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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이승 마지막 상
이원우 아우구스티노
견지로가 서울 근교에 올라온 지 어느덧 만 5년이 지났다. 본래 촌사람이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서 어디 도시인이 되겠는가? 해서 가끔 상경하면 길거리에서 헤매기 일쑤다. 참 견지로란, 말단 작가인 이원우가 늦게 쓰기 시작한 필명이다. 견마지로(犬馬之勞)! 임금을 위하여 모든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고사성어에서, 말 마(馬) 자만 뺀 것이다. 임금은 ‘임’이요, 임은 먼저 간 혈육을 두고 말함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일 수밖에.
세상살이가 참 우습기는 하다. 부산과 밀양에서 여기 저기 옮겨 살 때에는 서울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두서너 해에 한 번? 아마 거기에도 못 미쳤으리라. 지금은 더러 서울에 올라가서,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한다. 늦게 정식 데뷔한 가수로서 공연도 하고, 지인도 만난다. 명동성당에서 미사 참례도 하고,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앞에서 머뭇거리기도 한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등은 찾기 수월하다.
그 외의 목적지라면 항상 혼란에 빠진다. 지하철? 견지로에겐 그게 더 문제다. 도대체 그 복잡한 노선을 어떻게 찾으며, 어느 역에서 환승하는지도 모르니까. 요행히 근처에서 내렸다손 치더라도 그 다음이 또 장애이고말고.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아 참, 딱 하나. 사흘이 머다 하고 찾는 26기계화 보병사단은 눈 감고도 갈 수 있다. 5000번 버스에서 하차, 양주행 지하철을 타면 그만. 양주 역에서 택시로 7천원 천 원 남짓!
어쨌든 ‘길치(실은 路癡)가 맞겠지.)’라서 수모를 겪었다, 얼마 전에. 밀양시 부북면 태로초등학교를 졸업한 그. 동기생 몇 몇 서울에 산다. 견지로를 친구랍시고 가끔 연락하기도 하는 그들이 고맙다. 그도 그럴 게 그 중에는 60년 만에 만나는 친구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하나, 손일학(孫一鶴)은 예외다. 견지로에게 걸핏하면 타박을 주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지하철 이용이 버거운 견지로가 갈팡질팡했다. 그날 손일학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무조건 몇 번과 몇 번이라고 노선을 일러주더니, 어디에서 내려 몇 번 출구로 나오라고 하곤 전화를 끊는다. 겨우 만났다. 김일학에게 욕도 얻어먹었다. 그날 모임은 견지로의 기분을 잡히게 하고도 남았고말고. 그런데 더욱 기가 차는 것은 귀가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오는데, 앞서 가던 손일학이 친구에게 하는 말이 이랬으니까. 그건 상처를 깊게 낼 독한 말을 화살처럼 시위에 메겨 쏘는 것과 진배없었다.
“견지로, 저 친구 말이야, 그래 교장까지 한 친구가 지하철을 못 타 비실비실하다니, 쯧쯧. 초등학교 때도 그렇더니….상(賞) 갖고 싫은 소리 몇 번 한 적도 있었지.”
견지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할밖에. 그는 깊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도 가만있지는 않았음은 물어보나마나. 오랫동안 혀를 벼린 흔적이 묻어났다.
“비실비실하는데 자네가 보태 줬어? 아직도 옛 버릇이 남았군그래.”
태로초등학교는 부북면에서 제일 큰 학교였다. 한 학년에 두 반씩은 유지하는….견지로는 꼭 왕복 20킬로미터를 걸어 통학했고, 5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해 온 손일학은 그 중간쯤 되는 부락의 신작로 가에 집이 있었다. 어느 동네 부자가 대대로 산다면서 지은 기와집인데 으리으리했다. 손일학의 어머니가 담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손일학의 집은 부자였다.
문제는 둘이 학과 성적이며 예체능 등에서 수위를 다툰다는 점에 있었다. 한데 둘은 퍽 대조적이었다. 견지로는 국어 ‧ 사회 ‧ 자연 ‧ 도덕 등 과목에서 손일학에게 절대 지지 않았다. 다만 산수가 문제였다. 산수 시험 결과에 따라 석차가 뒤바뀌기 예사였다. 4학년 말 산수 시험에서 ‘내지(乃至)’의 개념을 서술하는 문제가 나왔는데, 쉬는 시간에 둘의 충돌이 있었다. ‘65내지 70’이나, ‘70내지 65’나 마차가지라고 견지로가 우겼다. 그랬더니 손일학이 대뜸 한다는 말이
“그것도 몰라? 비실비실하지 마. 65내지 70만 정답이야.”
“그기 그거지 머. 선생님이 점수 매기시는 것 보면 될 거 아니가?”
