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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의 오늘날 설 자리. 信天함석헌
인생의 종교냐? 역사의 종교냐?
이것은 역사의 자리에서 하는 말이다.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이 ‘나와 너’라는 말을 하면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나와 것’으로 떨어져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나와 너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또 어쩔 수 없이 다시 너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라면, ‘나와 것’은 ‘나와 너’보다 못지않게 참일 것이다. ‘너’가 살았다면 ‘것’은 죽었다. 그러나 삶만이 참이고 죽음은 거짓인 것일까? 삶 없는 죽음, 죽음 없는 삶은 없다. 삶과 죽음은 생명의 안과 밖이다.
역사는 ‘나와 것’에서 나온다. 어떤 나도 또 한 번 죽어보지 않은 나 없고 또 한 번 부활해보지 않은 나 없다.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에 부활이 진리인 것이 아니라 부활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부활이라는 사실이 있기 전에 벌써 “내가 부활이다”했다. 또 한 번 산 나요 또 한 번 죽은 나기 때문에 역사는 있다. 나는 역사적 단면이요 ‘것’은 너의 역사적 단면이다. 가로 자르면 그렇지만 세로 쪼갠다면 나는 너의 저쪽이요 너는 나의 저쪽이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 그것이 역사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직도 ‘인생의 종교’라는 꿈속에 사는 사람 혹은 거울 속의 제 얼굴만을 보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인생의 종교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참 종교라면 잘못이다. 죽지 않는 인생이 어찌 있느냐? 죽고 사는 것이지. 그러면 종교는 또 ‘역사의 종교’ 아닌가? 그런 것을 인생의 종교만 믿고 있다면 그것은 꿈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울을 떠날 줄 모르고 들여다 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이 꿈도 꾸지만 꿈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지 깨지 못하면 그야말로 영원한 산 송장 아닌가? 거울도 보는 것이 사람이지만 거울만 보고 있으면 얼은 빠지지 않는가?
다 상대와 절대의 관계다. 절대가 타락해서 상대가 있는 것 아니다. 절대만이 참이고 상대는 거짓이 아니다. 절대가 먼저 있어서 거기서 상대가 나온 것 아니다. 절대⟷상대로 있는 것이 참이다. 역사 없는 인생 없고 인생 없는 역사 없다.
일제 시대에 별로 한 것도 없이 법에 끌려갔던 일이 있는데 그 조사하는 첫말이 놀라왔다. 왈, “너희놈들 인생의 종교를 믿고 있다면야 누가 잡아 오겠느냐? 종교라는 이름 아래 독립운동 하니 잡아왔지” 했다, 그래 대답하기 전 우선 나는 속으로 “그럼 나도 낙제는 면했나 보다” 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변론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아마 가깝다는 신앙의 친구들조차도 김교신, 송두용, 유달영 하는 여러분이 같이 갔으니 말이지, 나나 누구 하나만이 잡혀가서 그 말 들었다면 “과연 옳은 말이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론을 그만두고 청천백일 아래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대답하게 해봐! 민족을 온통 먹어버리자는 그 압박정치에서 선량한 종교로 인정받는 것이 그래 옳은 산 종교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일본 사람이 해야만 악하다 하고 다른 사람이 하면 악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며, 만일 마찬가지로 악이라 할진대 어찌 그때만 역사에서 의무를 다하려는 것이 옳고 이때는 아니라 할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 기독교가 싸워온 것을 크게 잘 한 것으로 고맙게 알면서도 나는『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쓸 때부터 우리에게 인생의 종교는 있다면 있지만 아무래도 역사의식이 깊지 못한 것을 부족으로 생각해서 지적하고 있었다. 만일 참 의무감 일으키는 역사의식이 있었다면 어찌 해방 후의 역사가 이 꼴이 됐을 수 있을까? 나는 해방을 “하늘에서 준 떡”이라 하는 사람이지만, 아무리 주기는 하늘에서 했다하더라도, 또 하늘에서 주었을수록, 그 뜻을 안다면 먹는 것은 제가 씹어 먹어 제 힘으로 소화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이후에 된 역사를 본다면 감히 누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잘했노라 할 수가 있는가? 변명할 수 없는 실패 아닌가? 그럼 실패라면 그 책임 누가 져야 할까? 물론 민족 전체가 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역사를 말할 때는 그 전체를 대표해서 구체적으로 죄를 지는 개인 또는 단체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민족 전체에 돌리고 구체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그것은 하나마나한 판단이요 속이는 일이다. 전쟁을 한 것은 각 민족들이지만 그 죄악의 값을 몸으로 질 전쟁범을 눈물로 골라내야 했다. 그것이 역사 짓는 민족의 길이다.
