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보면 항상 대통령 임기 2년 정도 되면 레임덕에 시달렸다. 지지층도 다 날아가 버리고 3년째 되면 뭘 하려고 해도 지지를 못 받으니 할 수가 없게 된다. 대통령제 안에선 임기 초반 1년 반 안에 확고한 무엇이 보이지 않으면 임기 내내 그럭저럭 가게 된다.
결국은 내각제로 가는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 체제가 가장 안정적인 곳이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이다. 1949년 연방공화제를 수립한 후 계속 연정을 하고 있다. 이 같은 내각제로 가야 한국 정치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나. 내년을 넘기더라도 2016년 새 국회에서도 개헌을 얘기할 시간은 충분하다. 대통령 임기가 1년 반 정도 남아 있는 때이고, 동시에 그만두는 입장이니 대통령으로서도 개헌 논의에 거부감을 많이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프레시안 : 독일 모델을 많이 거론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앙겔라 메르켈을 벤치마킹하라고도 했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김종인 : 내가 메르켈을 벤치마킹하라고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성격이 전혀 달라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강한 걸 좋아해서 그런지 자꾸 대처 얘기를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나를 따르라' 식의 정치는 시대착오적이 되고 있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글로벌 인터넷 혁명 시대다. 경청하고 타협하는 게 답인 시대다. 남의 얘기도 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메르켈의 리더십이 각광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어느 순간 결정하는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세계 지도자 중 원전을 일거에 없앤 유일한 사람 아닌가. 자기가 물리학자인데도 몇백만 분의 1의 확률이라도 사고가 나면 그다음엔 방법이 없다며 원자력 발전을 안 하겠다고 했다. 나라를 끌고 가는 사람의 리더십이란 건 이처럼 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집권한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도 메르켈은 여전히 70%에 육박하는 높은 지지율을 자랑한다.
야수 풀어놓으면 안돼…'룰' 정하면 따라야
프레시안 : 경제민주화에 있어서만은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리더십을 강조했는데, 오히려 그 부분에선 의욕을 상실한 것 같다.
김종인 : 지금 대한민국 경제를 소생시키려면 경제민주화를 안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경제민주화는 최고 통치자의 확고한 의지에 달려 있다.
흔히들 미국이 자유 시장경제라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은 19세기 말에 여러 문제가 생기니 50~60년에 거쳐서 사회 구조 전반을 재조정했다. 이게 지금 미국을 세계적 국가로 만든 것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통일 직후엔 여건이 어려워 구조조정을 할 수 없었지만 경제가 계속 취약해지니 2000년대 맞아 노동시장의 경직성 등 많은 걸 변화시키며 경제를 살려냈다. 여기서 역시 주목되는 것 역시 독일 사회가 오랜 기간 축적한 신뢰와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다. 그 덕에 독일은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커다란 사회적인 동요가 없었다.
한편 한국과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경제 발전에 도취돼 한 번의 구조조정도 안 거친 유일한 나라들이다. 우리는 1960년대 초반 산업화를 시작한 후 1987년 민주화를 했고, 그 후 25년이 지났는데도 경제 구조가 그대로다. 일본 또한 아직도 구조 문제에 관심이 없고 잘 되면 '니혼진(일본인) 정신'으로만 설명한다.
그 결과 어떻게 됐나. 재계가 경제에 힘을 꽉 잡았다.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세력이 재계이고 이들이 관료와 정치를 좌지우지한다. 재계 이익에 반하는 건 하려야 할 수가 없다. 한편, 독일은 연방국 초대 경제 장관이자 철저한 시장경제 신봉자였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독과점을 절대적으로 배격하며 콘체른(재벌)이 형성될 수 없게끔 했다. 지금 보면 이렇다 할 큰 기업이 없는 것 같지만 나라는 정상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비교가 된다. 독일 정부부채가 통일 직전 GDP 대비 42%였다가 통일 후 20여 년 지나니 22%포인트가량 늘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부채는 1989년 GDP 대비 71%에서 최근에는 250% 가까이 가고 있다.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일본 경기가 1분기에 반짝한 걸 두고 아베노믹스의 성공을 말하고, 2분기에 형편없이 내려앉은 걸 두고 소비세를 도입해서 그런 거라고 얘기하는데 이렇게 분석하면 안 된다. 1분기 '반짝'은 증세를 앞두고 사전 구매가 몰려 생긴 착시 현상일 뿐, 일본은 소비세를 도입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은 경제 운용 시스템을 어떻게 할 거냐의 문제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만 얘기한 것이 아니다.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자본가에겐 기본적으로 야수 같은 기질이 있는데, 이들이 멋대로 아무나 잡아먹히게 내버려두면 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겠나. 그래서 경제민주화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어떤 룰(규칙)을 정하면 룰을 따르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20년 만든 일본과 꼭 닮은 최경환 경제정책
프레시안 : 최근의 경제 상황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정책은 어떻게 보고 있나.
김종인 : 최 부총리가 말로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답습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딱 일본처럼 하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가 어디서부터 취약한 점이 드러났는가. 1985년도 프라자 협정 이후에 환율이 절상되니 일본 수출 기업의 수익이 뚝 떨어졌다. 그러자 기업을 도와주려고 금리를 인하했다. 이는 곧 재태크 바람을 불러 부동산 가격이 뛰고 주가가 뛰었다. 거기에 일본 사람들이 황홀감에 빠졌다.
경제 여건, 그러니까 국내 수요를 떨어뜨리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나 완제품 조립 대기업들의 경쟁력 하락 문제들도 일본과 똑 닮았는데, 이런 구조적인 문제로 상황이 나빠지니 '이까짓 것 경제 부양 정책 쓰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똑같다. 일본이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됐나. 매년 1000억 달러씩 10년 동안 1조 달러를 경기 부양 자금으로 쓰고 경기는 살아나지 않았다. 종국엔 빚만 잔뜩 늘어났다.
우리의 경제 상황을 분명하게 진단해서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살 거냐 등 대비해야 할 게 정말 많다. 일본 아베노믹스도 보아하니 성공하긴 틀렸다. 아베노믹스가 실패하면 엔화 가치가 엄청나게 내려갈 것이다. 그때 경쟁 관계에 있는 우리 상품이 국제 시장에서 어떤 상황에 부닥칠 것이냐, 이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의 주요 산업인 조선업, 중공업, 석유 화학, 철강, 건설, 전부 취약한 분야가 되어가고 상황에서, 어떤 혁신으로 이들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할 거냐, 이런 분야에서 노력해야 한다. 막연히 금리 내려주고 경기 부양한다고 되겠나. 그래 봐야 단기적으로 볏짚 태우는 것처럼 부르르 탔다가 꺼져버리는 것이지 효과가 없다. 경제 상황이 이럴 때일수록 경제민주화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