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뜨거워지기를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게 미지근함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고, 어떤 사람은 수요일에 운동하러 가는 거처럼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거 정도로 여긴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무신론을 주장한다면 그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을 반대하고 부정하며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서로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미지근한 신앙은 뜨거움과 차가움도 아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서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신다. 뜨거워지고 밝아지기를 바라신다. 신앙은 무엇보다 먼저 마음 안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시작되는 곳이고 근본적인 선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은 그곳에 하느님 한 분만 계시게 한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가난하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느님 편이거나 그 반대편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 중간은 없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그 당시 세관장은 마을에서 공적인 왕따였다. 예수님을 한 번 뵈려고 했는데, 키가 작은 그에게 아무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과 만남은 꿈도 꾸지 않았을 거다. 단지 호기심에서 보고 싶었을 거다. 예수님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님은 한 번에 훅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셨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게 더 쉬울 거라고 하셨는데, 그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율법에 따르면 남의 소유물을 훔치면 두 배로 갚아 주면 됐는데(탈출 22,3.6), 그는 네 곱절로 갚겠다고 했다. 예수님과 만남으로 뜨거워진 마음은 율법을 넘어선 행동으로 이어졌다.
뜨거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동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가르친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내 안에 하느님이 없으면 나는 먹고 마시고 돈 벌고 치장하고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슬프게 죽는 참으로 어리석은 속물이 될 수밖에 없다. 죽으면 황금 옥좌에 임금님처럼 앉아 계신 하얗고 긴 수염의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 오른쪽에 계신 분과 내 삶을 두고 셈을 하게 된다. 동화 같은 얘긴 줄 안다. 예수님 말씀이 다 비유인 거처럼 죽음 이후 벌어질 일도 동화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동화 같은 얘기로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님을 알기에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생기를 얻는다.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이 아니면 만족이 없고, 하느님 한 분으로 다 채워진다. 미지근함을 경계해야 한다. 주일에 성당에 간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미지근한 신앙이 무슨 구원을 가져다주겠나.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묵시 3,1).”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묵시 3,17).”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하느님은 도둑처럼 찾아가신다(묵시 3,3).
예수님, 제 마음 안에 사랑의 불을 놓아주십시오. 노력해서 믿을 게 아니라 믿음의 내용을 당연한 사실로, 해가 뜨고 또 지는 거처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거로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보다 소중한 제 신앙을 지켜주시고, 아드님을 잘 따라가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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