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때 청과의 전쟁에서 패한 우리나라는 세부득이 그들의 강압에 못이기어 왕세자를 심양에 인질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만리타역에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심정이야 오직하였겠는가.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우리나라 백성들 의 월경채삼(越境採參) 때문에 왕세자는 더욱 고충을 받았던 것이다. 인조 18년 10월 심양에 있는 왕세자 앞에 청의 사신(使臣) 龍骨大(사신 용골대) 등이 조선의 월범자(越犯者) 두 사람을 포박하여 끌고와서 그들은 말하기를 採蔘(채삼)하는 일은 전부터 엄금하여 오는 터인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고 採蔘者(채삼자)는 백여명이나 떼를 지어 드나들고 있으나 잡힌 자는 두 사람 뿐이다. 너희 나라에서는 어떻게 되어 이렇게 방치만 하고 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왕세자가 자세히 질문하여 보니 청인들은 조선사람들이 강을 건너기도 전에 월강하여 와서 붙들어다 가죽배에 태워 납치하였다고 한다. 세자는 한탄하여 말하기를 "미욱한 백성들이 법 무서운 줄 모르고 채삼하기에만 열중하여 邊民(변민)으로서 죽엄을 당한자도 많다. 그리하고도 또한 이러한 상태이니 참으로 비통하도다. 더욱이나 남조와의 교통이 이미 두절되어 인삼은 死貨(사화)와 동일한데 그래도 아직 채삼을 그만 두지 않음은 실로 알 수 없고나" 하였다. 이리하여 이 범인은 본국으로 압송하여 의법처리토록 하였다 한다. 또한 인조 21년 9월에는 용골대가 세자에게 와서 말하기를 강계 사람들이 上土(상토), 外怪(외괴), 梨洞(이동)의 세곳으로부터 월경채삼하다가 청인들에게 붙잡힌 자가 4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총과 활을 쏘아 청인 2명을 살상하고 36명은 체포되었다. 그중 한 명은 강계부사의 전령패(傳令牌)를 차고 있는 자도 있다. 그들은 필경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고 반드시 배후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어떻게 할참이냐며 그 패까지 제시하면서 힐문(詰問)하였다. 세자는 하는 수 없이 겸손한 말로 대답하기를 이들은 모두 보잘 것 없는 무지한 자들이고 또한 제나름대로 주장하는 바도 있으니 죄등을 감하여 죽엄만은 면케하고 館所(관소)에 보내어서 농사짓는 노역에 종사시키겠다 하고 그들 36명을 인수 하였다. 또 인조 23년 4월에는 왕세자가 앞서 청으로부터 급여받았던 밭과 우마를 채삼인 50여명의 속죄를 충당키로 하고 비변국(備邊局)으로부터 上啓(상계)하여 후일 정약용(丁若鏞)의 [牧民心書](목민심서), [工典山林條](공전산림조)에는 당시의 모습과 정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案)컨대 閭廷(여정) 茂昌(무창) 盧芮(노예) 慈城(자성)을 지금은 이를 廢四郡(폐사군)이라 말한다. 그 곳 사람 채삼자(採蔘者)는 천백의 무리를 이루고 갈대를 서로 엮어 초막을 짓고 자식과 손자를 기르며 四時 오래 머물러 주민이 된다. 이 땅을 지키는 수령들이 활을 쏘고 총포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면 그들 또한 활과 총으로 결사적으로 대항하여 접전을 하기도 하며 퇴거를 가장하기도 하여 자유자재다. 그리하여 수령들은 이 일을 감추어 보고하지 않고 관찰사 또한 상문(上問)시키지 않는다. 千里有指(천리유지)의 강토를 팔장만끼고 불법한 백성을 내버려둔 지 백년에 이르렀다. 세종, 세조 때 6진을 경영하고 선조대에 새롭게 경산(莖山)을 두다. 옛날에는 강한 인방(隣邦)에 접한 땅일지라도 오히려 이를 개척한 바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종(祖宗)의 땅을 하는 일 없이 포기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냐? ....(중략).... 일조(一朝)에 큰 일이 생긴다면 즉 서북의 이로(二路)는 아직 우리의 완전한 소유가 아니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하였다.
또한 저서 [經世遺表](경세유표)에도 폐4군의 지역이 국방상 요지임을 논하는 중에... 압록의 방비야말로 중대하다. 지금 아무런 이유없이 이 지방을 헐어 없애어 무지막지하고 奸細(간세)한 무리들로 하여금 산림 중에 숨어 살게 하며 그 처자를 이끌어 들여 소굴로 만들고 날로 금, 은, 동, 철을 채취하고 해아삼(孩兒蔘, 人形의 최상품 인삼)과 담비로 스스로 살지게 하고 弓矢(궁시)와 맹화의 기물을 감추어 자위하여도 수토(守土)의 신(臣)은 이를 감추고 보고하지 않고 묘당의 신들도 알고도 말하지 않으나 난은 이미 이 이루워진 것 방비는 지금 어데있는가?..." 하고 통박(痛駁)하였다. 이 2書는 정약용이 강진에 적거(謫居 귀양살이) 18년간의 저작으로서 위의 사실은 정조 후기로부터 순조 초년에 이르는 실정이었다. 공연히 천리폭원(千里幅員)에 가까운 땅을 버려두는 것은 애석하지 않을랴! 산림과 川沼(천소)의 이익은 성라(星羅)와 같이 창창하다. 산에 蔘茸(삼용)이있고 초서(貂鼠 담비) 또한 풍요하다 그리하여 피아의 삼캐는 것과 비슷하다는 도배(徒輩)들의 도적소굴로 만들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이와같이 이 지방은 산삼의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2. 인삼의 지나친 공물과 유랑민
貢蔘(공삼)의 過重(과중) 징수로 유망(流亡)하는 강계부민(江界府民)들이 많았다. 평안북도 강계는 원래 산삼이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이 산삼의 多量産出(다량산출)로 인하여 조선조 중기 강계부민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산이 풍부하면 지방민이 그 만큼 부유하여져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것이 화단(禍端)이 되어 그 고장에 살수가 없어 男負女戴(남부여대)하여 다른 곳으로 流亡(유망)할 수 밖에 없었으니 인삼 징수의 가혹이 도를 넘은 때문이었다. 조선조에 소위 貢蔘(공삼)으로서 그 종류로는 우선 戶蔘(호삼)이라 하여 평상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있었고 稅蔘(세삼) 또는 常平蔘(상평삼)이라 칭하여 삼군(蔘軍)을 人山시켜 채취케한 것과 貿蔘(무삼)이라 하여 종친부 등에 상납하는 것, 단삼(單蔘)이라 하여 대마(對馬 쓰시마)에 급여용, 신삼(信蔘)은 일본 덕천(德川 도쿠가와) 정부에 사신을 파견할 때 필요한 것, 기타 강변의 파숫군으로부터 징수하는 것 등등, 실로 각종 명목으로 인삼을 긁어 내었던 것이다. 이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지역민 중 流散(유산)하는 자가 속출하여 주민 2만여호 중 모두 도망가고 겨우 4천여호밖에 남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영조 44년 4월 평안관찰사 鄭常(정상)이 강계 蔘弊(삼폐)에 대하여 상소한 내용을 보면 그가 강계지방에 순시차 들어가자 남녀노소는 관찰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변에 도열하여 혹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며 호소하기를 "우리들을 살려주십시요 이제 우리는 蔘 때문에 살 수가 없읍니다" 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삼을 캐러 10명이 입산한다 하여도 그 동안 남획한 결과 그 중 8-9명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상례이며 그 상납시기가 되면 납부하여 할 수량은 태반이 부족하므로 백성들은 사방으로 동분서주 혹은 도내의 산읍(山邑)에서 구하기도 하고 혹은 함경도까지 이르러 간신히 납부액을 충당하려 하여도 또한 부족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상태이다. 그들은 관찰사에게 말하기를 임금임께서는 구중궁궐(九重宮闕) 깊은 곳에 계시니 어찌 우리들의 참상을 아시겠는가, 道臣守令(도신수령)들께서는 어찌하여 이러한 상황을 上聞(상문)케 하여 우리들 같은 성상(聖上)의 백성을 동일시하여 홍은을 베풀게 하지 않는가. 만약 이 삼폐를 營門(영문)에서 변경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오직 죽을 뿐이라고 눈물로 호소하니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본부(本府)에 이르러 그 사정을 詳密(상밀)히 조사하니 인호(人戶)는 점점 줄어가는데 전체 부담액은 그대로 두어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모두 도산(逃散)하는 수 밖에 없다 하였다.