그럼 우리 해방 후 역사의 실패는, 국제관계인 것은 국제관계에 돌리고라도, 우리 할 부분에서 말할 때 책임질 자가 누군가? 누가 봐도 기독교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6년간 민족정신을 주로 버티어 온 것이 기독교인이요 3.1운동의 등뼈 노릇을 한 것이 기독교인일진대, 그것이 자타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일진대, 2차 대전 이후 민족의 분열을 막는 책임도 기독교에 있었다 할 것이다. 선수는 무슨 방법으로 됐든 간에 민족 전체가 뽑아 내세운 것이다. 그때의 새 역사의 기수는 기독교였다. 그들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역사적 현실이 그러했다.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밖으로는 공산주의에, 안으로는 봉건적인 부조리에 있었던 것을 극복하고 민족의 운명을 건질 힘은 그 정신으로나, 도덕으로나, 조직으로나, 기독교를 내놓고 다른 데 구할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의 가장 미워한 것이 기독교였다는 사실, 오늘 북한에 기독교는 거의 말살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중명하고 있지 않는가? 미워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가장 두려운 적수였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그 수로 보나 역사적 지위로 보나 공산주의보다 절대로 우세했던 기독교가 왜 하나님과 역사가 짊어지워준 그 사명, 그 책임을 다 못했던가? 한마디로 역사가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놈의 천당이 나라를 망쳤다. 감히 못할 말인 줄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이 말 하다가 스데반처럼 돌탕에 맞아죽어도 좋다. 별을 바라다가 도랑에 빠졌다. 도랑이나 되면 좋게, 발목을 다치는 도랑 정도가 아니라, 빠진 다음에는 나올 수가 없는 수렁이다.
절대로 하늘나라가 없다는 말 아니요, 하늘나라 찾는 것이 잘못이란 말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하늘나라 바라는 일 아니라는 말이다. 하늘이 허공에, 죽은 후에, 있는 줄 아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주의 기도에 보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찾는 것으로는 기도가 다 되지 않는다. 나라가 임하라 했지. 임한다니 공중에서 떨어지는 감 먹으려듯 입만 벌리고 있으라는 것 아니었다.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했지. 이루어진다니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으란 말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양식 달라고 했다. 일하겠다는 말이다. 단번에 무한량을 주지 않고 날마다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날마다 일해 벌어먹는 것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담 구절 보면 알지 않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핑계의 여지가 없다. 사회 없고 공동 역사 건설의 책임 없는데 우리가 어디 있으며 잘못은 무슨 잘못이며, 용서는 무슨 용서인가?
허공에 있는 것이 햇빛이 아니요 땅에 내려와야 빛이요 열이듯이, 하늘은 무한 막막한 허공에 있지 않고 땅에 와 있다. 땅 중의 땅, 흙 중의 흙이 어디냐? 네 가슴이요 내 가슴 아닌가? 하늘나라 너희 안에(혹은 속에, 혹은 너희 사이에) 있다는 말은 왜 그렇게 쑥 빼놓는가? 저도 모르게 책임지기 싫어서, 그저 노는 것이 좋아서 한 생각 아닐까? 그것이 천당 아닐까?
