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우트들의 필수품 ⓒ gettyimages/멀티비츠 |
scout n. 정찰병(척후병). 재능있는 신인을 발굴하러 다니는 사람
scouter n. 정찰자. 감시자. (18세 이상의) 보이스카우트 단원
<네이버 영어사전>
많은 사람들이 '스카우터'라고 잘못 말하고 있는 스카우트는 '스카우트'가 맞다(필자가 추천하고 싶은 임창정 주연의 2007년작 영화의 제목도 <스카우트>다).
대표적인 야구어(語) 사전인 <딕슨 베이스볼 딕셔너리>에 나와 있는 스카우트의 뜻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하위 레벨의 선수를 평가하고 추천하며 사인을 맺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앞으로 만나게 될 상대를 관찰하고 그들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리포트를 작성하는 사람'이다. 흔히 후자를 '어드밴스 스카우트'라 부른다(어드밴스 스카우트를 가장 먼저 도입한 종목은 미식축구였다. 그리고 야구에서는 1950년대 브루클린 다저스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에드 배로 단장과 함께 1920년대 양키스 제국을 건설한 폴 크리첼은 역대 최고의 스카우트로 꼽힌다. 양키스는 크리첼(스카우팅 디렉터)이 원석을 찾아내면 배로(제너럴 매니저)가 결정하고 조지 와이스(팜 디렉터)가 길러내는 방식으로 최고의 선수들을 쓸어모았다. 물론 여기에는 제이콥 루퍼트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크리첼의 첫 번째 작품은 바로 루 게릭이었다.
1923년 초, 크리첼은 콜럼비아대학에 괴물 투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경기를 찾았다. 그날 루 게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좌완 투수는 타석에서도 두 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크리첼은 배로에게 '다음 번(next) 베이브 루스'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깜짝 놀란 배로는 크리첼에게 다시 한 번 보고 오라고 했다. 크리첼이 본 두 번째 경기에서 게릭은 17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또 홈런을 때려냈다(그날은 루스가 양키스타디움 개장 1호 홈런을 친 날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크리첼은 게릭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앞으로 누가 뭐라고 하든 투수가 아닌 타자를 하라고 조언했다.
1929년 크리첼은 또 한 명의 보물을 찾아냈다. 존 맥그로 감독이 어디서 저런 굼벵이를 데려왔냐며 뉴욕 자이언츠가 퇴짜를 놓은 행크 그린버그였다. 크리첼은 그린버그를 설득할 요량으로 그를 양키스타디움에 데려왔다. 그리고 타격 연습 중인 게릭을 가리키며 "저길 보게나. 저런 선수가 우리 팀에 있다네."라며 자랑했다. 하지만 그린버그의 생각은 달랐다. 게릭이 있는 팀에서 1루수로 뛰기 어렵다고 생각한 그린버그는 양키스 대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선택했다.
토니 루카델로는 현재 스카우트들이 작성하는 리포트의 토대를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루카델로는 1943년부터 1989년까지 47년(컵스 15년, 필리스 32년) 동안 현장을 누비며 무려 52명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다. 그가 직접 계약을 맺은 선수들 중에는 명예의 전당 선수인 마이크 슈미트와 퍼거슨 젠킨스, 1974년 NL 사이영상 수상자인 마이크 마셜, 1970년 AL 타격왕인 알렉스 존슨 등이 있다.
과거 유망주 확보 경쟁은 누가 더 많은 스카우트를 고용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스카우트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은 그만큼 더 샅샅이 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인 요즘, 숨겨진 선수는 없다. 누가 더 뛰어난 분석력과 예측력을 가지고 있느냐의 싸움이다. 지난해 자료에 따르면, 정규직 스카우트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팀은 토론토(23명)로, 가장 적게 보유하고 있는 팀의 세 배에 달한다. 피츠버그는 반면 스카우트의 숫자는 하위권이지만 비디오/기록 분석가가 가장 많은 팀이다.
스카우트 숫자 상위 팀들
23명 : 토론토
20명 : 양키스
16명 : 시애틀
14명 : 컵스
13명 : 밀워키
12명 : 휴스턴 애리조나 샌디에이고
11명 : SF STL 탬파베이 신시내티
10명 : 애틀랜타 메츠 필라델피아
<출처-베이스볼 아메리카>
영화 <머니볼>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선수 선발을 놓고 빌리 빈과 스카우트들이 벌이는 갈등이다. 빈은 한동안 스카우트의 눈보다 기록지의 숫자를 더 신뢰했다. 그러나 번번히 드래프트에 실패한 후 양측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지금도 빈은 드래프트보다 트레이드에 강하다).
반면 3년 연속 1라운드 대박(2006년 린스컴, 2007년 범가너, 2008년 포지)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이는 역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다) 여전히 스카우트의 눈을 가장 신뢰하는 구단이다. 샌프란시스코를 19년째 이끌고 있는 '현역 최장수 단장' 브라이언 세비언(58)은 양키스 스카우팅 디렉터 시절 '코어(Core) 4'(데릭 지터, 마리아노 리베라,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를 입단시킨 사람이며(세비언 1996년 9월 부임, 빌리 빈 1997년 10월 부임), 브루스 보치(59) 감독은 스카우트 출신인 형 조 보치로부터 많은 조언을 얻고 있다(조 보치는 샌디에이고 스카우트 시절 인성에 문제가 많다고 소문난 맷 레이토스를 직접 만나본 후 지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이다).
