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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時論, 詩論은 없다
우리 시대의 창조적 시론은 없다. 시는 시의 시원에서부터 지금껏 창조의 길을 걸어 온 것이 아니라 지나친 분석과 문학적 가치와 의미 부여와 의미 캐기를 통해 퇴행의 길을 걸어왔고 창조의 싹마저 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창조적 시론이나 문학론도 진보가 아닌 퇴행을 위한 문학론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낡은 틀의 답습과 흉내 내기로 바쁘다. 평론가와 제도권 교육과 나와 뭇 시인들은 이러한 역행의 쳇바퀴를 돌리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리고 한창 유행하는 100 인이니 100 년 기념이니 젊은 시인이니 하는 문학적 줄 세우기를 통한 작가론, 작품론이 축제 쪽으로 밀고 가는 이벤트성이 큰 우려를 낳고 있기도 하다. 그 한 편에서 갈채를 보내는 쪽에 편승한 평론가도 가관은 아닐 것이다. 이벤트가 문학의 부흥이고 시의 발전이라는 가치 혼란 속에서 시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문단에서 패거리 만들기와 줄 세우기를 통해 흑백논리의 유령이 문학에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래파냐 아니냐를 따지면서 미래파란 테두리 안으로 들어간 젊은 시인들의 집단화가 가져오는 상쇄현상 때문에 자신이 가진 독특한 시세계를, 개성을 잃어버리고 전혀 미래적이지 못한 미래를 흉내 내다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좌초해 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흉내 내기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시인을 만나기도 한다. 전혀 미래적이지 못한 현상에 대한 어설픈 흉내 내기로 시를 출발하는 젊은 시인들도 있다. 지금 미래파라 자칭하거나 지칭한 젊은 시인 군과 나와 문학인이 시를 시인들만의 전유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증황이 들어내기도 하므로 슬프기도 하다. 나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시의 나라를 세우는데 나도 크나큰 걸림돌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미래파가 미래로 나아갈 때 문학의 사조를 다시 만들려 할 때 미래적 토양이 되지 못한 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을 반성해 보기도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창조적 시론을 위하여 라는 주제를 가지고 원고지 앞에 앉아 있다.
고대서양에서 시는 문학의 통칭이며 희곡을 말하였다. 고대서양 문학은 모두 극시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문예비평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희곡에 대한 이론서였고 비극이 훌륭한 희곡의 주제였고 비극을 떠난 문학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시의 어원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기 보다는 우리 시대에 객관성을 띄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정한 시론을 찾아나서야 하나 없다. 누구나 자기의 시론을 또는 자기의 시작법을 강요하지만 그것은 시인이나 시를 쓰는 사람에 대한 고문이고 테러에 가깝다. 어떤 사람이 시론을 들고 남 앞에 섰다면 그것은 극히 개인적 시론을 말하는 것이지 보편적인 시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보편적인 시론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없다. 시의 창조에서는 일정한 표준이나 정형이 없다. 시는 정신의 발화현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정신이 시를 수태하여 낳을 수 있도록 정신을 물꼬를 터주는 것이 진정한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자유로운 생각의 산물이자 시 자체가 자유의 상징이다. 위 생각들이 시인이나 독자나 일반인에게 공감하거나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일은 내 개인적 생각의 결과이며 극히 위험한 내 생각 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창조적 시론을 말한다는 것은 내 개인이 내가 시에 대해 아는 것과 내가 어떤 자세로 시에 접근하는 가와 내가 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 가와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떤 주제와 방법으로 시를 쓰는 가이며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시대의 창조적 시론에 대한 모색이 아님을 말해 두고 싶다. 내가 창조적 시론을 말한다는 것은 극히 내 개인에 국한된 시론이고 내 시론이 있다면 누구에게 간섭 을 받거나 또는 내가 남에게 강요할 시론은 아니다. 누가 시론으로 시작법으로 내게 그 무엇을 강요 해 올 수도 없다. 지금 우리 시대의 창조적 시론을 위하여 라는 주제는 지금 우리 시대에 나는 어떤 자세로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주제로 시를 써가고 있는 가라는 물음에 대답이 될 것이다. 우리시대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시에 임하고 있는가를 살펴가는 것이 창조적이던 아니던 간에 이 시대의 시인에게 시를 배우는 사람에게 독자에게 일반인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시의 내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펼치는 가난한 나의 시론이 될 것이다.
1. 내가 말하는 내 창조적 시론은 시대가 반영된 시
명자 꽃
명자 꽃 피는데 함성은 왜 피지 않나
명자 꽃 피면
이 어두운 골목에도 피가 뜨거워
함성이 피고 지고 흐드러져야 하는데
명자 꽃 피니 울음만 다소곳이 피어나네.
명자 꽃 피면 가시내야. 솜털 뽀얀 네 얼굴에
보조개 곱게 곱게도 피어났는데 가시내야.
명자 꽃 피는데 왜 너는 피지 않나.
뜨거운 피가 피워내던 함성은 왜 또 피지 않나.