3. 왕실용 인삼 구입
고래로 우리나라 왕실에서 자연생 인삼 즉 산삼을 흔히 복용한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으나 근세 산삼이 매우 희귀하게 되었을 때에도 천금을 불사하고 이를 이왕직(李王職)에서 구입하여 어용(御用)에 공(供)하였다고 한다. 1901, 2년경부터 1925년경까지 많을 때는 1년에 2천여원 적을 때는 5백원어치 가량을 매상(買上)하였다. 그 중 이왕직에 확실히 기장되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데, 그 밖에 민간이나 신하들의 헌상품도 있었다. 1920년 2월 2근 量目不明, 代 550원 동년 11월 1 量目不明, 代 750원 1921년 11월 3근 量目不明, 代 9백원 1925년 10월 1근 5돈 5분 代 120원 1926년 4월 1근 4돈4분 代 430원 동년동월 1근 5돈2분 代 260원
어용은 임금님께서 사용한 것이고 퇴위한 고종용(高宗用)도 또한 구입하였는데 당시 서울에는 산삼 전문상이 있어서 중개인 또는 채취자가 직접 지참하여 이 상인에게 팔거나 위탁하였던 것이다. 이왕직에서는 이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였는데 전의(典醫)에 서모씨가 있어 산삼의 감정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번 보아 즉석에서 진가(眞假)를 알뿐만 아니라 어느 산에서 난 것까지 식별할 수 있었다. 이 서모씨의 감정에서 可하다 하면 여하의 고가라 할지라도 이왕직 회계과에서는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용의 목적은 치료용이 아니면 보건용이었다. 그 사용법은 금 또는 은병에 산삼을 손으로 쪼개넣고 1홉의 물은 부은 후 3,4시간동안 서서히 달여서 6작(勺)쯤 된 때 1회 또는 2회에 복용하였는데 이야말로 진짜 독삼탕(獨蔘湯)이다. 이를 달일 때 금병 또는 은병은 세가다리형으로 나무를 조립하고 이에 매달은 후 숯불을 피워 약 1자(尺)의 거리에서 열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산삼 이외에 풍기산(豊基産)인삼도 의료용(醫療用) 또는 보건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는 생강이나 대추 등을 첨가하였다.
4. 동물 치료에 인삼을
이조때 동물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인삼을 먹이다. 인삼은 비단 인간의 약용뿐만 아니라 동물의 질병에도 이를 사용하였다. 말은 육축중에서도 가장 귀한 동물로서 군국(軍國)의 필요불가결한 가축이며 그 밖에 운송 농업등 사람의 경제생활과도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건강에 대하여는 옛날부터 일상 주의를 하였고 그 질병이나 상처에 대하여는 상당한 의료방법을 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조 중기에 이르기까지 육군은 기병(騎兵)을 주축으로 하였다. 한편 도로가 매우 불편하였기 때문에 역체제(驛遞制)를 두어 많은 역마를 사육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반 私人들도 여행에는 흔히 말에 의존하였으므로 말의 질병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주의를 하였다. 조선 태종대에는 혜민국조교(惠民國助敎)에 명하여 사복사(司僕寺)의 소속으로 말의 醫方(의방)을 습득케 하였으며 [세조실록] 12년 윤3월에는 서거세(徐居世)가 [마의서](馬醫書)를 편찬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나 이 서적은 지금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이밖에 마의서(馬醫書)로서 전하여진 것은 權仲和(권중화), 韓尙敬(한상경)에 의하여 편찬된 [新編集成馬醫方](신편집성마의방)과 정조대에 관간(官)인 [馬療諺解](마요언해)]가 있다. 이 [마요언해]에 그 처방중 인삼을 배합한 것은 20여처방이나 있으며 [신편집성마의방]에는 인삼을 배합한 것이 7처방 정도 있다.
그 처방명(處方名)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즉 人蔘散(인삼산), 黃不散治內外黃方(황불산치내외황방), 人蔘當歸散(인삼당귀산), 蔘笭散(삼령산) 등이다. 그 다음에 소에 대한 치료인데 소도 또한 말 다음으로 인간에게 유용한 가축 이지만 말에 비하면 주로 하급노동에 사역되었고 말과 같은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의 질병에도 인삼이 배합된 처방들이 있으나 귀중한 인삼을 실지로 소에까지 사용하였는지는 매우 의문이라 하겠다. 기타 동물로서 매(鷹)의 훈련과 사육에 인삼을 먹였다든가 작은 사조(飼鳥)들에게 인삼을 시여하여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일본에서 전하는 이야기로 모인이 삼광(三光)이라 이름지은 잘 우는 꾀꼬리를 길렀는데 이미 노쇠하여 날개털도 빠지고 그 목소리도 매우 희미하게 되어 사람들은 애석하다고 한탄하였다. 그 때 이를 기르던 자가 조선인삼을 구하여다 약간량을 사료에 섞어 먹였더니 이 꾀꼬리는 원기를 다시 되찾고 목소리도 커져서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한다.
