 받은 백성들과 함께 온전하게 된 동물들이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으며(계 22:3) 완성된 동물의 왕국으로 인하여 장난과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된 사람들과 또한 온전하게 회복된 동물들이 맘껏 뛰놀며 즐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과 함께 위로를 받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하여 피곤하고 허무하고 많은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성령 안에서 체험할 때 우리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인 부활 및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 예수님을 마음 속에 구세주와 왕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분 덕분에 우리는 구원의 방주를 타고 하나님의 보좌에 이를 것이며, 마침내 새하늘과 새땅에 이를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알려준 새하늘과 새땅의 그림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이 세상이 아니라 이제 주의 재림과 함께 임하게 될 새하늘과 새땅이 우리의 본향이며 우리가 거할 영원한 나라임을 기억하면서 더욱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참된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