1956년 1월『사상계』에다가「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글을 썼던 것은 이런 심정에서였다. 그때까지 나는 세상을 향해 감히 글을 쓸 용기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잘 되지 못한 글인데도, 그것이 당시에 크게 파문을 일으켰다. 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지적했던 사실이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가 호랑이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능히 작대기로 호랑이를 쫓을 수 있었던 것에 비할 수 있다. 생각 있는 이들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며 그 글을 다시 본다면 그때에 지적했던 것을 충분치는 못하지만 거짓이 아니었던 것을 인정해 줄 것이다.
1971년에 와서 나는 또 한번「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하는 글을 우리『씨의 소리』에다 썼던 일이 있다. 요점을 간단히 말한다면 첫번 글을 쓴지 십오륙 년이 되어 와도 별로 힘 있는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깨우치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이제 우리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날까지의 교회 역사를 한번 돌이켜보기로 한다.
200년 전 가톨릭이 들어왔을 때 심한 박해를 받았고 대원군 때에 와서도 끔찍한 학살을 당했다. 그런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이 곧 종교는 결코 인생의 종교만일 수는 없다는, 종교의 목적은 결코 개인적인 안심에만 있지 않다는, 힘 있는 증거가 아닐까? 처음 들어올 때는 귀족들이 소외감에 못 견디어, 정치적으로는 못하는 권력 싸움을 학문에서 해보려는 생각에서 한 것이었지만, 일단 들어온 다음에는 곧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서민계급으로 번져나갔다. 학살도 그 때문에 됐다고 해석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일로는 그런데, 그 교도 자신들에게는 아직 역사적 자각이 생기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의 빛나는 순교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후에는 아주 미약한 상태에 빠졌다.
개신교는 그보다 약 한 세기 떨어져 들어왔는데 이것은 그 시초에서부터 서민적이었다. 당시에 양반계급은 그래도 제 종교 제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할 수 있지만 서민계급은 참 의미에서 그들의 종교는 없었다고 하여야 옳을 것이다. 개신교가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번져나간 것은 그 의지할 곳 없고 호소할 길 없는 소외된 서민들에게 그 환란을 건져 주고 그 억울을 갚아주는 살아 있는 하나님과 그의 새 도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때는 서구에서 민족주의가 한창 성하던 때요, 온갖 미신을 벗겨주어 정신을 자유하게 해주는 과학이 새 복음처럼 전파 되었던 때다. 그렇기 때문에 교도는 곧 신문명의 선봉이요 민족정신의 정예분자였다. 그러므로 인생의 위안인 동시에 또 크게 발달한 역사과 활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복자인 일본이 그것을 그냥 둘리 없었다. 그래 일어난 것이 그 악독한 데서 비길 것이 없는 소위 105인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지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결코 수그러지지 않았다.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은 그때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이 아직 동등한 강국이 되지 못한 관계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 경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선교에 픽 도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선교사의 보호가 있다 하더라도 신도 자체가 용감한 믿음이 없었다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용감한 믿음은 결코 죽어서 천당 간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고 새 역사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어린 사절이나마 체험했던 것이므로 확신을 가지고 증언할 수 있다. 평안도 상놈들에게 전에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3.1운동은 그래서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히 갑자기 된 운동이 아니었다. 십 년 두고 기도한 결과로 된 것이다. 불교나 천도교는 직접은 아니지만 역시 기독교의 이 신앙에, 간접으로 자극을 받아서 준비가 돼 있었다 하여야 옳다. 마치 죽도록 일하여 가산을 모은 사람의 자손이 노동의 가치와 행복을 모르는 모양으로 후일 일이다 될 대로 낙착이 되어, 식민지 살림이 쉽게 하나님의 섭리로만 보이는 전통적인 순수복음주의 신앙에서 보는 사람 눈에는 3.1운동은 신앙적이 아니었다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념적인, 교리적인 신앙의 폐단에 잡혀버린 생각이요 역사가 뭔지 모르는 생각이다. 혁명을 개인적으로 뜯어보면 망나니의 장난이 많지만 그 때문에 혁명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자부해도 그것은 초학훈장의 도덕 밖에 못된다.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끌어내야 합니까 하는 식이다. 역사는 그런 순신앙을 소라처럼 두고 커다란 물결을 쳐 들어오고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신앙의 경화증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박해 때문이 아니고 도리어 물질적 행복 때문이다. 큰 행복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3.1운동 이후 일본이 문화정책을 쓰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의 회유책을 쓰자, 자본주의 경제가 차차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민족 안에 계급적 대립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돈과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민족을 버리고도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법이요 설혹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타협을 하고야 만다. 참 종교, 즉 스스로 혼으로써 체험한 종교를 제해 놓고는, 그 법칙에다 복종하고야 마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3.1운동에 그렇게 강했던 민족정신이 그 이후 맥없이 풀어진 것도, 기도만 하면 곧 눈물로 민족의 고난을 호소하고 해외에 망명한 동포를 위해 애소하고 하던 사람들 입에서 어느덧 그것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도, 다 이 물질적 안락과 바꾸어서 된 일이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이것을 들어 기독교를 비난할 때마다 변명할 용기를 차마 가지지 못했다.
