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란 흰 구름,
아오테아로아(Aotearoa)의 눈물
뉴질랜드는 다른 하나의 이름도 갖고 있다.
아오테아로아(Aotearoa), 기다란 흰 구름이란 뜻이다.
영화 <피아노> <웨일라이더> <마오리족의 복수>로 유명하다.
얼굴이고 몸이고 전신에 문신을 한 마오리인을 보면
마치 19세기 아메리카 인디언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
옛 신라인도 그렇게 문신을 했다.
최근 연구를 보니까,
성골 진골 골품제도도 같고,
머리에 새깃털 두개를 꽂는 절풍도 비슷하고,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도 유사하고,
좀생이별 신앙도 갖고 있고,
최고 높은 하느님과 그밖의 다른 하위 신을 둔 신관도 같다.
마오리인의 <나무꾼과 선녀> 버전
마오리인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늘에는 마오리어로 와이치리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여신이 살고 있었다. 와이치리는 카이탕가타라고 하는 마오리인의 젊은 용사와 사랑하게 되어 어느 날 땅으로 내려와서 사랑하는 용사와 결혼했다. 와이치리는 아오테아로아(뉴질랜드)에 몇 해 살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으나 카이탕가타와 부부싸움을 한 이후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했다. 이윽고 구름이 지상으로 내려와 와이치리를 하늘로 데려갔다. ‘카이탕가타’라는 이름의 거리가 뉴질랜드에 있는데 카이탕가타와 와이리치가 정말로 이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오리인들은 처음부터 아오테아로아에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먼 옛날에 '헤아우이스'로부터 왔다고 한다.
고귀한 야만인
마오리인은 유럽인들보다 몇 백 년이나 일찍이 ‘작은 태양’을 의미하는 ‘라 리리키’라는 별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마오리인에 관한 민속학적 연구로는 제1인자인 엘스돈 베스트(1856~1931)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마오리인은 유럽인이 여전히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고 있던 시대에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 마오리인이 사용했던 천체관측용 도구는 땅 위에 놓인 몇 개의 막대뿐이었는데, 그 막대를 별의 운행에 맞추어 늘어놓으며 관측했다. 그들은 이런 도구를 사용해서 자신들이 숭배하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에 일곱 개 이상의 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것은 마야인들과 같다.)
기묘하게도 고대의 마오리인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와 마찬가지로 태양을 ‘라’라고 불렀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을 ‘카우’라고도 불렀는데, 이 말은 마우리어로는 천체의 운행을 의미한다. 고대의 인도인은 ‘아파스(구름의 소녀)’라는 말을 썼는데, 마오리인은 ‘히네카푸아(구름의 처녀)’라고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망원경이 없던 시절에 마오리인이 목성의 띠나 토성의 테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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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의 뜻이 혹 우리말 '마을'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고,
타조 비슷하게 생긴 '모아'를 잡아먹는 사람이란 말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신라인들처럼 고래등 타는 사람(Whale Rider)인 마오리인이
주식량거리인 고래를 따라 태평양을 항해하다 아오테아로아까지 가지 않았나 하는 주장도 있다. (아래 루트 참조)
(코리안 신대륙발견/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은 신라인들이었을까?/오두)
마오리 사람들은 생명의 풍요로운 원천인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했다.
숲은 사냥꾼들에게 사냥감을 주고,
카누와 집을 만들 나무를 주며,
새들에게 멋진 깃털을 준다.
마오리 젊은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존경하고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였다.
노인들은 말이나 행동에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노인들은 함께 사냥을 하거나,
마당이나 베갯머리에서 이런 얘기를 젊은이들한테 들려주었다.
"숲의 신 타네가 자리에 모인 새들한테 말했다.
투이야, 너는 땅으로 내려가기를 그렇게 싫어했으니
비겁함의 표시로 목에 흰색 깃털 두 줄을 달아주마.
발을 적시는 게 싫다고 한 푸케코는
평생 동안 축축한 습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둥지를 만드느라 바쁘다는 피피와로로아,
너는 앞으로 둥지를 지을 필요가 없을 거다.
남의 둥지에다 알을 낳게 될 테니까.
하지만, 키위야,
너는 희생의 대가로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새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예전의 우리처럼 마오리 세계에서는
어른이 섬김을 받고 젊은이들은 튼튼하고 용감했다.
<슬픔의 시작>
평화롭기만 하던 아오테아로아 마오리 사람들에게
슬픔의 먹구름이 덮히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백인들이 배를 타고 몰려들면서부터이다.
전쟁이 터지기 한 해전,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다"란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왔다.
