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988호 가치를 아는 자에게 일을 맡기면 목숨을 건다 (잠26:10~11)
예전에는 모르는 길을 가려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물어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운전자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로 길을 찾아주는 장치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만 입력하고 지시대로 따라가면 반드시 목적지까지 데려다줍니다.
성경은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어 경험자에게 물어보는 시대였다면, 신약시대에는 내비게이션이 장착된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면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범사에 헤매지 않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내비게이션에 ‘예수님이라면 어떤 자를 쓰셨을까?’라고 입력해보겠습니다. 분명히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실 것이고,
성경을 통해 즉시 답을 찾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적 사업을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농부가 가장 먼저 볍씨를 고르듯 사람을 고르셨습니다. 자고로 사람은 길러쓰는 것이 아니라 골라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22).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택하신 장면입니다. 이들은 어부로 열심히
일을 하다 예수님께 발탁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택할 때 먹고 노는 사람을 택하지 않으시고 자기 일에 충실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어부로서, 의사로서, 세리로서 각자 자기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왜 그러셨는지 십분이해합니다.
저 역시 놀고 있는 자에게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들이 시간이 많아 일을 잘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시간이 많아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하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시간에 개의치 않고 목적을 실현한 자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택한 것도, 사도 바울을 택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밤을 새서라도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는 베드로, 예수의 도를 좇는 사람들을 잡으러 포기하지 않고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바울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주의 종으로 택하신 이유도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을 보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성격 덕에 철산리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 70여 개국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기필코 근성’, ‘올인 정신’, 이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엘리야나 엘리사, 마태복음 9장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님께 다가가 고침을 받은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 그리고 반드시 전쟁에 이겨 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던
입다, 꼭 아들을 얻고야 말겠다고 기도한 한나, 이 모두 기필코 근성이 있었던 자입니다.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금식한
후에 왕 앞에 나간 에스더도 이 기필코 근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우리 삶에서 대충이란 기생충을 잡아내고 ‘기필코 정신’을 주입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목적의식이 분명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목적의식은 ‘방향’입니다. 방향을 잡아야 달려갈 것 아닙니까? 활을 쏘아도 과녁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믿음의 전당에 오른 믿음의 선친들은 다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피곤치 않습니다. 힘들지도 않으며,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목적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자를 택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명(使命)이란 부리는 자에게 목숨까지 내놓는 것을 말합니다. 곧 사명을 깨닫고, 사명에 부도내지 않는 자를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이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은 37명의 용사들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신앙이 될 때 하나님께 기억될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일의 가치를
아는 자를 택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돈의 가치를 알면 돈을 벌기 위해 주야로
달리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이 가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일에 가치를 알게 되면
절대 나태하지 않습니다. 가치를 알면 의욕이 생성되기 때문이지요. 또한 가치를 아는 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고,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하며 인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저는 봉사나 헌신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날에
받을 상과 가치를 가르칠 뿐입니다. 가치를 알게 되면 자원하여 기쁨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자를 택하셨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든, 사업을 하든, 목회를 하든, 정치를 하든, 거기는 다 전쟁터입니다. 승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쟁터에
나가는 자가 가정에 얽매인다면 그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신경이 온통 가정에 가 있으면 일에 몰두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어느
버스회사의 사장은 가정문제가 있는 자들에겐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갈리어 사고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회사는 사고율이
낮다고 합니다.
목사가, 전도사가 생활에 얽매인 자라면
성도를 살리기는커녕 성도에게 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주 냉철하게 이 부분에 선을 긋습니다.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여러분, 인생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만나 동업하고, 결혼하고, 대업을 도모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사람을 썼을까?’ 생각합시다. 좋은 만남은 인생의 날개가 되지만, 잘못된 만남은 평생의
올가미가 되니까요.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0). 할렐루야!
길은 잃을지라도 사람은 잃지 말라
사람, 곧 인재가 힘이고 경쟁력이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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