결과는 견지로의 케이오 패. 그때 견지로는 충격을 크게 받았다. 그에게서 들은 비실비실한다는 말이 정말 수시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체육. 손일학은 견지로보다 키도 10센티미터쯤 컸다. 나이도 한 살이나 많은 손일학을 견지로가 달리기 등 체육 기능 면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 게다가 견지로는 늘 징징 짜는 편이었고, 손일학은 활달한 성격이었으니,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손일학이 훨씬 좋았다.
한 번은 하굣길에 견지로가 손일학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손일학이 견지로를 보고선 잠시 들어왔다 가라고 했다. 마당가에 수탉과 암탉이 짝짓기를 하는 중이었다. 손일학은 견지로를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견지로는 그 자리에서 놀라 자빠질 뻔했다. 그때만 해도 사진첩 따위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한데 손일학은 근사한 사진첩에 빼곡히 사진이며 상장을 넣어 정리해 놓고 있었다. 견지로는 완전히 주눅이 들 수밖에. 그도 그때까지 상을 웬만큼 받았지만 작은방 벽에다가 덕지덕지 도배를 하듯이 붙여 놓았으니까 말이다. 손일학이 말을 이었다.
“너 촌티 좀 벗어. 항상 콧물이나 흘리고….비실비실하다는 말의 뜻을 아니? 힘없이 흐느적흐느적 비틀거린다는 거야. 너 서울 한 번 가 봐. 애들이 얼마나 똑똑하다고.”
“…….”
“그리고 말이야. 서울 애들은 다르다. 너처럼 몸도 약하고 사나이 기질도 부족해선 성공할 수 없어. 넌 고작해야 음악 아니면, 붓글씨? 또 하나. 글짓기 그거 하나는 나도 인정하지. 그래 봤자 선생이야. 너하고는 질적으로 다를 걸? 내 상 봐.”
아닌 게 아니라 서울에서 그가 받은 상은 엄청났다. 듣도 보도 못한 봉사상 같은 것도 있었으니까. 아 참, 구청 학예 발표라던가 뭔가에서 그리기 입상한 상장도 있었다. 무엇보다 견지로와 비교되는 건, 개근상이었다. 본래 약골인 데다 워낙 먼 거리 왕복 2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통학하다 보니, 견지로는 1년에 두서너 번 결석할밖에. 그에 비해 손일학은 입학 후 모두 개근한, 그야말로 지독한 그러나 강한 어린이였던 것이다. 앨범을 자꾸 젖히니 마침내 유치원이라는 데에서 준 상장도 보였다.
“넌 정근상도 하나 없다면서? 그래 갖고 잘난 척하긴….앞으로도 상에다 목을 매 봐!”
그건 속이 뒤집어질 정도의 수모였다. 그 뒤로부터 견지로는 손일학 집 앞을 지나가기가 겁이 났다. 그래 가끔씩은 일부러 손일학의 집에서 제법 떨어져 흐르는 냇가로까지 가서 발을 물에 담그는 흉내를 내면서 피해 다녔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 사이의 서먹서먹한 관계는 졸업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그래도 졸업식 때 답사를 견지로가 맡는 바람에 손일학이 구시렁거렸음은 물어보나마나. 여섯 해 동안 재학한 견지로 몫이 당연한데도!
그러나 드디어 견지로와 손일학은 졸업과 동시에 헤어지게 된다. 견지로는 그해 천하 명문인 부산중학교에 응시해서 합격했고, 손일학은 서울의 어느 일류 중학교에 진학했다.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지만, 견지로는 공부를 잘했고, 1 ‧ 2학년 때는 우등상과, 손일학으로 인하여 가슴에 한이 맺혔던 개근상도 받았다. 천하의 부산중학교 우등생이라면, 장래가 촉망된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렇게 3학년 초까지 잘 나갔다. 하지만 전교 650명 중 5등 안에 들어가던 모의고사 성적도 담임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물거품이 된다.
“쟤는 왜 용의가 단정하지 못해? 촌 놈! 명문 중학교 학생은 외관이라도 그럴싸해야지.”
김일학 이후로 처음 겪는 수모였다. 견지로는 다음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담임교사의 얼굴에 손일학의 잔영이 겹쳐졌다. 역전 삼류 극장에서 ‘OK 목장의 결투’ 등을 보다가 기차를 타고 귀가하였다. 들킨 뒤 겨우 수습이 되었으나, 이미 고등학교 진학은 물거품이 된 뒤였다.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둔 저녁에 삼십 리 길을 걸어 고향에 와서 눌러 앉아 버렸다. 재수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재수라는 게 유명무실해서, 저녁 먹기가 무섭게 개울 건너 양지, 마흔 호쯤 일가들이 모여 있는 데로 가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늦게 일어나, 시각 장애인인 엄마가 챙겨주는 아침 식사를 하곤 책을 들고 냇가로 가서, 들여다보는 척하는 게 고작이었다. 대신 노래라는 노래는 닥치는 대로 불렀고말고.
