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군지> 이사異事에 “조간송 사우의 자미화”란 기록이 있다, ―趙澗松先生祠宇內有紫微花一樹 本先生手植…… 조간송 선생님의 사우내에 자미화(목백일홍) 한 나무가 있으니 이는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다. 여러 대로 경험한 바 그 종가宗家의 운이 쇠한즉 그 나무가 말라 죽어서 몇 해고 원줄기와 가지와 잎이 없어지고 또 몇 년 후 그 집안 운이 돌아온즉 그 한쪽에 눈이 트고 혹은 중심에 눈이 나와 옛날처럼 순이 무성하게 자라나더라고 한다.(창녕군지, 사화·전설)
망우정을 여현정이라 개칭하며 기문을 쓴 대학자가 바로 도사면(남지읍 옛 이름) 용산에 살았던 간송 조임도澗松 趙任道(1585~1664)로 <축산군지>의 이사는 선생이 남긴 큰 족적을 살필 수 있게 한다. 함안 검암에서 태어난 간송은 17세인 1601년에는 인동으로 여헌 장현광을 뵙고서 스승으로 모시고 학업을 닦았다. 1604년(선조 37) 20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다. 칠원 장춘사에서 공부하던 22세 때인 1607년(선조 40) 이른 봄에 한강 선생이 여헌 장현광과 망우정에 와서 하룻밤을 지내고 망우당 곽재우, 문암 신초 등과 함께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선유를 하였을 때 아버지 입암 조식과 숙부 조방을 따라 낙강선유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망우당 곽재우와 이도순을 처음 만났는데 망우당을 선생으로 존대, 이도순을 친구로 삼았다. 낙강선유는 그 당시 37명 선비들이 모인 큰 행사로 이름났는데 간송이 쓴 <용화산하 동범록>이 전해지고 있다. 1614년에는 동당시에,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으며 32세 때 과거를 완전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광해 임금 시절 폐모론이 일어나자 간송은 신자臣子로써 대비를 폐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로 인하여 광해의 미움을 사서 낙동강변 칠원현의 내내로 피신하여 1618년 상봉정을 짓고 은거하게 된다.
15년 후인 1633년 강 건너 거룬강 아호鴉湖 옆 도사면 용산에 망모암望慕庵을 지어 이사하면서 낙동강 건너 남쪽 용화산록에 합강정을 짓고 강을 건너다니며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며 은거하였다.
망모암의 자미화에 대해 지은 시가 다음과 같다,
龍山卜居
용산에 핀 붉은 자미화 한 그루 龍山一樹紫微花
띠집(모옥) 처마 밖 꽃이 피니 곧 내 집이라오 花外茅簷是吾家(下韻缺)
합강정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 용산 망모암으로 가는 길은 오리 쯤되는데 그 시절 욱개에서 거룬강까지 강변은 솔밭이었으므로 늑대 같은 맹수들이 있어 위험했다. 그런데 간송이 밤중에 망모암으로 돌아가면 그때 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호위하 듯 뒤따르니 다른 맹수들이 범접을 못했다고 전해온다.
모재 이도순慕齋 李道純(1585~1625)은 부곡의 대학자 덕암 이석경의 조카로 일찍이 이도유, 이도자 등 집안 형제들과 함께 성주 백매헌 정구 선생에게 가서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산의병군으로 참전하여 곽재우 의병군과 협력하여 싸웠으며 화왕산성 수성 때도 함께 하였다. 망우당이 요강원 낙동강변 창암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에 은거하자 출입하기 시작하여 선생이 별세하기까지 가까이 모시며 배워 유일한 제자로 세간에 알려졌다. 용화산하동범 때 처음 만나서 22세 동갑 친구가 된 간송과 모재는 망우정에서 자주 만났다. 모재의 스승 한강 선생의 수제자인 여헌 장현광은 간송의 스승이라 서로 끈끈한 인연이 있었다. 모재는 문장 필법이 뛰어나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망우당의 사위 신응이 이도순을 눈여겨보고 사위로 삼으니 곧 망우당의 외손서가 되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격언처럼 부곡에 살았던 모재는 간송의 상봉정 가까이 살기 위해 5리 안으로 인접한 마을인 도사면 마산정으로 이사했다. 그 마을을 망우정과도 가까웠다. 그러나 스승 망우당이 가신 지 8년 후인 1625년 10월, 모재는 병을 얻어 애석하게도 마흔한 살에 타계하고 말았다. 간송 조임도가 절절한 애도를 표하는 만사輓詞에서. ― 방에는 고아와 과부가 있고 집에는 노친 있으니 지금 군의 이 죽음 혹 돌이킬 수 있을까? 하고 탄식하며 망우당의 생애 조명과 여현정 관리 등 함께 세운 여러 계획이 허사가 되고 뛰어난 도량을 애석해하며 출중한 재능과 덕행도 슬퍼하면서, ― 여현정 아래 같이 놀던 곳은 차마 소리 없이 흐느끼며 홀로 왕래하지 못하겠네. 하고 친우 이도순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도순의 단명으로 자녀들이 어렸기에 여현정은 주인을 잃은 듯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아들 곽탄과 외손자 신동망이 오가며 관리하였다. 사실 망우정을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불행이 겹쳤다. 장자인 처사 곽형이 35세로 단명(1613년 타계)했고 또 곁에 살았던 사위 의영고 봉사 신응이 1609년 38세로 병사하니 1617년에 별세한 망우당보다 8년이나 앞섰고 곁에 있던 외손자 신동망이 어렸기 때문이었다. 10년 후에 간송이 여현정에 문우들과 갔는데 곽탄이 손님들을 맞이하여 아침밥과 술 석 잔씩을 부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간송문집>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곽탄을 망우정 주인이라 하였다. 망우정은 그 후 외손 영산 신씨와 이도순의 문중 등에서 관리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이 간송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고 1634년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1647년 대군 사부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였다. 간송은 수학修學과 출퇴, 학문적 교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학자의 길을 걸은 유학자로 저서로는 『취정록』, 『금라전신록』, 『간송집』 등이 있다. 『금라전신록』은 그의 대표저서로 한강 선생이 편찬한 <함주지>를 보완, 함안 고을의 인물과 시문을 총망라한 시대와 지역의 대표성을 가진 저서이다. 1664년 80세로 도사면 용산에서 별세하였는데 사후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에 제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