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거기까지
거제로 와 지내면서 예상하지 못한 특이 경험을 하고 있다. 지난봄 일요일 점심나절 창원에서 고현으로 돌아가려고 팔룡동 터미널로 향했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승차권은 매표창구 종사원에게 카드를 제시하고 발권을 마쳤다. 출발 시각이 제법 남아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가 버스에 올라 기사가 승차권을 회수할 때 호주머니를 뒤지니 차표가 없어 난처했다.
평소 간편복으로 다니다가 그날은 양복을 입어 차림이 달려졌다. 지갑 대용으로 쓰는 휴대폰 껍데기에도 차표가 없어 양복 안주머니까지 살펴도 승차권은 나오질 않았다. 인터넷으로 예약된 자리라도 승차권 없이 그 버스를 탈 수 없다고 했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매표창구에서 승차권을 다시 사서 고현으로 갔다. 가서 보니 승차권은 셔츠 왼쪽 가슴 호주머니에 모셔져 있었다.
지난 유월 중순이었다. 코로나로 미루어진 학사일정으로 뒤늦게 중간고사를 보았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고사기간인데 주말이면 카풀로 다니는 지기 학교는 그 다음 주 시험이었다. 지기는 금요일 퇴근 시간이면 나를 태우려 우리 학교 앞으로 왔다. 그런데 그날은 오전에 시험을 끝낸 내가 지기 학교 근처로 갔다. 퇴근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어 그 학교 근처 숲길을 산책했다.
대금산으로 가는 등산로와도 통하는 봉산재 숲길은 산책하기 아주 좋았다. 옥포 사는 사람들이 아침이나 저녁은 물론 낮에도 더러 올라왔다. 나는 느긋하게 유유자적 두어 시간 숲길을 걸었다. 전망대에 올라 덕포 일대와 바다도 굽어봤다. 지기 퇴근 시각에 맞추어 학교로 내려가 동반석에 앉아 거거대교 진입로로 들었다. 통행료 요금소를 앞두고 휴대폰을 펼치니 카드가 없었다.
지기와는 창원의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아 금요일 집으로 돌아올 때 함께 오니 말벗이 되어 좋았다. 무임승차를 할 수 없는 지라 거가대교 통행료는 내가 계산한다. 그런데 휴대폰 껍데기 갈피에 끼워져 있어야 할 카드와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아까 지기 학교 뒷산 숲길을 산책하다 어딘가 흘린 모양이었다. 휴대폰 껍데기가 낡아 카드를 끼우는 틈이 헐거워 그럴 일이 예상되었다.
카드는 곧바로 분실신고와 함께 새로 발급 받았다. 주민등록증은 사진을 챙겨 행정 관서를 찾아 재발급 신청을 해야 했다. 나는 그간 잃어버린 경험이 적은 편이라 주민등록증 갱신도 드물었다. 언젠가 은행 창구에서 주민등록증을 제시할 일이 있어 보여주었더니 코팅 시진이 흐려 다시 내라고 해서 동사무소를 찾아 재발급 받은 적 있었다. 오래 되니 코팅된 얼굴 사진이 지워졌다.
이번에는 내 부주의로 생긴 사정이다. 문갑 서랍 봉투에서 얼굴 사진을 두 장 찾아놓았다. 주중 근무를 마치고 사진을 들고 연초 면사무소로 갔더니 담당자는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다고 해 발길을 돌렸다. 창원 집으로 돌아와 다른 사진을 찾아내 한 주 뒤 다시 들릴 셈이었다. 그 즈음 이웃 학교 근무하는 다른 지기가 전화가 왔더랬다. 그는 퇴근 후 학교 주변 숲길을 거닌다고 했다.
지기가 다닐 숲길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대뜸 전망대에서 내 카드를 주웠다면서 해온 연락이었다. 카드는 잃어버린 날 분실신고 후 재발급해 잘 쓴다고 했다. 그 주변 내 주민등록증은 있었는지 물으니 보이질 않더라고 했다. 넓은 세상이 좁게만 느껴졌다. 이웃 학교 지기가 산책 중 내 카드를 주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간 지녔던 주민등록증과 인연은 거기까지로 받아들였다.
민원업무 담당자가 원하는 규격 사진을 들고 다시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짧은 시간 정한 절차 따라 재발급 신청을 마쳤다. 보름 뒤 새로운 주민등록증이 나올 거라고 했다. 그새 임시로 사용 가능한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 확인서’를 끊어줄 수 있다고 했으나 사양했다. 집에 어딘가 보관 중인 운전면허증이 떠올라서다. 장롱 면허증을 꺼내 휴대폰에 끼워 약국에서 마스크도 사곤 한다. 20.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