5. 채삼꾼 공식적으로 등장하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인삼이라 하면 모두 재배한 인삼을 뜻하고 산에서 자연생으로 자란 인삼은 산삼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지만 옛날 재배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인삼이라 하면 전부 산삼을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산삼을 채취하는 특별한 직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문헌(文獻)에 의하면 만력년대(萬歷年代 1600년대) 울산의 호적장에서 호주명 아래 채삼군(採蔘軍)이라고 기입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관에서 부역(夫役)으로 채삼꾼을 지정하였던 기록일 것이다. 전국의 산야에서 인삼이 풍부하게 산출되었을 시대에 있어서는 지방민에게 이를 공납시켰던 것이므로 따로 직업적으로 채취하러 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남획으로 인하여 그 산출량이 격감되자 차츰 이를 채취하는 일은 특수한 견식이 필요하게 되어 농민들의 특수한 부업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채삼군은 심마니 또는 심메꾼 등으로 호칭되고 조선조 고종 중기 이후 산삼의 私採는 묵인 또는 공인되었던 것이다. 이 심마니들은 그 조직, 종업상태(從業狀態), 풍습, 禁忌(금기) 등이 만주의 동일 업자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이는 상호 국경을 접하고 주로 국경선 양측에서 서로 침범하면서 인삼을 채취하던 역사적인 전통에 기인한 것 같다. 그들이 산삼을 채취하려고 입산할 때는 수인이 단체를 조직하고 엄격한 규율과 깊은 신앙 및 상호신뢰를 기초로 단결하여 행동하는 바 그 단체의 장을 어인(御人)이라 칭한다. 이 어인은 一團의 통솔자로서 절대권력을 가진다. 부통솔자가 있을 때에는 中御人(중어인) 또는 次御人(차어인)이라 부른다. 도중 취사를 담당하는 자를 精才(정재)라고 부르는데 이 어원은 "평북 강계" 지방의 방언으로서 '주방'과 동일하며 "정재"의 권한은 어인에 버금한다. 그 외에 연료를 채취하는 자, 山中제사를 담당하는 자등 담당업무가 정확히 분담되어 있는데 그 권한은 상호 불가침으로 되어있다. 입산경력이 적은 자는 '소댕이'이라고 부르고 전연 무경험자는 '날소댕이'이라 한다. 이들의 입산기는 년중 대체로 3기로 나누는데 苗節(묘절), 丹節(단절), 黃節(황절)이 그 것이다. 묘절은 봄철 인삼이 발아하기 시작하고 다른 초목들이 너무 무성하지 않아 비교적 구별하기가 용이한 때이다. 단절은 여름철 인삼의 과실이 익어서 빨갛게 되어 가장 발견하기가 쉬운 시절이다. 황절은 가을에 접어들어 인삼의 잎이 노랗게 황변할 때다. 산삼의 채취라는 일은 가장 사행적(射倖적)인 것으로서 운이 좋으면 일거에 거액을 얻을 수 있으나 몇달 동안이나 심산유곡을 헤매이며 갖은 고생을 하여도 한 뿌리의 삼을 구경도 못한 채 헛탕을 치고 돌아오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다음 기회의 행운을 기다린다.
6. 심마니의 행동과 금기
심마니들이 산삼을 채취하려고 단체를 조직하고 각 업무분담을 정한 후 입산을 하기 전에 약 1주일간이나 적어도 3일전부터는 매일 여러 번 깨끗한 물로 몸을 정결하게 목욕하고 여성과 동침을 피하며 부정한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상가(喪家)나 해산한 집에 출입하지 않으며 상자(喪者)나 棺(관) 동물의 시체를 보는 것들도 부정탄다고 이를 기피한다. 만약 부정한 몸으로 산에 들어가면 산신의 노여움을 사서 인삼을 얻을 수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人山한다는 말과 그 시일을 절대 비밀에 부쳐 타인에게 누설하지 않음은 물론 처자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안 사람이 이를 물어보는 것 조차 금기이다. 그러므로 행선이 어디인지는 어인(御人) 외에는 다른 단원들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밤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를 드리는 상대신체(相對神體)는 마을의 성황당이나 큰 암석 또는 귀신나무 등이다. 즉 이들 부락의 수호신에게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냄으로써 도중의 가호와 다수확을 기원하는 것이다. 강계 지방에서는 옛날 수확이 많았던 시절에는 이 제사를 이틀간이나 성대히 행하고 마을사람들은 초대하였는데 돼지를 여러 마리 잡아 주연을 베풀고 출발직전에는 온동리 사람들이 모여 "豊穫(풍확)이다" "풍확이다" 소리치면서 그 일행의 전도를 축복하여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제사상에 바치는 祭需(제수)로는 소주, 닭, 쌀밥, 물고기 등인데 禿魯江(독로강)에서 나는 농어를 가장 귀한 것으로 쳤다고 한다. 이 농어를 구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쏘가리, 잉어, 붕어 등을 썼다. 제물을 다 차려놓은 후 단원들은 平伏(평복)하고 어인은 기립하여 제문을 낭독한다. 제문은 원래 종이에 써야할 것이지만 어인 등은 문필에 어두운 자가 많아서 대체로 그 제문을 다만 암송(暗誦)한다.
그 제문의 일례는 다음과 같다. "강계부 강계읍 某里 어인 박모 정재 조모, 소대인 김모, 이모, 정모, 조모 네 멀거니가 五大 모래미를 가지고 들어왔아오니 명아(明雅)하신 산신님 흠향하시옵소서, 夜실에 허몽(虛夢) 마시옵고 진몽(眞夢)을 주시옵소서" 이때 일동은 삼배한다. 이날밤은 철야로 촛불을 밝히고 제사를 지낸 후 일동은 이미 입산준비를 하였다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이튿날 곧바로 이곳에서 출발한다.
7. 심마니의 입산풍습
채삼군 일행이 人山을 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게 되면 일행은 도중에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무언의 행동을 한다. 도중에 여인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며 더욱이 여자가 길을 가로지르는 것은 질색이다. 그러므로 만약 앞에서 여인이 오는 것을 보면 이쪽에서 먼저 삼캐러가는 입산자임을 알린다. 그러면 오던 여인은 이를 알아차리고 길옆으로 피하여 등을 뒤로하고 멈추어선다. 이때 어인(御人 우두머리)이 여인에 대하여 치마자락을 요구하면 이에 응하여 치마끝을 두세치 찢어 준다. 일행은 이것을 지참하고 人山한다. 이러한 풍습은 고대 어느 나라에도 있는 풍속으로서 여체에 마력이 있다고 숭배하던 유풍의 일종이다. 그 여체에 접촉하였던 의복에도 마력이 있다고 신앙하였으며 이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입산중에 사나운 맹수나 악귀를 물리친다고 하는 뜻을 전습한 것이다. 또 산신은 여인의 서답(月經帶)을 좋아한다 하여 남의 집 물건을 몰래 훔쳐서 가지고 가기도 한다. 만약 도중에서 우연히 이것을 버린 것이 발견된다면 기꺼이 주워 가지고 간다. 이런 것들은 산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신당이나 수목에 걸어놓고 공헌물(供獻物)로 쓴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 가족의 것은 사용하지 않는 법이다. 입산을 하게 되면 대체로 첫날밤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목적지는 어인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며 다만 선두에서 인도하는 어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그 목적지는 대개 인삼이 산출되는 곳으로서 어떤 산꼭대기 지점인데 전년에도 숙박한 일이 있는 동연(同連)이라 불리우는 초막이다. 이 동연 부근에는 여러가지 모양의 신당(新堂)들이 있는데 높이가 3자 내외 세로, 가로 각 2자쯤 되는 초라한 것들로 조잡하게 목판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내에는 목판에다가 신명을 써놓은 것도 있고 또는 어떤 모양을 한 돌을 넣어 놓은 것도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것도 있다. 만약 이 조그만 신당이 크게 파손되어 있으면 다른 일을 제쳐놓고 우선 이것부터 신조(新造)하거나 보수를 한다. 이렇게 신당을 보수 또는 신조한 후 당일 저녁 다수확(多收穫)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준비를 하게 된다.
