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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간도로의 이주와 망명
흔히 말하는 간도는 북간도(백두산의 동북방, 두만강 대안)와 서간도(백두산의 서남방, 압록강 대안)로 나뉜다. 그중 가장 큰 규모의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던 북간도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4개 현이 중심이었으나, 넓게는 액목 · 돈화 · 동녕 · 영안 · 안도현까지 아울러 지칭하기도 했다. 서간도는 압록강 북쪽으로부터 송화강 중상류 지역까지를 가리킨다. 서간도에는 집안 · 통화 · 유하 · 회인 · 관전 · 임강 · 장백 · 무송 · 흥경(현 신빈) · 해룡 등의 현이 자리 잡고 있다.19세기 중엽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서북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했던 직접적인 동기는 기아와 빈곤 등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특히 1869년~1871년 사이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의 대흉년은 서북 지방 주민들을 기아 상태에 몰아넣었다.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살기 위해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그 무렵 회령부사로 부임한 홍남주는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두만강 너머 개간의 필요성을 느끼고, 월강을 원하는 주민들에게 ‘월강청원서’를 내도록 하는 한편, 두만강 건너편을 간도(間島), 즉 ‘사잇섬’이라 명명했다. 이후 강을 건너는 주민들이 급격히 늘어났다.북간도 이주 초기 단계에 조선인들은 두만강변의 무산, 종성, 회령 등지에서 강을 건넌 뒤 강기슭의 산골짜기를 따라 해란강 이남 일대, 곧 두만강변에서 멀지 않은 분지와 산기슭에 촌락을 형성했다. 한인들이 북간도에 정착하자 각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벼농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대체로 190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로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용정시 개산둔지 천평 일대와 용정 부근 해란강변의 서전대야 일대였다.북간도로 간 이주민들은 함경북도 출신이, 서간도는 평안북도 출신이 다수였다. 1904년 당시 서북간도의 한인 78,000명 가운데 함북 출신은 32,000명, 평북 출신은 23,500명으로, 2개 도 출신이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했다.민족운동가들의 북간도 망명은 1908년경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1908년 관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 특히 함북 경성의 이남기 · 최경희를 비롯하여 김정규 · 지장회 등은 1908년~1909년 북간도와 연해주로 집단 망명했다. 또 함남의 북청 · 삼수 · 갑산 일대에서 활발한 유격전을 수행하던 홍범도 · 차도선 등은 북간도와 연해주로 넘어가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한편 국내에서 자강운동에 참여했던 이들도 을사조약 이후 대거 망명길에 올랐다. 이상설 · 이동녕 · 정순만 · 여준 등은 1906년부터 용정촌을 독립운동 기지로 삼기 위해 북간도로 망명했다. 이들은 1906년 8월 용정촌에 정착하여 민족주의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열었다.다음으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 착수된 곳은 북만주의 밀산이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은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회장 김학만, 그리고 정순만 · 이승희 등과 함께 1909년 여름부터 밀산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중 · 러 접경지대인 흥개호 북쪽의 중국령 밀산부 봉밀산 일대에 한인들을 집단이주시켜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인 자제의 교육을 위한 한민학교를 건립하면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해 나갔다.강제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을 전후해서는 대종교 계열의 인물들도 북간도로 대거 망명했다.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을 비롯하여 임원인 서일 · 계화 · 박찬익 · 백순 · 현천묵 등도 북간도 연길 · 화룡 · 왕청 일대로 망명하여 한인학교를 세우고 민족주의교육에 뛰어들었다. 대종교 인물들은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에 대종교 북도 본사를 세워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한편 서간도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다. 