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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말씀
제목 : 온유함으로 받는 말씀
성경 : 약 1:22~25
찬송 : 529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31203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약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약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약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1:21절은 야고보서의 중요한 신학적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 구절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야고보가 2절 이하에서부터 제기했던 시험과 인내, 지혜와 세상적인 정욕의 문제, 그리고 나뉜 마음, 즉 이 ‘두 마음’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21절 하반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심긴 말씀’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온유함으로 받는’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받으라’는 말은 ‘끌어안으라’는 말입니다. 이미 그의 안에 심겨 있다 해도 그것이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되도록,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품어서 마치 땅이 씨앗을 품어 싹을 내듯 그렇게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하는 데에는 여러 다양한 방식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듣고 말하는 문제입니다. 야고보가 이미 19절과 21절 상반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듣는 일은 민첩하게 하고 말하는 일은 미련할 만큼 더디게 해야 합니다. 쉽게 격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추천할 만한 태도와 행위들이, 전혀 신자의 외부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명령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이런 요구들은 이미 그들의 심령에 ‘심긴 말씀’으로 씨앗처럼 심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요구는 그 심긴 씨앗을 다만 진실로 품어 그 ‘자연스런’ 성장, 곧 싹이 나고 잎이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도록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심으신 것도, 그 심은 말씀을 온유함으로 품어내는 일도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내는 일입니다. 이제부터 야고보는 과연 어떻게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으면, 이런 사람을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살펴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습을 살펴보고도 나간 뒤에 곧바로 자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가져다주는 율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에 계속 충실한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율법을 실행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함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약 1:22~25/새한글성경)
√열매 맺는 행함
약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무엇보다 말씀을 행하여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지 듣기만 해서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채영삼 역)
여기에서 ‘말씀을 행하여 열매를 맺는 자’라든지 ‘듣기만 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자’라는 표현들은 어떤 일시적인 행동을 묘사하기보다는 그런 행동을 습관적으로 혹은 특징적으로 하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마음의 태도요 생활의 습관인 사람과, 그 말씀이 마치 자기 자신의 일인 것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항상 괘념하여 실행할 것을 고민하고 행하는 것이 마음의 태도요 습관인 사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읽고 우선 쉽게 낙심하거나 자신을 정죄하는 자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 곧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어떻게 행할지 깊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과, 아예 처음부터 듣기만 하고 그것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없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후자는 하나님의 법이 그의 심령에 깊은 도전이나 충격을 주지 않은 경우입니다. 밭에 떨어진 씨앗이라면, 아예 싹이 나기도 전에 공중의 새가 물어가 버리는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차이가 날까요?
22절에서 ‘스스로 속이는 자’라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말씀을 받고도 혹은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을 듣고도 그것을 믿음으로, 마음으로 화합하지 않습니다.
√히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개역한글)
그들은 단지 들은 것만으로 자신이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열매 맺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경우 혹은 스스로 속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그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 아무런 유익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러분!
듣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25절 하반절에서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에게’ 그 율법이 약속한 생명이나 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지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그것을 행하여 그 유익을 얻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머리만 커진 것입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아는 대로 실제로 행하여 말씀이 자신과 화합되는 과정을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열매가 여물지 않은 빈 껍대기만 있습니다.
그래서 23절은 이런 사람이 마치 ‘청동 거울로 자기의 생긴 모양은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청동 거울은 고대에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투영된 피사체가 또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들여다 본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쉽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부족한 거울인 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입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입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그렇다면 ‘온전한 율법 곧 자유의 율법’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구약의 율법입니까? 혹은 인간의 양심이나 그런 보편적 양심과 방불한 율법입니까?(롬 2:14) 아니면 18절이나 21절에서 언급한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이나 예수님께서 성취하시고 새롭게 명하여 가르치신 율법일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25절의 ‘온전한 법, 자유의 법’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1:25이나 2:12절에서 언급되는 ‘자유의 율법’은 2:8절에서 묘사된 대로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대표되는, 새 언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해석되며 새롭게 명령된 율법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25절에 나타나는 ‘온전한 법, 자유의 법’은 21절에 ‘마음에 심긴 말씀’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의 온전한 율법’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목적과 내용을 성취하신 율법, 그래서 다시 그분의 권위와 삶으로 가르쳐 새로운 백성에게 명하신 율법과 같은 것입니다(참고, 마 5:17~19 또는 산산수훈 전체, 5:21~48).