그런 때에 온 시련이 신사참배 문제였다. 소수의 강한 믿음을 가졌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하는 변명을 내세우며 다 머리를 숙였다. 나타나고 아니 나타나고 간에 양심이 그렇게 되고 정신이 살아 있는 법은 없다. 그리고 나중에 교단폐합 문제가 나왔을 때는 심지어『성경』까지 고치기도 사양하지 않고, 개신교의 생명인 『성경』까지도, 총독부의 지시대로 개조하였다.
그러는 때에 해방이 왔다. 그랬으니, 어디서 참 힘과 지혜가 나올 수 있었을까? 우리 일이지만 우리 일일수록 무자비하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 개인으로는 순교자도 있으나 교회는 결코 순교한 것이 되지 못한다. 더 정당한 비판은 후일의 투철한 역사가를 기다릴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내 심정으로는 그 밖에 할 도리가 없다. 나는 결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분열을 막을 수 없었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싶지 않다. 동양에서는 제일 강하노라 자부하는 교회가 왜 그것을 못했을까? 기쁜 줄이야 몰랐을 리가 없지만 새 역사 창조의 능력이 없었다. 몸은 없는 것 아닌데 힘을 내지 못했다. 양은 없지 않은데 목자가 없었단 말이다. 지도자들이 영(靈)의 감동을 못 받았다. 양심이 낙인(格印)을 찍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 동안 회개와 간구와 명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이상한가 보라. 이북에서 죽다가 남아서 남으로 왔는데, 기독교라면 개신교에 관한 한 이북인데, 그 이북 기독교가 피란하여 와서 이남에는 비로소 교회가 일어나게 됐는데, 그 기독교인이 너도나도 정치에 나서려고 했다. 나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정치참여는 왜 하느냐?” 하는 그들이 군정시대, 이정권 시대의 자기네를 좀 생각해봤으면 한다. 그때에 정당했다면 지금만 왜 아니라 하며, 지금에 아니라 할 진대 그때는 왜 그리 열심이었는가? 정말 신앙 때문인가, 죽기가 무서워서인가?
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한일국교 문제가 나왔을 때, 소위 보수파 자유파의 대립이 있었던가? 다 같이 반대하지 않았는가? 그럼 그것은 정치참여가 아니었던가? 그것이 만일 정치참여가 아니라면 지금에 사회 정의 실현을 부르짖는 것은 왜 정치참여인가? 왜 비신앙적 행동인가?
