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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iah 5: 20Woe unto them that call evil good, and good evil; that put darkness for light, and light for darkness; that put bitter for sweet, and sweet for bitter! 악을 선하다, 선을 악아라 하고 어둠을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고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통영의 딸 신숙자, 그녀의 딸 오혜원, 오규원, 녹취록[ "(신숙자)우리가 세어진지 1520일이 되는 오늘, 저번에 건강하지 못하다는 소긱을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한지요? 언제 마나게 될지 기약할 수 없고 또 다시 당신에게 소식을 전할 기오히가 있을까? 짐작할 수 없으니 무슨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아빠를 그리면서 여전히 생활하고 있어요. (큰딸 오혜원) 아빠! 나는 혜원이에요. 며칠 전에 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즐겁게 보내는 꿈을 꾸었어요. 조국에도 훌륭한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 사랑이 그립습니다.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내어 부르니 울음이 나옵니다. (작은 딸 우규원) 아빠! 나는 규원이에요.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그리고 12살이 되었어요. 보고싶어요 아빠. 아버지는 알지 않아요. 내가 빨리커야 어머니 힘도 덜어드리는데 안타까워요. 그러나 이제는 물도 잘 긷고 나무도 잘 듭니다. 보고 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1991년 1월 11일], 신숙자의 남편 오길남은 사진을 보며 녹취록을 말을 꺼낸다. 그의 눈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 아픔, 고통으로 깊이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오길남) [ "절망하면서....절망속에서 희망을 (생각)하는 거죠. 절망적인 상태죠.. 한편으로는 이제는 죽어버리고 어디로 살져 버린 건 아닌가....]
오길남 박사 1942년 경북 의성군 출생, 69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85년 독일 유학중 포섭 입북 (국국의 쇠) 대남방송요원 활동, 86년 11월 북한 탈출, 아내 신숙자 42년생 경남통영 출생, 장녀 오혜원(76년 출생), 차녀 오규원 (78년 출생) 87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강제 구금(탈북자 증언) 오길남씨는 자녀들의 사진을 보며 가슴이 저미고, 고통스럽고 꿈도 꾸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는 세월을 살았다. (오길남) "1986년 11월 10일 가족들과 헤어지던 날 아침 아직도 어둑했어요. 헤원이가 아빠보고 '(독일어) huckepack' 좀 해달라고.. 업어달라고 그래요. 우리 집 사람은 손으로 울고 나도 마음속에 가슴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있었어요." 특히 그는 자신을 북한에서 먼저 내보내 준 아내의 마지막 말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신숙자) " 당신은 이 (북한) 체제에서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애들은 이제 어리다. 7살, 10살 이어니까... 이런 (북한) 체제의 어려움을 겪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 그렇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나가라' " 그는 가족을 북에 두고 혼자 탈출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힘들어 했다. (오길남) "그 꿈 많고 예쁜 아기들을 데리고 함께 북행했던 것은 내 자살행위이기도 하거니와 내 아내와 딸들을... 결국... 죽여버린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니겠느냐.... 그래서 항상 그런 가슴 아픈 거... 가책 속에서... 양심의 가책속에서....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혜원아, 규원아, 그리고 혜원이 엄마 죽지 말고 꼭 살아있어 주오...
신숙자와 오길남의 만남 : 신숙자씨는 통영 중하교를 졸업하고 마산 간호학교를 졸업한후 독일 간호사로 갔다. 거기서 오길남이란 서울대 독문과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오길남은 독일에서 반독체제 운동을 하고 독일에 망명한 상태였고 반정부 인사이고 친북인사인 윤이상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신숙자씨가 몸이 아팠다. 1985년 오길남은 북한 공작원들의 북한에서 교수를 시켜주겠다, 아내의 병을 고쳐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설마 괜찮겠지 생각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북한 행을 선택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 모든 것이 거짓말임을 깨달았다. 교수는 커녕 대남 간첩활동을 하기 위한 간첩훈련을 받게 된다. 북한은 서울대 출신, 박사과정에 있었던 자임을 이용 대남 간첩활동을 강제로 시킨것이다. 오길남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은 1. 이 지경인 줄 몰랐다. 내 눈에 비친 북한은 온통 김일성 주체 사상 일색이었다. 경제이론이나 과학적 사고 방식이 먹힐리 없는 나라다. 2. 북한은 한마디로 사이비종교 광신적 집단이다. 자기는 위장된 구국의 소리 앵무새 방송요원이 강제로 되었고, 대남공작원이 되어 북한은 좋은 곳이니까 함께 일하자 라고 말할수 밖에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계속해야 하니 엄청난 수치, 수모를 겪는 고통의 날을 보냈다고 증언했다.