특히 1869년 대기근 이후 북간도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이주했다. 1869년 이후 3년 동안 평안도 사람 6만 명이 서간도로 넘어갔다. 청국이 1875년 봉금령을 폐지하자 조선 사람들의 서간도 이주가 본격화되었다.1897년에 통화 · 환인 · 관전 · 신빈 등지로 이주한 사람은 이미 8,772호에 37,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이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관리사로 임명하여 서간도로 파견하기도 했다. 1900년 평북관찰사 이도재는 서간도 지역을 적절히 배분하여 후창 · 자서 · 강계 · 초산 · 벽동 등 각 군의 관할로 배속시켰다. 1902년 서간도 이주민은 9,753호 45,593명에 달했다.청국은 서간도 이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행정기구를 증설했다. 또 조선인들의 황무지 개척을 장려하기 위해 토지소유권을 인정해주고, 대신 세금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주민들에게 변발과 호복(胡服)을 강요하고 청국에 입적할 것을 종용했다. 소작농의 경우 중국인 지주들의 수탈도 극심했다. 때문에 조선인들은 대체로 곤궁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서간도 지역 이주민 사회는 처음 파저강(또는 동가강)이라 불리던 혼강 유역(통화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지역이 벼농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통화현의 조선인 이주민은 1912년 10,275명에 달했다. 신의주 대안의 안동, 봉성현, 그리고 관전현 등은 양국의 교통로 부근으로 조선인들이 다수 모여 살았다. 1904년 안동 · 봉성현에는 1,402명이, 관전현에는 3,720명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준공된 이후에는 이주민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환인현의 경우는 이주가 다소 늦어 1907년 2,005명의 이주민이 있었으며, 유하현의 경우에는 1912년 당시 5,356명의 이주민이 있었다.서간도 지역의 관전현과 유하현 일대를 항일운동 기지로 삼을 것을 처음 구상한 이들은 항일의병이었다. 1896년 유인석의 제천 의병 계열 인물들이 평안도 지역을 경유하여 통화현 오도구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 지역이 항일운동 기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인석을 따라 이주한 이들은 70~80명에 이르렀다. 또 평북 의병장 조병준 · 전덕원을 비롯하여 황해도 평산 의병대의 이진룡과 조맹선 · 우병렬 · 백삼규, 그리고 강원도의 박장호 등도 서간도로 망명했다.1910년 강제병합 이후 망명자는 더욱 늘어났다. 왕산 허위의 형 성산 허겸이 허위의 처와 자식 등 일가족을 거느리고 1912년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본격적인 망명은 신민회 계통의 운동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신민회가 추진한 독립군 기지 건설사업과 관련하여 조직적으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회영 · 이시영 6형제를 비롯하여 이동녕 · 이상룡 · 김창환 · 주진수 · 김대락 등의 선발 망명대는 1911년 초까지 환인현 횡도천과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 도착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이회영 일가의 경우 50여 명의 가족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일시에 처분하고 1910년 말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 천전의 김대락도 50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의 이상룡 · 주진수가 망명한 뒤, 이들의 영향으로 영양 · 봉화 · 안동 등지에서 1911년에 87명이, 1912년에는 1,092명이 서간도로 이주했다.
서북간도 지역의 자치운동과 민족운동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세워지고 쑨원(孫文)이 이끌던 난징 임시정부가 ‘연성자치제(聯省自治制)’를 내세우자 북간도 한인들은 민족자치운동을 시작했다. 북간도의 한인 지도자들은 간민교육회를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로 발전시켜 중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자치를 실시해 간도를 항일운동의 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동춘 등 4명의 대표는 간민자치회 설립을 승인받고자 베이징에서 리위안훙(黎元洪) 임시정부 부총통을 만났으며, 1913년 2월 4일 당시 국자가(局子街)라고 불렸던 연길에서 총회를 열어 자치단체 설립을 추진했다.중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명칭은 ‘자치’라는 표현을 뺀 간민회로 정했으며, 3월에는 길림성의 지방행정당국으로부터 설립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4월 26일 정식 총회를 열어 규약과 조직체계 등을 확정했다. 회장은 명동학교 교장이던 김약연이 맡았으며, 국자가에 총회를 두고 화룡현과 왕청현 등에 분회를 두었다.
