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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6:1-5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 시편은 전편(105편)과 차이점을 가집니다.
전편에서 시인이 보여준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백성에 대해 자비로운 분 이상이라는 사실이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올 세대에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진정한 예배자를 모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본 시편은 이러한 두드러진 은총이 악용되고 있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무례히 악용하며 많은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혔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불충하게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 죄를 고백하면 책망이나 비난 따위는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선한 소망을 갖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계속 복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빈번히 반역을 일으키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계속해서 누릴만한 가치를 잃었기에 시인은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한 후 백성들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악의와 배은망덕함과 교만과 불성실과 다른 죄악 등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케 하였음을 고백합니다.
1. 본문 1절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찬송 - 칼빈)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본 시에는 표제가 없으나 이 권면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과거의 은총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화목에 대한 확증을 가질 수 있으므로 비록 지금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머지않아,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진노를 풀고 화해하시리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현재의 질병이 안겨주는 괴로움을 제거해 주며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어 절망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성향을 지닐 그러한 것에 마음을 모을 것을 명합니다.
시편 106 편
2. 본문 2절은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 입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구절이 바로 다음 구절과 연결된 것으로 본다면 그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임무가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부정한 자들과 사악한 자들은 자기들의 더러운 입술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욕을 돌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50편에서는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시50:16)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다음 구절, 즉 “공의를 지키는 ........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은 이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선지자는 다른 의도를 가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의식을 압도하는 초월적인 장엄성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가 비록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나중에는 알아차리겠지만 이제까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의 모든 성의를 다해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고의적으로 우리로 찬양을 불가능케 하려고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분발케 하여 능력을 총동원하여 찬양을 돌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높입니다.
그 민첩성의 정도가 어느 정도이건 간에 우리가 아직도 완전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해서 우리의 열심을 중단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최대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우리의 가진 능력이 미치지 못 할지라도 마음에서 나오는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을 아는 지식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냉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의 십분의 일에도 미칠 수 없는 자들이 완전의 백분의 일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댄다는 것을 확실히 매우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절은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과 앞 절이 차이가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능력은 말로는 다 찬송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 후에 이제 입술만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므로 마음의 찬동이 없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모든 행실이 이 찬송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6 편
시인은 먼저 “공의를 지키는 자”를 말한 다음에 “의를 행하는 자”를 말함으로서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를 짤막하게 정의해 줍니다.
상반에서 선지자는 신실한 마음의 감정을 하반에서는 외부 행위를 말합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 정직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에 대한 그림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또 아무도 이 의무를 위해서 한결같이 의롭고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것을 그의 일관된 목적으로 삼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적절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내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단지 텅 빈 고백만을 하고 있는 자가 적지 않으며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행위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는 자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본문 4-5절은 “(4)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5) 나로 주의 택하신 자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업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입니다.
이 말을 통해 선지자는 자기가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을 자기에게 베풀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처음부터 매일매일 계속 베풀어 주셨던 모든 복에 자기도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것을 자신만을 위해 바랐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교회의 이름 안에서 똑같이 자기의 본을 받아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성도들을 자극시키려고 했습니다.
선지자는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것과 동일한 공로 없는 은혜를 내게 베푸셔서 나로 하여금 주의 교회에서 잘려나가지 않고 항상 주의 백성들의 숫자 속에 포함되도록 해주시라는 말입니다.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자비롭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수동태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선지자가 환유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을 지적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이며 경험적으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증거는 이 자비의 근원에서부터 흘러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에 포함되었다면 그는 이것을 진정한 복의 정점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시편 106 편
선지자는 이 방법으로 하나님이 자기와 화목을 이루셨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 선지자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관대하신 분임을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며” 라는 말은 당시에 기록된 본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성들이 처량하고도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자기들을 잊으셨다는 생각에 신자들이 은밀히 사로잡혀 있던 그러한 시대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는 이러한 형편을 제거해 주시라는 기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자신이 스스로 버리셨던 자들을 찾아오시마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구원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과시입니다.
다음 절에도 선지자는 같은 의미에서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선지자는 계속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복에 동참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동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요3:3) 또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벧전3:10, 좋은 것과 생명을 본다 - 칼빈)이라는 말들이 다 복을 가리키는 것처럼 복을 향유함을 가리키기 위해 취해진 말입니다.
‘나로 하여금 주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이 말씀을 해석하는 자들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과 연결된 앞 절이 이 해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취한 해석은 곧 이어지는 “주의 나라의 기업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택한 자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복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호하심 아래서 기쁘고 하나님만을 복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선지자의 희망임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교회가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든지 간에 그 모든 격동 중에서도 여전히 이 원리 즉 항상 자기들의 열조에게 자신을 보여주셨고 그들의 복을 신실하게 지켜 주는 분이 되시는 하나님의 양무리와 백성들에 속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확고히 견지합니다.
선지자가 구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늘 대해 주시듯 자기에게 대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는 교회의 공통적인 복에서 제외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당시에 하나님이 환난을 당한 교회에서 그의 자비의 사랑을 거두사 마치 완전히 버리신 것처럼 하셨음을 암암리에 불평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시편 106 편
시106:6-11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본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 중에 홍해에서 거역한 죄를 말씀합니다(출14:11).
1. 본문 6절은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입니다.
선지자는 개인의 입장에서 말하지만 이제 자신을 전체의 몸과 동일하게 봄으로서 전 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선지자는 여기서부터 이 시의 마지막까지 고대 역사를 수집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항상 악하고 교만한 영으로 하나님을 향해 부패한 일을 저지르고 반역하며 감사할 줄 모르고 불성실했었음을 말하고 그들의 후손도 그들보다 나은 점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이 먼저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기에 우리들의 완악한 마음은 우리에게 베풀어질 하나님의 은총을 닫아놓기에 선지자는 매우 타당하게도 그들의 쓰라린 징벌 속에서도 백성들의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으며, 보다 큰 형벌을 내리신다 해도 그것은 마땅한 것이라는 점을 겸손히 인정합니다.
또 다른 이유에서 유대인들이 범한 죄를 그들 앞에 폭로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엄하게 벌하신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들이 범한 죄의 마땅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보여주신 이 약속은 우리에게 유익함을 줄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범죄를 가리켜 사용한 세 가지 표현을 통해 그들의 죄악이 마음에서 살짝 지나치는 감정으로가 아니라 깊숙이 심각한 상처를 주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의 죄악에 사로잡혀 죄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심판대로 부르실 때에 입으로만 자기들의 죄를 고백한다면 무엇이 이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위선으로 어둡게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지자가 백성들이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즉 불의하고 악한 자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불필요하게 또는 공연히 말을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반성하여 우리 죄를 교묘하게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는 똑같은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곧 찾아냅시다.
시편 106 편
그 이유는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은 감히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대다수는 자기 죄에 대한 핑계와 구실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비슷하게 다니엘도 다니엘서 9장에서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이 시의 저자는 아마도 다니엘을 답습한 것 같습니다.
성경의 이 두 곳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반성하고 주시하는 것임을 배웁시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데 충실했던 거룩한 선지자들도 백성들과 더불어 똑같이 자신의 죄로 고백했던 사실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위장된 겸손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은 자신이 부패한 것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음을 깨닫고 만일 죄악이 관영하면 가장 훌륭한 자라도 그 해로운 결과를 입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내놓음으로서 자기들이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곧 간파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죄악의 수준이 여기에 달하고 있었으므로 가장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마치 격렬한 폭풍에 휘몰리듯 죄악에 휩쓸렸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가능한 방법까지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굳은 마음의 소유자들의 교만함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당시의 광신자처럼 자기가 무죄하여 완전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생각하는 자 역시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그러므로 성령께서 선지자 에스겔의 입을 통해 가장 의로운 사람 중 하나라고 말하며 자신을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머물도록 했던 다니엘이 자기와 그 백성들의 죄를 입술로만 말하지 않고 이것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심히 몸서리치고 두려운 것으로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점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사실상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똑같은 죄를 실제로 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가 매우 커다란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 들어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선지자는 자기 죄악을 경감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열조를 들먹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모든 비난을 무시한 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방어합니다.
자기들은 조상들에게 그렇게 배웠기에 그 나쁜 교육이 자기들로 하여금 과오를 저지르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다니엘은 자신과 백성들이 극심한 형벌로 벌을 받을 만함을 보여줍니다.
애당초부터, 즉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새로운 죄악으로 점점 더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키는 작태를 결코 중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런 의미에서 많은 이유를 가진 후손 속에 열조들을 포함시킵니다.
시편 106 편
2. 본문 7절은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이 속박에서 해방되자마자 처음부터 곧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어떻게 반역하는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선지자는 자신을 한 시대의 역사에만 제한시키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전체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측량할 길 없는 인자하심으로 대해 주셨음에도 백성들은 악을 행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백성들의 집요하고도 지독한 완악함의 증거입니다.
선지자는 먼저 그러한 배은망덕함을 이유로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비난합니다.
선지자는 그 행위를 어리석다고 말함으로서 그 죄악을 헐뜯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분명한 사실을 보지 못했던 백성들의 악하고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역들은 소경이라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까지도 감동받을 만했던 하나님의 이적들을 보지 못할 정도로 사단이 그들을 미혹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엄청난 무지가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이제 선지자는 “기억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들의 무지가 변명할 여지없는 성질의 것임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그들의 소경됨이 적당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한 어리석음에서 온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무지의 원인은 자체로 풍성하게 나타난 사건을 간과한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죄를 가중케 했던 망각이 어떻게 그토록 빨리 그들에게 임했는지를 말합니다.
이런 사건들을 경험하고도 그들의 영이 소생 못 할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애굽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기억을 해야 할 것이 그들의 마음에서 사라져 버린 것은 1년이나 한 세기가 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을 원수들에게 넘겨 살육 당하도록 방치라도 하신 것처럼 당시에 하나님을 대적해 비방한 것은 미친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백성들이 지나갔던 바다가 히브리어로 ‘숲(Suph)의 바다’ 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갈대의 바다’ 라 번역해서 סוף (수프)란 ‘해초’(海草)를 뜻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원이 어떤 것이든 그 장소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이름을 그렇게 보는 것은 매우 일리가 있습니다. 그곳에 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6 편
3. 본문 8-11절은 “(8)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9)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10)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11)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입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누구든지 7절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것, 즉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하신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애물을 제거하시며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비방받지 않도록 자기가 시작하신 그 구원을 계속해서 성취하셨습니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공로가 상반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시지 아니하셨다면 결코 우리를 구원해 줄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완악했던 백성들을 위해서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를 변경시키셨던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는 그 후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어진 여러 방편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보다 현저하게 나타났었습니다.
선지자는 “홍해를 꾸짖으시니” 라는 말로 바다를 마르도록 명령하시고 계획하셨을 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합니다.
물이 양편으로 갈라지고 자유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 이적을 찬송하기 위한 의도에서 선지자는 이사야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비유를 이끌어 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사64:13) 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바다를 마른 평지 위같이 지나간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진기한 일이었다고 선지자는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 백성들이 방황하던 광야에는 깊은 바다와 울퉁불퉁한 길, 그리고 많은 언덕과 골짜기와 뾰족 뾰족한 바위가 있었을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바다를 지날 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고 깊은 바다를 통해 드러난 길이 평탄했음을 상기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 선지자는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라는 말로 이 이적에 보다 더 큰 능력을 부여합니다.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평탄한 길을 열어주고 애굽 사람들은 뒤덮어 삼켜 버려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한 백성과 다른 백성들에게 차등을 주셨겠습니까?
