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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몸살 감기가 나서 목소리가 평안하지 않는 것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거 우리 10일 감사 1천 번째 기도 노트를 전시에 놓으셨어요 놨어요. 그래서 오늘은 가져가지 마시고 다음 주까지 이렇게 전시에서 성도들이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한 분이 집에서 이렇게 넘어지셔서 이렇게 머리가 이렇게 부딪히셨대요. 근데 이 성도님이 넘어지자마자 입에서 이렇게 내뱉은 말이 있는데 “하나님 나 이제 가요.”였대요.
멋진 일 않나요?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꼭 여러분에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교회에 이렇게 멋진 성도가 있다고 넘어지면 아파 죽을 뻔했다 이렇게 하는데 이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 나 이제 가요.”라고 하셨답니다.
제가 두 가지 감사를 했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첫 번째 감사는 하나님 나 이제 가요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되게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은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고백을 해요. 빨리 하나님께 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정작 이분들이 돌아가실 때가 되면 막 삶에 집착하는 모습이 죽음의 그 시간에서 보이는 것을 많이 경험하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돌아갈 때 이런 위기가 있을 때 이런 고백을 한다는 건 믿음의 고백이니까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고백이라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 감사는 첫 번째와도 비슷한데 천국에 대한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에 되게 감사했어요. 그러니까 천국이 있다고 믿은 거잖아요. 영원한 삶이 있다고 믿은 거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이 땅에 도한 소망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천국에 있는 소망이 있어야 정상이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옆 사람과 인사 한번 하겠습니다.
천국에서 뵈니 감사하네요.
별로 이렇게 천국에서 봤는데 안 반가우신가 봐요. 이 집사님이 왜 왔지 막 이런 분위기 같은데 한 번 더 인사하겠습니다.
천국에서 뵈니 감사하네요.
감사합니다.
2025년 교회의 어떤 표를 이렇게 생각하다가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교회라는 단어예요. 교회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믿는 순간 여러 신분이 생겨요. 그리고 그 신분에 맞는 호칭들도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 있어서 성도라는 신분과 호칭도 생기게 되고요. 그리고 자녀라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또 호칭도 생기게 되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과 또 호칭도 생기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신분과 또 호칭도 생겨요. 다 좋고 정말 행복한 호칭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런 호칭을 가지고 있고 내가 이런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과 저는 이 신분을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분을 주시고 어떤 호칭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의무만 던져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권리도 권한도 함께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도 해야 되지만 또 한편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즐거움은 또한 누려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우리 관계 우리의 신분도 다양하고 그리고 거기에 또 호칭도 되게 다양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누릴 것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땅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땅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창조하셨고 이 땅을 누릴 수 있는 많은 권한을 여러분과 저에게 주셨어요.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풍성한 것을 누릴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로 인해서 이 누림이 되게 약해요. 물론 우리가 의무도 충성도 잘 못하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 반면에 내 누림도 잘 못해요. 여러분이 하루를 살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가지고 얼마의 시간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시나요?
여러분이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런 신분을 가지고 나는 오늘 하나님의 백성이야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몇 시간을 살아가나 따지고 보면 별로 그런 시간이 없어요. 교회에 있는 시간은 어찌저찌 해서 그렇게 살지 몰라도 세상에 가면 하나님이 세상에 이렇게 누릴 수 있도록 주신 이 신분들과 이 고난들을 못 누리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누리는 일에 신경을 빼앗기다 보니까 하나님의 누림에 대해서 많이 놓치고 살아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만드신 것들을 우리가 누리고 살기도 바라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체를 우리가 누리고 살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풍요가 많을까요? 하나님에게 풍요가 많을까요?
하나님에게 풍요가 많죠. 우린 참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풍요가 많다고 생각해요.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풍요롭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당연히 만드신 이에게 더 많은 풍요와 더 많은 영광과 아름다움과 넉넉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반대로 죄로 물들기도 했잖아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이 죄로 물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나라가 발전해도 사회는 엉망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요.