헤어짐 : 1986년 11월 오길남은 또 다른 유학생 부부를 포섭을 하기 위해 독일에 파송을 받게 되었다. 이때 부인 신숙자씨는 남편의 고통을 알기에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먼저 나가서 우리 가족들을 빼주세요. 만일 그것이 실패하면 교통사고로 우리 식구들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혜원이와 규원이는 아직 어리니까 이 사회에 적응할 거예요. 당신이 도망친다고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만일 당신이 내 말을 흘려들어 공작원이 되어 다른 선량한 사람을 이곳으로 끌어 들인다면 우리는 정말 구제 받을 수 없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명심하세요. 다시 한번 말할께요. 들어오지 마세요. 우리는 죽어도 좋으니 더럽게 살지 마세요. 이럴려고 박사가 된게 아니 잖아요 하며 호소했다. 당신이 남편으로 속아서 우리를 이곳으로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용서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 받을 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순한 사람들을 음므로 희생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요.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떳떳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야 해요. 올가미에 씌여서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는 한이 없어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 우리의 몸은 이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속에 있어요. 만일 청순한 젊은이 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곳으로 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받는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예요. 범죄공모에 가담해서는 안돼요.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오길남과 윤이상 : 오길남은 독일에 와서 윤이상에게 가족의 구출을 위해 여러번 찾아갔다. 왜냐하면 오길남 박사가 북으로 가게 된 것은 단순히 북한 요원의 감언이설뿐만 아니라 특별한 인사의 설득이 주요했는데 그 자가 바로 재독 음악가 윤이상이기 때문이다. 윤이상은 이를 부인하지만 그의 김일성찬양은 도를 넘었다. 김일성이가 사망하자 윤이상은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하여 영령앞에 심심한 애도아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 길이 명복을 빕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도이칠란드 베를린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일) 윤이상이는 김일성이와 여러번 친하게 지낸 관계이기 때문에 오길남은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사실 윤이상은 내 집 드나들듯이 북한을 왕래했고 김일성과 담화 / 사진을 찍고, 통일을 위해 손을 잡은 자였기 때문에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이상이는 오길남에게 당신은 미제 간첩이다. 미제 고용간첩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평양으로 돌아가라고 하며 오길남의 요청을 거절했다. 오길남은 고민 끝에 아내 부탁처럼 북한에 돌아가지 않았고 그의 가족들은 남편이 없어진지 3개월 만에 요덕 15호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갇히게 되었다. 혜원이 11살, 규원이 9살 때 일이다. 아이들이 뭔 죄가 있어 정치 수용소냐? 이것이 북한의 인권 실상이다. [탈북자 증언] 요덕 수용소는 산으로 둘러쌓인 제일 살기 힘든 지역이며 여기서 탈출은 불가능하다. 5미터의 구덩이가 있어 탈출하다 빠지면 뾰족한 것에 찔려 죽고 그것을 넘더라도 3300볼트 전기가 흐른는 전기 울타리가 있어 감전되면 즉사하는 구조다. 신숙자씨는 거기서 자살을 두번 시도하여 특별 감시대상이 되었다. 1994년 탈출한 회령 22호 정치범 수용소 경비대 하사 출신인 탈북자 안명철씨의 자서전 [그들이 울고있다]에 보면 남한출신 간호사 신숙자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그날 새벽녘에 독신자 숙소 20미터 거리에 있는 가족 세대 숙소에서 자지러지는 여자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간밤에 목놓아 울던 아주머니의 울음 소리와는 뭔가 다른 절박한 울음 소리였다. 나는그 곳으로 달려갔다.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방문을 열어 젖히자 이불보를 말아 만든 끈으로 신숙자 아주머니가 목을 매달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어린 두 딸이 어머니의 다리를 잡고 어쩔 줄 몰라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재 빨리 끈을 풀고 아주머니를 내렸다. 다행히 신 아주머니는 숨이 끊어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중략" 신 아주머니는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시 울어 눈이 퉁퉁부었다. 중략... "사람살려요"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신아주머니의 집이었다. 신 아주머니를 지키던 여자가 얼굴이 새파래져 소리치고 있었다. 문은 잠겨 있어 부숴야 했다. 문을 열자 방안은 연기와 불로 가득차 있었다. 아주머니가 두 딸과 함께 불에 타죽겠다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불붙은 가지를 정신없이 밖으로 끌어내고 세 모녀를 끌어내려하자 신 아주머니는 안나가겠다고 몸부림치셨다. 놓아 주세요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나아요..머리카락과 얼굴, 손은 다 그을리고 딸들은 거의 실신상태로 엄마를 부르며 슬피 울었다... 중략... 수용소에서 아주머니만큼 사람다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숙자 구명운동이 벌어지게 되는데 경상대학교에서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가 열리고 신숙자 모녀 사진이 전시되었다. 통영 현대교회 방수열 목사가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을 벌였으나 윤이상은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한 운동이 유엔까지 알려지게 되자 북한에서는 2012년 에 신숙자의 사망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딸들은 평양인근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알려져있다.