시편 106 편
시106:12-15 이에 저희가
본문에서는 음식물을 조급히 탐하여 모세를 원망한 죄에 대하여 말합니다.
1. 본문 12-13절은 “(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13)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찬송을 부른 사실에서 출발한 것은 그들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이중으로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러한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를 통해 확신을 가진 후에도 습관이 되어 있는 그들의 마음의 성벽을 또 다시 일으켜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키기 시작하되 마치 하나님의 이적적인 사역을 보지 못한 자들처럼 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자기들이 받았던 그 현저한 은혜를 망각했다는 그들의 불경스러움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핑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역의 영광에 압도당했던 그들은 억지로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선지자는 이야기하며 이리하여 그들의 반역죄는 가증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완악함이 압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다시 자기들의 예전 불신앙의 상태로 다시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앙은 항상 말씀의 본질과 상응한다는 사실을 볼 때, 또 말씀이란 썩지 않는 씨앗이기에 그것은 결코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마가가 말한 바와 같이 일시적인 믿음은 변덕스러운 것으로서 중생의 영의 열매라고 볼 수 없으며 그것은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4:17).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발적인 믿음이 아니라 억지에 못이겨 갖게 된 믿음, 즉 자기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느낌을 가짐으로서 그에게 어떤 경외심을 보여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단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하면 인간들은 자신을 기만하지 말고 신앙의 시금석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항상 신실성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이 구절을 예의 주목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변덕스러움을 지적하기 위해 선지자는 “미구에” 라고 말합니다.
시편 106 편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들이 여행을 떠난 후 서둘러 마라라 불리는 곳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가 강조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매우 약하게 해석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들이 서둘러서 곧 바로 길을 떠났다고 심각하게 말한 것은 그들이 겨우 짧은 동안만 믿음을 가졌을 뿐이고, 곧 하나님의 사역을 잊어버린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바다를 지난 후 마라에 이르기까지 단 사흘밖에 여행하지 않았으나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자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점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그토록 배은망덕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은혜를 기억하여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위하여 자신에게 재갈을 물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범죄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욕망이 이루어질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욕망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던 것이 죄였다는 점입니다.
단 하루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는 힘들다는 점을 볼 때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들의 욕망이란 가히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욕망을 즉각 만족케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곧 인내하지 못하고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과오는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 점과 하나님께서 평안을 얻지 못한 점,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기쁘게 여기실 때까지 인내로서 기다리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께 그렇게 하시도록 명령이라도 한 것처럼 무례하게 나아간 점에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거칠게 나아가는 죄악을 가중케 하기 위해 “가르치심” 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가지고 계심과 그의 가르치심에 따라 적절하게 행해야 함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이 가진 것 이상의 것을 내다봄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지배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항상 같은 원리를 간직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유익한 것으로 아시는 것들을 우리를 위해 행사 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시편 106 편
진실로 우리에게서 스스로의 지혜를 벗겨 버리는 믿음은 소망 중에, 조용히 하나님께서 그의 역사를 이루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해 줍니다.
반면에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은 지나치게 서둘러 하나님의 가르치심보다 항상 앞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2.본문 14절은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입니다
선지자는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자기가 짤막하게 언급했던 죄를 가르치는 자로서 자기 직분의 의무와 잘 어울리게 말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아닌 다른 길을 요구하는 자는 자기의 욕망의 만족 속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적절하게 절제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시고 다스려 주시는 길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욕망을 향하고자 하는 강한 경향성에 재갈을 물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필요이상의 것을 바라는 자마다 육체적 욕망에 직접 사로잡힘으로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직접적인 반대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라는 말씀은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마땅히 자기가 바라야 할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양상은 여러 가지가 있기에 선지자는 그 중 한 가지, 즉 백성들이 자신의 수단으로까지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주제넘은 행위를 저지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지켜야 할 길을 배척하고 하나님은 전혀 존귀한 분이 아니시라 하여 하나님이 육체적으로 우리를 만족케 해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족할 음식을 주셨으며 또 하나님은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으시면서도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자기가 정해 준 방법을 통하여 도움 입기를 바라시는 것이 그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떡이 없이도 우리를 배부르게 해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이 이러한 양식으로 유지되도록 그의 뜻을 정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방법을 게을리 하면서 하나님께 다른 방법으로 배부르게 해주시기를 바란다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시편 106 편
3. 본문 15절은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입니다.
רזון (라존) 이란 말 속에는 아름다운 말 재주가 있습니다.
만약 ו (자인) 대신 צ (차데) 로 보면 이 말은 좋은 기쁨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좋은 기쁨 또는 욕망과 매우 비슷한 말을 통해서 그들의 욕심을 비유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 말로 백성들의 무절제한 욕망을 실제적으로 확대하기를 그들이 만나를 싫어하므로 이제는 파리함만 남았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사치스럽게 살면서 음식에 까다로움을 부리는 자들, 특별히 상한 음식을 먹어 위가 상하여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들을 들어 백성들을 견책합니다.
그들은 해로운 음식만 먹는 자들이요, 이런 것을 먹으면 먹을수록 몸을 망치는 악습의 희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음식은 불과 순식간에 그들의 건강을 앗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건강치 못한 상태를 몸에 대해서 말함으로서 이것을 마음에 적용시키며 그러한 병적인 사람들을 유대인에다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과식은 건강에 도움은커녕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어 도리어 건강을 해칩니다.
적절하게 섭취하여 얻을 수 있는 음식의 복을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이유는 이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죄악을 벌하시므로 그들을 겸손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압도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죄악을 통해 지혜를 배운다는 것은 격언과 유사한 말입니다.
어떤 충격에도 새롭게 될 수 없는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고 완악한 자들인가!
시편 106 편
시106:16-22 저희가 진에서
본문 첫 부분은 이스라엘이 불신앙 중에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죄(민16장) 에 대하여 말합니다(16-18).
둘째 부분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죄에 대하여 말합니다(19-22).
1. 본문 16절은 “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 입니다.
선지자는 매우 짤게 또 하나의 범죄를 들고 있는데, 역시 이 방법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 깊이 생각할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백성들은 대대로 새로운 죄 범하는 양상을 고안해 내서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케 하는데 매우 노련해 있기에 바로 이 점에서 우리들은 더욱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저희가 ‘모세와 아론을 질투했다’는 말 속에서 선지자는 그들이 극악무도한 교만의 영향을 받아 행동을 함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씌워주신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세도 ‘나와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우리를 원망하느냐(칼빈 ;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한글)(민16:11)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방편으로 백성을 다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들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 자체를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질투”라는 말, 즉 하나님께서 최고의 자비와 긍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해 주시고 계시는 바로 그 시간에 그들이 자기들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반항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미친 행위는 자기들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의지하지 않고 하늘 그 위에까지 올라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아론과 모세가 하나님께 똑같은 취급을 받았음을 우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아론을 가리켜 “여호와의 성도” 라고 부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 속에는 두 사람 모두를 다 가리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권위를 받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권위를 높이고 그들의 권세를 극대화(極大化)함으로서 이 성도들에게 멸시를 가한 다단과 아비람은 그들이 아닌 하나님께 반역한 것임을 말합니다.
시편 106 편
2. 본문 17-18절은 “(17)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땅을 덮었으며
(18) 불이 그 당중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을 살랐도다” 입니다.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그들에게 임한 형벌의 막중함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들의 잘못을 고치고 개선되기는커녕(하나님의 보응이 돌들까지라도 거의 제해 버리실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할지라도) 더욱 완악하게 행했던 백성들의 강퍅함을 공적으로 책망하고 꾸짖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땅이 살아 있는 다단과 아비람’과 그 모든 당(堂)들을 ‘삼켜 버리고’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와 그들을 소멸시킨 것은 분명히 무서운 악한 징조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일반이요, 그들의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의 당하는 벌과 일반이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어니와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 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민16:29, 30)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해 반역할 만큼 미혹되어 있었기에 여기 드러난 소요의 무서운 성격은 그럴듯한 치료약만으로는 치료될 수 없었습니다.
위선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을 때는 두려움을 느끼는데, 그들의 죄악을 제거시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에도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려는 그들의 어리석음의 극치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몇몇 사람의 실수를 모든 백성 전체에게 담당시키셨는가? 라는 의문에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 음모를 볼 때 선동한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고, 270명이 그들과 동조해서 선동자의 무리에 가담한 것이었지만 전 회중이 비방하고 트집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모두가 다 똑같은 악감(惡感)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벌은 사악한 음모를 꾸민 우두머리들과 장본인들에게만 미쳤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음을 아시고 새로운 혁신을 열망하셨음에도 형벌을 가볍게 해 대부분의 백성들을 보존코자 한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9-20절은 “(19)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20)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향한 참된 예배를 포기하고 자기들을 위해 송아지를 만들었던 백성들의 반역을 심히 비열한 것으로 말합니다.
시편 106 편
그들이 비록 이런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은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풀먹는 소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바꾸어 버렸기에 선지자는 그들의 짐승 같은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행위로 하나님은 영광을 탈취당하셨으며, 그의 모든 존귀가 훼손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큰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가장합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보이는 형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여 참된 하나님을 포기하고 자신을 위해 악한 우상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풀먹는 소의 형상으로”라는 말을 자기 영광, 또는 그들의 큰 불경건의 죄악을 더욱 신랄하게 책망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으로 그들에게 옷 입혀 주신 것을 본 후에도 마치 온갖 종류의 음식을 다 만드신 하나님과 풀을 먹는 우매한 짐승 사이에 무슨 유사한 점이라도 있는 것처럼 소뿐 아니라 생명이 없는 소의 형상을 하나님의 위치에 앉히는 작태는 얼마나 미치광이의 짓인가?
선지자는 그들이 일반 형태의 우상숭배에 만족지 않고 모든 수치심조차 내던져 버린채 가장 무례한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했기에 그들의 소경됨을 야비하고 지독한 것으로 지적하고자 함을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사람이 모양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경스럽게도 하나님에서 그가 마땅히 누리셔야 할 지위를 빼앗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신에다 견준 그들의 행위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자기들의 생명을 부지해 나아간다면 자기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은 죽은 피조물을 먹음으로서만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만 족속들과 비교 되는 경우보다 하나님께 치욕적인 경우가 있겠는가?
이 비교는 그들의 죄의 흉악함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참된 하나님 대신 생명이 없는 소의 모양에 경배를 드린 것은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얻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광의 날개 그늘을 친절하게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 드리워 주시사 그들을 최고의 영광으로 옷 입혀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영광을 벗어 버려 자기들의 벌거벗음이 드러나게 되어 땅위의 모든 열방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상숭배의 죄를 보여줄 때에 ‘벌거벗었다’(칼빈 ; 방자하게-한글)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시편 106 편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출32:25).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의미했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대답이 있습니다.
이 상징물이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의 모든 관심을 여기에다 집중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 뿐이었습니다.
4. 본문 21-22절은 “(21)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 니 (22) 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 자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이 죄를 범한 것은 단지 무지해서 만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매우 뚜렷하게 나타내주셨으므로 고의적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창조 속에서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보지 못했다는 핑계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자비로우신 방법으로 자신을 알게 해주셨음에도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짐승 우상을 섬긴 죄는 훨씬 더 가증합니다.