인권이 가장 발달된 날에는 밤 6시 이후에 아예 다니지도 못해요. 낮에 다녀도 칼을 들고 사람들이 따라오는 것도 전 세계에 한두 나라가 아니고 여러 나라들이에요. 세상은 죄로 물들어서 그 세상을 우리는 절대로 제대로 누릴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만드신 세상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하나님에 대한 누림에 좀 집중하면서 이 땅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풍요를,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는 풍요를 여러분은 얼마나 누리고 살아가십니까?
이런 거죠. 하나님은 넉넉한데 우리는 가난해요. 하나님 평안한데 우리는 불안해요. 왜요? 하나님의 평안을 우리가 못 누리니까 하나님의 부여를 우리가 못 누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요즘 교회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씩 들떠요. 확실히 예전과는 좀 다른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교회라고 했을 때 제가 느껴지는 감정과 지금 내가 교회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확연하게 좀 다릅니다.
오늘은 성경 몇 구절을 좀 연결시켜서 살펴보면서 제가 교회에 대한 정의를 좀 내려보려고 해요. 물론 이미 성경이 정의를 내리기도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한 이야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성경 몇 구절을 연결시키고 그를 짧게 해석하면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을 잠깐 언급하려고 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이 그 안은 성령의 전 성전이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오.
골로새서 1장의 말씀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9절과 30절 2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에베소서 5장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거죠. 이 세 구절을 연합하면 성도의 모임이 곧 교회라는 의미가 되고 성도가 곧 교회라는 의미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도인 동시에 곧 교회가 되는 거예요. 물론 여러분과 제가 교회라고 할 때는 이 건물 내의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건물로서의 교회는 이해돼요. 목장 교회라는 이 건물이 있죠. 실은 교회는 아니고 정확하게 하면 예배당인 거죠. 그리고 성도들은 이까지는 이해가 대부분 해요. 공동체가 교회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의 이 모임이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자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도 성도들이 이까지는 다 알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교회라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걸 잘 몰라요. 자신이 교회라는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내가 교회라는 사실을 아는 건 신앙에 있어서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에요. 우리가 그냥 가볍게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어서 그렇지. 신학적인 측면에서 내가 곧 교회라는 사상은 혁명과 같은 사상이에요.
이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잘 알지 못했던, 어쩌면 지금 시대가 점점 지나면서 우리가 꼭 완성해야 될 이 땅의 지상의 교회가 완성해야 될 목표 중에 하나가 내가 곧 교회라는 거예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고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이 땅에 여러분과 저의 마지막 사명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목장 교회라는 공동체도 교회지만 나도 교회이다.
우리의 이중적인 삶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은 어디에서 기이했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교회인 줄 모르는 삶에서 출발한 거죠. 내가 교회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중적인 삶이 가능했던 거예요. 내가 교회면 나는 교회에 있을 때도 교회고 나는 집에 갔을 때도 교회인 거고, 나는 직장에 갔을 때도 교회인 거잖아요. 사람들이 이 삶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삶에 되게 익숙한 거죠.
교회에서 삶과 세상의 삶이 다르고, 교회 직분자로서의 삶과 세상의 어떤 직위의 삶과는 많은 차이가 있게 되는 거예요. 이게 일치를 이루려면 우리가 나는 교회라는 이 신앙적인 전환이 우리에게 한 번은 꼭 있어야 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준비한 건 이 전환을 만들어주려고 해요. 어렵게 이걸 막 설명하고 설교하려고가 아니라 정말 간단한 방법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설명해 드리려고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한번 따라해보겠습니다.
나는 교회다
한 번 더 합니다.
나는 교회다.
할렐루야 여러분 다 교회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나는 교회다라는 문장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이 됩니다.