냇가에서도 노래! 그 노래를 떠나서 한시도 살 수 없는 나날이었다. 노래란 노래는 닥치는 대로 입에 올리곤 하였다.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배운 가곡 ‘봄처녀’부터, 지리동산 갈가마구야 어쩌고저쩌고하는 노동요,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 그리워 운다 너영나영 두리둥실 안고요…’하는 ‘너영나영타령’ 등 민요에 이르기까지. 특히 대중가요에 심취해(?) 있었으니, 황금심의 ‘낙화유정’을 빠져들어 혼란 속에 헤매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가사가 그랬으니까. 낙화 유정 뒷골목에 누구를 찾아(중략) 화투장에 점을 치며 맺은 날짜 기다리는 맺은 날짜 기다린 사람 팔자 시간문제요. 마침내 40년 뒤에 노무현 앞에서 그 노래를 열창했으니, 진짜 사람 팔자 시간문제로다. 얼마 전에는 일흔이 넘은 대한가수협회 회원 자격으로 황금심과 고복수 내외의 묘소까지 갔다 왔다.
다시 그 옛날. 그렇게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암울하게 지내던 겨울 방학 어느 날, 뜻밖에도 김일학이 견지로의 집에 온 게 아닌가? 서울 친구들과 친척 집에 다니러 왔다가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얼른 보아 180센티미터는 됨 직한 키에 덩치도 엄청나게 크고, 본래 미남인 일학은 서울 생활 몇 년 만에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사람을 얕잡아보는 습성은 남아 있어, 견지로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오죽하면 엄마마저 그랬겠는가?
“야야, 너거 친구 학인가 뭔가 하는 애 말이다. 와 그래 건방시럽노?”
그러나 특차인 다음 학기에 부산사범학교에 원서를 넣고 시험을 봤는데, 웬걸 당당히 합격한 게 아닌가? 견지로는 탄성을 질렀다. 야, 정말 부산중학교 대단하다. 난 노래만 불렀지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합격하다니, 그게 다 중학교 초까지 닦은 실력 덕분 아닌가!
사범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다. 특히 3학년 졸업 때는 120명 중에 5등이어서, 약관의 나이(20세)에 진해 대야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견지로는 스스로 교사 자질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하고, 시내 네 개 극장에 오는 쇼를 빠지지 않고 관람했다. 가수, 가수가 꿈이었다. 남일해 한명숙 남백송 등등이 출연하는 ….마침내 코미디언 백금녀의 남편 죠비서를 다방에서 만나 가수로 데뷔해 달라고 조르기까지 했으니 실로 기가 막힐 따름이고말고. 그때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얼만 전까지 밤무대에 섰겠지.
그러나 시필귀정, 견지로는 평생을 교직에 몸담는다. 43년 동안 어린이들과 부대끼며 지내온 기나긴 세월이었다. 마침내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으니 지금 견지로가 후회하는 일은 없다. 다만 그 기간 참으로 많은, 남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체험을 했으니 이제 적은들 무슨 흉허물이 되랴. 살아봤자 앞으로 다섯 해쯤일 테니. 하나만 고르라면 까마득한 옛날 김일학의 집에서 그 친구로부터 당하던 ‘상(賞) 사건! 그게 결코 잊어지지 않아,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려던 그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은 견지로에게 지금 실소로 남는다. 손일학이 당시를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적어 보자. 어쨌거나 손일학은 견지로를 짓칠 만큼 짓친 언행으로 괴롭혔음은 사실이다. 두말 하면 잔소리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면 견지로는 아찔하다. 43년 동안의 힘들었던 순간순간들을 어찌 다 필설로 표현하랴. 그래도 징계 한 번 받지 않고, 강산이 네 번 변할 세월을 버텨냈다! 대신 교장으로 퇴임할 때 황조근정훈장 수훈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장하다면 장하다고 할 수밖에. 한데 직전에 아찔한 순간을 맞기도 했으니 고백하기조차 부끄럽지만, 털어 놓자.
교장 초임 학교에서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명천초등학교로 전보된 게 02년 9월이었다. 견지로는 당시에 19년째 무료노인학교를 운영해 오고 있었다. 교사 교감 교장으로 직명이 바뀌었지만,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휴일 방학도 없이 토요일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노인학교의 문을 열었다. 워낙 극성스럽고 처절하달 정도로 열심히 하니까 당시 국회의원이던 정형* 의원이 특별 교부금인가 뭔가로 덕천2동 경로당 2층에 조립식 건물까지 올려 주었을 정도였다.