8. 인삼 재판
인삼을 둘러싼 재판으로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예는 박흥식(朴興植)씨가 냈던 홍삼 7천 5백근 인도(引渡) 청구소송이었다. 이 소송은 원고인 박씨가 조선총독부 재무국 전매총무과장 岩城弼太郞(암성필태랑)이라는 日人을 상대로 냈었다. 해방이 되고도 몇년이 지난 부산피난 시절인 1953년의 일이었다. 박씨는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가 있던 서울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인 박씨의 주장은 1945년 해방되기 직전 조선총독부시절 매수대금 5백44만원으로 홍상 9천6백근을 전매당국으로부터 매입, 대금을 지불했으나 이 중 7천 50근을 인도받은 일이 없다고 주장하며 해방 후 몇년이 지나서 왜정 때 전매당국 책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박씨는 왜정 때 조선 비행기공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홍삼을 전매당국으로부터 사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당시 홍삼은 三井물산이 일수판매(一手販賣)라는 단독판매권을 정부에서 얻어 유일하게 홍삼을 판매할 수 있었으나 박씨는 해방직전 특수한 케이스로 홍삼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씨가 매입한 홍삼의 대부분은 전쟁말기에 해상항로가 위험하여 중국에 반출을 못하고 개성인삼 출장소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후 찾지 못했었다. 개성출장소 창고에는 전매국, 삼정물산, 박씨소유 홍삼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박씨는 전매당국과 홍삼판매계약을 맺고 대금을 지불했으나 물건을 인수받지 못했으며 왜정 때 책임자는 홍삼을 인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소송이 제기되자 낯한 입장에 부닥친 것이 전매청이었다. 해방전 日人책임자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전매사업인 홍삼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매청장 김치영(金致榮)씨는 기획계장 조용봉(趙龍鳳)에게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는 법무제도가 없어 기획계장 조씨는 전매청의 소송관계도 관장사무였기 때문에 이 일이 맞겨진 것이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이 사건을 맡은 것은 김치걸(金致傑)판사였다. 박씨는 변호사도 대면서 이 사건에 적극적이었다. 기획계장 조씨는 개성인삼출장소 직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응소에 필요한 준비서면을 작성했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수할 법적책임이 없다고 강조하고 소련군이 홍삼을 모두 가져간데 대한 책임은 더욱 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부산에 피난중이던 개성출장소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 소유의 홍삼이 꼬리표까지 붙어 개성창고에 있었으나 해방직후 소련군이 약탈해간 것이 틀림없었다. 이에 대한 공판이 열려 전매청측에서는 증인으로 기획계장, 서무과 직원 5∼6명이 출두했고 피고인 박씨측에서는 중역들이 출정했다. 이색(異色) 소송사건은 부산의 일간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 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회공판이 열린 후 원고측은 소(訴)를 취하하고 말았다.
9. 경무대에 가짜 산삼 상납
경무대(景武臺)에 가짜 산삼 상납되어 쉬쉬한 일도. 삼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산삼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심심찮게 강원도 산골에서 산삼을 캤다고 신문에 나기도 하지만 1953년 경무대에 상납됐던 1백년 묵었다는 산삼이 삼이 아닌것이 감정되어 쉬쉬한 일이 있었다.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구내리 무당 박모씨(당시 나이 45세)는 현몽으로 태백산 중봉에서 길이 6자 무게 1관 되는 산삼을 캤다며 상납했었다. 이같은 사실이 전매청에 연락되어 인삼계장이던 현종천씨(작고)가 감정을 했으나 인삼과 비슷하게 쓴맛 단맛은 있는데도 삼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비서들은 받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하고 바친 사람을 생각해서 비밀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산삼을 캤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가짜 산삼이 많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진짜 산삼도 있겠지만 보통 인삼을 산삼으로 재배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산삼은 머리부분이 삐쭉하고 긴 것이 특징인데 사기꾼들은 보통 인삼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에 많이 심었다. 대개 땅속에 머리부분을 일정기간 거꾸로 묻어 재배하다가 바로잡아 키우면 머리부분이 길게(이것을 장뇌라고 한다.) 굵어서 산삼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사기꾼들은 이같이 인공재배한 가짜 산삼을 바위옷으로 싸고 목상자에 넣은 다음 다시 흰 보자기에 싸서 대도시에 나와 꿈 운운하며 파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가짜 산삼을 만든 사람과 결탁한 약방에서는 몇백년 묵은 산삼 운운하며 엄청나게 값을 불러 부호들에게 권했다.
10. 의술의 천시와 인삼
우리나라 역대왕조의 의약술은 서서히 진보되기는 하였으나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이것은 경제생활의 빈곤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또한 사회제도에서 오는 폐단도 그 원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의사의 직분을 천시하고 의관(醫官)같은 직책은 양반계급이 관장하고 소위 중인계급이 代代 세습으로 그 직을 맡아 낮은 지위에 놓여 있었다. 내의원제조와 같은 벼슬자리는 의원이 아닌 문관으로 補하고 전의를 그 지휘하에 귀속시켰던 것이다. 왕, 왕족, 대관 등이 병환이면 진찰한 결과를 보고하고 처방을 지시하여 동의를 구하여야만 하였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왕이나 왕족이 병으로 서거하면 주치의관의 책임을 받는 예도 허다하였다. 그 실례로는 동의보감의 저술로 유명한 허준같은 이도 선조가 몸이 편치 않을 때 한중용서 양제(寒中龍書 凉劑)를 사용하여 그 병이 중하여졌다 하여 실각하고 광해군대에 와서는 또다른 이유로 남대문밖으로 추방당하는 비운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아래서 의권(醫權)이 신장되지 못하고 의도가 부진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정도전, 유성룡, 유지번, 정약용 등 유학자들이 의학저술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괄목할만한 사실은 선조때 전유형이 의서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임진란 때 길가에 쓰러진 죽은 사체를 해부한 후 그 기술이 능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일본이 해부를 시작한 때부터 2백80여년전 일로서 의학사상 특기할 사실이며 일본인들도 놀라고 있다. 이러한 정황속에서도 인삼의 효능은 확고한 신념의 대상이 되어 그 복용은 여러가지 처방중에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인삼의 재배가 성행되기 전까지는 서민들의 이용물이 될 수 없었다. 인삼은 전통적으로 보화로 취급되어 중국과의 무역품으로서 국가재원이었으며 조선조 중기이후부터는 다시 일본과의 주요 무역품이 되어 은화와 바꾸게 되고 광해, 인조 양대에는 명청(明淸)전으로 종전 만주로부터 중국전토에 공급되던 인삼의 거래가 두절되어 우리나라 인삼가격이 폭등되는 등 여러가지 사단으로 서민들의 복용이 더욱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인조때 청과의 전쟁에서 패한 우리나라는 세부득이 그들의 강압에 못이기어 왕세자를 심양에 인질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만리타역에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심정이야 오직하였겠는가.