나도 교회에 있지만 우리 가정도 교회라는 의미가 돼요. 나도 교회이지만 내가 있는 모든 곳이 곧 교회라는 의미도 돼요. 내가 어렵다는 것 곧 교회가 어렵다는 의미가 되고요. 내가 즐겁다는 것 곧 교회가 즐겁다는 의미가 돼요.
내가 행복하면 교회가 행복하다는 의미가 되고, 내가 성장하면 곧 교회가 성장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나의 삶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내가 범죄하면 우리 교회는 범죄한 교회가 되는 것이고, 내가 말씀을 어기면 곧 우리 교회는 말씀을 어기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이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이 교회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말씀을 어기면 우리 교회는 곧 말씀을 어기는 교회가 되는 거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목장 교회라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안에서도 불수 존재이지만, 이 공동체로의 교회와 여러분의 개인 교회 제가 개인의 교회를 오늘 호칭상 이게 좀 붙이기가 어려워서 여러분의 교회라고 이렇게 호칭을 할 거예요.
여러분의 교회 그러니까 공동체 교회와 여러분의 이 교회도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거죠.
여러분이 시험에 들면 여러분의 교회가 시험에 들면 목장교도 시험을 들고 여러분의 교회가 범죄를 하면 이 말은 여러분이 범죄한다는 의미죠. 목장 교회도 곧 범죄하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게 분리될 수 없는 거라는 거죠.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슬프면 교회도 슬프게 되고요. 내가 화를 내면 교회도 분노로 가득 차게 되고요. 내가 싸우면 교회도 싸우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내 삶이 교회다, 내가 교회다라는 사실에 인식의 전환까지는 믿음이 다다르기가 되게 어려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신학적인 어떤 인식의 변화들을 혁명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이 땅에 교회와 성도들이 이거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려고 정말 투쟁하며 산다면 이 교회야말로 되게 성숙한 교회예요. 제가 이 땅에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교회가 이런 교회인 거죠. 우리 목장 교회와 여러분의 교회가 분리되지 않는 교회 그렇게 여긴다면 저에게 있는 교회는 제가 앞으로 일출 교회라고 이름을 붙일 거예요.
저는 일출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붙여서 한번 여러분의 교회를 좀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교회는 이름을 대요. 일출교회라고 하시면 안 되고 저의 교회는 저 여러분의 이름을 대시고 교회입니다. 이렇게 하셔야 돼요. 아셨죠? 시작
저의 교회는 일주일 교회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교회 하나씩 다 개척해 드렸어요.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한 200개 교회가 개척이 됐어요. 놀라운 일이 벌어졌죠.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200개의 교회가 개척이 됐습니다. 아니 이미 존재하던 교회지만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했던 교회예요. 오늘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를 개척했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돼요. 제가 지난 주간에 성도들이 교회를 좀 많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셔서 어떻든 성도들이 제 말씀을 제 설교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좀 있더라고요.
엄청 감사했어요. 제가 오늘 설교를 좀 쉽게 하고 이렇게 하는 건 요 하나만 여러분이 오늘 일주일만 기억해도 엄청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요. 나는 일출 교회다. 이 사실만 기억해도 개척교회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단계까지 가는 확률이 1%라도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오늘 개척한 여러분의 교회도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가 되게 어렵다는 거예요. 내가 운영하고 내가 개척했고 따지면 하나님이 개척시켜주신 거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만 우리가 내가 개척했다고 하니까 내가 운영하고 내가 개척했다고 해서 내가 이 교회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건 아닌 거예요. 내 엄청난 노력이 있어야 여러분의 교회를 여러분이 유지하고 성장시키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개혁된 교회를 원합니다. 좀 다른 교회들을 목장 교회가 개혁되려면 먼저 여러분의 교회가 개혁돼야 돼요.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개척해 드린 여러분의 교회가 개혁돼야 목장 교회가 개혁될 수 있는 거예요. 개혁된 성도들이 있어야 개혁된 교회가 되지 계획의 캐치 프레이즈를 외친다고 해서 개혁된 교회가 되는 건 아니에요.