또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행사하셨던 만큼 능력의 역사에는 그의 크신 이름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분명히 적지 않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에 통상적인 표적만을 주셨다 해도 이것만으로도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외심과 경배를 드릴 만큼 그 표적에 많은 관심을 보였어야 마땅했습니다.
이 이적들은 매우 고귀한 것이었다기보다 차라리 무서운 것이었고 또 진기한 것이었기에 백성들이 그들의 눈을 감은 채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은 심히 비열한 행위였습니다.
어둠이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태양으로 쫓겨 가는 것처럼, 온갖 공상과 완악한 실수는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 앞에서 쫓겨나고야 맙니다.
시편 106 편
시106:23-2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여기서는 가나안 복지를 주시마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신종(信從)치 않고 퇴보한 죄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보고를 듣고 겁약해져서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기로 고집하였습니다(민13:31).
이것은 불신앙으로부터 겁약에, 겁약에서 원망으로 빠진 결과입니다.
1. 본문 23절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보응을 잠시동안 보류시켰던 기도의 방법을 통해서만 자기들의 임박했던 멸망에서부터 현저했던 구원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간 이내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에 습관이 되어 있는 경향, 즉 자기들 마음의 무서운 완악함에 대한 증거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범죄 한 자들을 멸하시고자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감정처럼 얼마동안 심히 노를 발하시다가도 그 후에는 곧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신의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은밀하신 뜻에 따라 그들을 용서하시기로 하셨고 실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또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두려움으로 치사 그들이 죄가 크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이것으로 인하여 겸손해지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빈번히 말하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을 좇아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진노하심을 보다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범죄자를 용서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는 왕이 그를 심판대 앞에 앉혀 놓음으로서 그 사람에게 행한 자비를 보다 효과적으로 그에게 인식시켜 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음 속에 은밀한 계획을 가지시면서도 백성들이 영원한 죽음으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범했다고 그들에게 공공연히 말씀하십니다.
시편 106 편
다음에 선지자가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라고 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끼어 하나님의 무서운 보응이 그 백성에게 임하지 않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성읍들이 강습을 당했던 경과를 가리키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갈라진 틈이 전쟁에 가담한 많은 장비로 생긴 것이라면 용감한 군인들은 실제로 진지를 고수하기 위해 그 틈 속으로 자신을 내던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모세와는 달리 아첨하는 말로 백성들을 기만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꾸짖기를 전쟁의 날에 갈라진 틈에 세울 토성을 쌓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겔13:5).
어떤 주석가들은 선지자가 백성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르는 자들을 구별해 내고 있는 것, 즉 그들 상호간에 서 있는 거룩한 관계를 말한다고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이 비유 또는 유사를 갖게 해준 그 갈라진 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성을 신실하게 보호하사 그들을 위한 벽 또는 성벽이 되어 주셨습니다.
만약 모세가 그 백성들의 중재로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 백성들이 새롭게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킴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멸망이 엄습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2. 본문 24-25절은 “(24) 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25)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입니다.
유대인들이 멸망의 문턱에 도달한 이후, 심히 크고도 절박한 위험에서 거의 피할 수 없는 와중에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킨 것은 그들의 억제할 수 없었던 죄악의 명백한 발산이었습니다.
이 반역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가장 바랐어야 했던 거룩한 땅을 멸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버지처럼 보살피심으로 그들을 양육하시고자 하셨던 장소로, 또 오직 자기만 경배하게 이방민족으로부터 구별해 낸 사람들인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고자 결정하셨고, 또 하늘의 상속 기업으로 특별히 그들에게 허락하신 가나안 땅이 이 구절과 다른 몇몇 구절에서 “낙”토(樂土) 라는 말로 매우 적절히 불려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거할 거룩한 처소를 멸시하는 것은 가장 비열한 망은(忘恩)이 아니겠는가?
책망의 원인을 선지자는 “저희가 여호와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기”때문으로 말합니다
시편 106 편
그들이 의무인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는다면 그들은 가나안에 이르는 온갖 장애를 극복할 것이라는 그 땅에 대한 강한 희망에 불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음과 동시에 자기들에게 주어진 기업을 거절했고, 또 마치 하나님을 대항하여 팔을 쳐들려는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원망을 했습니다.
3. 본문 26-27절은 “(26)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저가 손을 드사 - 칼빈)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
(27) 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마음속깊이 간직하여 가장 주의를 기울여 경성함으로 한결 같이 하나님을 경외토록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보응하심에 대한 또 다른 실예를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은 없기에 그 백성들의 어리석음은 핑계 댈 여지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노를 억제하시고 그들의 후손을 온 땅으로 흩으시지 않으셨으나, 만일 그들이 계속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지만 않았더라면 그것만으로 그들의 교만을 억제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손을 드사’ 라는 말이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시기 위해 그의 팔을 드신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선지자의 말은 “맹세”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는 이 견해를 가장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하늘에서 불러 내리려는 것처럼 손을 드는 경우는 그들에게 흔히 있었던 엄숙한 예식으로 맹세를 수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만물보다 위에서 만유를 다스리시며 사도의 말처럼 자신보다 더 큰 것으로는 맹세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 적용시킨다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히6:13).
선지자가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사람들의 습관을 빌어 온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로 인해 거룩한 땅을 그 백성들이 지키지 못했더라면 그들의 분산은 실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시편 106 편
시106:28-31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이 부분에서는 이방신(異邦神) 바알브올을 숭배한 죄에 대하여 말합니다.
발람의 간교한 수단에 속은 이스라엘 민족은 모압 여인들로 더불어 음행하고, 또 그 우상 섬기는 일에 동참한 사건이 있었습니다(민31:16).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을 그렇게 많이 보고도 자주 죄에 빠진 것입니다(민25:7-9).
1. 본문 28절은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입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유대인들은 매우 무서운 형벌의 위협을 당한 이후 얼마 안 되어서 곧 새로운 종류의 배교(背敎) 행위에 빠졌다’ 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간접적으로 미디안 사람들의 우상에 빠졌다고 비난을 당하게 된 것은 여자들의 음모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발람의 의도였는데, 그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심을 즉시로 깨달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발람이 발락 왕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모압의 딸들을 놓아 두어, 이들의 유혹으로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민31:16). 여기 언급된 우상숭배는 육체적 음모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석가들은 각각 견해를 가집니다.
선지자는 이 일로 백성들이 두 가지 죄악을 범했다고 그들을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미디안 여자들에게 유혹을 당한것 또 하나는 바알브올에 매인것입니다(민25장)
만일 이 견해가 사실이라면 선지자는 그 백성들의 완악함을 책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저버리고 하나님과 혼약한 거룩한 연합관계를 파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그의 배우자로 택했기에 교회가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떠나 음부(淫婦)가 되는 것 못지않게 자기의 순결을 수치스러움으로 더럽히는 것입니다.
바알브올이 미디안족속의 우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어떻게 이 명칭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알’ 이라는 말은 ‘주, 주인’ 또는 ‘보호자’ 라는 뜻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시편 106 편
פער (파아르)가 ‘열다’(to open) 는 의미를 가지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이 말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런 행위를 저지른 원인을 말해 준다는데 우리는 이 견해가 옳다고 확증할 수 없습니다.
이 명칭은 아마도 어떤 지명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 사람들은 자주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그 섬기는 장소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선지자가 의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악하게 하나님을 반역하고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자신을 더럽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라는 말씀 속에서 선지자는 그들의 반역의 비열함을 더욱 크게 지적합니다.
선지자는 우상의 제물이란 말로 자신들을 생명의 다함없는 생물인 참되신 하나님께 연결시켜 주는 그러한 제사에 참여했던 것처럼 그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것을 먹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고의적으로 그토록 가증스러운 죄악에 물들어 자기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들의 행위는 더욱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연회가 그들의 예배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연회의 결과는 참 하나님을 포기하고 죽은 자와 결혼함으로 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제사를 드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제사한 음식을 먹기까지 했다는 데는 그들의 매우 파렴치한 면을 신랄하게 책망합니다.
2. 본문 29-30절은 “(29)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 도다 (30) 이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를 주었던 것은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책벌함에 있어서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엄격한 방법을 항상 실천하셨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이 재앙으로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에 이 책벌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앞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모세의 기도로 진정되었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그 재앙이 비느하스의 진지한 중재를 방편으로 멈추게 되었다 또 중지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פלל (필렐)이란 말을 ‘기도하다’ 라고 번역하는데, ‘공의를 행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과 더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탕한 자들에게 열심히 공의를 집행함으로서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보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부터 떠나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일어났다’는 말은 다른 모든 자들이 분별없는 무관심에 머물러 있을 때에 그는 일어났다 또는 중재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한 사람의 자비로운 중재로 재앙이 가시게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때 죄를 중단치 않은 점은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시편 106 편
우리는 이 모든 사건들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대대로 우리에게 채찍을 가하셔서 우리앞에 다른 사람들의 본을 보여주어 회개하도록 촉구하시는데도 이런 하나님의 바르게 하심으로 바로 선자는 매우 적습니다.
우리가 주의해 살필 점은 비느하스가 공의를 행할 그때 재앙이 그쳤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불을 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죄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스스로 판단하는 길에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11:31)라 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우리가 받을 만큼만 내려 주심으로 우리에게 적지 않은 호의를 베풀어 주십니다.
동시에 살필 점은 한 사람의 형벌에 대한 결과로 그때 재앙이 그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백성은 자기들이 저지른 지독한 죄악에서 물러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1절은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이처럼 한 개인 칭송을 통해서 백성 전체를 책망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비느하스의 탁월한 행위를 인정하셔서 찍어주신 이 표를 볼 때에 백성들이 매우 유치한 행동을 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영광은 오직 비느하스 한 사람만 받을 것이 아니고, 그의 후손들이 세대를 거듭하는 동안 누려왔습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을 더 크게 책망하기 위해 비느하스 한 사람을 그들과 대조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의 개인적 열심이 자기 소명의 한계를 넘어서 칼을 취하여 공의를 행한 것을 어떻게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비느하스는 적절한 판단이 없이 모험삼아 이 일을 행한 것처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때로는 일상적인 수준의 행위로는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하고도 비상한 충동을 갖는 경우가 있다고 답변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을 때(출2:12) 그는 아직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음에도 그리고 아직 칼의 힘을 부여받지 못했음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내적 충동에 의해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움직여졌음이 분명합니다.
비느하스도 이와 같은 충동으로 움직였습니다.
사실상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칼로 무장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있어서 하늘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소명의 공통적인 양식과 순서는 그것이 정당한 경우에는 언제나 비느하스로 하여금 성령의 비밀스러운 영향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여 칭찬받을 만한 행위를 수행하도록 한다는 사실은 주목되어야 합니다.
시편 106 편
그러나 한 가지 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 한 가지 행위에 어떻게 비느하스에게 의로 여겨질 수 있었던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3) 창세기 15장 6절에서 모세는 똑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이 구절이 행함에 대해 말한다면 바울의 논리는 천박하고 유치한 것이 될 것입니다.
먼저 비느하스가 이 행위 하나만으로 외롭게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봅시다.