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우리나라 백성들 의 월경채삼(越境採參) 때문에 왕세자는 더욱 고충을 받았던 것이다. 인조 18년 10월 심양에 있는 왕세자 앞에 청의 사신(使臣) 龍骨大(사신 용골대) 등이 조선의 월범자(越犯者) 두 사람을 포박하여 끌고와서 그들은 말하기를 採蔘(채삼)하는 일은 전부터 엄금하여 오는 터인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고 採蔘者(채삼자)는 백여명이나 떼를 지어 드나들고 있으나 잡힌 자는 두 사람 뿐이다. 너희 나라에서는 어떻게 되어 이렇게 방치만 하고 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왕세자가 자세히 질문하여 보니 청인들은 조선사람들이 강을 건너기도 전에 월강하여 와서 붙들어다 가죽배에 태워 납치하였다고 한다. 세자는 한탄하여 말하기를 "미욱한 백성들이 법 무서운 줄 모르고 채삼하기에만 열중하여 邊民(변민)으로서 죽엄을 당한자도 많다. 그리하고도 또한 이러한 상태이니 참으로 비통하도다. 더욱이나 남조와의 교통이 이미 두절되어 인삼은 死貨(사화)와 동일한데 그래도 아직 채삼을 그만 두지 않음은 실로 알 수 없고나" 하였다. 이리하여 이 범인은 본국으로 압송하여 의법처리토록 하였다 한다. 또한 인조 21년 9월에는 용골대가 세자에게 와서 말하기를 강계 사람들이 上土(상토), 外怪(외괴), 梨洞(이동)의 세곳으로부터 월경채삼하다가 청인들에게 붙잡힌 자가 4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총과 활을 쏘아 청인 2명을 살상하고 36명은 체포되었다. 그중 한 명은 강계부사의 전령패(傳令牌)를 차고 있는 자도 있다. 그들은 필경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고 반드시 배후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나 어떻게 할참이냐며 그 패까지 제시하면서 힐문(詰問)하였다. 세자는 하는 수 없이 겸손한 말로 대답하기를 이들은 모두 보잘 것 없는 무지한 자들이고 또한 제나름대로 주장하는 바도 있으니 죄등을 감하여 죽엄만은 면케하고 館所(관소)에 보내어서 농사짓는 노역에 종사시키겠다 하고 그들 36명을 인수 하였다. 또 인조 23년 4월에는 왕세자가 앞서 청으로부터 급여받았던 밭과 우마를 채삼인 50여명의 속죄를 충당키로 하고 비변국(備邊局)으로부터 上啓(상계)하여 후일 정약용(丁若鏞)의 [牧民心書](목민심서), [工典山林條](공전산림조)에는 당시의 모습과 정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案)컨대 閭廷(여정) 茂昌(무창) 盧芮(노예) 慈城(자성)을 지금은 이를 廢四郡(폐사군)이라 말한다. 그 곳 사람 채삼자(採蔘者)는 천백의 무리를 이루고 갈대를 서로 엮어 초막을 짓고 자식과 손자를 기르며 四時 오래 머물러 주민이 된다. 이 땅을 지키는 수령들이 활을 쏘고 총포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면 그들 또한 활과 총으로 결사적으로 대항하여 접전을 하기도 하며 퇴거를 가장하기도 하여 자유자재다. 그리하여 수령들은 이 일을 감추어 보고하지 않고 관찰사 또한 상문(上問)시키지 않는다. 千里有指(천리유지)의 강토를 팔장만끼고 불법한 백성을 내버려둔 지 백년에 이르렀다. 세종, 세조 때 6진을 경영하고 선조대에 새롭게 경산(莖山)을 두다. 옛날에는 강한 인방(隣邦)에 접한 땅일지라도 오히려 이를 개척한 바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종(祖宗)의 땅을 하는 일 없이 포기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냐? ....(중략).... 일조(一朝)에 큰 일이 생긴다면 즉 서북의 이로(二路)는 아직 우리의 완전한 소유가 아니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하였다.
또한 저서 [經世遺表](경세유표)에도 폐4군의 지역이 국방상 요지임을 논하는 중에... 압록의 방비야말로 중대하다. 지금 아무런 이유없이 이 지방을 헐어 없애어 무지막지하고 奸細(간세)한 무리들로 하여금 산림 중에 숨어 살게 하며 그 처자를 이끌어 들여 소굴로 만들고 날로 금, 은, 동, 철을 채취하고 해아삼(孩兒蔘, 人形의 최상품 인삼)과 담비로 스스로 살지게 하고 弓矢(궁시)와 맹화의 기물을 감추어 자위하여도 수토(守土)의 신(臣)은 이를 감추고 보고하지 않고 묘당의 신들도 알고도 말하지 않으나 난은 이미 이 이루워진 것 방비는 지금 어데있는가?..." 하고 통박(痛駁)하였다. 이 2書는 정약용이 강진에 적거(謫居 귀양살이) 18년간의 저작으로서 위의 사실은 정조 후기로부터 순조 초년에 이르는 실정이었다. 공연히 천리폭원(千里幅員)에 가까운 땅을 버려두는 것은 애석하지 않을랴! 산림과 川沼(천소)의 이익은 성라(星羅)와 같이 창창하다. 산에 蔘茸(삼용)이있고 초서(貂鼠 담비) 또한 풍요하다 그리하여 피아의 삼캐는 것과 비슷하다는 도배(徒輩)들의 도적소굴로 만들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이와같이 이 지방은 산삼의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2. 인삼의 지나친 공물과 유랑민
貢蔘(공삼)의 過重(과중) 징수로 유망(流亡)하는 강계부민(江界府民)들이 많았다. 평안북도 강계는 원래 산삼이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이 산삼의 多量産出(다량산출)로 인하여 조선조 중기 강계부민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산이 풍부하면 지방민이 그 만큼 부유하여져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것이 화단(禍端)이 되어 그 고장에 살수가 없어 男負女戴(남부여대)하여 다른 곳으로 流亡(유망)할 수 밖에 없었으니 인삼 징수의 가혹이 도를 넘은 때문이었다. 조선조에 소위 貢蔘(공삼)으로서 그 종류로는 우선 戶蔘(호삼)이라 하여 평상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있었고 稅蔘(세삼) 또는 常平蔘(상평삼)이라 칭하여 삼군(蔘軍)을 人山시켜 채취케한 것과 貿蔘(무삼)이라 하여 종친부 등에 상납하는 것, 단삼(單蔘)이라 하여 대마(對馬 쓰시마)에 급여용, 신삼(信蔘)은 일본 덕천(德川 도쿠가와) 정부에 사신을 파견할 때 필요한 것, 기타 강변의 파숫군으로부터 징수하는 것 등등, 실로 각종 명목으로 인삼을 긁어 내었던 것이다. 이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지역민 중 流散(유산)하는 자가 속출하여 주민 2만여호 중 모두 도망가고 겨우 4천여호밖에 남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영조 44년 4월 평안관찰사 鄭常(정상)이 강계 蔘弊(삼폐)에 대하여 상소한 내용을 보면 그가 강계지방에 순시차 들어가자 남녀노소는 관찰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변에 도열하여 혹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며 호소하기를 "우리들을 살려주십시요 이제 우리는 蔘 때문에 살 수가 없읍니다" 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삼을 캐러 10명이 입산한다 하여도 그 동안 남획한 결과 그 중 8-9명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상례이며 그 상납시기가 되면 납부하여 할 수량은 태반이 부족하므로 백성들은 사방으로 동분서주 혹은 도내의 산읍(山邑)에서 구하기도 하고 혹은 함경도까지 이르러 간신히 납부액을 충당하려 하여도 또한 부족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상태이다. 그들은 관찰사에게 말하기를 임금임께서는 구중궁궐(九重宮闕) 깊은 곳에 계시니 어찌 우리들의 참상을 아시겠는가, 道臣守令(도신수령)들께서는 어찌하여 이러한 상황을 上聞(상문)케 하여 우리들 같은 성상(聖上)의 백성을 동일시하여 홍은을 베풀게 하지 않는가. 만약 이 삼폐를 營門(영문)에서 변경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오직 죽을 뿐이라고 눈물로 호소하니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본부(本府)에 이르러 그 사정을 詳密(상밀)히 조사하니 인호(人戶)는 점점 줄어가는데 전체 부담액은 그대로 두어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모두 도산(逃散)하는 수 밖에 없다 하였다.