부임 얼마 만에 노인학교 학생들이 금의환향한 견지로를 축하하기 위해 교장실로 모여와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날 노인학생들은 종일 교장실에서 떠들었다. 음담패설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런데 호사다마가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추석도 지나고 며칠 뒤였다. 교장 회의에 참석했다가 교장실로 들어오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명천초등학교 교장실입니다.”
상대방은 처음부터 거칠게 나왔다. 첫마디가 가슴을 섬뜩하게 만든다. 사뭇 명령조였다.
“아, 여기 부천 검찰지청인데요. 교장선생님 바꾸세요.”
“제가 교장입니다.”
도대체 수사관들이란 왜 그렇게 위압적인지, 무조건 내일 부천검찰지청으로 오후 두 시까지 무조건 나오라는 것이다. 견지로가 왜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의 교장이 거기까지 가야 하는가 물었다. 수사관은 콧방귀를 뀌더니 컴퓨터 교실 사장의 본사가 부천에 있는데, 사장이 직원을 시켜 견지로에게 20만 원짜리 상품권을 전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는 것
그리고 전화를 딱 끊었다. 견지로는 새벽같이 김해 공항으로 나가 비행기를 타고 올라갈 수밖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두 방망이질을 했다. 겨우겨우 ane고 해서 검찰지청을 찾았더니, 7급 수사관이라는 사람이 딱 버티고 앉아 꼬치꼬치 캐물었다. 견지로는 평소 교장이라면 최고의 직위(?)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얼마나 오산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다른 시도의 교장들도 몇몇 불려와 옆방에서 수사를 받는 모양이어서 시끌벅적했다. 수사관은 거의 반말로 시종하였다. 부인하자 교장이 쩨쩨하다며 일갈했고.
그래도 견지로는 버티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받은 적이 없다. 기억을 더듬다가 그날 내 노인학교 학생들이 서른 명 이상이 교장실에 와서 종일 떠들다가 간 걸 떠올렸다. 열 한 시라고? 그들이 어린이들에게 보여 준다며 전부 한복으로 갈아입고 무용 연습도 했다! 내려와서 노인 학생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들이 분노했다. 선생님이 그럴 사람도 못 되지만, 그것도 자기들이 교장실에서 종일 눌러 앉아 있던 그날이라니,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결국 시 교육청 징계위원회로 이첩되는 선에서 끝났다. 노인 학생들이 어디서 들었는지, 탄원서 비슷한 것을 작성하여, 교육청에 내고 하는 바람에 사건은 종결되었다. 몰론 완전무결하게 혐의를 벗었으니 견지로가 쉰 안도의 숨, 그 의미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그럼으로써 견지로는 아슬아슬하게 그 소중한 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왕이니 견지로의 상에 관련 이야기를 계속한다. 참, 결과적으로 참 상을 많이 탐하고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그 원인(遠因)은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 시절과 맞닿는다고 할 수밖에. 그 옛날 김일학이 안겨 주던, 몸을 부르르 떨게 하고 가슴에 못을 박은 수모! 행여 수치로 되돌아올까 두렵기도 하지만, 죽기 전에 기가 막힌 사연들을 털어놓고 싶은 것은 한갓 인지상정쯤이었으면 좋으련만.
초임 시절엔 방황했지만, 견지로는 그로부터 35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에 드디어 교육의 꽃이라는 교장이 된다. 참으로 전신만고 ‧ 우여곡절 ‧ 파란만장의 과정을 겪었다. 그 결실이 훈장으로 이어졌다 해도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런데 진해 시절의 그 좌절감은 한갓 기우의 곁다리였는지 모르지만, 교직 생활을 하는 기간 내내 적어도 이런 저런 상을 참 많이도 받았다. 교육과 관련이 있는 것 없는 것 닥치는 대로. 차라리 상 사냥이라 하자.
정말 희한한, 남들은 상상도 못할 상도 있다. 듣는 이가 웃지 않으면 제 그르다. 밀양 교원 예능경진대회 한글 서예 최우수상을 받은 건, 군에서 사단장 표창장을 붓으로 써 왔던 실력을 발휘한 덕분이고말고. 그러나 도 대회에 대표로 출전했지만 번번이 입상 실패. 대가 밑에서 서예 공부를 제대로 한 및 타 시군 동료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예에서 실패한 경험을 곱씹고 와신상담, 몇 년 뒤에 국악 성악 부문에 출전한다. 민요와 시조창 등이 있었는데, 두 번째 도전에서 최우수상 수상자가 된 것이다. 민요 ‘태평가’를 열창한 결과다. 우수상과 우량상 수상자가 도 대회에 출전한다. 거의 프로가 되어야 입상할 수 있는 도 대회. 사전 준비도 만만찮게 해야 함은 물론이고말고.