율법은 의롭게 할 수는 있으나 어느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구원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의롭게 되는 것도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느하스의 행위가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행위를 의로 여겨주시되, 그들이 가진 본래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고 공로 없는 은혜로 의롭다 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만 의가 구성된다고 하면(어떤 곳에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행함을 엄격히 시험하면 많은 불완전에 젖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고 공로없이 주시는 자비하심을 피난처로 삼고 이것을 의지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을 뿐 아니라 달이 해에서 그 빛을 빌어오듯 바로 그 믿음으로 우리의 행위가 의롭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부패함이 억제를 받아 우리가 의롭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적이 아닌 신앙은 사람에게나 행위에 있어서 의의 성격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이제 바울에게로 돌아갑니다.
바울이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닙니다.
바울은 보다 고차원적인 원리,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을 인간들과 화목하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의를 소유할 수 없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믿음이 방편이 되어 사죄와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행함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어느 곳에서고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매우 적절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실상 방금 말한 의에 종속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의로 여겨 주시지 않는다면 행함 그 자체는 참되신 은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시편 106 편
시106:32-39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기서는 먼저 그들이 므리바에서 마실 물이 없어 모세를 대적한 일과 모세의 실수에 대하여 말합니다(32-33, 민20:10,11).
이 사건은 모세까지도 실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별세하게 되었습니다(신34:4-6).
다음 구절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들을 남아 있게 하므로 그들과 동화(同化)하게 된 죄에 대하여 말합니다(34-39).
1. 본문 32절은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입니다.
선지자는 다툼의 물에서 백성들이 범한 또 다른 범죄를 말합니다.
이곳의 이름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붙여졌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사실상 모세를 직접적으로 대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비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의 중함을 지적하려고 모세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선해서 택하신 자기의 종이라 할지라도 아끼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범죄가 매우 가중한 것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그러한 형벌을 받아야 될 사람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범죄의 원인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그를 찾아온 백성들의 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모세가 다른 사람들의 죄의 영향을 받아 본래 자기가 가진 마음의 확신과는 정반대가 된 관계로 불의를 범하기에 성급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다툼을 일으키고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불평으로 인해 모세를 자기들의 범죄 속에 끌어들인 그 백성들의 불경건함이야말로 어떻게 핑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2. 본문 33절은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어 말하였음이로다” 입니다.
시편 106 편
מרה (마라) 동사는 본래 ‘성가시게 굴다’ 또는 ‘화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히브리어의 히필형 가정법으로 되어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수동적인 의미로 그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킨 때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את (엣)이라는 전치사를 여격을 가리키는 표적으로 보고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거스려 반역을 일으킨 것을 말하려고 한다는 자들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모세가 정말 그랬었다면 선지자는 분명히 그가 부주의함으로 떨어졌던 그 죄와 어리석음을 그토록 지엄하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답변한 의미는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이 반역을 처음으로 일으킨 사람들은 백성들의 충동으로 인해서 죄를 범하는 자리에 몰리고 말았던 모세가 하나님께 그토록 엄한 취급을 당한 것을 본 후 매우 가증스런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모세가 백성들에게는 형벌을 받았다고 말해 주기는 하지만 그가 전혀 책망을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자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세의 영혼이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킨 결과로 번민을 일으켰음을 인정한다 해도 이 일은 그에게 더 주의해 한결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해주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모세를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에게 내리신 형벌을 가리킨다고 추측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드러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방을 늘어놓았을 때에 그의 영혼이 얼마나 크게 어지러워졌는지를 선지자가 말해준 것으로 봄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모세의 겸손하고 온유한 영혼이 백성들의 완악함으로 소요를 일으켰음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모세는 생각없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칼빈 ;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한글)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290:10)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자기 속으로 분노를 불태우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반석을 두들겼습니다.
3.본문 34절은“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입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단순히 유대인들에게 임한 형벌의 관계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우리가 보기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시편 106 편
그들은 마치 백성들이 이방민족들을 멸하지 않기에 그들은 승리의 영광을 얻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백성들을 통박하는 것처럼 이 구절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또 다른 책망을 합니다.
즉 이방인들을 좇아내는데 태만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그 땅에서 뿌리째 뽑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암몬족속의 죄악의 잔이 넘치게 된 것은 그들을 몰아내서 거룩한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자신이 거하실 곳으로 택하셨기에 그 땅이 모든 더러운 것들에게 거룩해지고 성별케 되도록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수를 거절하고 할례를 받지 않는 가나안 거민들과 친교를 나눔으로서 자기들의 뻔뻔스러움을 드러냈습니다.
이 민족들을 좇아내는데 관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그토록 엉뚱한 반응을 나타낸 것은 그들이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뜨겁게 불붙여주는 원인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이 모든 민족들을 칼로 멸하라 명했으나 너희가 이제까지 내 음성에 순종치 않았으니 “너희의 남겨둘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33:55) 하셨습니다.
민족들을 다 멸하지 않고 얼마를 남긴 것은 자비로운 행위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 행하기를 게을리 하는 죄와 그들을 그 땅에 남겨둠으로서 그들의 가증한 것에 오염되기가 쉬운 죄를 범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만용을 부리거나 너무 지나친 자비로 공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데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과오를 피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엄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민족들 전체 중 얼마를 남겨놓은 것 때문에 정죄함을 받았을진대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있는 자기 직분의 의무를 두렵게 여기고 무감각하게 생각하여 몇몇 사람들에게 지나친 자비를 베풀어 줌으로서 죄악을 억제시켜 주는 쐐기를 약화시키고 공공복리를 크게 손상시킨 재판관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4. 본문 35-36절은 “(35)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36)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이 어리석은 인간애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멸절시키지 않았던 민족들의 더러운 것들로 오염된 것이었습니다.
시편 106 편
만약 그들이 가나안 땅을 자기들만 차지하고 살았더라면 하나님께 순전한 예배를 드리는데 더욱 용이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이웃들에게서 영향을 입고 유혹을 받아서 곧 자기 열조의 발자국을 따르지 못했던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본받고 따르기가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이제 선지자는 그토록 여러 차례나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켰던 자들의 후손들에 대해 이들 사이에서도 역시 동일한 불신앙과 반역, 배은망덕함이 계속 만연됨으로 그들의 열조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방 족속들과 섞임으로 인해서 자기들을 자녀로 택하사 그 하나님을 모독하는 민족들과 자신들로 구별해 주는 특별한 상태 하에 품어 주신 하나님의 두드러진 사람과 자비를 노골적으로 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 족속들과 무분별하게 접촉함으로서 이 거룩한 언약을 무효화(無效化)시켜 버렸습니다.
선지자는 “저희가 ... 그 행위를 배우며”라는 말을 하면서 악한 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에게 경고해 줍니다.
선보다는 악을 좇기 쉬운 우리들은 부패한 것과 사귀면 사귈수록 더욱 그 악한 것을 널리 확대시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처해 있을 때 우리가 가장 주의하고 조심 할 것은 우리가 관계하는 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더러운 도덕으로 우리를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빠져들기 쉬운 우상숭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될 때에는 죄에 죄를 더하는 것밖에 다른 무슨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선지자는 유대인들이 이미 이방족속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의식에 빠져들었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섬긴다’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아름다운 기도형태만을 생각하는 교황주의자들의 야비한 생각을 논박합니다.
만약 형상 앞에서 예배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었다면, 선지자는 이방신들을 섬긴 자기 백성들을 정죄할 근거가 충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리고 훌륭한 기도는 그 형상에 드려야 한다고 구분하는 것은 야비한 짓입니다.
선지자는 이 행위가 그들의 어리석음에 집착하는 그들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채찍에 대한 그들의 멸시를 보다 뚜렷이 나타내기 위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5. 본문 37절은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입니다.
시편 106 편
선지자는 백성들의 끔찍스러운 맹독성을 폭로해 주는 미신 중의 하나를 말합니다.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아들과 딸들을 마귀에게 제사로 바쳤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이처럼 흉악한 모습으로 말하는 가운데 선지자는 그 행위를 보다 끔찍한 색조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분별이 없는 열심은 아무것이라도 바치기를 좋아하는 천박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유대인들이 불타는 열심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를 말함으로서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가 무엇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광적(狂的)인 지경에 이르고 있었기에 자기들의 자식들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생각하듯 그들의 생각이 선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자기의 자녀를 제물로 바친 행위는 실로 모든 자연 감정 중에 가장 칭찬을 받을만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변덕스러운 재치의 충동을 받아 행동할 때에는 외면적인 예배 행위를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 자기 죄를 가중시킵니다.
아브라함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자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해 아들을 바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 백성들은 무절제한 열심의 충동을 받아 모든 자연 감정을 떠나서 자기의 자녀들의 피로 그들의 손을 물들였습니다.
6. 본문 38절은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자녀들을 제물로 바쳐 무죄한 피를 흘림으로 그 땅을 더럽했던 종교적인 광증(狂症)을 여전히 더욱 큰 분개심으로 통박합니다.
혹 아브라함은 자기 독자를 아끼지 않았기에 칭찬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기에 몰인정하게 여겨지는 모든 요소들은 믿음의 순결성으로 다 지워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다면(삼상15:22) 도덕과 종교는 모두 최상의 규범입니다.
자신의 판단을 떠나 미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지독스러운 잔인한 행위를 하도록 마음이 굳어진 것은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진노가 무섭게 나타난 것입니다.
시편 106 편
순교자들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위험 속에 던질 때마다 그 희생의 향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그러나 데키치신(Decii)의 이름으로 두 로마사람이 저주스럽게 죽음에 내맡긴 것은 극악한 불경건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이런 생각에서 백성들의 죄를 지적한 것과 그들이 교만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한 것은 주제 넘는 죄악을 더 첨가한 것으로 지적한 것은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예배를 받으시기 위한 특별한 장소로 삼으시기 위해 옛 주민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 땅에서 쫓아내야 할 것으로 그들이 더럽혀졌음을 책망하기 위한 심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우상숭배로 그 땅을 더럽혔을 뿐 아니라 잔인하게 자기 자녀들을 죽이므로 하나님께서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을 빼앗았고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헛되게 만드는 이중 악을 행한 것입니다.
7. 본문 39절은 “저희는 그 행위로 더러워지며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이에 유대인들의 이방사람들의 야비한 습관을 좇아 완전히 부정하게 되었다는 일반적인 말로 시작하여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 속에는 불경건함밖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사람의 행위’ 라는 말로 하나님의 허락없이 사람들이 고안해 낸 모든 거짓된 예배를 지적합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참으로 관련되어 있는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요, 종교문제에서 모든 인간적인 생각이나 혼합물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의 모든 불타는 열심에서 나오는 결과가 자기들의 추악한 생각으로 인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그들을 비열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영적인 순결을 이룩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6 편
시106:40-4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본문에는 먼저 이스라엘이 계속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노하시며 징벌하신 사실이 말씀됩니다(40-42).
본문의 다음 부분은 그러나 그 징벌은 일시적 징계요 영벌(永罰)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금 그 징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신실하였으나 하나님은 신실하시었습니다.
1. 본문 40-42절은 “(4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41)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저희를 치리하였도다
(42) 저희가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 수하에 복종케 되었도다” 입니다.