3. 왕실용 인삼 구입
고래로 우리나라 왕실에서 자연생 인삼 즉 산삼을 흔히 복용한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으나 근세 산삼이 매우 희귀하게 되었을 때에도 천금을 불사하고 이를 이왕직(李王職)에서 구입하여 어용(御用)에 공(供)하였다고 한다. 1901, 2년경부터 1925년경까지 많을 때는 1년에 2천여원 적을 때는 5백원어치 가량을 매상(買上)하였다. 그 중 이왕직에 확실히 기장되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데, 그 밖에 민간이나 신하들의 헌상품도 있었다. 1920년 2월 2근 量目不明, 代 550원 동년 11월 1 量目不明, 代 750원 1921년 11월 3근 量目不明, 代 9백원 1925년 10월 1근 5돈 5분 代 120원 1926년 4월 1근 4돈4분 代 430원 동년동월 1근 5돈2분 代 260원
어용은 임금님께서 사용한 것이고 퇴위한 고종용(高宗用)도 또한 구입하였는데 당시 서울에는 산삼 전문상이 있어서 중개인 또는 채취자가 직접 지참하여 이 상인에게 팔거나 위탁하였던 것이다. 이왕직에서는 이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였는데 전의(典醫)에 서모씨가 있어 산삼의 감정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번 보아 즉석에서 진가(眞假)를 알뿐만 아니라 어느 산에서 난 것까지 식별할 수 있었다. 이 서모씨의 감정에서 可하다 하면 여하의 고가라 할지라도 이왕직 회계과에서는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용의 목적은 치료용이 아니면 보건용이었다. 그 사용법은 금 또는 은병에 산삼을 손으로 쪼개넣고 1홉의 물은 부은 후 3,4시간동안 서서히 달여서 6작(勺)쯤 된 때 1회 또는 2회에 복용하였는데 이야말로 진짜 독삼탕(獨蔘湯)이다. 이를 달일 때 금병 또는 은병은 세가다리형으로 나무를 조립하고 이에 매달은 후 숯불을 피워 약 1자(尺)의 거리에서 열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산삼 이외에 풍기산(豊基産)인삼도 의료용(醫療用) 또는 보건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는 생강이나 대추 등을 첨가하였다.
4. 동물 치료에 인삼을
이조때 동물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인삼을 먹이다. 인삼은 비단 인간의 약용뿐만 아니라 동물의 질병에도 이를 사용하였다. 말은 육축중에서도 가장 귀한 동물로서 군국(軍國)의 필요불가결한 가축이며 그 밖에 운송 농업등 사람의 경제생활과도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건강에 대하여는 옛날부터 일상 주의를 하였고 그 질병이나 상처에 대하여는 상당한 의료방법을 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조 중기에 이르기까지 육군은 기병(騎兵)을 주축으로 하였다. 한편 도로가 매우 불편하였기 때문에 역체제(驛遞制)를 두어 많은 역마를 사육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반 私人들도 여행에는 흔히 말에 의존하였으므로 말의 질병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주의를 하였다. 조선 태종대에는 혜민국조교(惠民國助敎)에 명하여 사복사(司僕寺)의 소속으로 말의 醫方(의방)을 습득케 하였으며 [세조실록] 12년 윤3월에는 서거세(徐居世)가 [마의서](馬醫書)를 편찬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나 이 서적은 지금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이밖에 마의서(馬醫書)로서 전하여진 것은 權仲和(권중화), 韓尙敬(한상경)에 의하여 편찬된 [新編集成馬醫方](신편집성마의방)과 정조대에 관간(官)인 [馬療諺解](마요언해)]가 있다. 이 [마요언해]에 그 처방중 인삼을 배합한 것은 20여처방이나 있으며 [신편집성마의방]에는 인삼을 배합한 것이 7처방 정도 있다.
그 처방명(處方名)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즉 人蔘散(인삼산), 黃不散治內外黃方(황불산치내외황방), 人蔘當歸散(인삼당귀산), 蔘笭散(삼령산) 등이다. 그 다음에 소에 대한 치료인데 소도 또한 말 다음으로 인간에게 유용한 가축 이지만 말에 비하면 주로 하급노동에 사역되었고 말과 같은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의 질병에도 인삼이 배합된 처방들이 있으나 귀중한 인삼을 실지로 소에까지 사용하였는지는 매우 의문이라 하겠다. 기타 동물로서 매(鷹)의 훈련과 사육에 인삼을 먹였다든가 작은 사조(飼鳥)들에게 인삼을 시여하여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일본에서 전하는 이야기로 모인이 삼광(三光)이라 이름지은 잘 우는 꾀꼬리를 길렀는데 이미 노쇠하여 날개털도 빠지고 그 목소리도 매우 희미하게 되어 사람들은 애석하다고 한탄하였다. 그 때 이를 기르던 자가 조선인삼을 구하여다 약간량을 사료에 섞어 먹였더니 이 꾀꼬리는 원기를 다시 되찾고 목소리도 커져서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한다.