자유의 율법은 자유를 주는 율법이기도 하고 자유하게 된 자들이 따른 율법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실제로 그분의 삶으로 보여주셨으며 또한 우리들에게 친히 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입니다. 복음으로 자유하게 된 자들, 곧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이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더욱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되는 그 법입니다.
25절의 ‘온전한 법, 자유의 법’이 23절의 청동 거울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특별히 흥미롭습니다. 청동거울은 그것을 들여다보고도 곧 잊게 되는 희미한 율법을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25절에서 상대적으로 ‘온전한 법, 자유의 법’은 그것을 들여다 볼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계속 머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온전한 법, 자유의 법’은 계속 그와 함께 머물 수 있을까요?
청동 거울과 같은 법은 그 자체로도 희미하고 그것에서 떠나 있으면 쉽게 잊게 됩니다. 하지만 ‘온전한 법, 자유의 법’은 그와 함께 계속 머물게 됨으로 듣고도 잊지 않게 됩니다. 야고보는 혹시 21절의 새 언약의 결과로 ‘마음에 심긴 말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심겼다’는 표현이 너무도 확실하게 그 법이 그의 심령에서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25절에서 야고보는 ‘듣고 잊으며 그래서 행하지 않는 자’와 ‘듣고 거기에 항상 머물며 행하여 열매를 맺는 자’를 대조하고 비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청동 거울’같이 사람의 밖에 있고 희미한 율법과 ‘마음에 심긴 말씀’처럼 항상 그가 거기에 머물 수 있어서 잊지 않고 행하여 열매 맺게 하는 ‘온전하고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대조하며 비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심긴 말씀, 열매 맺는 말씀
√약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개역한글)
약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행하여 열매 맺는 자’(포이에타이 로구)를 개역한글은 ‘도를 행하는 자’ 또는 ‘말씀을 행하는 자’(개역개정)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 ‘행하는’의 의미는 말씀을 단순히 행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와 더불어 그 말씀의 내용을 이루어가는 ‘열매로 맺는’의 의미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이런 용례는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을 마무리 하시면서 ‘나무와 열매’의 비유와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적절히 드러납니다.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더구나 지금 야고보서의 본문에서처럼(1:22),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에서는 ‘듣는 자’와 ‘행하는 자’, 곧 ‘듣고 행하지 않는 자’와 ‘듣고 행하여 열매를 맺는 자’가 짝을 이루며 대조되고 있습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야고보가 전해주는 복음은 새롭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 구원의 사실은 무엇보다 팩트(사실)입니다. 우리 속에는 말씀의 DNA가 심겨져 있습니다. 새끼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아기가 자라면 성숙한 사람이 되듯이, 우리 속에 심겨 있는 이 말씀, 이 말씀의 DNA는 우리로 하여금 자꾸 말씀으로 인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꿈꾸게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해바라기 씨를 심으면, 해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피어나는 해바라기를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의 안에 심긴 말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그의 심령 안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는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더욱더 우리는 그 말씀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은 우리를 진정 꽃피우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이 병아리처럼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마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마치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 ‘처럼’이 ‘진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은 우리에게는 그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를 담은 말씀의 DNA가 심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그분이 완성하시겠지만, 우리는 오늘도 마치 말씀대로 완성될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버리십시오. 여러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십시오. 여러분과 맞지 않습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릴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빚어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감사함과 온유함과 순복함으로 여러분 안에 심긴 말씀을 받아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 아멘 입니다.
† 재건정읍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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