백성들에게 임한 형벌의 지엄함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사실 즉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키므로 적지 않은 반역의 죄를 범했음을 확증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개혁이 얼마나 소망이 없는 가를 깨닫고 이 모든 것들은 자기들을 참으로 자기의 죄로 돌이키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택한 기업이 되는 백성들이 마귀의 노예가 된 이방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진노가 무서움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사악함 싫어하기에 이 무서운 재난을 몰아냈어야 했습니다.
“저희가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 수하에 복종케 되었다”라는 말씀 속에 선지자는 백성들의 행위의 무례함을 더욱 놀라운 방법으로 지적합니다.
그들은 매임과 압박 받는 상태에 떨어짐으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 아래 진실 되게 온 마음을 다해 겸손해지지 않는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더 수치스럽게 드러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그토록 자기들을 괴롭혔던 굴레에 떨어지거나 원수들의 세력을 일으키게 하는 동기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께만 전심을 다하라는 경고를 받았었습니다.
하나님의 멍에 메기를 거절했던 그들은 폭도들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고 압제를 당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아버지로서 다스리심에 따라 다스림을 받지 않은 자들은 원수들의 발아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공의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시편 106 편
2. 본문 43-44절은 “(43) 여호와께서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저희가 꾀로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44)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입니다.
백성들의 악한 고집이 하나님의 지엄하신 채찍으로도 그들을 바로잡지 못한 사실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선지자는 이제 이와는 반대로 백성들의 마음이 말할 수 없도록 굳어져 버린 것을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모든 은혜들도 그들을 순종에 매어 둘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끌어냅니다.
사실 그들은 환난을 당하던 때에 자기들이 지고 있는 짐 때문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벌을 완화할 뿐 아니라 놀라운 구원을 그들에게 베풀어 주셨는데도 얼마가지 못해 실족한 것을 어떻게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온 인류의 본성을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은 단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상황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지엄하신 막대기로 우리를 겸손케 만들거나 그의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녹아지도록 하신다면 그 효과는 단지 일시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고 인자하심을 쌓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곧 우리의 악한 습성에 향하는 경향에 빠져들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수많은 엄청난 구원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우매함을 억제하지 못했기에 실족하는 일이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시인은 “저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꾀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들이 죄악으로 인하여 찾아오는 마땅한 보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모든 환난을 당하기에 가장 마땅한 자들이었음에도 저희의 부르짖음이 응답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칠 줄 모르는 인자하심으로 그들의 영혼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에게 매질하기를 그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현명한 교훈을 듣지 않으려고 귀머거리가 되었고, 자신의 모든 경고와 채찍을 무시해 버린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다는 이 사실은 얼마나 긍휼히 여겨 주심인가? 모든 인내와 오래 참으심 이후에도 그들의 심히 타락한 심령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3. 본문 45절은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입니다.
시편 106 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이 여기서는 긍휼과 오래 참으심의 원인으로 돌립니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범죄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용서를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이 언약으로 고침을 받아 자기들이 안전한 곳으로 알았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는 자들의 앞 못 보는 강퍅함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지자는 그들의 배은망덕함을 책망합니다.
그들은 멸망당해야 마땅할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유지해 나아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구절에서 강조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의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죄가 받아야 할 많은 형벌은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의 보고(寶庫)의 위대함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돌이키사”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변화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르게 하시는 사역의 모양을 가리킬 뿐입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께서 형벌을 감해 주시고 그의 심판을 집행하시는 손을 거두셨을 때 하나님이 그의 뜻을 바꾸셨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다만 우리의 연약함과 한정된 이해력에 맞추어 사람들의 말하는 방법을 좇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4. 본문 46절은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입니다
선지자는 앞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원수들 손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원수들을 물리쳐 주셨기 때문이었다고 말한 것과 같이 이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이 모든 원수들의 마음을 무서운 방법과 극히 잔인함으로 그들에게 보응을 내리사 부드럽게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어 그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굳어지기도 하고 부드럽게 되기도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백성들을 향해 불타고 있을 때는 원수들도 그들을 향해 무자비한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가 쉬는 그 순간에는 그의 심판의 용광로에서 나오는 불길은 꺼지고 원수들의 잔악함이 긍휼로 바꾸어집니다.
따라서 잔인하고 야만적인 원수들이 전에는 미워하던 자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기 시작하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변화입니다.
혹 그들이 이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신 섭리는 이리를 어린양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시편 106 편
시106:47-48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본 시편의 끝부분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구함과 송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히 그 택하신 백성을 지키신 사실을 보는 선지자는 이렇게 기도할 용기를 얻습니다.
1. 본문 47절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입니다.
결론을 볼 때 이 시는 백성들이 슬픔과 환난 당한 시기에 쓰여졌음이 분명합니다.
학개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백성들 중에 이름난 선지자들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제사장들이 예언의 영을 받아 모든 백성들에게 필요한 위로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형식을 백성들이 자신들의 전 역사를 상고함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 이래 선조들은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상황의 긴박성, 즉 안티오쿠스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흩어진 이후에 생긴 상황의 긴박성 속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이 겸손해져서 하나님이 흩으신 것을 비방 못하게 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용서 받을 가치가 없음에도 그들의 열조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셔서 앞으로는 사죄의 소망을 갖도록 해주셨음을 깨달아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진심으로 정성스럽게 추구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려는 언약에 대한 엄숙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여 주셨으므로 백성들은 모세의 예언에 따라 학대를 당하고 피를 흘리는 지체들을 한 몸으로 불러 모아 주시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는 말씀에 의해서 입니다(신30:4).
이 예언은 마침내 널리 흩어져 있던 무리들이 한 곳에 모이고 믿음으로 연합을 이루었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이 땅에 속한 나라와 정치로는 회복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음으로서 더 훌륭하게 한곳에 모여졌기 때문입니다.
시편 106 편
그들은 어디서든 피차에 이방인들과도 믿음의 거룩하고 영적으로 연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한 교회를 구성하고 온 땅에 그 교회를 확장시켜 나아갑니다.
그들은 포로에서 자기들이 구속함을 받음으로 완성된 목적, 곧 주의 성호를 찬송하는 것과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추가합니다.
2. 본문 48절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입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백성들의 기도와 간구를 조절하여 기운을 잃어버린 포로들이 심한 압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기를 쉬지 않도록 합니다.
또 이것은 주의 깊게 살펴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역경을 만나 어려울 때 백 명 중에서 거의 한명도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려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은 부주의하고 활기 없는 기도를 드리거나 혹은 자신의 괴로운 처지에 관하여 불만을 토로함으로서 자신의 마음의 교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구하는 음성에 하나님이 호의로 응답 해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바르게 해 주심에 온유한 마음으로 복종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십자가를 인내로 지고 나가는 길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환난당하는 포로들에게 하나님께서 매우 지엄하게 채찍을 내리시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라고 권면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라는 말씀도 역시 똑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고통의 바다에 압도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라고 그들 모두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107:1-9 여호와께 감사하라
박윤선 목사님은 이 시편의 총 주제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 되었다가 구원되어서 돌아온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으로 밝힙니다.
1) 시인은 사람의 행사란 변덕스럽고 확실치 못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이거나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파선, 기근, 방황, 질병, 전쟁의 재난과 같은 환난이나 모든 역경들은 하나님이 노하셨다는 여러 증표로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자신의 심판대 앞에 사람들을 소환하십니다.
2) 반면에 번영과 복된 사건들도 자비로우신 아버지 앞에 사람들을 소환함이 됩니다.
번영과 복된 일들도 자비의 아버지요, 치우침없는 심판주되신 사실에 대한 반영입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송을 어느 때나 받으시기 위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3)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않으려는 악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합니다.
1. 본문 1-5절은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입니다.
1) 이 구절들은 시편 제106편의 서두와 같습니다.
(1)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매우 즐겨 사용했습니다.
다른 시편에도 많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시는 한 파트가 한 부분을 노래하면 다른 파트가 이것을 받아 교대로 부르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매 구절 다음에 ‘여호와께 감사 혹은 찬송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화답하는 형식의 방식이 계속됩니다.
이 시편에서는 사실상 1절의 내용이 중심을 이루면서 적어도 의미상으로는 7차례 정도 반복됩니다(8, 15, 21-22, 31-32, 43- 다시 1절로).
시편 107 편
이 시인이 누구였든 통상적으로 사용하던 일반적 서두(序頭)나 아름다운 감정 표현 없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회는 하나님을 빈번하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2) 시인은 2절에서 곧 이어서 더욱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시인은 먼저 노예와 갇혔던 자리에서 구원함을 받아 오랫동안 힘든 여행을 마친 후 안전하게 자기들이 거할 곳에 당도한 자들에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권합니다.
시인이 이들을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 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길 없는 광야에서 방황하고 맹수들의 울부짖음에 시달리고 있을 때 만약 하나님이 손을 펼치사 보호자와 안내자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러 차례 집에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여행자들을 예외 없이 통틀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이나 다른 어떤 강포나 불가피한 상황으로 먼 지역으로 쫓겨나서 사면으로 위험을 당하는 것으로 느끼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아니면 원수들이나 강도들이나 약탈자들에게 갇힌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이런 상황에 들어간 것도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된 것도 우연히 아니라 그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보살피시는 섭리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2) 그런데 2절은 1절과 연결되어 있어서 선지자는 이 찬양시를 부르라고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 이 구절은 매우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자기 고향 땅에 돌아오므로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들아 이제 나아와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 대열에 참여하여 너희의 구원을 통해 너희가 체험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선포할지어다’ 라는 방식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2) 유대인들이 큰 무리로 여행할 때 모두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 돌아오기 위해 사면에서 울퉁불퉁하고 사납고 험난한 길을 지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인류 가운데 사는 주의 백성들이 어느 때나 일반적으로 당하는 일입니다.
(3) 시인은 그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많이 방황했으며 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 황량한 광야에서 찾기 힘든 피난처를 구하지 못했던가를 기억나게 해 줍니다.
만약 사람이 올바른 방향 지식이 없이 숲 속에 들어간다면, 그는 끝내 방황하다가 사자나 이리들의 밥이 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4) 그러나 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광야에 길을 잘못 들어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히 그의 눈을 집중시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순간 순간마다 죽을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7 편
2. 본문 6-9절은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 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입니다.
1) 6절에서는 과거 동사가 사용되어서 문법적으로는 계속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1)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광야에서 방황하던 자들은 거할 곳을 찾지 못하여 때때로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원에 대한 소망이 끊어졌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도움을 간구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근심 중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그러므로 선지자가 말씀하려는 것은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경건한 자들의 믿음을 인간들의 일반 상식처럼 묘사하여 권장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사는 것,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등등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각한 가난의 압박을 당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는커녕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올 뿐 다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 이런 계획을 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성도들이 육욕에 빠져 하나님을 비방하는 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는 관계없이 자기 이름을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필요에 의해 마지못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종교를 하나의 우화로 간주하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도 모든 시대에 행해졌던 습관이었습니다.
그들이 농담으로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에 비웃던 하나님의 이름에 경배를 드리게 된 것은 타고 난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여기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 즉 경건심과 믿음이 부족한 자가 위험한 처지에 있을 때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본능적으로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한 것은 불안하고 곤궁할 경우에 불과하기에 자기들이 자기 행복을 만드는 것으로 아는 이 지식은 우매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평화롭고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기 형통에 도취돼 있는 자가 많습니다.