여러분의 삶이 개혁이 될 때 우리 목장 교회라는 이 공동체 교회도 동일하게 개혁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오늘 여러분이 개척한 여러분의 교회가 개혁되지 않으면 개혁된 목장 교회는 만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변화된 교회들, 개혁된 교회를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개혁된 교회죠. 만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이 오늘 제가 개척해 드린 여러분의 교회를 개혁하셔야 돼요. 이 말은 여러분의 삶이 개혁이 돼야 목장 교회가 개혁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깨끗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공동체로서 목장 교회가 깨끗하려면 여러분의 교회가 깨끗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교회가 깨끗하지 않는데 목장인 교회가 깨끗할 수 없어요. 우리는 순결한 교회의 정결한 교회 세상과 다른 교회를 원하지만 정작 자신의 교회는 깨끗하게 하지 않아요.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이 그러는 동안 우리 교회는 결코 목장교회는 순결한 교회는 될 수 없어요. 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여러분의 욕망이 아무리 솟구쳐 올라와도 안 되는 일이에요. 오직 여러분의 교회가 순결해질 때 목장 교회도 순결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순수성을 외치는 목회자나 성도들 중에 자신의 몸의 교회는 방치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니까 구호는 외치는데 자기 몸의 교회는 방치해 둔 거죠. 성도의 삶이 선교를 하지 않는데 교회가 선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모든 교회와 성도가 교회의 부흥을 소망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부응하려면 여러분의 교회가 먼저 부응해야 돼요. 여러분의 교회가 먼저 전도를 해야 그 영혼으로 목장 교회가 채워지는 거잖아요. 여러분의 교회가 여러분은 빨리 제가 오늘 200개 교회를 개척한 것처럼 여러분도 빨리 복음을 전해서 교회 개척을 하셔야 돼요.
그래야 우리 교회가 부흥된 교회가 되는 거죠.
목장 교회가 부응하길 바라면서 자신의 교회를 방치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 부흥은 방치했기 때문에 교회가 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목장 교회에도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교회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를 좋아해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과연 사회적인 책임을 다 감당하고 있습니까?
목장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잘 감당한다는 건 여러분의 교회가 모인 성도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잘 감당한다는 의미인 거예요. 그래야 교회가 세상에 짐들을 잘 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함이 지는 짐은 그 사람의 영향력과도 같아요. 제가 여러분에게 작은 짐들을 좀 지우잖아요. 어떤 성도들은 기분이 좀 안 좋을 수도 있어요.
교회 목사님은 뭐 계란도 팔고 목사님은 뭐 라면도 파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제가 만약에 수이라고 했으면 이걸 판매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이거를 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교회가 져야 하는 짐, 우리 교회보다 더 연약한 교회들을 위해서 우리가 져야 하는 짐, 우리보다 더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우리가 져야 하는 짐 우리가 지는 짐은 곧 교회의 영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좋기를 바래요. 교회가 멋지기를 바래요. 그런 환상이 있어요. 주변에 그런 교회가 있으면 막 좋아하고 또 막 부럽기도 하고 해요. 그런데 교회가 짐을 지지 않는다면 목장 교회라는 공동체의 교회도 짐을 져야 하고, 여러분 개인의 교회, 여러분의 교회도 짐을 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기대하는 그 멋진 교회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짐을 져야 돼요. 요즘은 감사하게 우리 교회가 짐을 지려고 하는 성도들이 조금씩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마음 한편으로는 되게 감사해하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합니다. 다 말씀드리면 또 너 여러분 너무 이렇게 우주에 있어서 겸손이 사라질까 걱정이 돼서 말씀은 다 드리지 못하지만 어쨌든 짐을 지는 성도들이 자꾸 많아진다는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저희가 새벽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남쪽 유다 출신으로서 북쪽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가 아모스라는 선지자예요. 근데 이 아모스의 이름이 이름의 뜻이 짐이라는 뜻이에요. 