견지로는 이번에는 달랐다. 아예 수소문하여 창원 북면 온천에 있는 김애* 인간문화재를 찾아갔다. 현역에서 물러난 기생 출신으로 대단한 실력을 가진 그에게 견지로는 넙죽 엎드렸다. 큰절을 한 것이다. 놀라지 마라. 그 옆에 앉은 사람은 내연 관계에 있는 황** 전 국회의원이었은즉!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선생님을 사사하겠다고 했더니, 얼마를 선불해 달라고 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토를 달 것인가? 적잖은 액수의 수업료를 지불하고 그로부터 1주일에 두 번씩 밀양에서 창원으로 내달았다. 그토록 노래를 많이 불러왔지만, 맹렬히 연습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틀린 곳이 있으면 가차 없이 지적하고 호통을 쳤다. 드디어 당일, 견지로는 바지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둘렀다. 그리고 어렵사리 구한 청사초롱을 한 손에 들고 무대에 섰다. 반짝! 김애* 인간문화재의 비녀가 형광등에 부딪혔다. 견지로는 우황청심환까지 먹었지만 떨리는 가운데 소릴 뱉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를 바치어 무엇하나/ (중략) 니나노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첫 음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니나노 얼싸 좋다’까지는 어림도 없었다. 목이 아프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많은 동료 교사들이며 출전자들이 반은 연민의 정으로 반은 웃음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견지로는 모르겠다 싶어 2절도 토해냈다. 청사초롱을 흔들어야 할 게 아닌가? 청사초롱 불 밝혀라/ 잊었던 낭군이 다시…
결과는 실패! 여담이라 하기엔 너무 가슴 아픈 사연도 겪었다. 시 우량상을 받은 중등교육과 장학사가 바로 내 뒤에 ‘새타령’을 불렀는데, 그는 내내 긴장하였다. 난 약을 먹었지만, 그는 대신 무대로 올라가지 몇 분 전 소주를 잔에 따라 마셨다. 그러면 떨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도 눈물을 흘려야만 했고말고. 곡 선정이 잘못되어서였으니, 정통 민요 ‘새타령’이 아니라, 김세레나가 부르는 대중가요 ‘새타령’이었다는 말이다. 그가 그해 입상했더라면, 몇 년 뒤에 교장으로 승진했으리라. 한데 그는 그만 다른 신병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컨디션을 위해, 점심 때 보신탕까지 먹었다던 그가 사무치도록 그립다.
당시만 해도 시도 교원예능경진대회는 치열했다. 우수상 ‧ 우량상 ‧ 장려상은 각기 일정한 점수로 환산되어 연구 실적에 가산되었다는 뜻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다시 말해 교감 승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고말고. 만약에 말이다. 견지로가 ‘태평가’ 첫 음을 잘 잡아 실력을 제대로 발휘, 우량상이라도 받았다 치자. 그는 그 덕을 봐서 경남 지방에서 관리직(교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을 것이다. 한글 서예 부문도 마찬가지다. 그 입상 실패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승진은 못하고, 대신 뒷날 부산에서 교장으로 옷을 벗었으니 그저 요상한 게 우리 인간의 삶이라 하겠다.
견지로의 교원예능경진대회 도전은 양산시로 옮겨서도 계속된다. 이번은 가곡 성악이었다. 신청서를 작성해서 냈다. 연습은 양산중학교 김미숙 음악 교사(현 왕종근 아나운서의 부인?). 곡목은 채동선의 ‘향수’! 견지로는 수시로 양산중학교로 찾아갔다. 피아노 앞에서 두어 시간 발성 연습-입모양 ‧ 호흡 등-에서부터, 실제 부르기에 측은할 정도로 매달렸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들른 것이다. 바로 엄정행 교수 부친이다. 워낙 유명한 그분의 말.
“소리를 앞으로 뱉어 보시오. 입안에 가둬 놓지 말고….”
드디어 대회장에 나갔다. 한데 이럴 수가! 출전자는 단 세 명뿐이질 않는가? 어느 중학교 음악교사와 견지로의 사범학교 두 해 선배, 그리고 견지로. 어쨌든 경창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중학교 음악 교사는 전공이 성악이라 단연 두드리진 실력을 보였고, 나머지 둘은 어금버금하였다. 아니나 다르랴, 결과는 우수상은 중학교 교사가 탔고, 나머지 둘은 똑 같이 장려상. 후문에 의하면 둘의 성적은 다섯 명 심사위원의 합산 결과 소수점까지 같이 나왔더라나? 그러나 성적은 우수상에 비해 뒤떨어지니, 둘에게 장려상을 줄 수밖에. 만약 그때에 우량상이라도 받아서 도 대회에 출전하였더라면? 그 결과에 따라 견지로의 부산 전입은 실패하였을지 모른다. 승진 점수가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족 점수 0.120? 장려상 점수는 0.125였으니까. 다음해에 고등학교를 부산에 나온 교사(교감 승진 예정자 제외)는 부산에 전입시켜 주게 됐으니, 향후 24년 동안 견지로는 부산에서 상과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80년대 초반 부산시 북부 교육청 관내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은 견지로는, 우선 대도시에 적응이 안 되어 혼이 났다. 학교 규모는 너무 커서 78학급, 5학년 주임(현 부장교사)을 맡았는데, 대부분이 기존 부산 교사들이라 시골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왔던 그를 백안시하기도 예사였다.