시편 107 편
(4) 또 경건의 씨앗이 자기들 마음에 심겨져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환난의 구렁텅이에 빠질 때까지는 지혜를 배울 꿈도 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고대 어릿광대들이 신전에 들어가는 길에 하나님의 보호 때문에 파선을 피했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 신전에 상인들이 걸어놓은 많은 서판들을 보면서 감미롭고 익살스러운 어조로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의 주검은 셀 길이 없고 그 숫자 또한 셀 수가 없네’ 라고 중얼거렸던 풍자적인 읊조림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 광대는 이러한 방법으로 그 우상들을 바로 비꼬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전하게 항구에 당도한 사람들보다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수백 배나 더 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영광을 최저 수준으로 끌어내리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중에도 동시에 공의도 행하사 그 중의 하나가 베풀어져도 다른 하나는 결코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5) 이 말씀이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광야에 넘어진 여행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목마름에 쓰러졌다면, 많은 사람이 사나운 짐승에게 밥이 되었다면, 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면 이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여러 가지 증거로 보여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같은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켜 주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 공의를 선포하기 위해 심판을 내리셔서 차이를 두십니다.
2) 그러므로 선지자는 매우 적절하게 저희는 하나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7절).
3)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심에 대해 감사드리라고 권합니다(8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더욱 높이려는 생각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 을 하나님의 자비와 연결시킵니다.
선지자는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지나치게 많이 나타나서 모든 자들은 깨닫거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드러진 구원을 받은 자들이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악한 시도로 하나님의 기이하신 일을 능가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발로 광선을 짓밟으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본능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촉구한다면 우리가 번민과 위험에 직면해 있을 때, 그리고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이것은 우리의 사악과 배은망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시편 107 편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중에 만중에 하나가 하나님과 그의 성품과 그의 기이하신 일을 알고 그의 부요에 참여한 자가 있어 통합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것으로 만족케 하시며 충만케 채워주심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9절) 하나님으로 부요케 되는 일이 가장 복된 일입니다.
3. 본문의 뜻을 종합하면 1절에서 선언되고, 또 반복되는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은혜의 혜택을 선포하라” 입니다(1-9).
1) 유대백성은 포로 되었던 자리에서 구원받고 오랫동안 힘든 여정을 마치고 안전히 거할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권합니다(1).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섭리였기 때문입니다.
2) 또 “구속함을 받은 자” 들에게 그 동안 체험했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선포하라고 권합니다(2).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는 그들로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게”(6) 하신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며 거할 곳을 찾지 못하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며 모든 구원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습니다”(7).
이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날 때 우리는 감사 드려야 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평범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자하신 하나님이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8) 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섭리를 알아 차리지 못하거나 알아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행사(行事)를 선포합니다.
4) 환난의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또 그 환난에서 구원받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알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시편 107 편
시107:10-22 흑암에 거하는 자
우리 주변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섭리하십니다.
전쟁이나 기근, 질병 같은 역경은 하나님의 노하심의 증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과 기쁨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그 섭리를 알고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현저하게 볼 수 있습니다.
1. 본문 10절은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흑암에 거하는 자 -칼빈)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과 은혜를 분명히 나타내신 또 다른 위험에 대해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운명의 장난이라고 부를 뿐 이것들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섭리로 보는 자는 극히 적습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서 받으시고자 하시는 실제 지혜와 차이가 있습니다.
즉 환란의 때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야 하며 환난에서 구원받을 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알아야 하는 지혜와 매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대적이나 약탈자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단순히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에게서부터 건짐을 받는 것도 우연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모든 환난은 하나님의 채찍이요, 여기서 헤어날 길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약탈자나 강도의 손에 떨어졌으나 그 즉시 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모든 살 소망을 포기한 채 순간 순간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현저한 증거입니다.
또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더 절실히 비춰지는 은혜인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지 않는 자들은 다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선지자는 기이한 방법으로 보호를 받고도 즉시 자기를 보호해 준 구원의 빛을 상실해 버리는 모든 자들에게 그 배은망덕을 책망합니다.
또 선지자는 한층 더 강력하게 책망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한 증거로 그들의 한숨과 울부짖음을 말합니다.
시편 107 편
그들이 근심 중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자기들의 구원주이시다는 사실을 신실하게 고백하고 평화롭고 평온한 때에 이 고백을 팽개쳐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2. 본문 11-16절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당하는 환란에서 원인을 말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갖는 헛된 생각을 바로잡아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 보았다면 그 즉시 세상 사람들의 행사에는 우연이나 운명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임한 모든 환난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는 마음 속에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라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또 선지자는 그들이 환난 당한 이유를 밝혀 줌으로써 그들을 유명한 악인으로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환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비록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들을 비방할 자가 없다 할지라도 자기 생활과 자기 마음을 돌이켜봄으로 자기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의 진정한 원인을 항상 찾아낼 수 있게 합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단순하게 죄를 범했다고 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대적하였다고 함으로써 우리 생활을 최상으로와 유일하게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명령에 복종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순전히 필요에 의해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오는 구원이 자기들이 받고자 하는 소망과 상반됨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무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놋문과 쇠빗장은 은혜를 한층 더 높이기 위한 의도로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노예 쇠사슬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는 의미입니다.
3. 본문 17-19절은 “(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란을 당하매
(18)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9)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입니다
1) 시인은 또 다른 징계에 대해 말합니다.
시편 107 편
시인은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감금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질병을 주는 자들은 죄에 대한 열매를 거두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범죄자가 하나님께서 바른 길을 가도록 자기에게 역사 해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2) 시인은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자신을 음탕함에 방치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이라 부릅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단순하게 무지나 과오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올바른 이해력을 빼앗아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이롭지 못한 일들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육체적 정욕에서 비롯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잠언 말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신 멍에를 벗어 던져 버리고 사단과 죄악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자신의 미련과 포학의 결과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선지자는 어리석음의 근본 요소를 “범과” 또는 “죄악”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사람이 한번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모든 자제력을 잃어버린 채 또 다른 죄악으로 점점 더 깊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세상에 일반으로 침투해 있는 불안을 말한 것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직면하여 모든 살 소망을 포기해 버린 자들의 곤란에 대해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구원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다 더 분명해집니다.
기적적이고 주목할 만한 방법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거나 원하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경우와 같이 사람은 약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능력의 효과를 식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저희는 많은 “위경”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많은 사망에서부터 건짐을 받았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라는 말씀 속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들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 하여 가장 큰 근심에서 구원을 받으면 이로써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 기이하신 방법으로 간섭해 주시지 않는다면, 자기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본문 20-21절은 “(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입니다.
시편 107 편
다시 한번 선지자는 저희가 멸망에서 건지심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 생각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또 실제로 건짐을 받은 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질병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대조시킵니다.
이 말씀은 땅에 있는 의사의 기술로 저희 질병이 고침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들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질병에서 나옴을 받는 방법도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획하시고 세상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질병이나 죽음까지도 즉시 나가도록 하십니다.
이 말씀이 주석가들의 생각처럼 성도들에게만 해당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근심에 매여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 말씀으로 아직 성별 되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악한 자들과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도 미쳤다는 사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질병이란 우연히 우리에게 다가오거나 자연적 원인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질병을 보내신 바로 그 분께서는 그것들을 쉽게 제거하실 수 있으며, 말씀만으로도 이 뜻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구절 내용을 깨달은 이상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비유 말씀을 아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 없이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또 이 말씀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영적 생명의 기쁨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5. 본문 22절은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설명 형식으로 덧붙인 것으로 제사를 드릴 때 주의 섭리가 무시당한 경우에 주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이 어떻게 탈취되는가를 보다 강력히 보여줍니다.
자연 그 자체도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자연 이외의 것으로는 깨닫지를 못하는 이방 사람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제사 드리는 행위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 행해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런 의식을 지키게 함으로써 인류 전 가족을 같은 경전과 종교 감정을 붙들고 계시려 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를 아는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의 무감각과 각기 다른 생각들을 이 문제로 이끌어 들입니다.
시편 107 편
우리는 여기에 의식적 율법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의 일부분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한 선지자는 극심한 멸망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자기의 위대한 구원자를 찬송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배은망덕한 자들을 책망합니다.
6. 우리에게 주신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예배하라” 고 가르칩니다.
1) 사람이 당하는 모든 환란에서 그 진정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11) 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 순종하기 거절하는 자들은 그 죄의 열매를 질병으로 거두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음탕에 방치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미련한 자” 라고 부릅니다.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란을 당하매”(7) ‘위경’(20) 에 빠집니다.
위경은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다”(18) 는 말씀대로 의사도 고칠 수 없는 치료 불능의 병입니다.
3) 이런 육체의 질병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이 없이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20)
이 말씀을 믿기 전에는 영적 생명의 기쁨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4)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아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심히 어려운 자리에서 건짐 받고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책망 받아 마땅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어다”(21, 22).
시편 107 편
시107:23-32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먼저 본 시편 전체를 살펴보고 본문을 보겠습니다.
1)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외국에 포로 되어 많은 고생을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긴 역사(歷史)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회고하고 찬송합니다(1-3).
사람은 고생을 당해 보아야 하나님의 인자하신 간섭도 체험하는 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으로 확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근심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이 네 차례(6, 13, 19, 28) 나옵니다.
또 여호와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찬송하라는 말씀도 네 차례 나옵니다(8, 15, 21, 31).
2) 시인은 인생이 고난 받는 중요한 원인 한 가지를 역설(力說) 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죄악입니다. 그 죄악에는 보응이 있습니다.
(1)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외국에 사로잡혀 갑니다(11, 12).
“하나님 말씀을 거역” 한다는 것은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 이란 말로 해설됩니다.
그러므로 그 죄악은 아주 강퍅하게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범한 자들은 포로가 되는 형벌을 받을 만합니다(렘22:10).
(2)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미련” 함으로 질병에 걸립니다(17, 18).
사람이 미련하여 하나님의 천연법(天然法)을 지키지 않아도 질병에 걸리지만, 미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므로(눅24:25), 심리적 불안을 초래하여 질병에 걸립니다.
많은 질병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자를 찾아온다는 것은 현대 의학도 증명합니다.
18절의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란 말씀은 질병에 걸린 것을 가리킵니다.
(3)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거민의 죄악으로 인해 땅이 박토가 됩니다(33, 34).
사람들이 악하면 자연계도 다스려지지 않으므로 산물을 내지 못합니다.
(4)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 남을 압박한 죄로 자신이 압박을 받습니다(39-41).
압박하는 자가 압박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묘하다고 할 것은 그가 악인들의 행한 일의 종류를 따라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시18:26).
1. 본문 23-28절은 “(23)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24)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시편 107 편
(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27)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28)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가 인간들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대한 또 다른 실례를 보여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파선을 당한 자를 항구에까지 인도하신 것을 예를 들어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음부와 흑암에서 그들을 일으켜 밝은 낮에 살도록 해주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행사와 기적을 보면서 항해하는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흔히 일어나는 기적적인 일들을 일반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 하기에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기이한 여러 일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선지자 자신이 해석가가 되어 하나님이 어떻게 급작스런 폭풍을 일으키시며 또 잠잠케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문맥과 연결시켜 보는 것이 좋습니다.