찰스 로버트 다윈을 태운 영국의 비글호는 1831년 12월에 영국을 떠나 5년간 남아메리카, 호주, 뉴질랜드, 갈라파고스 섬 등을 샅샅이 조사했으며, 그 자료를 토대로 다윈은 1859년 종들은 자연이 특정 환경에 가장 잘 맞는 동식물을 선택하기 때문에 진화한다는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사람세상에서도 무조건 싸워 이기는 것이 정의라는 이상한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총과 대포가 없이 자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졸지에 야만인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패배한 자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중에 뉴질랜드로 이름이 바뀐
기다란 흰 구름, 아오테아로아(Aotearoa)의 토착민 마오리인들은
1860년,
야금야금 땅을 빼앗아가던 식민지 종주국 영국에 대해 무장봉기의 깃발을 들었다.
평소,
‘여자들과 땅은 남자들을 죽게 만드는 원인이다.’
하며, 이웃 부족들과 싸움을 벌일 때만해도
아이들 싸움이었다.
하지만, 총과 포를 갖춘 영국군 14,000명과 맞서
숲의 사냥무기로 싸운다는 것은
애당초 바위에 계란 던지기 식이었다.
(영국은 본토에 있는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뉴질랜드 타라나키에 투입했다.)
12년(1860~1872)동안 벌인 전쟁이 끝났을 때,
40만이던 마오리인의 인구는 4만 명만 남았다.
10명중 9명이 죽은 셈이다.
마오리인들은 왜 이런 바보 같은 싸움을 벌였을까?
문제는 땅이었다.
마오리인들에게 땅은 생명이고 삶이었다.
선조를 기억하고 존경하면서,
같은 피붙이와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땅의 주인으로서 공동체적 일체감을 갖는 것이
후손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하며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땅을 남에게 함부로 넘겨주는 행위는
선조에 대한 반역행위로서 규탄 받았다.
1600년대부터 유럽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더니,
1769년, 영국의 쿡선장이 상륙하여 식민지발판을 마련하고,
1814년, 영국 선교사들이 대대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영국 감옥에서 풀려난 죄수들도 몰려들어 총포를 팔아 부족 간 싸움을 부채질하고,
바다에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이 무력을 과시했다.
혼란에 빠진 마오리인들은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부족을 지켜달라고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식민지를 얻을 수 기회라 여기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와이탕기(Waitangi) 조약”을 맺었다.
와이탕기(Waitangi) 조약
제1조: 마오리의 모든 추장들은 그들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주권을 영국 여왕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절대적으로 이양한다.
제2조: 영국 여왕은 추장들과 부족들의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토지를 매도할 경우에는 반드시 여왕의 대리인과 협의하여 여왕에게 먼저 토지의 구입권을 양도한다.
제3조: 영국 여왕은 뉴질랜드의 마오리 원주민들에게 왕실의 보호를 확장하여 영국민의 권리를 부여한다.
마오리인들이 ‘테리히 파케하(백인들의 분노)’라 부른 마오리-영국간 12년 타라나키 토지전쟁은 이 조약이 불씨가 되어 시작되었다.(영국에서는 마오리전쟁이라 한다.)
문제는 조약문, 특히 제1조의 주권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마오리인이 쓴 "카와나탄가"(kawanatanga)는 외교상 "주권"(sovereignty)을 뜻하는 것으로, 비록 영국의 보호를 받지만 생명 같은 “땅의 소유권”을 절대 남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영국은 마오리인들의 손으로부터 “땅의 소유권”을 완전히 빼앗겠다는 의도로 그것을 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governance)이라 읽었다.
영국 여왕에 대한 충성선서를 거부하는 마오리 의원(2012. BBC)
"와이탕기조약은 무효이며, 모든 토지는 우리것이다"
영국이 토지매수를 본격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하자,
마오리인들은 조상의 혼과 숨결이 서린 오랜 공동체 땅을
헐값에 팔지 않겠다고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마오리인들은 토지의 84%인 130만에이커 땅을 영국한테 강탈당했다.
그리고 오지나 빈민가로 내몰렸다.
그 자리에 백인들은
양을 방목하고
아름드리나무들을 벌목하고
석탄을 채굴했다.
타라나키 토지전쟁 직후 4만명이던 마오리인들은
140년이 지난 이제 50만을 회복했다.
뉴질랜드 420만 인구 중 13%가 마오리족 후손이나,
아직 '제3등국민'으로 빈곤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상 최고의 낙원>이라는 뉴질랜드,
거기엔 아직도
아오테아로아(Aotearoa) 토착민 마오리인들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