팜 시스템을 고안한 브랜치 리키의 두 번째 팀이자 흑인 선수에게 처음으로 기회를 준 팀인 다저스는 전통적인 스카우트 강팀이다. 1990년대 초중반 사상 초유의 신인왕 5연패(1992년 에릭 캐로스, 1993년 마이크 피아자, 1994년 라울 몬데시, 1995년 노모 히데오, 1996년 토드 홀랜스워스)를 달성하고 아시아 시장까지 선점했던 다저스는, 뉴스코퍼레이션 시대 팜의 암흑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2002년 로건 화이트가 스카우팅 디렉터에 부임하면서 다시 본 모습을 되찾았다.
제임스 로니, 러셀 마틴(2002) 채드 빌링슬리, 맷 켐프, A J 엘리스(2003) 클레이튼 커쇼(2006) 등과 현 유망주 트리오(작 피더슨, 코리 시거, 훌리오 유리아스)가 화이트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또한 화이트는 단 몇 번의 스윙을 본 후 야시엘 푸이그와 계약했다. [푸이그 스카우트 이야기] 화이트는 특히 고교 선수를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데이빗 프라이스, 폴 골드슈미트 등 상당수의 특급 선수들이 고교 졸업반 때 화이트의 지명을 받았다(양키스/디트로이트 수준의 계약금 지원이 있었다면 그들 중 몇 명은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었을 것이다).
스카우팅 디렉터로 13년을 재직한 화이트의 꿈은 다저스의 단장이 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저스는 화이트의 승진 대신 대신 탬파베이에서 앤드류 프리드먼을, 오클랜드에서 파르한 자이디를 데려왔다(둘 다 드래프트가 약한 팀 출신이다). 잭 쥬렌식(전 밀워키, 현 시애틀 단장)의 예에서 보듯, 최고의 스카우팅 디렉터라고 해서 최고의 단장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단장이 되면 다른 팀 단장과의 두뇌 대결, 스캇 보라스 같은 에이전트들과의 배짱 싸움, 철저한 예산 관리 등 스카우팅 디렉터 시절에는 없어도 됐던 훨씬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해진다(배로도 자신의 후계자로 크리첼이 아닌 와이스를 택했다).
결국 화이트는 경쟁 팀인 샌디에이고로 자리를 옮겼는데, 앞으로 샌디에이고와 다저스가 어떤 드래프트를 하느냐는 반드시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다.
소싯적의 '블게' ⓒ gettyimages/멀티비츠 |
스카우팅과 관련해 다저스에게 최악의 실패 사례로 남아 있는 선수는 블라디미르 게레로다(통산 .318 .379 .553 449홈런 1496타점). 어려운 집안 형편에 일찌감치 학교를 관두고 생선을 팔러 다녔던 게레로는, 가족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다저스 아카데미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이복형 윌튼 게레로에게 매일 점심을 가져다 주며 본인도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 게레로 가족은 윌튼이 집안을 일으켜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게레로는 이복형제를 포함해 총 9남매였다).
16살이 되자, 게레로도 다저스의 트라이아웃 캠프에 입소했다. 하지만 다저스는 무려 8주라는 면밀한 검토 끝에 게레로와 계약하지 않기로 했다. 훗날 게레로는 "그들은 내가 너무 긴 스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더 심각한 문제는 내가 너무 뚱뚱하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다저스가 그만 나오라고 했을 때, 나는 본격적으로 체중 감량이 시작되고 있었어요."라고 회상했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아카데미에서도 퇴짜를 맞은 게레로는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갔다. 덜덜거리는 스쿠터를 타고 온 게레로는 스파이크도 짝짝이었다. 첫 타석에서 땅볼을 친 게레로는 1루로 뛰다 사타구니 부상까지 당했다. 결과는 뻔해 보였다. 당시 몬트리올의 도미니카공화국 담당 스카우트였던 프레드 페레이라는 마지막으로 게레로에게 공을 던져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칠지만 파괴적인 송구를 목격했다. 그제서야 유심히 보니, 게레로는 꽤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게레로는 몬트리올의 차지가 됐다. 1993년 2월, 게레로가 받은 계약금은 1929년 루 게릭이 양키스로부터 받은 돈과 같은 2000달러였다.
브랜치 리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단장 시절이었던 1947년,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요기 베라를 잡지 못했다. 보스턴 브레이브스, 보스턴 레드삭스, 뉴욕 양키스, 브루클린 다저스 등은 뉴욕 자이언츠에 앞서 윌리 메이스를 데려갈 수 있었던 팀들이다. 1953년 퀸시 트루프라는 이름을 가진 카디널스의 스카우트는 팀이 보고 오라던 선수에 대해 "He can't hit, he can't run"이라는 리포트를 올렸다. 그 선수는 명예의 전당 유격수 어니 뱅크스였다.
누가 더 실수를 적게 하느냐. 그리고 더 정확한 미래를 예측하느냐. 메이저리그의 치열한 순위 싸움은 바로 스카우팅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게레로가 나와 올려보는 MLB카툰(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