나는 그때 한일관계 정책에 반대했던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잘못은 그 후부터다. 언제부터인가? 월남참전 문제부터다. 그때부터 교회지도자들의 태도가 갈리게 됐다. 극히 소수가 거기 반대를 했고 대다수는 애매했다. 내가 아는 한 분명히 찬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분명히 반대도 아니 했다. 그런 현상은 어떤 위험이 있고 없는 것을 따라 달리 나타나게 된다. 속 힘이 빠진 것은 말 바꾸고 성 갈고『성경』개편하고 하던 때에 이미 된 것인데, 군정은 미군 군정이요 이승만은 기독교니 아무 위험은 있을 리 없고 좋은 일만 있을 듯 하므로 너도나도 나선 것이고, 한일회담 반대는 전 민족에 반일 감정이 아직 있는 한, 또 외교방식이 버젓치 못한 이상 민족 대부분이 지지하지 않을 줄 아니, 반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월남참전 문제가 일어나는 동안에 교회에 변동이 일어났다. 6.25 때부터 원조, 구조하며 흘러들던 종교불(弗)이라는 것이 그 주요 원인이 된다. 하나님과 맘몬을 겸해 섬기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건만 기독교의 탈을 쓴 맘몬은 환영해도 좋은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전에 천당이 화가 됐던 것처럼 이번에는 달러가 화근이 됐다. 구호를 구호대로 했다면 맘몬의 사자까지는 아니 됐겠는데 그 매력에 혹해 그것을 자본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리하여서 돈이 생기고 본즉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애매해진 것이었다. 만일 오늘같이 될 줄 알았다면 적어도 예수의 제자인 담에는 그 해답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 분명하게 못한 것은 양심이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어서 잘못을 하려 할 때까지는 양심의 가책이 있어도, 일단 어쩔 수 없이 결과가 나타나고 보면 그담은 자기 한일을 정당화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기독교 안에 시국문제에 대하여 대립되는 두 태도가 나타나게 된 것은 이렇게 하여서 된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오늘날 선 자리를 말하면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4.19운동이다. 우리나라 모든 자유운동의 원천이 기독교에 있는데, 4.19만은, 3.1, 4.19라고 언제나 나란히 세워 이야기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관계가 없다. 물론 깊이 볼 때는 3.1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영향 없이 결코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직접으로는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로서는 중대한 반성거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한편으로 이승만이 기독신자였고, 그 정권은 거의 기독교정권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기독교인이 많이 참여해 있었고 이정권의 부패에 기독교인이 많이 관계되어 있으므로 그 타도운동이 기독교에서 나올 수 없었다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그 전부도, 또 가장 큰 원인도 아니었다. 기독교인 중에는 이승만이나 그 협동자들을 반드시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보다도 세상이 다 알듯이 4.19 운동의 한 원천은『사상계』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의 일단에 있었다. 그런데『사상계』는 그 발행인인 장준하나 그 외에 필자 중에 기독교인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결코 기독교 주의를 표방하는 잡지는 아니었다. 도리어 비기독교적이었기 때문에 광범위의 독자를 가졌다 할 수 있다. 여기 한국기독교의 큰 결함이 있다. 나는 그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전문 전도자로서 훌륭한 사람은 많이 있어도 기독교 인물은 없다는 말을 해오지만 바로 그것이다. 역사의식 부족하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겠지만, 그것을 또 다른 말로 한다면 기독교가 생활화 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열심은 열심인데, 너무 냄새나는 신앙이란 말이다. 속담에 장 냄새나는 장은 좋은 장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종교 냄새나는 종교, 즉 상식적이 못되는 종교는 건전한 종교가 못된다. 상식적이 못된다는 것은 고루한, 이른바 고린내 나는 신앙이란 말이다. 그것은 굳어진 종교, 교리적인 종교, 틀에 박힌 종교다. 그런 종교는 일반 사회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 그러므로 사회를 건지지 못한다. 교회당 안에서는 열심이지만 일단 넓은 세상에 나오면 무력하다. 이것은 본래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이 대체로 자기네 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파 사람들이었다는 데서 온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래서 좋은 점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목적이 나만 아니라 세상을 건지는 데 있을진대 소금이요, 등불이요, 산위의 성일진대 반발을 일으킬리만큼 틀에 박힌 것만 가지고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까지 그 껍질을 벗지 못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강점은 감정에 있지 그 깊은 이해에 있지 않다. 그래서 변하는 시대에 적응을 못한다. 4.19 운동에 발언권이 없는 것은 이렇게 해서 된 것이었다. 만일 이대로만 나갔다면 내가 1956년에 경고했던 대로 고혈압 증상으로 졸도하기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한국기독교의 선 자리
역사는 심판에 의하여 구원되는 법이다. 한 탯집에서 자랄 때는 누가 에서요 누가 야곱인 것을 분별할 수 없지만 일단 태속에서 나와서 제 살림을 하게 되면 차차 하나는 에서로 돼가고 하나는 야곱으로 특징이 나타나, 하나에게서는 역사의 상속권이 떨어져버리고 하나에게는 이스라엘의 칭호가 주어지게 된다. 늘 이상하게도 앞선 자가 뒤지고 뒤섰던 자가 앞서게 된다. 금새 먹기에는 고감이 제일이고 뜻을 지키는 것은 늘 밑지는 일같이만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의 상속권은 소수의 신신학(新神學)파에 떨어지게 되었다.