무엇보다 술과 담배를 못 하는 견지로는 동 학년 14개 반 교사를 대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시종종의 사고가 나고 그때마다 수습하느라 혼이 났다.
그래도 그리운 데가 있었으니, 매주 토요일 오후, 학교의 교실 한 칸을 빌려 운영하는 어느 중년 남자의 노인학교였다. 부임 두 달이 조금 넘었을 견지로는 자기 발로 노인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고 노인 학생들 앞에서 민요 ‘양산도’ 등 몇 곡을 부르곤, 받아 준다면 거기서 토요일 오후마다 봉사하고 싶다고 했다. 노인 학생들은 대환영이었다. 일손이며 강사가 부족했던 학장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 어쭙잖은 보이지 않는 성취동기가 마침내 25년 넘게 뻗어갈 줄이야. 미리 이야기하지만, 견지로는 그로부터 토요일 오후가 없는 25여 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찬 잊을 뻔했다. 이걸 소개하지 않고서는 견지로의 기가 막힌 상 이야기는 전개될 수 없으니 적당한 시점인지 모르지만, 여기서 드러내자. 견지로는 삼랑진읍 변두리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부터 소위 문학 창작에 혼자서 매달려 있었다. 설사 나중에 교장까지 되다 해도 사회에서 도무지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아, 문학 공부를 한 것이다. 말이 공부지 당시 초등학교 교사들이 보는 전문지 <새교실>의 ‘수필’ 추천 문을 두드린 게 시초다. 물론 거기를 통해 문단 데뷔가 되는 건 아니라 해도, 기초는 닦을 수 있다는 언질이 있어서였다.
순조롭게 천료를 하고(77년), 다시 당시 정말 작가 배출에 인색했던 <수필문학>에 초회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으나, <한국수필> 2회 천료를 통해 정식 등단, 문협에도 가입한다. 지금부터 33년 전 봄이었다.
그 14년 뒤에 견지로는 늦깎이 소설가가 되기도 한다. 그로부터 견지로는 두 다리를 걸친다. 교직에서의 성공과 사회적인 소위 저명인사가 되고자 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풀이해 보자. 교장으로 정년을 맞는 것과 문필가로서 나름대로 이름을 떨치는 걸 목표로 삼은 것.
교감 승진이 급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자리가 교감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과정이 참으로 험난함은 물어보나마나. 무엇보다 연구 실적이라는, 현장교육연구논문이나 교육실천 사례 등에 입상해야 하는데, 문제는 경남에서 인정되던 것도 부산에서는 시도를 달리하니 점수가 삭감되는 건 당연한 노릇, 그걸 채우느라 고생께나 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토요일 오후마다 나가는(몇 년 뒤에는 버젓이 노인대학 학장으로 발돋움한다.) 노인학교에서 민요 지도 및 고사성어 해설 전래, 동화 구연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인 학교 교육과정 운영 이모저모를 논문과 실천 사례 등으로 꾸며 지면에 발표함으로써 빼앗긴(?) 점수를 보전한다. 교육감과 부산교원단체연합회장 상을 모두 합해 열 장이나 받는 기록을 세운다.
경력이며 기본 점수들 다 채우고도 부산에 들어와 힘든 세월을 보내기 7년 만에 교감으로 직위를 바꿨고. 그렇게 시도 교육감 수준의 표창장이며 상장이 수북하게 쌓여갈 때, 견지로는 까마득한 옛날 손일학의 으스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홀더에 그 고생의 징표들을 넣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곤 했고말고.
그 전에 어마어마한 큰 사건이 터진다. 견지로가 희대의 ‘상의 화신’으로 변모할 만한 충격….그렇다, 그건 어느 누구도 예상 못 했을 만큼 충격이고도 남았다. 토요일 오후마다 퇴근을 않고 노인 학교로 출근하는 평범한 교사인 견지로가 여기저기 방송에 소개되었던 덕분이었을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는지 부산 시민이 된 지 5년 만인 그해 10월 2일 ‘자랑스러운 부산 시민상 봉사 본상’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따로 대상(大賞)이 없었던 그 시절, 봉사 본상이 대상이었음을 모두가 인정하던 때였다. 수십 년 봉사 활동을 한 시민이 수두룩한데, 고작해야 5년, 2백 번 정도 민요 부른 걸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었으니 견지로 자신도 어리둥절할밖에. 문구도 거창하여 ‘3백 70만 부산시민의 이름으로 준다’라 하였다. 상금도 자그마치 1백만 원! 부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견지로는 흥청망청, 그 거금을 마구 뿌렸다. 여기저기 인사도 하고, 파출소장과 동장을 만나 저녁 한 끼도 샀다. 바지도 한 번 마련했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십 수만 원 마이너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0월 2일에 그 상을 받고 도하 신문마다 대서특필, 노인학교와 견지로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는 게 아닌가. 그 덕분에 그해 11월 초 부산교육대학교 동창회장이 주는 ‘자랑스런 부산 교대 동문’으로 박세직 장군과 함께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당일 시상식에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속사정을 모르는 동기들에게 괘씸죄(?)에 걸려 상패는 어디 갔는지 지금도 모른다. 아쉽다.