가시내야. 가시내야. 명자 꽃 가시내야.
위의 시는 쇠고기 파동으로 촛불 시위가 있고 무차별 적인 진압이 있었고 정권 교체 후 일어난 사회적 현상을 보고 5 월 27 일 새벽에 쓴 시이다. 나는 졸시 라 하며 앞으로 내시를 나마저 격하하지는 않겠다. 명자 꽃이 피듯 생명의 절정에 이른 것은 시대를 노래하기 위해 시대를 누리기 위해 시대를 뒤엎기 위해 한 시대를 거부하는 어떤 몸짓이 없음을 슬퍼한다. 내 자신이 명자 꽃을 바라보며 다시 투사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나서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촛불을 들고 청계의 밤하늘 아래 서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 이처럼 내 개인 시론은 시대가 순수하게 투영되고 그것에 반항하는 정신이 몸짓으로 나타나 있어야 한다. 시대의 어둠을 고발하거나 시대의 어둠을 말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라는 잘못된 편견이 내게 있지만 난 끝까지 이 생각을 고집하고 싶어진다. 모든 생명과 가치는 현실에서 나온다. 현실은 문학이나 예술에서 알맹이고 고갱이다. 현실이 반영되지 않는 문학은 구체성이 떨어지고 공감대를 얻기 힘들며 현실을 등진 문학이다. 시를 도구 삼아 반사회적이거나 저항의 도구로 시가 전락한다 해도 그것이 시로써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해서는 미모사 보다 말미잘 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시 쓰기 살아 숨쉬는 시 쓰기이다. 현실과 끝없이 매춘행위를 벌이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고 질책이고 현실에 대한 간섭이자 현실이 가야 할 곳을 가리키는 푯대여야 한다. 우리는 이 시란 푯대를 따라가 현실의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시혼을 건져 올려 불의 나라 시의 나라를 세우는 건국이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명자 꽃이란 시는 중의적이다. 명자란 한 시대를 살다가 자살한 우리 누나 친구 이름이다. 선한 그 누나가 왜 강물로 걸어 들어가 강물이 되어버렸는지 무엇이 누나를 압박해 강물로 몰아서 갔는지 지금도 내게는 의문이지만 명자 누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용광로 불꽃 투영되는 형상강으로 스스로 저물어간 명자 누나는 지금도 의문이다. 이제 명자 꽃이 피어도 명자 누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강물이 흘러가버리듯 명자 누나는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영영 가버렸다. 우리 곁에 있다가 모든 것이 영영 가버리듯 나를 상실감 속에 생강나무 같이 세워두고 가버렸다.
2. 내가 말하는 내 창조적 시론은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것
기억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치명적이면서도 도피처가 된다. 양면성을 가졌으나 문학이나 시는 예술은 결국 기억의 산물이다. 기억을 음악으로 시로 짜 어떤 문양으로 나타내느냐에 따라 기억은 생명력을 부여받고 기억은 승화될 수 있다. 나는 시란 마음 속에 잔해처럼 나뒹구는 아니면 바위처럼 자리잡고 있는 기억을 적재적소에 놓는 퍼즐작업이라 부르고 싶다. 심중에 앙금으로 자리 잡고 앉아 조금씩 리듬으로 노래로 한으로 풀려나오는 것이다. 억압의 기억을 어느 민족보다 더 많이 가진 우리는 그래서 문학이나 예술이나 모든게 구성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이 또한 매력이자 뚜렷한 특징인 것이다.
금남로에서
나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눈물 난다.
광주에서 내 기억은 홍탁을 앞에 두고
무등산을 함께 바라보던 일
네 꽃잎으로 져간 일
차마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숨기고 살았지만
토말로 어란으로
네 무순 같은 손잡고 떠나자는
그 약속 잊지 않아 눈물 난다.
그 약속 아직 유효하여 눈물 난다.
나 잊은 줄 알았는데 눈물 난다.
네 꽃잎으로 져 간곳에도
오늘처럼 소쩍새 울어
애절할 텐데
애절할 텐데
너는 아직 네 안에서 지지 않았다.
금남로로 부는 바람에 내 안의 네가 끝없이 나부낀다.
광주사태 때 군 제대를 하고 대학교 진학한지 2 학년이 되었고 학자추위원장이었던 나는 외신을 타고 전파되는 무삭제 완역판으로 계엄군이 벌이는 만행을 접수 받을 수 있었다.이 땅에서 산다는 게 한 없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결국 금남로에서 란 시는 기억의 퍼즐화이다. 난 이 기억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마음 깊은 곳에 있다가 부패해 때때로 사체 같이 떠오른다. 때로는 뇌관처럼 내 마음을 순식간에 터뜨리기는 기억을 부둥켜 안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얼마나 섬세하게 내가 보낸 날을 묘사하며 이미지화 시키느냐 잘 되새김질하여 공감대를 형성시키느냐가 내가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기억의 나열이 시가 될 수는 없지만 기억을 시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상처를 곱씹으며 상처에 무수한 애정을 보내야 한다. 상처가 가진 식물성 섬유질이나 감각을 자극하고 있는 미세한 기억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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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
-박영근 생각-
그의 영전은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결국 지나고 보면 산다는 게 그렇게 우스웠던 것이겠지요.