5.16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기독교는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결코 찬성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부는 친불교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한일국교 문제를 거쳐 월남파병을 결심했을 때 현정부는 그 나갈 노선을 아주 결정했고 따라서 종교에 대해서도 그 태도 결정을 요구하게 됐다. 그럴 때 몸집 크고 힘있는 에서는 팥죽을 취했고 힘은 없으면서도 영원의 상속권을 꿈꾸는 야곱은 빈들로 탈출 길을 취하게 됐다. 신선한 사나이기는 하나 깊은 생각 없는 에서는 자연적인 제 지위를 믿어서 역사적 결단 내리는 일을 그리 신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가혹한 것이다. 자연적 지위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뜻에 대한 영악한 믿음 없이는 못견디어 난다.
역사에서 매양 소외당하는 소수파가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신신학, 구신학의 대립은 이미 일제 때에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력으로 볼 때 그것은 에서 대 야곱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야곱이 약하기 때문에 민첩했고 영악했듯이 신신학파도 역시 소수자이기 때문에 역사의 추세에 대해 민첩했다. 그들은 전쟁 후 새 시대의 한 징후로 일어나는 반항문학, 산업선교, 토착화문제, 이런데 등한히 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 해방신학을 소리높이 외치고 있다. 그런데 다수파는 믿는 데가 있었으므로 그런 추세에 그리 주의하지 않았고 정통의 의자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모르기는 하지만 이제 그 호인이었던 에서가 자기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슬피 우는 날이 오고, 엉덩뼈는 좀 위골이 됐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싸워 이긴 야곱이 권위를 가지고 나타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 한국기독교의 선 자리는 정통파, 소수파, 전통적인 명분파, 역사적 고지 점령의 자부에, 서로 엇갈리는 생각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회합의 장소로 다가들고 있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와 같다. 서로 용서를 하고 이해하고 화합할 것인가? 싸우고 원수 갚고, 분풀이하고 헤어질 것인가? 어느 의미로는 오늘 이스라엘·아랍의 관계는 아직도 그 싸움의 계속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그것은 사람의 사사 마음에서 나오는 그릇된 생각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데 이르자는 것이 싸움의 이유요 목적이다. 하나님의 눈에는 야곱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에서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올라가는 생명의 운동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로서 이 시기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어떻게 하여서 기독교가 다시 역사의 무대에 정면으로 다시 나오게 됐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4.19 이래 십여 년을 땅 속으로 스며들어갔던 흐름이 다시 큰 울음소리와 함께 표면으로 나온 것이다. “매년 연중행사같이 한다”는 비웃음을 듣는 학생 데모에 기독교의 이름이 정식으로 오르게 된 것이 민청 사건에서요, 그로 인해 생긴 것이 목요기도회요, 그 결과로 뜻밖에 얻어진 것이 가톨릭 개신교의 연합의 시작이요, 그 연합운동을 하다가 누구도 뜻하지 못했던 사건으로 터져 나온 것이 3.1 민주구국선언인데, 이제 와 보면 놀랍게도 높이 세계의 눈이 모이는 무대 위에서 놀고 있는 우리가 되었다. 거기서는 지금 해방신학에서 한 걸음을 또 나가 기쁨의 신학, 사건의 신학 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극을 하는 자신들이 보다 큰 엄청난 극을 보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제 선 자리를 아는가, 모르는가?