짐을 지는 사람 짐 이게 이제 아모스의 이름의 뜻입니다. 아모스는 북쪽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무거운 짐을 졌어요. 이 짐은 하나님께서 이 아모스에게 지워진 줌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모스도 마찬가지 우리는 교회인 동시에 우리는 또 아모스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짐을 지는 공동체이고 성도는 짐을 지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짐을 지는 무게가 가치를 결정해요. 교회가 어떤 짐을 짓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의 가치가 결정되는 거죠. 근데 짐을 지지 않는데 교회가 가치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우리나라가 어렵잖아요. 어려운 이유는 짐을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자기가 져야 될 마땅한 짐을 치면 이 혼란스러움들이 쉽게 사라질 텐데 아마 제 추측으로는 정말 이 땅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짐을 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죄의 결과니까요. 그래서 점점 세계가 혼란스럽고 어려워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짐을 져야 목장 교회도 짐을 지는 교회가 됐습니다. 여러분 가정이 짐을 지지 않는데 좋은 가정이 될 수 있을까요? 안 돼요. 짐을 지지 않는데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짐을 지지 않는데 교회가 좋은 교회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멋진 목장교회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교회가 짐을 져야 돼요. 목장교회가처럼 큰 짐은 못 져도 하나님 분명히 여러분에게 짐을 이렇게 주실 거예요.
조금만 눈을 뜨고 보시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지어진 짐이 다 보여요. 안 보이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제가 여러분의 교회를 개척해 드렸잖아요. 그 개척교회가 어떤 짐을 져야 되는지 안 보이시는 분들은 찾아오시면 제가 열심히 기도하는 이후에 여러분의 교회에 맞는 짐을 제가 지워드릴게요.
아멘을 하지 않으신 것은 짐을 지기 싫음이 크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신의 짐을 지면 이기적이 되고요. 하나님이 지으신 짐을 지면 영광스럽게 돼요. 우리는 자기가 욕망을 위한 짐은 기꺼이 져요. 그래서 사회가 이기적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영광스러운 짐은 잘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여러분과 저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어요. 특별히 이 땅에 교회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목장 교회 성도로도 불렀지만 여러분의 몸에 있는 성전, 여러분의 몸에 있는 교회의 성도로도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교회를 하나씩 다 개척해 드렸습니다. 제가 주중에 만날 때 여러분에게 제가 물을 수도 있어요. 권사님의 교회 이름이 뭐예요? 이렇게 물을 수 있어요 집사님은 교회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을 수 있어요.
여러분 주저하지 않고 답을 하시려면 연습을 많이 하셔야 돼요. 나의 교회는 일출 교회다. 나의 교회는 일출 교회다라고 연습을 많이 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의 기억 속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 잡도록 해야 돼요. 나는 교회다라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의 교회를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도 영화롭게 되고요. 자신의 교회를 풍성하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 목장 교회도 동일하게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교회 하나씩을 다 개척해 드렸습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의 교회의 개척자로 사셔야 돼요. 여러분 개척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시죠? 후미로와도 힘들지만 개척하는 목회자들도 엄청 힘이 들어요. 왜냐하면 교회의 문을 닫아야 할 순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이 개척한 교회를 부흥하는 일에 일이 어려울 거예요. 그래도 포기하지 마시고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개척하게 하신 나의 교회를 내가 열심히 부응시키자는 이런 결단과 각오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개척자들은 짐을 져야 됩니다. 기쁘게 감사함으로 짐을 짜야 돼요. 하나는 짐을 지는 공동체의 영광과 협업을 허락하셔요. 가정도 짐을 지면 회복이 되고 교회도 짐을 지면 회복이 돼요. 우리 교회가 기쁘게 짐을 지는 교회가 되고 그래서 교회 곳곳에 큰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