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여수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여수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를 탔다.
나의 좌석은 11E 였다.
그래서 자리를 잡고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어느 할머니가 다가오시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11F인디, 나허고 자리를 바꿔 줄 수 있것능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또 할머니의 좌석이 창가쪽이라 나는 내심 "더 전망이 좋은 자린데 왜 그러시지?" 하고 생각했다.
흔쾌하게 좋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나는 할머니가 착석하실 수 있도록 서둘러 창가쪽으로 이동했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셨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모으신 채 기도를 하기 시작하셨다.
"내 어머니와 똑같은 분이 또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심히 기도를 하고 계셨기에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비행기는 힘차게 이륙했다.
하늘 높이 비상하여 제 고도를 잡을 때까지 할머니는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두 손을 꼭 잡으신 채로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리셨다.
마치 최고참 권사님 같은 포스였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간혹 "주여, 주여" 라는 작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도 닿았다.
간절하셨다.
비행기가 제 고도를 잡고 안정적으로 순항하고 있다는 부기장의 멘트가 나오자 할머니는 그제서야 기도를 딱 멈추고 드디어 눈을 뜨셨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설핏 움음이 터졌다.
내가 웃으니까 할머니가 "왜 웃느냐"며 눈을 살짝 흘기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환하게 웃기만 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할머니도 겸연쩍은 듯 나를 따라 활짝 웃으셨다.
그 미소가 매우 맑고 귀여우셨다.
"제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랬어요. 제 어머니는 비행기를 타시면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시거든요. 항공기 추락에 대한 염려증,
폐소와 고소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계셔요. 그래서 탑승 전에 '우황청심환'을 꼭 챙겨 드실 뿐만 아니라 비행 후 항공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까지 몹시도 불안해 하셔요. 그런 분이라 여행의 참맛을 거의 느끼지 못하시는 편입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내 말을 듣고 할머니도 응수하셨다.
"하이고 나랑 똑같구먼"
내 어머니 얘기를 들으시더니 할머니도 '동병상련'을 느끼신 듯했다.
당신도 내 어머니와 영락없이 똑같다고 하셨다.
"이 뱡기를 타기 전에 나도 '우황청심원'을 먹었는디" 하셨다.
"그러셨어요?"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이 흘렀다.
특히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 로 인해 약 3천여 명의 참사가 발생한 이후로는 더더욱 비행기 타기가 싫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번엔 집안 식구의 병환 때문에 긴급하게 상경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타게 되었단다.
이번 비행으로 본인도 5년은 감수할 것이라는 말씀까지 빼먹지 않으셨다.
항공기를 납치해 테러를 자행하는 무서운 세상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하셨다.
자신도 칠십 평생을 살아왔지만 요새처럼 세상이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던 때도 별로 없었다고 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당신의 불안과 걱정은 반대로 더욱 커졌다고 하셨다.
서울을 한 번 다녀가면 2-3일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삭신이 쑤셔서 따뜻한 아랫목에서 그냥 누워계신다고 했다.
더군다나 우리가 타고 가는 비행기의 기장이 외국인이라서 더욱 불안해 하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사실은 항공기가 제일 안전한 교통수단이예요. 자동차보다 사고율이나 사망자 수가 훨씬 더 적거든요.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가세요"
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리면서 계속 그 분과의 순수한 대화를 이어갔다.
정말로 천진난만하신 시골 할머니셨다.
"젊은이는 뱡기가 안 무서운게벼?"
"예, 저는 비행기가 빠르고 안전해서 좋아요. 자동차보다 더 편안하고요. 군복무 중엔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훈련도 꽤 많이 했었거든요"
"하이고 오금 저리네. 그냥 앉아서 가는 것도 무선디 뱡기에서 뛰어 내려? 비싼 밥 먹고 그렇게도 위함한 짓거리를 하고 잡았을까? 워메, 미쳤네 미쳤어"
그러시더니 당신은 높은 곳에 가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요실금 증상'이 심해진다고 하셨다.
"우헤헤헤"
나는 할머니의 표정과 말씀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도 아까처럼 눈을 살짝 흘기셨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하셨다.
당신도 계면쩍은 듯 피식 피식 웃으셨다.
"뭣땀시 뛰어내린당가? 다치거나 죽으면 우짤라고? 무모 생각도 허야제?"
이렇게 푸념하시면서 젊은 놈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셨다.
"할머니 자제분들도 모두 군대에 다녀오셨을 텐데요?"
"우리는 딸 시 명에 아들 둘인디, 아들들은 모두 지역 방우 출신이라 겁나게 '안전'하고 빠르게 군생활을 마쳐부렀지"
할머니는 특히 '안전'이란 단에에 힘을 주셨다.
그러면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만에 하나, 우리 아들들이 '해병대'나 '공수부대' 같은 데로 끌려갔더라면 아마도 매일 가슴을 졸이며 사느라 한 20년은 더 팍삭 늙어부렀을 것이여. 그런 부대에 지원해서 가는 애기들은 모다 불효막심한 놈들이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했다.
"아아. 정말 그런가? 이 세상 엄마들의 마음은 모두 그럴까? 내가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서 군생활을 했을 적에 내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몇 가지 상념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잠시 후 승무원이 사탕을 나눠주었다.