5. 채삼꾼 공식적으로 등장하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인삼이라 하면 모두 재배한 인삼을 뜻하고 산에서 자연생으로 자란 인삼은 산삼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지만 옛날 재배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인삼이라 하면 전부 산삼을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산삼을 채취하는 특별한 직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문헌(文獻)에 의하면 만력년대(萬歷年代 1600년대) 울산의 호적장에서 호주명 아래 채삼군(採蔘軍)이라고 기입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관에서 부역(夫役)으로 채삼꾼을 지정하였던 기록일 것이다. 전국의 산야에서 인삼이 풍부하게 산출되었을 시대에 있어서는 지방민에게 이를 공납시켰던 것이므로 따로 직업적으로 채취하러 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남획으로 인하여 그 산출량이 격감되자 차츰 이를 채취하는 일은 특수한 견식이 필요하게 되어 농민들의 특수한 부업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채삼군은 심마니 또는 심메꾼 등으로 호칭되고 조선조 고종 중기 이후 산삼의 私採는 묵인 또는 공인되었던 것이다. 이 심마니들은 그 조직, 종업상태(從業狀態), 풍습, 禁忌(금기) 등이 만주의 동일 업자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이는 상호 국경을 접하고 주로 국경선 양측에서 서로 침범하면서 인삼을 채취하던 역사적인 전통에 기인한 것 같다. 그들이 산삼을 채취하려고 입산할 때는 수인이 단체를 조직하고 엄격한 규율과 깊은 신앙 및 상호신뢰를 기초로 단결하여 행동하는 바 그 단체의 장을 어인(御人)이라 칭한다. 이 어인은 一團의 통솔자로서 절대권력을 가진다. 부통솔자가 있을 때에는 中御人(중어인) 또는 次御人(차어인)이라 부른다. 도중 취사를 담당하는 자를 精才(정재)라고 부르는데 이 어원은 "평북 강계" 지방의 방언으로서 '주방'과 동일하며 "정재"의 권한은 어인에 버금한다. 그 외에 연료를 채취하는 자, 山中제사를 담당하는 자등 담당업무가 정확히 분담되어 있는데 그 권한은 상호 불가침으로 되어있다. 입산경력이 적은 자는 '소댕이'이라고 부르고 전연 무경험자는 '날소댕이'이라 한다. 이들의 입산기는 년중 대체로 3기로 나누는데 苗節(묘절), 丹節(단절), 黃節(황절)이 그 것이다. 묘절은 봄철 인삼이 발아하기 시작하고 다른 초목들이 너무 무성하지 않아 비교적 구별하기가 용이한 때이다. 단절은 여름철 인삼의 과실이 익어서 빨갛게 되어 가장 발견하기가 쉬운 시절이다. 황절은 가을에 접어들어 인삼의 잎이 노랗게 황변할 때다. 산삼의 채취라는 일은 가장 사행적(射倖적)인 것으로서 운이 좋으면 일거에 거액을 얻을 수 있으나 몇달 동안이나 심산유곡을 헤매이며 갖은 고생을 하여도 한 뿌리의 삼을 구경도 못한 채 헛탕을 치고 돌아오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다음 기회의 행운을 기다린다.
6. 심마니의 행동과 금기
심마니들이 산삼을 채취하려고 단체를 조직하고 각 업무분담을 정한 후 입산을 하기 전에 약 1주일간이나 적어도 3일전부터는 매일 여러 번 깨끗한 물로 몸을 정결하게 목욕하고 여성과 동침을 피하며 부정한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상가(喪家)나 해산한 집에 출입하지 않으며 상자(喪者)나 棺(관) 동물의 시체를 보는 것들도 부정탄다고 이를 기피한다. 만약 부정한 몸으로 산에 들어가면 산신의 노여움을 사서 인삼을 얻을 수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人山한다는 말과 그 시일을 절대 비밀에 부쳐 타인에게 누설하지 않음은 물론 처자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안 사람이 이를 물어보는 것 조차 금기이다. 그러므로 행선이 어디인지는 어인(御人) 외에는 다른 단원들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밤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를 드리는 상대신체(相對神體)는 마을의 성황당이나 큰 암석 또는 귀신나무 등이다. 즉 이들 부락의 수호신에게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냄으로써 도중의 가호와 다수확을 기원하는 것이다. 강계 지방에서는 옛날 수확이 많았던 시절에는 이 제사를 이틀간이나 성대히 행하고 마을사람들은 초대하였는데 돼지를 여러 마리 잡아 주연을 베풀고 출발직전에는 온동리 사람들이 모여 "豊穫(풍확)이다" "풍확이다" 소리치면서 그 일행의 전도를 축복하여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제사상에 바치는 祭需(제수)로는 소주, 닭, 쌀밥, 물고기 등인데 禿魯江(독로강)에서 나는 농어를 가장 귀한 것으로 쳤다고 한다. 이 농어를 구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쏘가리, 잉어, 붕어 등을 썼다. 제물을 다 차려놓은 후 단원들은 平伏(평복)하고 어인은 기립하여 제문을 낭독한다. 제문은 원래 종이에 써야할 것이지만 어인 등은 문필에 어두운 자가 많아서 대체로 그 제문을 다만 암송(暗誦)한다.
그 제문의 일례는 다음과 같다. "강계부 강계읍 某里 어인 박모 정재 조모, 소대인 김모, 이모, 정모, 조모 네 멀거니가 五大 모래미를 가지고 들어왔아오니 명아(明雅)하신 산신님 흠향하시옵소서, 夜실에 허몽(虛夢) 마시옵고 진몽(眞夢)을 주시옵소서" 이때 일동은 삼배한다. 이날밤은 철야로 촛불을 밝히고 제사를 지낸 후 일동은 이미 입산준비를 하였다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이튿날 곧바로 이곳에서 출발한다.
7. 심마니의 입산풍습
채삼군 일행이 人山을 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게 되면 일행은 도중에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무언의 행동을 한다. 도중에 여인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며 더욱이 여자가 길을 가로지르는 것은 질색이다. 그러므로 만약 앞에서 여인이 오는 것을 보면 이쪽에서 먼저 삼캐러가는 입산자임을 알린다. 그러면 오던 여인은 이를 알아차리고 길옆으로 피하여 등을 뒤로하고 멈추어선다. 이때 어인(御人 우두머리)이 여인에 대하여 치마자락을 요구하면 이에 응하여 치마끝을 두세치 찢어 준다. 일행은 이것을 지참하고 人山한다. 이러한 풍습은 고대 어느 나라에도 있는 풍속으로서 여체에 마력이 있다고 숭배하던 유풍의 일종이다. 그 여체에 접촉하였던 의복에도 마력이 있다고 신앙하였으며 이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입산중에 사나운 맹수나 악귀를 물리친다고 하는 뜻을 전습한 것이다. 또 산신은 여인의 서답(月經帶)을 좋아한다 하여 남의 집 물건을 몰래 훔쳐서 가지고 가기도 한다. 만약 도중에서 우연히 이것을 버린 것이 발견된다면 기꺼이 주워 가지고 간다. 이런 것들은 산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신당이나 수목에 걸어놓고 공헌물(供獻物)로 쓴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 가족의 것은 사용하지 않는 법이다. 입산을 하게 되면 대체로 첫날밤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목적지는 어인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며 다만 선두에서 인도하는 어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그 목적지는 대개 인삼이 산출되는 곳으로서 어떤 산꼭대기 지점인데 전년에도 숙박한 일이 있는 동연(同連)이라 불리우는 초막이다. 이 동연 부근에는 여러가지 모양의 신당(新堂)들이 있는데 높이가 3자 내외 세로, 가로 각 2자쯤 되는 초라한 것들로 조잡하게 목판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내에는 목판에다가 신명을 써놓은 것도 있고 또는 어떤 모양을 한 돌을 넣어 놓은 것도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것도 있다. 만약 이 조그만 신당이 크게 파손되어 있으면 다른 일을 제쳐놓고 우선 이것부터 신조(新造)하거나 보수를 한다. 이렇게 신당을 보수 또는 신조한 후 당일 저녁 다수확(多收穫)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준비를 하게 된다.