그리고 15년 뒤, 부산시장과 교육감이 축사를 한 PSB 부산방송 문화 대상 수상자로 임시 사옥 무대에 선다. 문화 예술 부문 이** 전 신라대 사범대학장과 또 다른 실업인. 견지로는 사회봉사 부문에 해당되었다. 견지로가 교내 사고 때문에 너무나 아플 때에 받은 상. 상금으로 시민상의 열 배나 되는 1천만 원. 그러나 견지로는 별 기쁘지 않았다.
아무리 이** 교수가 문단이며 교육계 선배라도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엄청난 많은 문학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견지로는 등단 25년이 되었는데, 문학상 하나 없다는 열등감에 좌절감에 빠져 있었으니까. 하여튼 수상 이후 상금 1천만 원 중 기십 만원만 쓰고 남겨 두었다. 그리고 딱 십 년 뒤에 용인에 올라와 어떤 경로를 통해 전액을 사회로 환원했다.
여담 하나. 동(同) 대학교 전 총장과 그 무렵 인연이 있었다. 그가 견지로에게 언질을 주었었으니, MBC 문화 시민상을 받을 만하니, 때가 되면 추천하라는 거였다. 자기가 심사 위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아닌가! 연말에 그의 연구실로 전화를 했더니 조교가 하는 말이다. 그가 1년 동안 캐나다에 머무르게 되었다는….부랴부랴 방향을 틀어 PBC(현 KNN)으로 방향 전환을 했는데 그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수상 소감 때 김상국 앞에서 그의 히트곡 ‘불나비’를 목메(?) 부른 게 기억에 남고말고.
견지로는 가만있지 않았다. 노인의 삶을 예찬하는 일에 문인들을 동참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지역 사회 인사들과 함께 전국에서 처음으로 노인문학상(덕토실버문학상)을 제정 운영한 것이다. 딱 두 번으로 그쳤지만, 총 8백만 원이 소요되었다. 점심 식사를 대접할 수 없어 그 추운 날 주먹밥으로 대신했다. 5전투 비행단 부사관들과 경혜여고 학생들 등이 손을 녹여가며 작업에 동참하였고. 비닐봉지 안에 주먹밥 두 개씩. 그때 울먹이며 부르던 ‘굳세어라 금순아’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자신은 받으려 해도 안 되던 문학상을 만들어 전국 규모로 확대해서 시행했으나 견지로의 마음은 여전히 슬펐다. 그 흔한 문학상은 견지로에겐 땅에서도 솟지 않았고 하늘에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순서를 뒤바꾸어 한 번 한탄해 보자. 문인이라면 모름지기 문학상을 탐한다. 그러나 그건 견지로에겐 30년 넘게 ‘해당 사항 무’였으니 실로 기가 막혔다. 남들은 등단 10년이 안 되어 **문학상을 받는 게 예사였다. 여기 올라와서, 그러니까 두서너 해가 지난 뒤, 그쪽에다 타진을 했더니 대답이 사람의 간을 뒤집어 놓는다.
문학상은 문학만으로 되는 게 아니란다. 스스로 인간성을 한 번 반성해 보라나? 세상에, 문학상이 인간성이 나쁘면 안 된다니, 할 말은 없다만 그렇게 하면서까지 하며 사람을 폄훼하니 상대가 원망스러웠다. 더구나 그가 참척을 겪고 낯선 땅에 올라와 울면서 거의 죽음 직전의 세월을 보내던 때 아니던가.
‘하기야’라는 부사를 전제로 하면 일찍이(?) 문학상을 견지로가 받은 적도 있다. 98년도, 견지로의 몸부림을 딱하게 본 어느 동료 문인이 주선하여, 서울 모 단체에서 주는 ** 문학상 시상식에 세워 준 것이다. 하지만 옛 명성은 어디 가고 진짜 문학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뭐가 어수선했다. 단 하나는 기억에 남는다. 수상자 소감 때, ‘목포의 눈물’을 불렀는데, 기가 막히려고 해서 그런지 어느 인사가 연주하는 톱 반주에 맞췄다는 것.