간민회는 북간도 거주 한인의 자치기관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인에 대한 행정관리를 중국 지방정부와 협의하고, 세금 징수 등의 행정업무를 대신하기도 했다. 간민회는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 중국 정부와 법률의 보호 아래 자치를 실시하려는 목적에서 중국 국적을 얻는 입적(入籍)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문맹퇴치와 사숙(私塾)개량, 식산흥업 등 신문화운동을 벌이며 재만 한인의 생활을 보호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아울러 연해주에서 조직된 권업회 등과 협력을 추진하기도 했다.그러나 간민회의 활동은 유림의 반발을 사서 그들이 조직한 농무계(農務契), 공교회(孔敎會) 등과 대립했다. 유림은 중국으로 입적하는 것은 조상을 배반하는 일이라며 반발했고, 신문화운동에도 반대했다. 1914년 농무계는 간민회가 회비를 강제징수하며 농민들에게 부담을 안기고 있다며 지방행정당국에 신고했다.중국 정부는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이 일본의 간섭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고 간민회 활동을 단속했다. 그리고 1914년 3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연성자치기관의 철폐를 명령하자, 이를 근거로 간민회와 농무계를 모두 해산시켰다. 그러나 간민회는 해산 이후에도 일정한 조직을 유지했고, 이는 1919년 3 · 1운동 이후에 북간도에서 만들어진 ‘대한국민회’(간도국민회라고도 함)의 기반이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북간도로 망명한 이상설 · 이동녕 · 여준 · 정순만 · 김우용 · 박정서 · 황달영 · 홍창섭 등은 간도의 한인 자제들에게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이들은 1906년 교통의 요지인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 있는 최병익의 집을 매입하고, 서전평야에서 이름을 따 사립학교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초대 숙장은 이상설, 운영은 이동녕 · 정순만 등이, 교사는 이상설 · 여조현 · 김우용 · 황달영 등이 맡았다.그러나 1907년 4월 이상설이 이동녕 · 정순만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서전서숙은 재정난에 처했다. 특히 1907년 7월 통감부의 간도출장소가 설치된 뒤 일본의 방해와 감시가 심해졌다. 통감부 간도출장소 측은 항일교육의 근절을 위해 간도보통학교를 세우고 매월 20원의 보조금을 내겠다는 회유책을 제시했지만, 서전서숙은 이를 거절했다. 서전서숙은 훈춘 방면의 탑두구 근처로 옮겨 갑반 학생들만 수업을 계속하다가 그해 8월 졸업식을 갖고 결국 폐교했다.명동학교는 1908년 4월 김약연 등이 중국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에 세운 학교로서, 1925년 문을 닫을 때까지 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명동촌은 함경북도 회령과 종성에 살던 문병규 · 남종구 · 김약연 · 김하규 등이 1899년 가족을 이끌고 집단이주하여 만든 마을이다. 1906년 이상설과 이동녕 등이 용정에 근대적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세우자, 김약연은 남위언과 사촌동생인 김학연 등을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1907년 서전서숙이 1년 만에 문을 닫자, 명동촌에 있던 규암재 등의 사숙을 통합하여 1908년 4월 명동서숙을 세웠다. 명동서숙은 박정서와 여준이 숙장과 교사로 참여하는 등 서전서숙을 직접 계승하여 만들어졌다.명동서숙은 1909년 이름을 명동학교로 바꾸고 김약연을 교장에 앉혔으며, 신민회의 북간도교육단 책임자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명동촌의 지도자 김약연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후 명동학교의 교육은 기독교교육과 민족교육을 결합한 것이 되었다. 명동학교는 1910년 중등교육과정을 설치하고 역사학자 황의돈, 한글학자 장지영, 박태환 등을 교사로 초빙했다. 1911년에는 여학부(女學部)도 설치했다. 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명동학교에는 북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국내의 회령 등지에서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1911년 학생 수는 소학부 280명, 여학부 65명, 중학부 160명에 이르렀다.명동학교는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대한독립선언대회를 주도한 ‘충렬대’는 명동학교와 화룡현 자동(滋洞)의 정동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대한국민회의 주요 인물들도 대부분 명동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명동학교가 북간도 민족운동가 양성의 요람으로 자리 잡자,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간도 참변 당시 명동학교에 불을 질렀다.