2)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의 생명은 그들이 만나는 폭풍우에 의해 자주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다가 큰 동요를 일으키며 파도가 일 때마다 그들은 죽음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계속 더 생생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선지자는 바다가 자기 마음대로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할 때 ‘여호와께서 명하셨다’ 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가 바람을 일으키시며 바다를 흉융케 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이 어떤 현상을 보고 폭풍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는 것이 사실은 분명하나 갑작스러운 변화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단순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는 방법으로 돌풍과 폭풍우가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 서서 그 원인 자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폭풍이 가져오는 긴박한 위험에 대해 말합니다.
차라리 생명을 잃지 않고 무사하게 폭풍을 피했을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더 현저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 죽음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라는 말씀은 저희가 파도를 타고 공중에 올라가므로 그들의 생명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고 이어 그들을 깊은 곳에 빠지게 하는 바다의 동굴로 떨어지는 것을 말하려는 듯합니다.
시편 107 편
다음으로 선지자는 그들을 괴롭히는 두려움 또는 그들에게서 판단력을 빼앗아 가 버리려 하는 두려움에 대해 말합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선원들이 기술로 항해한다 해도 그 기술이 허사 되고 무기력하게 되어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밧줄을 동원해 깊은곳에 닻을 던지며 모든 돛을 다단다 해도 온갖 노력과 인간기술이 모두 소용없게 되며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지기만 바라게 됩니다
모든 안전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 졌기에 더 이상 자기들이 동원할 방법을 강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도움이 실패하자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죽은 자와 다름없게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2. 본문 29절은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입니다.
세속 작가라면 이런 사건에 대한 역사를 말할 때 바람이 잔잔해지고 노한 파도가 평온케 되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고요하게 평정시키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것으로 부각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세상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았던 바다의 맹렬한 파도와 바람이 갑작스럽게 고요해진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치 파도가 서로 다투는 것처럼 바다가 흉용하고 무서운 분노로 끓어올랐다가 갑자기 고요하고 평온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파도의 뛰놂과 그토록 분노를 억제시키고 바다 밑바닥을 거울처럼 부드럽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지자는 이렇게 뛰어난 바다에서의 광풍에 대한 묘사를 말하면서 광풍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잠잠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폭풍이 바다를 흉용케 하고 파도가 산처럼 맹렬히 뛰놀며 또 바람을 쉬게 하고 물결의 요동을 잔잔케 하는 근본 이유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라 합니다.
이 말씀은 그런 상황에 포함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시인이 말한 것이 이방 사람들인 Virgil 이나 기타 다른 시인들이 말한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훨씬 더 감미롭습니다.
그들은 한 신(神) 이 폭풍을 일으키고 다른 신이 그것을 잠잠케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시의 숭고함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피조물 가운데서 동요를 일으키시고 혼란으로부터 그 피조물들을 회복시키고 자연을 격동 속으로 몰아넣다가 다시 잔잔케 하시는 최고 존재자에 대한 찬양 가운데서 이보다 더 우아한 형식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을 발하게 됩니다.
시편 107 편
3. 본문 30-31절은 “(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두려움에 대해 말한 다음 ‘저희의 기쁨’ 을 말해서 그들이 자기들의 두드러진 구원을 잊어버렸다면 이는 배은망덕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들은 광풍 그 자체와 계속되는 평온을 통해 자기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와 그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충분한 교훈을 가르쳐 줄만한 충고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32절은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입니다.
선지자는 또 그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감사는 개인적으로나 한 가족으로 드려야 할 뿐 아니라 많은 무리가 모이는 모든 곳에서도 드려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가 특별히 “장로들” 이라고 말한 것은 지식과 경험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이 찬송을 더 잘 들을 수 있고 또 증거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이런 사실이 정확히 강조됩니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그 구원을 받은 자 개인을 위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험에서 구원을 받은 자는 모든 백성 앞에서 그 사실을 증거 해야 됩니다.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라는 말씀도 “장로들”은 백성의 대표자들이니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므로 그 찬송이 백성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본문은 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 섭리의 또 다른 실예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파선 당한 자를 항구까지 인도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마치 음부의 깊음에서 건져내 빛 가운데 살도록 해주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기이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마다 감사 찬송해야 합니다.
이런 감사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가족과 교회에서도 드려져야 합니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32).
시편 107 편
시107:33-41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 상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를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1) 하나님은 악인들을 인해 토지를 건조하게 하여 소산이 없게 하십니다(33, 34).
(2)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을 인하여 박토를 옥토 되게 하십니다(35-38).
본문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은 압박하는 자들은 낮추시고 핍박받는 자들을 높이십니다.
1. 본문 33-34절은 “(33)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입니다.
1) 여기서 변화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비옥한 땅이 박토가 되고 열매 맺지 못하던 땅이 새롭게 열매 맺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역 거민에게 자기 진노를 쏟으사 그들에게서 복을 거두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풍성을 주신 경우가 아니라면 어떻게 어떤 곳은 불모지가 되고 다른 곳은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든 우리는 선지자가 땅위의 어떤 곳은 옛날 비옥하던 곳이 지금은 메마르고 황량한 땅이 되는 반면 다른 곳은 비옥하게 되기를 시작했다고 말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나 지표면(地表面)의 이러한 기이한 변혁이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뜻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34절에서 땅은, 그곳 거민들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손으로 보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스스로 드러내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시인은 물이 풍부한 들판이나 지방을 ‘못과 샘’ 이라 부릅니다.
수분은 식물이 자라 열매를 맺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염밭” 이란 말은 소금보다 더 불모의 땅이 없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막9:50)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열매 맺지 못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곳을 불모지로 만들려면 보통 그곳에 소금을 뿌립니다.
선지자가 그 땅이 소금으로 덮였다고 한 것은 고대 관습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시편 107 편
2. 본문 35-38절은 “(35)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37)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소산을 취케 하시며
(38) 또 복을 주사 저희로 크게 번성케하시고 그 가축이 감소치않게 하실지라도”입니다
33절과 대조 되는 이 변화는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더 분명히 해 줍니다.
밭이 예전과 같은 소출을 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흔히 옛날 사람들처럼 농사를 그 땅에 계속 지은 관계로 땅이 그 생산 능력을 다 빼앗긴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땅에 자기 능력과 인자하심을 놀라웁게 베풀어 주시지 않았던 경우에 메말랐던 땅이 많은 소출을 내게 되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토양 성분뿐 아니라 대기도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광야가 못으로 변함으로써’ 한때는 결코 초라한 성읍이 아니었던 황량하고 비경작된 장소에서 많은 유명한 도시들이 번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토질(土質)이 변한다는 것은 태양과 별들의 운행이 변한 것만큼이나 있을 수 없습니다.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라는 말씀은 그들이 직접 궁핍하다고 느낀 이후에 무엇이 자기들의 궁핍함을 채워 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의미든가, 더 이상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곳에 살면서도 그곳을 떠나거나 새로운 거처를 구할 수 없는 그 가련한 자들이 하나님으로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세상 사람들이 도와주기를 거절하는 자와 그들에게 쫓겨난 자들의 기근이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시매 안락하게 변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 사실을 말한다고 봅니다.
“소산을 취케 하시며” 라고 번역한 말씀을 적지 않은 유대인 해석가들은 동일한 말씀의 중복으로 보고 연결 접속사를 보충하여 ‘열매와 소산’ 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연례적(年例的)으로 거두는 소산으로 보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이 지역의 비옥함은 일시적인 것이나 불과 몇해 동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해마다 계속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תואובת(테부아오트)란 땅에서 해마다 거두어들이는 완전하게 자란 열매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새로운 거민들이 뿌리고 심었다’ 고 말했을 때는 우리들에게 그들이 도착하기 이전 경작은 이 지역에서 알려진 바 없으며 따라서 매우 특이하게 비옥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상황을 대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게 합니다.
끝으로 선지자는 한때 빈곤과 가난으로 눌려 있던 자들이 이제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로 날마다 풍성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복에 기인된 것인 사실을 말합니다.
시편 107 편
3. 본문 39 - 41절은 “(39)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저희로 감소하여 비굴 하게 하시는도다
(40)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케 하시나
(41)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하시나니” 입니다.
1) 이 구절에 들어 있는 진리를 말하기 전에 먼저 단어를 간략히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דצוע(오체르) 란 말은 ‘폭군’을 의미하며 דצע(아차르)는 ‘법을 지키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본문의 흐름과 가장 잘 어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마지막 두 단어는 주격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격으로 보아 ‘슬픔과 비애의 고통’ 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의 고통과 비애를 인하여’ 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 우리는 이제 본문 중심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우리가 앞서 이 지역이 토질과 관련해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제는 인생도 영원토록 같은 상태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수적(數的)으로 감소될 뿐 아니라 전쟁에 패하거나 시민들의 폭동 또는 기타 다른 원인들로 자기들 지역과 재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염병으로 핍절케 되었든지, 전쟁으로 짓밟힘을 당했던지, 내란으로 잘려 나갔던지 그들의 지위와 처지는 모두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풍요의 숨겨진 원천이었던 자기 은혜를 거두어 버리시지 않는다면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또 성읍들이 파멸될 원인은 수없이 많이 있기에 선지자는 다른 것들을 변화시키는 것 중 가장 두드러지고 현저한 원인을 들어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불투명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포착될 수 없기에 선지자는 방백들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이름과 명성으로 그들이 겪은 어떤 사건도 결코 불투명하게 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한 생각을 꺾으사 그들의 잠에서 일어나게 하시면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게 됩니다.
우리는 또 이 말씀의 형식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라는 말씀은 그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고집하고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 한 하나님은 이런 능욕을 부으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107 편
우리는 “왕이여 하나님이.....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들.... 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단2:38) 라는 다니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백들은 능력을 덧입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내적인 영광과 엄위는 어떠한 사람의 탈보다 더 안전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보잘것 없는 작은 고을을 단 사흘 동안만 다스린다 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보이지 않고 어느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방백들을 하찮게 여기실 때마다 방백들의 막강한 권세는 필히 굴복됩니다.
온 세상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던 막강한 권력가들이 자기 위엄이나 세력을 빼앗기게 되면 자기 하인들에게는 하나의 쓰레기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됩니다.
이처럼 놀라운 변혁은 하나님의 능력이 기이하게 나타난 결과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우둔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 구절과 대조해서 곧이어 보여주기를 가난한 자와 무식한 자들이 높임을 받고 이들의 집이 일어나며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자들이 갑작스럽게 부귀와 권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마음의 강퍅함이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시편 107 편
시107:42-43 정직한 자는
오늘은 이 시편의 마지막 두절을 상고하고 마치려 합니다.
이 시편은 사상적(思想的)으로 105편, 106편과 서로 일치하는 점들을 가집니다.
이 시편들은 서로 동반시(同伴詩)가 됩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 시편을 포로 후 시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구원되어 나온 사적(史蹟)에 대해 말합니다.
1.본문 42절은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악인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입니다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의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섭리의 수많은 명백한 증거들은 의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아서 그들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이라고 결론합니다.
또 의인의 생각은 신앙으로 조명을 받기에 그러한 장면을 진심 어린 기쁨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나 악인들은 놀라 할 말을 잃을 것이라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 두 부류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우주의 최고 통치자시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갖은 방법으로 강요를 받고 있으나 그 일을 만날 때마다 무엇인가를 깨달으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행위를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정확하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눈을 열어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인자하심과 지혜로우심을 바라보고 자기 지식과 통찰력을 새롭게 합니다.