영하의 거리에서 집에 갈 차비 좀 하며 내게 손 내밀 때 그의 손이 한없이 순결해 보였지요.
그의 집은 내 생각 미치지 못하는 인천인가 부천인가 어느 곳에 있었고
차비를 주었으나 골목 몇 건너 술집으로 다시 들어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비마저
술로 마시고 있던 그는 내 끌끌 차는 혀끝에 있었으나
지상엔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이 없다는 것을
취한 몸으로 그가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하루나 풀이나 바람이나 구름이나 정다운 얼굴이나 거리나
다 서로에게 보내는 문상인 것을
우리가 지상에 불멸로 기거할 집 한 채, 불멸로 적을 둘 번지수가 없다는 것을
허공의 집에 이른 그가 말하는지
허공의 푸른 솔 한 그루로 우뚝 서서 전하는지
오늘 하늘은 미세 먼지조차 없고 끝없이 푸르기만 합니다.
위 시는 어느 해 초겨울 박영근 시인을 만난 기억을 시로 나타내었다. 구면이었으나 늘 깎듯이 존댓말로 나를 대해 낯선 느낌을 주었고 그렇게 만난 몇년 뒤인 작년에 그는 허공의 푸른 언덕으로 떠났다. 그 언덕에서 그는 푸른 솔 한 그루로 지금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금곡리
그곳에는 콩 이파리 나부끼는 소리가 온 산에 가득하다.
자형이 고엽제 환자로 누나와 바스락거리며 사는 비린 이야기가
철되면 콩 이파리로 돋아나 비린 콩 냄새 나부끼며 한 없이 푸르러간다.
난 입욕하듯 그 비린 콩 냄새 속에 들어앉아
잎맥처럼 뚜렷이 들어나는 아오자이 자락 하늘거리는 월남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만든 자형의 무용담을 더듬으며
마늘 접 매면서 불혹에 닿은 누나의 바스락거리는 날도 본다.
금곡리
그곳에는 아직도 월남이야기가 바랭이로 벼로 피로 한 없이 푸르다.
위의 시는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고엽제 환자가 된 자형과 누나가 사는 것을 보아온 내가 그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쓴 시이다. 이처럼 기억의 긴 생명력에 편승해 시를 무두질해 내는 작업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 시대의 역사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3. 내가 말하는 내 창조적 시론은 자연과 교접을 통해 얻어지는 것
자연은 모든 것의 등받이 의자이다. 사물이나 동물 모든 것을 편안히 해준다. 자연의 법칙은 가장 당연한 이치이면서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순결한 것이다. 자연은 모든 영감의 자궁이며 이미지의 밭이며 가장 고결한 오르가슴을 간직하고 또는 오르가슴을 가져다주는 부드러운 질이며 수축과 이완이 있는 투명한 괄약근을 가졌다. 내가 자주 접하는 바다는 얼마나 우리에게 많은 문학을 완성하게 했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이미지의 꽃을 피워내 문학을 부채질해 왔는가?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새로운 거리로 나아간다는 것도 되지만 자연과의 대면이라고 도 할 수 있다. 영혼과 자연과 끝없는 교감과 교접이라 할 수 있다. 내 영혼의 숨통을 트여주는 것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고 자작나무 숲이고 우주고 풀잎이고 강물인 것이다.
아무르
아무르에 갔네. 상처 아물고 싶어
아무르 강가에 가 종일 앉아있었네.
아무르 아무르 아물어 내 상처 아물어라
내 아무르 강가 작은 풀꽃으로 살고 싶었네.
아무르 아무르 음악처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가 내 손 잡아 이끌 때까지
아무르 아무르 난 아무르 강가에 남아
보는 이 없어도 철 따라 피고 지는
작은 풀꽃이고 싶었네.
생을 무장해제 하고 청춘을 탕진하고
그를 기다리는 풀꽃으로 남아
철마다 아무르 아무르 피고지고 싶었네.
생의 완성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르 강가 작은 풀꽃과의 교감을 통해 나도 풀꽃으로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 아무르 강이라 부르는 누군가의 기슭에서 풀꽃으로 피고 지면 존재를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 내가 어떻게 시를 쓰고 있나를 보여주었으며 서두에서 이 시대에 창조적 시론, 진정한 시론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간 중심적이기에 규정하기에 따라 시론이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을 수 있다. 내가 창조적 시론, 진정한 시론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극히 개인적 견해이다. 대동소이한 시론에서 내 눈을 확 트게해 주는 시론이 없다고 단정한 내 편견이기도 하다. 좋은 시론이 지금도 어딘가 존재하고 있으며 또 써지고 있으리라 믿는다. 문제는 내가 읽지 않았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