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계간평
수필가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권대근
(수필비평가, 문학박사)
인간사 중에서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삶과 죽음이다. 대부분의 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살았는 상태에서 삶의 온기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축하해 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가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며 통곡한다. 탄생과 소멸은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사에 공존하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죽음이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마침『대한문학』겨울호에서 ‘생명’이라는 테마로 ‘삶과 죽음’을 다룬 수필을 실었다. 편집인은 무엇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까. 현대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을 평자는 이쯤에서 상기해 본다.
지올로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이 현저해진 요인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삶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인생에서의 죽음이 특수한 관계성이므로 어느 누구에게서도 어느 곳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수필가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김동필의 <상가임대>, 류경희의 <할머니의 손>,문향선의 <잿불처럼 사그라지듯이>, 이명선의 <초대받은 손님>등의 죽음과 관련된 글들은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가, 또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절실한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김동필은 죽음의 불가시성을, 류경희는 치매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문향선은 죽음에 대비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이명선의 수필은 아는 분의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삶과 죽음으로의 초대로 풀어내고 있는 글이다. 그는 삶과 죽음에 초대한 손님이야말로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아는 게 우리가 사는 이유일 것이라는 나름의 처방을 내리면서도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자신에게 난제였다고 고백한다. 체험의 여과 없이 관념적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추적하는 글이라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김동필의 <상가임대>는 상점이라는 의미의 ‘상가’와 초상집이라는 의미의 ‘상가’를 절묘하게 연상시키는 기법을 써서 수필의 맛을 살려낸 작품이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죽음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한 자전거포 주인의 돌연사를 통해 구체화하는 이 수필을 읽는 묘미는 자전거 빵꾸 때우다가 갑자기 죽은 분의 가게문 위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상가 임대’라 쓴 간판에 담긴 언표 내적 의미를 추적해 보는 데 있다. 이 수필의 재미는 자전거 주인이 죽기 전에만 해도 작가는 건강을 위한답시고 자전거를 탔는데, 외출에서 집으로 돌아간 작가가 아내의 말을 듣고 태도가 돌변했다는 데 있다. 자전거를 못 타게 하는 부인의 논거가 제법 그럴 듯해서 더욱 재미가 있다. 늙고 병들었으니 자전거 타는 모양이 초라하다는 것이 첫째 이유요, 번화한 찻길에 위험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세 번째 이유는 저전거 고쳐 주던 친구도 죽었으니 이 기회에 자전거와 인연을 끊으라는 것이었다. 이 수필의 묘미는 ‘가만히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는 작가의 반응이다.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된 자신의 입장을 거문고의 명인 백아와 친구 종자기에 얽힌 이야기로 구체화하는 데서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빛난다. ‘황혼녘, 그 자전거포 앞을 지나면서, 어디선가 “김 교수, 쉬어가시오”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 작가는 분명 휴머니스트이리라. 마지막 결구, “만유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자기 기운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고, 샛바람에 눈뜬 강물이 가만가만 말해 주고 있다”는 표현이 비극적 미학을 상승적으로 승화시켜, 유유한 멋을 낸다.
류경희의 <할머니의 손>은 치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수필이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치매에 걸렸던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손녀의 입장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리 슬프지 않다. 작가의 어머니 연세가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라는 진술을 통해 할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갔음을 축복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초상집의 우울한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할머니의 치매로 인해 가족들이 겪은 고생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작은 잔치를 맞은 듯 화기 있게 초상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공감이 된다. 첫 째는 할머니가 치매로 인해 힘든 인생의 모든 기억을 한꺼번에 놓아버렸다는 것이고, 다른 한 이유는 정신이 들면 갓 시집올 때의 나이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십대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했던 치매를 할머니에게 축복이었다고 의미화한다. 아담한 할머니였지만 유독 손은 관절이 불거져 있었고 기형이다 싶을 만큼 크고 억세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할머니가 본래부터 그런 손을 가지고 계셨을까’하는 의문을 놓으면서 인고의 삶을 살아온 할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되새긴다. 혹시 하늘에서 할머니가 보고 있을까봐 가끔 먼데 하늘을 올려다 보곤하는 작가의 할머니에 대한 애도가 아련하게 행간을 메우고 있다. 마지막 결구,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아무리 보아도 게으르고 제 몸만 아끼는 부끄러운 예쁜 손이다’라는 진술은 ‘단 한 군데 두 손만은 기형이다 싶을 만큼 크고 억센 것이었다’는 문장과 대비를 이루면서 반성적 성찰대 위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작가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채색한다. 거친 할머니의 손을 제재로 해서 자식들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온 우리네 여인들의 희생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손길이 곱기만 하다.
문향선의 <잿불처럼 사그라지듯이>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어떤 소리를 들을지라도 귀가 순하게 받아들이는’ 이순의 나이를 맞은 작가가 생각하는 죽음에 관한 단상이 깔려 있다.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은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그만큼 많아졌다. 생의 저 편보다 이 편이 훨씬 짧아졌으니 어찌 보면 죽음을 기다리는 삶,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거기다 세상을 뜬 분들의 꿈을 자주 꾼다. 내가 늘 죽음을 의식해서일까. 꿈속에서 언제나 침묵인 채로 있는 사람들, 깨고 보면 별로 유쾌한 꿈만은 아니다.”는 부분이다. 육십의 연세에 찾아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작가는 시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처음으로 죽음과 맞닥뜨렸기 때문에 죽음을 노인이 되었을 때 맞이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일부는 아동기나 청장년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남보다 앞서서 직면하기도 한다. 인간은 특히 죽음에 직면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괴로움과 고통 또한 만만찮다. 작가는 그런 심정을, “시월 열이틀 날 밤의 달빛이 어찌 그리도 서러웠을까. 사잣밥을 지어 내간 대문 앞에서 그만 울고 들어오라며 성화를 해댈 때까지 나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고 적었다. 작가의 시어머니 역시 지나온 여정은 인고의 삶이었다. 물의 학자 에모토 마사루의 말 이야기를 통해 주제의식을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좋았다. 곱게 늙어야겠다는 명제를 세우는 일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 하겠다.
수필은 현실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수필이 체험적 이야기이건 아니건 간에 수필과 현실은 상호 밀착되면서 수필적 화자를 자기 속에 밀어 넣는다. 수필은 언제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연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해명이면서 새로운 삶과 역사 진전의 지평을 가시화시켜 인간과 삶과 역사를 상승시킴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전개함을 말한다. 그것은 문학이 사회나 역사성의 수용에 의한 전파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죽음의 문제를 화소로 수필을 풀어내고 있는 작가들은 일차적으로 모두 문학의 사회적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노인이 되어 병들고 노쇠하게 되어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 가는 죽음의 유형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천수를 누리고 가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 돌연사나 사고사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도 있다. 이상과 같은 죽음의 현상을 검토할 때, 우리 수필가들이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비극적인 감각이 그만큼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아무튼 우리 수필도 죽음의 중력에 많이 이끌리게 된 것은 사실이며, 이는 우리 수필가들의 노령화에 따라 더욱 심화되고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