하나 되는 높은 자리
끝으로 이 연극을 놀면서 또 구경하면서 생각을 하는 동안에 얻어진 말을 하나 끝맺음삼아 하고자 한다. 교회라는 모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을 설명하는 데는 맨 첨의 교회를 보는 것이 가장 첩경일 것이다.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모인 열두 사람의 모임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릴 직전까지 전수히 마음을 쓰신 것은 오직 이것이었다. 그것은 유다의 배신을 제자들에게 예고할 때의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그것을 하나의 한 생명체로 만들자는 생각이다. 삼 년 동안 데리고 다니는 동안에 그것이 어느 정도 됐음을 알았다. 그래서 아주 마지막 결심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각오는 다 되어 있지만 그 새 생명체가 스스로 살아서 자랄 수 있다는 확신이 오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 예수께서 자기는 죽을 권세도 있고 살 권세도 있으므로 자진해서 버리는 것이지 결코 뺏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자기 뒤에 두고 가는 그 생명체에 확신이 가기 전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보통 인간처럼 힘껏 하다 아니 되면 “할 수 없지” 하는 식의 패배주의를 가질 수 있는 이는 아니다. 그러나 한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채 되지 못한 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예수님의 안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약점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안심한 것은 아직 완전히 자란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이기어 자기를 완성해갈 수 있는 생명의 씨는 분명히 들어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 됨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르지만 그 다른 것들이 하나가 되어 보다 높은 새 생명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혜사라 성령이라 하셨고 요한 1서에는 코이노니아라고 했다. 그 코이노니아를 설명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나는 화(和)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한다. 화음(和音)이라 할 때의 화다. 서로 다른 음들이지만 그것이 하나로 되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화(和) 곧 하모니다.
이 물질적인 우주에는 이미 그 화가 되어 있다. 테이야르가 말하는 것같이 이 우주의 신비스런 원리는 다(多)면서도 일(一)을 이루어가지고 있는 점이다. 노자·장자는 이것을 토대로 하는 사상이다. 그것을 도(道) 라고 했는데 노자가 도충이용지(道沖而用之)라 하는 때의 이 충(沖)은 우주적인 큰 하모니를 말하는 것이었다. 장자는 부동동지지위대(不同同之之謂大)라, 같지 않은 것을 같이 하는 것이 큰 것이라 했고, 공자도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요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 했다. 참 하나 됨은 일색(一色)이 되는 것 아니라 서로 각각 무한히 다르면서도 하나 되는 것이다. 성령은 화(和)하는 영(靈)이지 동(同)하는 획일주의의 영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쳐주신 것은 그런 자연적인 화만이 아니라 그 자연을 자료로 그 위에 혹은 그 속에 보다 높은 정신적인 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 뜻에서 볼 때 열둘의 모임은 의미가 큰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 직전에 깨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서 너 할 것을 해라.” 하여 유다를 내보낸 다음 그 깨어진 하나 됨을 다시 회복해 놓고는 “이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좋다.” “내가 이제는 너희를 친구라 한다” 하시고는 십자가로 나가신 것이었다.
서로 다른 것이 나타나는 것은 불행하지만 또 행이다. 자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보다 높은 생명이 아니고는 아니 된다. 예수로 인해 나타나신 것은 만물을 하나로 만드는 보다 높은 원리다. 거기 큰 즐거움이 있다.
보수파는 보수파의 할 말이 있고, 해방파는 해방파의 또 할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 승리를 고집하고 보다 높은데 이르는 화(和)를 이루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이 분별에 분별, 싸움에 싸움, 고난에 고난으로 시련을 당하는 이 나라, 이 기독교의 역사의 의미는 장차 오는 세계의 구원을 위해 화의 원리를 닦는데 있지 않을까? 보수하지만 고집으로는 말라! 싸우지만 미워함으로는 말라! 인생의 종교지만 역사의 구원 없이는 개인 구원 없다. 역사의 종교지만 덕 없이는 진보 없다.
씨알의소리 1977년 1월 60호
저작집30; 16-209
전집20;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