어쨌든 엄청난 불행을 겪고 나서 늘그막에 타관에 올라왔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상은 여기저기서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마구 퍼부어대는 게 아닌가! 바야흐로 지금도 혼란에 빠져들게 한다. 황조근정훈장쯤은 울고 갈 상이 '부산교육상'이다. 부산에서 무료 노인학교 운영과 우리 민요 보급에 노력했다는 걸 인정, 고향을 떠난 나를 수상자로 선정해 준 것이다. 상금이 없지만 무어 어떠랴. 견지로가 퇴임 후에 딱 한 번 선거 운동 찬조 연설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를 진심으로 선배 대접을 해 주는 정말 교육의원 감이 되는 교육장 중등교육과장 중학교장 등을 역임한 인사다. 한데 역시 3번을 추첨한 게 결정적 패인이었다. 1번이 당선될밖에. 그 친구는 그 뒤로 교육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를 깍듯이 형님으로 대접했다. 두 번이나 서류를 내서 미끄러진 견지로에게 기어이 부산교육상 수상자로 뽑아 준 것이다.
이윽고 그보다 몇 배나 비중이 있는 ‘화쟁문화포럼문화대상’ 문화부문 대상이 견지로에게 안겨졌다. 전 통도사 주지 스님과, 세계적인 선화가인 망운사 주지스님,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 기(旣) 수상자인 상이다. 견지로의 문학을 비로소 여럿이 인정해 준 것이다. 비로소 PSB 문화대상 때의 열등감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그래 문학상! 그 얘기를 이제 좀 하자. 그는 문학상을 위하여 후배들에게도 고개를 숙여 부탁하였다. 때론 편지도 보냈고말고. 전화도 걸었다. 그런데 거짓말같이 그것들이 몰려왔으니, <문예시대> 문학대상(부산)/ 한국수필 제정 청향문학상(서울)/ 부산가톨릭문학상(부산)/ 부산수필대상(부산) 등등. 피나는 창작의 결실이 아니라, 지저분한 로비(?)의 대가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나 기왕에 받았으니 왜 후회야 하겠는가? 그 중에서도 ‘부산가톨릭문학상’은 잊을 수 없다. 그 상은 부산가톨릭문인협회장을 지낸 사람만 주는 불문율이 있는데, 심사위원들이 측은지심을 보인 결과랄 수밖에. 시상식에서 견지로는 복음 성가 ‘주여 이 죄인을’을 불렀다. 견지로 주위에는 장애인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 가족들 여남은 명이 같이 서서 견지로에 이어 ‘가슴 아프게’로 축하해 주었고. 몇몇이 눈시울을 적셨고말고.
이제 견지로는 상에 욕심이 없다. 이만하면 됐다고 부르짖는다. 다만 가수로서 26사단과 서울 인사동 뷔페에서, 장병들과 노인들을 대상으로 ‘부산 노래’ 열아홉 곡을 십 년쯤 부르면, 부산시 문화상 대중 예술상을 받을지 모르겠다는 헛꿈은 꾼다. 그때까지 살까?
그런데 바로 며칠 전 부산북구문인협회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은 것이다. 상금 없는 '북구문학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견지로는 아연실색했다. 아니 마지막 전국 단위 위 두 문학상을 겨냥(?)하는 중인데, 고작 직할시 자치구 문학상을 받으라고?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녘에 서둘러 회장에게 백배사죄하는 전화를 넣었다. 견지로가 혼신의 힘을 퍼부어 창립한 북구문인협회요, 그의 손으로 원고를 모으고 광고를 얻어 만든 <부산북구문학>인데, 그 상을 외면하다니 건방을 떨어도 너무 떨었다고 사과를 했다. 그 상의 마지막 막(幕)을 '북구문학상'으로 내릴 테니, 노여웠다면 풀고 제발 내게 달라고. 회장은 그러겠단다. 너무나 크나큰 충격, 참척을 겪었었던 곳에서 이승 마지막 상을 받는다. 귀향의 의미가 정말 복잡하다. 하나 털어놓자, 여태 그는 모든 상금을 다 되돌렸었다, 사회로. 2천만 원이 넘는다. 이번엔 그가 십만 원 짜리 수표 몇 장을 도로 북구문인협회에 내놓을 참이다.
죽어 저승에 가면, 견지로는 그의 임에게 이 전말을 상세히 이야기하려 한다. 손일학과의 화해? 글쎄, 그건 견지로가 지하철을 탈 수 있고 나서야 가능하겠지.
원고지 85장 분량입니다.
2016. 4. 9
250행 원고지 85장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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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고지 85장의 분량인 '단편소설'이니 저서가 아니고 카페라 그런지
왠지....^^ 마우스로 주룩주룩 내리면서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