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여, 들으소서! 구원하소서!
이사야 37:14~20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는 이사야 36장부터 39장까지, 무려 네 장에 걸려 소개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누구입니까?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 왕의 뒤를 이어 25세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여, 29년 간 나라를 다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 이하에서는 히스기야 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과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3~4).”
히스기야 왕은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산당을 제거하고, 주상을 깨트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자, 히스기야 왕은 놋뱀을 부수며 “이것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느후스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열왕기하 18장 5절 이하에서, 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이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5~7).”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있어서는 철저했던 히스기야 왕은 정치적으로는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앗수르를 멀리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7절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8:7~8).”
히스기야 왕은 정치적으로는 애굽과 가까이하고, 앗수르와는 먼 거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반 앗수르 정책으로 인해 앗수르 왕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기야 앗수르 왕 산헤립은 주전 701년에 유다를 공격하여,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였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여호와의 성전과 왕국에 있던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앗수르 왕에게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은 여호와의 성전 문과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모두 벗겨 앗수르 왕에게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정복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중요한 요새였던 유다의 라기스를 점령하고,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 이사야 36장 1절부터 3절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이사야 36장 1절부터 3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큰길에 서매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큰길에서, 앗수르 왕이 보낸 랍사게와 유다 왕이 보낸 세 명의 관리들이 회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회담이지, 앗수르 왕이 보낸 랍사게는 유다에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회담장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앗수르의 랍사게는 유다가 의지하던 애굽은 마치 잘려진 갈대 지팡이와 같아서 그 지팡이에 몸을 기대면 손이 베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랍사게는 유다가 의지하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랍사게는 유다를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유다를 공격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랍사게는 국제적 통용어였던 아람어로 말한 것이 아니라, 유다 군사들이 듣도록 일부러 히브리어로 말하였습니다. 이에 유다의 사신들은 랍사게에게 자신들도 아람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니 히브리어로 말하지 말고 아람어로 말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유다의 사신들은 랍사게의 협박을 듣고 유다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눈치 챈 랍사게는 더욱 큰소리로 외치며 히브리어로 유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앗수르의 랍사게는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주장하지만,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히스기야를 따르지도 말고, 그의 말을 듣지도 말고, 그에게 속지도 말라(사 36:13~18).”
앗수르의 랍사게가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친 이유는 유다의 군사들이 듣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스스로 항복하고 성에서 나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랍사게는 유다의 군사들이 만일 스스로 항복하고 나온다면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우리 함께 성경을 찾아보십시다. 이사야 36장 16절과 17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요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랍사게는 유다의 군사들이 먼저 공동체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의 안위를 생각하도록 유혹했습니다. 랍사게의 말을 잘 들어오십시오. 만일 유다의 군사들이 항복한다면 각각 자기의 포도, 자기의 무화과,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랍사게의 말에는,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자기, 자기만을 생각하라는 외침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외침은 철저히 세상의 외침입니다. 세상의 외침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생각하지 말로, 철저히 자기 자신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만을 위하는 세상의 가르침과는 반대의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또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하며 살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일관되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축복된 길이요, 안전한 길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겁니다.
또 랍사게는 유다 군사들이 스스로 항복할 때, 유다 군사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겨질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갈 유배지마저도 풍요로운 땅처럼 왜곡시켜 한 말입니다. 가짜 평안이요, 가짜 유토피아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을 한 장만 더 뒤로 넘겨 이사야 37장을 읽어보면, 이제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직접 서찰을 보내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너만 위해 살아가라.”는 세상의 거대한 소리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사랑과 거짓된 평안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번 달 「생명의 삶」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잘 나가는 회사의 CEO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에게는 사업과 신앙생활이 별개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부도덕한 사업 행위로 잠시 하나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가도, 이내 ‘이건 사업이니까’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사업 문제로는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인 삶 속에서는 존중하지만, 일터의 지침으로는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삶과 신앙을 별개의 것으로 나누어 한 쪽에서는 경건한 척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철저히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사무실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 본능만을 믿어서도 안 됩니다.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작은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다들 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내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마음 전쟁 끝내기」, 조이스 마이어/ “내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생명의 삶」, 2017년 10월 호, p. 111에서 재인용).
앗수르가 유다를 위협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사야 37장 1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의 전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인 14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베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히스기야 왕의 깊은 슬픔과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 뿐만 아니라, 왕을 따르던 신하들과 제사장들도 왕과 함께 굵은 베옷을 입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히스기야 왕은 신하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내어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절).”고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리고도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듯이, 오늘 인생의 큰 강도를 만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웃의 중보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며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아닙니다. 간혹 나의 시급한 기도제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교회에 알려 기도의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나의 개인적인 상황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거리끼는 성도들이 있는데, 이러한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제목을 기꺼이 기도하고 있는 동역 자들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저는 길거리에서 전도하다가, 이웃교회 한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우리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중보기도하고 있다고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우리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갈마동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는데, 특별히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몇 개 교회들을 정해놓고 집중적으로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우리의 기도제목도 다른 분들에게 알려서 함께 연합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되, 단순히 문제만 해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우리 한 음성으로 16절과 17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히스기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라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고백은 참된 기도의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두 가지를 먼저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5~6).”
기도의 참다운 본질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한 이 두 가지 유의사항을 말씀하신 후에,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기도로 영적인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리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느 날,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아버지, 나는 솔직히 아버지가 내 친 아버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혹시 나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내가 용돈이 필요하니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당신에게 나의 용돈을 청구해요. 제발 나에게 이번 달 용돈을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아버지라도 믿지도 못하는 자녀에게 매달 기쁜 마음으로 용돈과 그 외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리지 못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귀를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을 떠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기도의 출발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끝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20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이 주 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으로 천하만국이 주 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응답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고, 기도의 끝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이 지은 「같이 걷기」 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날, 몽골에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이용규 선교사님이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컴퓨터로 글쓰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님의 아들 동연이가 다가와서 아빠의 무릎 위에 턱을 괴로 물끄러미 아빠를 바라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동연이 너, 아빠에게 뭔가 부탁할 것이 있는가 보구나?” 그러자 아이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아빠, 뭐 부탁할 것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빠가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그 말이 아빠에게 조용한 감동과 행복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 이 선교사님이 학교 사역으로 어렵고 힘들 일이 있어서 마음이 무거웠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교직원 예배 때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문득 이선교사님의 머릿속에 아들 동연이의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선교사님은 즉시 바닥에 내려앉아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합니다.
“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다른 부탁할 것이 있는 게 아니고요, 그저 아빠가 좋아서요. 아빠가 그리워요.”
그 때 하나님이 이선교사님을 안으셨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동안 그분의 품에 안겨 평안과 쉼을 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문제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리는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문제 가운데 눌려 있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문제의 해결보다도 하나님을 알아가고 만나는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이용규, 「같이 걷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생명의 삶」, 2017년 10월 호, p. 11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자신이 섬기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두 아들의 칼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문제와 어려움을 어떤 자세로 대면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라.”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참된 회개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기도를 올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어려움 가운데 처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해 드리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