의인들이 이렇게 체험한 즐거움은 자기 마음에 이것들을 간직해 얻은 대가입니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보호아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들의 자연적인 경향이 자신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생각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도록 자신을 방치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혹 그렇지 않다 해도 악인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섭리를 대적해 말할 때마다 강렬한 충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판단력은 심히 어두어져 있기문에 분명한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표현은 악인들이 스스로 말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표현입니다.
시편 107 편
악인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거슬러 비방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오만함과 멸시함으로 우리 믿음을 대적하며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엄청난 비방을 늘어놓고 있는 사실을 봅니다.
“악인의 입이 봉해졌다” 는 것은 선지자의 말씀의 신실성을 탄핵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교만하고 격렬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면 할수록 자기 악함을 더욱 널리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구절은 기쁨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보다 우리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의심과 두려움에 둘러싸여서 세상이 우연히 다스려지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교훈을 전복시키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참 위로를 빼앗고 안정되지 않은 믿음으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땅 위에서 지옥을 만들어 냅니다.
의심과 근심으로 계속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므로 쉼을 얻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결코 평온한 마음 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나타내 주셨지만 그 은혜로 복을 누린 사람은 심히 적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 대부분의 배은망덕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한 것입니다.
2. 본문 43절은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입니다.
1)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하는 대로 집중시킬 때부터 현명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아무리 남보다 우수한 명철과 민감성을 가졌다고 자랑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은 자기들을 비춰주는 빛을 가리고 있는 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질문 형식으로 된 어법(語法)을 사용해서 세상에 침투해 있는 거짓된 생각을 간접적으로 말합니다.
그들은 때마다 감히 하늘을 향해 경멸하는 것이 인간의 현명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관찰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어리석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07 편
이런 경고를 더 필요로 하는 것은 철학자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이 자기들이 가진 재능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모호하게 하고 가리는데 사용하며 마침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모든 것들을 제2원인으로 돌려버리는 잘못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에 가장 으뜸가는 자는 명성과 학식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이었고 그의 마음은 강퍅하며 부패해 있었기에 그는 여러 가지 야비한 생각들로 하나님의 주관하시고 계시는 섭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애매하게 만드는데 한결같은 목표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모든 빛을 분간해 냈던 마음의 자연적인 명석한 판단력은 진리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한편 선지자는 어리석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어리석음의 가장 천박한 성격을 정리할 뿐 아니라 이 위대한 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어리석음은 더욱 크고도 지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선지자는 “주의하고” 라는 말로 하나님의 사역을 다만 짐작하여서 생각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마땅히 주의 깊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또 그 지식이 신중하고도 성숙하게 요약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이 우리 마음 속에 간직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 관심과 한결같은 묵상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선지자는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라는 말 속에서 단수를 복수로 바꾸는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선지자는 또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주의해서 살펴보는 자가 적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탄식합니다.
4) 선지자는 마치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진실로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자를 만나 보기가 어찌나 힘든지”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그들의 존재를 모든 사람들 앞에 내세워서 그들의 마음이 자신을 간의 완악함으로 비뚤어져 나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간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과 지엄하심을 말한 후에 이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아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모든 곳에서 가장 현저하고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인자하셔서 이것으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어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라” 고 답변하겠습니다.
시편 107 편
5)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다스리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명백하고 많은 증거로 나타나며 그 증거들은 성도의 관심을 사로잡습니다.
성도(정직한 자, 42절)는 믿음으로 그 증거들을 알아차리고 기쁨으로 바라봅니다.
이 기쁨은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해 줍니다.
의심과 근심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확신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를 알고 누리는 지혜로운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라는 말씀처럼(43), 자기 모든 관심을 인자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집중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섭리가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시108:1-5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다윗의 찬송시
칼빈은 “이 시는 57편의 일부와 60편의 일부를 기록한 것이기에 우리가 이미 해석했던 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로 보인다” 고 하여 해설을 생략합니다.
박윤선도 “이 시편의 앞부분(1-5)은 57:7-11과 내용이 같고, 다음 부분(6-13)은 60:5-12 과 같다. 이 두 시편의 해석을 참조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는 매튜헨리 주석을 인용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 찬송함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 끝나는데, 이 찬송이나 기도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서 거룩한 믿음이 작용합니다.
①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총에 대하여 감사합니다(1-5).
② 다음에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 땅 위에 두신 교회에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6-13).
전반은 57:7절 이하에서 가져온 것이고, 후반은 60:5절 이하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두 시편의 연결에서 차이나는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전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말을 사용한다 해도 성령 하나님의 새롭게 해 주시는 사실이 확고하다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또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한 편에서 몇 절을 가져오고, 다른 시편에서 가져온 몇 절을 결합해 노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종종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예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을 노래함으로 우리는 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은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본문1-5절은 “(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 여 찬양하리로다
(2)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시편 108 편
(4)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힘입어 찬송의 달인이 되었던 자의 모본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옳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마음을 확고히 정하고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을 할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찬송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몸을 드려서 찬송해야 합니다(1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그러므로 내가 노래하며 찬양하리로다.
우리는 성령으로 마음과 뜻을 한데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집중해야 합니다.
찬송은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의 마음과 뜻을 모두 쏟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전인으로 아낌없이 우리들의 표현을 쏟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내가 높이 들림 받은 나의 영광으로와 나의 혀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구속함을 입은 우리 지체 중에 우리의 혀는 우리의 영광인데, 그 혀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사용될 때 가장 크게 주 안에서 우리의 영광이 됩니다.
마음이 좋은 말을 낼 때 우리 혀는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이 되어야 합니다(시45:1).
다윗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음악에 능한 것은 주 안에서 그의 영광이 되어서 주를 향한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재능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에 바쳐져야 합니다.
남보다 뛰어난 은사가 있다면 우리는 그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악기와 시간의 도움을 받아 열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하고 살아 움직이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우리 자신에게 분발을 촉구해야 합니다(2절).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우리는 지루하고 졸린 음조가 아니라 활기찬 태도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리라’ 한 것처럼 열렬한 헌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시편 108 편
4.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화를 받기를 바라는 자들로서 많은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3절).
다윗이 ‘내가 유대인들의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나아가 세상의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라’ 고 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무리들 속에 있든지 간에, 우리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선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이 듣는다 해도 시편들을 노래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우리의 찬송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진실하심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서의 긍휼하심과 실행에서의 진실하심을 찬미해야 합니다(4절).
하늘은 광대하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더 크고 넓습니다.
창공은 높고 밝지만,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더 탁월하고 더 빛이 납니다.
우리는 하늘과 구름 너머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나 진실하심과 관련해서 무엇을 보았든지 간에, 저 세상에는 여전히 그것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더 보아야 할 것들, 더 보도록 예비 되어 있는 것들이 무한히 영광스런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6.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결함이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행하셔서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시고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며 자신을 존귀하게 하시고 스스로 명성을 얻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5절).
또 우리는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천사들이 그들의 찬송으로 주를 높일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 두루 퍼져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가 우리의 간구여야 합니다.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먼저 간구 할 것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입니다.
시편 108 편
시108:6-13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본문 6-13절은 “(6)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 른손으로 구원하소서
(7)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 짜기를 측량하리라
(8) 길르앗이 내것이요 므낫세도 내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홀(笏) 이며
(9)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 리라 하셨도다
(10)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 (1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 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2)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3)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 이로다”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찬송하는지에 이어서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을 지니고서 교회의 관심사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6절).
교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교회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건지시도록 기도해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 구한 것을 허락하신다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시는 것을 우리를 위해 지체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주의 교회를 건지소서 그리하시면 주께서는 내게 응답하신 것이고 나는 내가 원한 것을 갖게 된 것이나이다” 라는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다윗이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시편 108 편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시72:19-20).
다윗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이름과 속성이며 온 땅 위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하심 그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 곧 구원을 베푸실 힘이 있으신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와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그가 그의 거룩하심을 두고서 맹세하신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말씀하셨기에 내가 기뻐하리라(7절) 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약속하신 것을 반듯이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진실하심과 그의 권능을 둘 다 지닌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말씀하신 모든 사실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께는 말씀하시는 모든 것과 행하시는 모든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히 주시기로 하신 것이 아직 우리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도 그 약속하신 것으로 인하여 위로를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것 저것들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었습니다.
(1)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 몇몇 지역들을 이미 자기 땅으로 여기고 훑어갑니다(7-9).
“세겜과 숙곳, 길르앗과 므낫세, 에브라임과 유다는 모두 내 것이다(8절).”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이방인들을 그의 유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땅 끝을 그리스도의 소유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을 두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어진 자들 중에서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다윗과 마찬가지로 그의 신민들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6:37).
(2)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원수들의 목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모압과 에돔과 블레셋을 이미 자신의 소유로 여깁니다(9절).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혹은 ‘블레셋을 이기고 내가 기뻐서 외치리라’ 가 그것입니다.
시편 108 편
이 말씀은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8절)는 말씀을 설명해 주는데 어떤 이들은 이 본문을 ‘내 영혼아 블레셋을 이기고 기뻐 외치라’ 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높아지신 구속주께서는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의 모든 원수들이 때가 되면 그의 발등상이 되리라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2:8).
4. 우리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기 시작하시는 단초를 보았을 때 거기서 힘을 얻어 그 긍휼하심을 온전히 이루시도록 기도하고 소망해야 합니다(10-11절).
“누가 나를 이끌어 아직 정복하지 못한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에돔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해주실까?”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문제, 즉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에돔 족속을 정복해서 그 나라를 복속시킬지는 아마도 다윗의 비밀 회의나 전략회의에서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문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렇게 아니하시겠나이까? 분명히 주께서는 그렇게 하시리이다’ 가 그 문답입니다.
다윗은 야곱과 에서에 관한 옛 예언, 즉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이 있어서 야곱에 대한 이러한 복으로 인해서 야곱이 에서의 주(主)가 되었기에(창27:37) 에돔에 대한 정복과 관련해서 더욱 확신을 가지고서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5. 우리는 기도하는 동안에 몇 가지 일들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 대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고 해도 낙심하여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아버려서는 안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지만 주는 이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시리이다(11절). 주께서는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이 지난 후에는 우리를 다시 위로하시리라.”
역경과 시련은 종종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변함이 없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기에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낙담치 말고 믿음을 지키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6. 우리는 피조물을 의지하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12절).
“여호와여, 우리를 도와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시고(대적을 치게 하시고), 우리의 계략이 형통하게 하시며 원수들의 계략이 좌절되게 하소서” 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하늘로부터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촉구할 때 우리가 승리의 기쁨에 관하여 말함과 동시에 곤경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도움(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라는 호소는 우리가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할 때 좋은 근거가 됩니다.
시편 108 편
“사람의 도움은 진정으로 아무 소용이 없기에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망하게 되리이다. 우리는 그런 이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간절히 주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기대하나이다.”
7, 우리는 우리의 일이나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에서 힘을 얻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13절).
(1) 우리는 해야 할 몫을 해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할 때에만 용감히 믿음의 길에서 행하게 됩니다.
복된 바울조차도 그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빌4:13).
(2) 우리가 아무리 기가 막히게 일을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나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만한 아무 일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에 우리는 아무리 용맹하여도 하나님처럼 그렇게 할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권능으로 무슨 일을 해냈거나 우리가 주의 전적인 은혜로 어떤 것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과 관련해서 모든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