8. 인삼 재판
인삼을 둘러싼 재판으로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예는 박흥식(朴興植)씨가 냈던 홍삼 7천 5백근 인도(引渡) 청구소송이었다. 이 소송은 원고인 박씨가 조선총독부 재무국 전매총무과장 岩城弼太郞(암성필태랑)이라는 日人을 상대로 냈었다. 해방이 되고도 몇년이 지난 부산피난 시절인 1953년의 일이었다. 박씨는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가 있던 서울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인 박씨의 주장은 1945년 해방되기 직전 조선총독부시절 매수대금 5백44만원으로 홍상 9천6백근을 전매당국으로부터 매입, 대금을 지불했으나 이 중 7천 50근을 인도받은 일이 없다고 주장하며 해방 후 몇년이 지나서 왜정 때 전매당국 책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박씨는 왜정 때 조선 비행기공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홍삼을 전매당국으로부터 사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당시 홍삼은 三井물산이 일수판매(一手販賣)라는 단독판매권을 정부에서 얻어 유일하게 홍삼을 판매할 수 있었으나 박씨는 해방직전 특수한 케이스로 홍삼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씨가 매입한 홍삼의 대부분은 전쟁말기에 해상항로가 위험하여 중국에 반출을 못하고 개성인삼 출장소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후 찾지 못했었다. 개성출장소 창고에는 전매국, 삼정물산, 박씨소유 홍삼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박씨는 전매당국과 홍삼판매계약을 맺고 대금을 지불했으나 물건을 인수받지 못했으며 왜정 때 책임자는 홍삼을 인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소송이 제기되자 낯한 입장에 부닥친 것이 전매청이었다. 해방전 日人책임자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전매사업인 홍삼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매청장 김치영(金致榮)씨는 기획계장 조용봉(趙龍鳳)에게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는 법무제도가 없어 기획계장 조씨는 전매청의 소송관계도 관장사무였기 때문에 이 일이 맞겨진 것이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이 사건을 맡은 것은 김치걸(金致傑)판사였다. 박씨는 변호사도 대면서 이 사건에 적극적이었다. 기획계장 조씨는 개성인삼출장소 직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응소에 필요한 준비서면을 작성했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수할 법적책임이 없다고 강조하고 소련군이 홍삼을 모두 가져간데 대한 책임은 더욱 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부산에 피난중이던 개성출장소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 소유의 홍삼이 꼬리표까지 붙어 개성창고에 있었으나 해방직후 소련군이 약탈해간 것이 틀림없었다. 이에 대한 공판이 열려 전매청측에서는 증인으로 기획계장, 서무과 직원 5∼6명이 출두했고 피고인 박씨측에서는 중역들이 출정했다. 이색(異色) 소송사건은 부산의 일간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 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회공판이 열린 후 원고측은 소(訴)를 취하하고 말았다.
9. 경무대에 가짜 산삼 상납
경무대(景武臺)에 가짜 산삼 상납되어 쉬쉬한 일도. 삼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산삼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심심찮게 강원도 산골에서 산삼을 캤다고 신문에 나기도 하지만 1953년 경무대에 상납됐던 1백년 묵었다는 산삼이 삼이 아닌것이 감정되어 쉬쉬한 일이 있었다.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구내리 무당 박모씨(당시 나이 45세)는 현몽으로 태백산 중봉에서 길이 6자 무게 1관 되는 산삼을 캤다며 상납했었다. 이같은 사실이 전매청에 연락되어 인삼계장이던 현종천씨(작고)가 감정을 했으나 인삼과 비슷하게 쓴맛 단맛은 있는데도 삼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비서들은 받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하고 바친 사람을 생각해서 비밀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산삼을 캤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가짜 산삼이 많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진짜 산삼도 있겠지만 보통 인삼을 산삼으로 재배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산삼은 머리부분이 삐쭉하고 긴 것이 특징인데 사기꾼들은 보통 인삼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에 많이 심었다. 대개 땅속에 머리부분을 일정기간 거꾸로 묻어 재배하다가 바로잡아 키우면 머리부분이 길게(이것을 장뇌라고 한다.) 굵어서 산삼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사기꾼들은 이같이 인공재배한 가짜 산삼을 바위옷으로 싸고 목상자에 넣은 다음 다시 흰 보자기에 싸서 대도시에 나와 꿈 운운하며 파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가짜 산삼을 만든 사람과 결탁한 약방에서는 몇백년 묵은 산삼 운운하며 엄청나게 값을 불러 부호들에게 권했다.
10. 의술의 천시와 인삼
우리나라 역대왕조의 의약술은 서서히 진보되기는 하였으나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이것은 경제생활의 빈곤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또한 사회제도에서 오는 폐단도 그 원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의사의 직분을 천시하고 의관(醫官)같은 직책은 양반계급이 관장하고 소위 중인계급이 代代 세습으로 그 직을 맡아 낮은 지위에 놓여 있었다. 내의원제조와 같은 벼슬자리는 의원이 아닌 문관으로 補하고 전의를 그 지휘하에 귀속시켰던 것이다. 왕, 왕족, 대관 등이 병환이면 진찰한 결과를 보고하고 처방을 지시하여 동의를 구하여야만 하였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왕이나 왕족이 병으로 서거하면 주치의관의 책임을 받는 예도 허다하였다. 그 실례로는 동의보감의 저술로 유명한 허준같은 이도 선조가 몸이 편치 않을 때 한중용서 양제(寒中龍書 凉劑)를 사용하여 그 병이 중하여졌다 하여 실각하고 광해군대에 와서는 또다른 이유로 남대문밖으로 추방당하는 비운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아래서 의권(醫權)이 신장되지 못하고 의도가 부진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정도전, 유성룡, 유지번, 정약용 등 유학자들이 의학저술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괄목할만한 사실은 선조때 전유형이 의서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임진란 때 길가에 쓰러진 죽은 사체를 해부한 후 그 기술이 능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일본이 해부를 시작한 때부터 2백80여년전 일로서 의학사상 특기할 사실이며 일본인들도 놀라고 있다. 이러한 정황속에서도 인삼의 효능은 확고한 신념의 대상이 되어 그 복용은 여러가지 처방중에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인삼의 재배가 성행되기 전까지는 서민들의 이용물이 될 수 없었다. 인삼은 전통적으로 보화로 취급되어 중국과의 무역품으로서 국가재원이었으며 조선조 중기이후부터는 다시 일본과의 주요 무역품이 되어 은화와 바꾸게 되고 광해, 인조 양대에는 명청(明淸)전으로 종전 만주로부터 중국전토에 공급되던 인삼의 거래가 두절되어 우리나라 인삼가격이 폭등되는 등 여러가지 사단으로 서민들의 복용이 더욱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