이로 인해 명동학교는 임시건물을 지어 학생을 가르쳤으나 학교운영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1925년 중등교육과정은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통합시켰으며, 소학교는 명동교회가 운영하며 1930년대 초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북간도에는 그 밖에도 창동학교, 광성학교, 대전학교, 북일학교 등이 있었다.한편 신민회는 1910년 봄 서울 회의에서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그해 여름 이회영 · 이동녕 · 주진수 등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로 적합한 곳을 물색했다. 그 결과 서간도가 가장 유력한 곳으로 꼽혔다.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에 걸쳐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 · 김창환 · 이동녕 · 여준 등 각도의 대표 인사 100여 명은 가산을 처분하고 가족과 함께 서간도 삼원보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1911년 4월 요녕성 류하현 삼원보 고산자에서 이주민 300여 명은 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조직하기로 하고, 사장에 이상룡, 내무부장에 이회영 등을 선임했다. 경학사는 이주민들의 자치기구로서 농업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구국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군사교육을 시작했다.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그러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1911년과 이듬해의 대흉작과 풍토병으로 커다란 어려움에 부딪친 것이다. 또 중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에게 토지를 매매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어려움에 봉착했고, 결국 이동녕은 시베리아로, 이시영은 봉천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다.이런 상황에서도 서간도로 이주해오는 한인들은 계속 늘어났다. 이에 삼원보에서 남쪽으로 90리 정도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에서 1912년 ‘부민단’이 조직되었다. 부민단은 “부여의 옛 땅에 부여 유민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이었다. 초대 총장은 허혁이었으며, 곧 이상룡으로 교체되었다. 부민단은 재만 한인의 자활, 복리증진, 교육, 독립운동 기지 건설 등을 주된 목적으로 했다. 특히 자활과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었고, 이주 한인들의 보호와 애국청년 육성에 주력하면서 재만 독립운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앞서 본 것처럼 1911년 4월 이회영 · 이시영 6형제와 이동녕 · 이상룡 등은 삼원보에서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1912년 부민단은 삼원보에 있던 신흥강습소를 합니하로 옮겨와 신흥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이석영의 재정후원을 받아 새 교사를 건축했다. 초대 교장은 여준, 교감은 윤기섭이 맡았으며, 나중에 교장 이세용, 교감 이상룡으로 바뀌었다.중학교 수준의 4년제 본과 외에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의 속성 별과를 두어 젊은 인재들을 교육했다. 비록 무관학교라는 이름은 아직 붙이지 않았으나, 교과 내용은 군사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본과에서는 일반 중학 과정에 무관교육을 겸하여 문무쌍전의 신교육을 실시했다.일제의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914년 9월 현재 신흥학교 학생은 약 40명 정도였으며, 18~19세부터 24~25세 사이의 청년들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졸업생들은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여 서간도 일대에서 이주 한인들의 계몽과 교육사업을 담당했다. 또 부민단과 함께 백두산 서쪽에 백서농장을 건설했다. 이곳에서는 신흥학교 졸업생 등 4백여 명이 모여 농사를 지으면서 동시에 군사 훈련을 받았다.한편 서간도 환인현에는 후일 대종교 3대 교주가 되는 윤세복과 그의 형 윤세용이 세운 동창학교가 있었다. 이들은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가산을 팔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환인현 서문 성안에 동창학교를 세웠다. 교장은 경북 예안 출신의 이동하가 맡았으며, 박은식과 신채호가 이어서 한국 역사를 가르쳤고, 주시경의 제자인 김진이 국어를 가르쳤다. 동창학교는 일본의 압력을 받은 중국 측의 강압으로 1919년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윤세복은 무송으로 옮겨가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흥업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또한 동창학교를 계승한 백산학교를 설립하고, 1924년에는 대종교 제3대 교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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