통영의 아들 간첩 윤이상(1917~1995년)이란 인물은 경남 산청 출생으로 통영군 통영면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성장했다. 오사카 음악대학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1937년 통영교사/ 1948년 통영여자 고등학교 음악교사 / 대학에서 음악강사를 하다가 1957년 베를린에 가서 1964년 서 베를린에 정착했다. 그를 생각하면 동백림 간첩사건이 떠오른다. 독백림이란 동 베를린을 말한다. 1967년 독일 등 유럽에 거주하는 유학생 문화예술인들이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 하면서 대한민국을 적대하는 일을 해서 대한민국이 간첩단을 잡아들여 처벌한 사건을 말한다.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윤이상은 체포가 되고 서울로 송환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2년뒤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사면 석방을 해준다. 그 이유는 간호사, 광부를 파견하는등 독일로부터 경제 지원을 받아야 했고 서독의 음악가들이 석방운동을 전개한 결과이다. 그후 윤이상은 1971년 서독으로 귀화한다(법적으로 한국 사람이 아닌 독일 사람이 된것이다). 윤이상은 독일 국적자로 북한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되었고 독일 하노버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까지 지냈다. 1990년에는 평양 범민족 통일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1995년에 사망했다. 윤이상은 정치적 탄압이라고 강변했지만 1976년 12월 대법원에서는 윤이상에게 무기징역을 선고 했다. 북한을 찬양 고무 지지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북한에 보내는 반국가단체 활동을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독일은 아무리 자못했지만 독일국민을 강제 송환한대에 대해 한국 정부에 불만을 표했다. 윤이상은 1987년 10월 김일성 옆에 앉아 대담을 나눌 정도의 종북인사다. 부부가 김일성과 기념 사진 촬영도 했다. 김일성이는 윤이상의 손을 함께 들어주며 치켜주기도 했다. 윤이상 음악회를 38회 이상 개최했다. 북한은 95년 그가 죽었는데도 계속음악회를 열어주었다. 윤이상은 김일성을 북한은 윤이상이를 찬양했다. [북한:김일성 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책참조] 윤이상은 친 김일성주의자 / 친북주의자이며 천재적인 음악가로 알려져 있고 1988년 독일로부터 대공로 훈장을 받았으나 북한의 정치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북한의 문화공작원(국가정보원)이다. 한편, 문재인은 윤이상을 찬양 받을 존재로 부각시켰고 처 김정숙의 손에 동백나무를 들려 독일에 보내 이식시키며 예의를 표했고 2018년 베를린 공원묘지에 묻힌 윤이상 유해와 동백나무를 다시 한국으로 이송해 통영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통영의 아들 오길남은 독일에서 통영으로 왔지만 통영의 딸은 북한에 묻혀있다. 이장한 윤이상의 묘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써있는데 이는 어느곳 어느 자리에 있어도 탐욕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함을 간직하고 있을 뿐아니라 맑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산다는 말로 연꽃을 의미한다. 문제인은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숭배하고 기념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문제인의 사상은 간첩 신영복을 존경하는 철학자라 말하지 않나 윤이상을 숭배하지 않나 종북 김일성 주의자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윤이상이 천재 음악가라 말하지만 매국노 이완용은 조선시대 추사 김정호처럼 글잘쓰는 3사람안에 들어가는 인물이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그를 숭배하거나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침을 밷는다. 그런데 문재인은 왜 대한민국을 적대시한 윤이상이를 높이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문재인은 제주 4.3사건 기념식에서 남노당의 무장 폭동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던 제주 4.3사건에 대해 말하길 좋은 세상을 만들기위해 먼저 꿈꿨다는 이유로 처참히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했다 말했다. 그렇다면 문재인 그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 말은 바로하자. 남노당의 꿈은 공산국가였다. 제주도민은 거기에 희생되고 그들을 진압하려던 군인에게도 피해를 입은 것이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다.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대한민국을 건국해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애를 매지 말고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들고 온전한 자유통일을 이루어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거룩한 제사장 국가가 될 것이다. 이를 막는 자는 그 누구도 개박살 나리라.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DiUZ4nJKI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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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7Nzc9sK7D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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