국내선에선 음료 서빙이 끝나면 거의 매번 사탕을 제공했다.
할머니는 사탕 바구니의 사탕을 두 손으로 가득 집어내셨다.
아무리 상냥한 승무원일지라도 할머니의 그런 행동에 순간적으로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용감무쌍한 독점이었다.
할머니는 승무원들의 표정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사탕 앞에선 과감하셨다.
두 손아귀에 가득 든 사탕을 당신의 좌우 호주머니에 넣으셨다.
몇 개는 좌석과 바닥에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승무원과 내 눈빛이 마주쳤으나 나는 차마 사탕을 집을 수가 없었다.
몇 사람 분의 사탕을 할머니께서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으셨으니까.
"쪼까 염치는 없지만 어쩔 수 있것능가. 우리 손주 새끼덜 몇 개씩 멕여야제"
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전혀 밉지 않았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환하게 웃으시는데 몇 개의 금니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합리성'이나 '공리주의'적 시각으로 보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쁜 손주를 생각하시는 할머니의 한국적 정과 사랑이 그대로 묻어났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원망이나 핀잔의 눈빛이 아니라 훈훈함과 따뜻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도 내 엄마의 그런 사랑과 관심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규범도 중요하지만 한국적 정서와 가족애가 물씬 느껴졌다.
"젊은 양반도 하나 먹어봐, 어여!"
친절하게도 사탕까지 까주셨다.
손등까지 깊은 주름이 가득했다.
한 평생 법 없이도 잘 살아오셨을, 우리네 어머니 같은 소탈하고 마음씨 고운 분이셨다.
"할머니, 사탕이 정말로 맛있네요"
"그랴. 겁나게 맛나부네~잉~"
빈말이 아니었다.
고소하고 달콤했다.
창밖을 바라보니 우리 비행기는 벌써 용인을 지나 과천 상공을 날고 있었다.
발 아래 '관악산'이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이윽고 안내 멘트가 울렸고, 랜딩기어 내리는 기계음이 육중하게 들렸다.
"할머니, 거의 다 왔어요. 벨트하세요"
잠시 풀어 놓았던 벨트를 매시고 다시 기도를 시작하셨다.
깊게 몰입하셨다.
연세를 드실수록 삶에 대한 애착과 여생에 대한 소중함에 눈뜬다고 했다.
날로 복잡해 지는 세상의 시스템에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더 많이 느낀다고 했다.
필경 우리도 그럴 것이다.
할머닌 한참 동안 그 자세로 눈을 감고 기도하셨다.
"쿵"
한 두번 비행기가 좌우로 요동치더니 이내 평온해 졌다.
김포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주님, 감사헙니다."
할머니는 기도를 멈추고 눈을 뜨시더니 덥썩 내 손을 잡으셨다.
"젊은 양반. 내가 시골서 김치를 한 박스 가꽜는디 말여, 택시 타는 디까정 좀 들어다 주실랑가?"하고 물으셨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영혼이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할머니신가?"
정말 해맑은 분이셨다.
'순수한 사람은 누구와도 금세 친해질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할머니, 택시 타는 데까지가 아니라 '서울시청'까지라도 제가 들어다 드릴테니 염려 마세요"
할머니의 박스를 찾아 나오는데 무게가 상당했다.
"할머니의 이 정성을 자식들이 잘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이 서울의 자식들은 바쁜가 보다.
자신의 승용차로 공항에 마중을 나올 법도 한데 여느 때처럼 그렇게 바쁘다를 외치며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물이나 직책 외에도 우리네 인생엔 너무나도 소중한 부분들이 많은데 말이다.
카트를 끌고 나오는데 갑자기 "장개는 갔는가?"하고 물으셨다.
"그럼요. 큰 애가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할머니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아그덜 겁나게 이뿌지라? 잘 키워야 허네. 원래 자슥들은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우는 뱁이지"
"예. 할머니"
택시 승강장에서 할머니를 먼저 보내드렸다.
그리고 난 지하철로 귀사했다.
순박한 시골 할머니를 보내드리면서 작별인사를 했지만 그 해맑은 웃음 뒤로 묻어나는 쓸쓸한 잔영이 계속 내 눈에 아른거렸다.
"누가 아픈지 한 번 물어나 볼 것을"
나는 아차 싶었다.
"무슨 급한 용무가 있길래 이렇게 황급하게 상경을 하시게 됐는지. 그렇게도 싫어 하시는 비행기까지 타시고"
그 주름 가득한 얼굴과 인자하신 미소 뒤로 간절하게 기도를 하실 수밖에 없었던 무슨 곡절이 있었을 테지.
할머니께서 까주신 사탕의 고소한 맛이 입안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던 그 따스한 체온이 까닭 모르게 나를 안타깝게 했다.
"부디 큰 일이 아니길 그리고 언제까지나 평안하시길 소망합니다"
나도 할머니를 위해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할머니, 항상 건강하세요. 삶에 대핸 따뜻함과 감사를 전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2002년 2월의 경험담이다.
그리고 약 십여 년 뒤에 그 당시에 적어두었던 짧은 메모를 발견했다.
가슴 속에서 반가움과 묵직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리하여 2011년 11월 29일 심야에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온기를 생각하며 글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