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우리 집 마 16:13 ~ 18 18/06/17
존 하워드 페인은 열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있다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그는 연기에 재능이 있어서 배우가 되었다. 그의 연기는 뛰어나서 영국으로 진출한 최초의 연예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프리카에 있는 튀니지란 나라의 미국 영사로 근무를 했다. 튀니지에서 영사로 근무한지 10년째가 되던 해인 1852년 4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튀니지에 묻혔다. 그로부터 31년의 세월이 흘러간 1883년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어 그의 유해를 미국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그의 유해가 미국 뉴욕항에 도착하던 날 뉴욕사상 최대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귀국을 개선장군 맞이하듯 환영했다. 군악대의 밴드가 조가를 연주했고 길에는 조기가 나부꼈다. 그의 유해는 다시 특별열차 편으로 미국 수도인 워싱톤으로 옮겨졌고 워싱톤 중심가 펜실바니아가를 퍼레이드한 후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터(Chester A.Arthur)와 국무위원의 정중한 영접을 받은 후 오크 힐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경우는 없다. 존 하워드 페인은 한 때 잘 나가던 배우였다. 그러다가 튀니지국가에서 미국영사로 근무한 것 밖에 없는 사람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환영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가 만약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그가 죽었을 때 바로 그의 시신을 본국으로 모시고 와서 영결식을 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무려 31년 후에 미국에서 국가적인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존 하워드 페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특별히 잘 한 것은 없다. 그런 그가 그렇게 전 국민의 환영을 받은 이유는 바로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랫말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가 오페라에 들어가면서 인기를 얻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고향의 봄]처럼 미국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라면,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는 자기가 떠나온 집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60년대와 70년대에 아주 많이 불렸던 적도 있다.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 뿐이리...
즐거운 나의 집의 영어로 된 제목은 Home sweet home이다. Home과 House는 뜻이 천지차이다. 하우스는 그야말로 집을 가리킨다. 하우스는 건물을 가리키고 홈은 가정이라고 번역해야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생활하고 잠을 자는 집이야 어느 곳이든 집일 수 있다. 그러나 가정은 가족이 있어야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여럿이 살아도 그건 가정이 아니다. 그에게는 가정이 없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므로 가정이 해체되었다. 그의 생활은 자세히 모르지만 배우로 잘 나가던 때는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여자 팬들과 어울리며 쾌락을 누리며 살다가 이혼하며 가정이 깨어지지 않았나 싶다.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의 원래 가사는 이렇다.
'Mid pleasures and palaces though we may roam,
환락과 궁궐 가운데를 방황할지라도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초라하지만 나의 집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네.
그래서 늙은 나이에도 가정이 없이 외롭게 살다가 조국을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면 홈 스위트 홈이란 노랫말을 지은 것 같다. 그는 죽기 한 해 전 친구에게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는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하고 말 것이오.” 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그는 “내게 돌아갈 가정은 없지만 고향 공동묘지에라도 묻히게 해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유언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노래로 미국사람들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깨우쳐 건강한 가정들로 새롭게 되는 일들이 아주 많아졌다. 그래서 미국정부에서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해서 그렇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준 것이다. 죽어서야 집을 구한 그의 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주신 존 하워드 페인. 편안히 잠드소서. 가정이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하게 된다. 존 하워드 페인은 가정의 소중함을 깨우친 공로로 나라를 구한 영웅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만한 공을 세운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위해 두 가지 공동체를 세워주셨다.
하나는 가정이다. - 하나님이 친히 가정을 만들어주셨다.
그런데 가정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함께 모여 사는데 어려움이 있다.
문제없는 가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가 혈기가 많아 폭풍전야와 같은 분위기에 사는 가족들도 많고, 어머니가 동창회다 계모임이다 하며 밖으로 돌아다니는 가정도 있고, 공부를 하지 않고 게임중독이 된 자녀들이 있어서 부모들이 한숨 쉬는 가정도 있다. 또는 불량청소년이 되어 부모에게 큰 근심이 되는 자녀를 둔 가정도 있다. 아니면 모든 가족이 반듯하고 모범적으로 살면 가족 가운데 한 명이 큰 사고를 당하거나 암이 걸려 어두운 그늘에 살고 있는 가정도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든 것은 가족들끼리 생각이 다르고 습관이 다른 것이 제일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요즘 청년들은 자기 수입이 있으면 결혼 전에도 가정을 떠나 독립하여 사는 경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부모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고 맘대로 살고 싶고 또 가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가 다시 한 번 유행했으면 좋겠다.
가정의 소중함을 모르고 산다. 가족들끼리 부딪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내가 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키워졌다는 감사함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아프고 실패해 봐라.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그래도 가족은 다르다. 서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도 가족이 어려움을 당하면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은 가족밖에 없는 것이다.
집과 가정을 떠나 밖에서 얻어먹고 공원이나 지하철역에서 잠을 자는 자들을 노숙자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런 이들은 홈레스라고 부른다. 집이 없는 자가 아니라 가정이 없는 자란 뜻이다. 그들은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 가정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바깥 생활을 하는 자들로 보인다. 자신이 실패하여 가족에게 부담을 주든지, 가족이 못마땅하더라도 함께 살며 위로받고 도와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가정이 필요하여 가정을 세워주신 것이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며 이제 성장했다면 가정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 도리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또 하나는 더 세워주신 것이 교회다.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교회는 주님이 친히 세우신 곳이다.
교회를 세워주신 목적은 무엇일까?
가정은 우리의 육신을 위하여 세워주신 것이라면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세워주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신약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므로 복음을 듣고 믿고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일일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세워서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말씀을
배워 진리를 깨닫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교회를 세워주신 것이다.
그런데 교회도 가정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다
가정도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사기 때문에 갈등과 다툼이 있다. 그처럼 교회도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갈등도 있고 다툼도 있다 사람마다 생각과 판단이 다르므로 못마땅한 부분도 생기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성령의 은혜가 충만했던 초대교회에서도 그런 갈등과 분열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가나안교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가나안교인이란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란 뜻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목사나 장로들이 하는 꼴들이 보기 싫어서 교회는 안 나간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살펴보자.
첫째로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으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집에서 중계되는 예배실황을 따라 찬송을 부르느냐고 물어보면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고 하기 싶다. 교회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텔레비전으로 예배를 보는 것은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드려야 한다. 예배순서 순서에 따라 내가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참여할 때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헌금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헌금생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예물을 드리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주님께 봉사할 기회가 없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당연히 내가 몸과 마음과
재능을 사용하여 주님을 섬겨야 한다.
넷째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동안 믿음이 자랐느냐고 묻고 싶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자는 성경을
읽거나 경건서적을 읽어가며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도 목사와 장로들이 하는 꼴 보기가 싫어서 나가지 않는 자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것이다. 나는 너희들하고 수준이 달라! 이런 마음의 자세가 있는 것이다. 자신은 아주 똑바로 믿고 똑바로 사는 줄 착각 하지만 사실은 성도의 기본적인 것을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교만이 가장 큰 죄란 것을 전혀 모르는 무지한 짓이다.
가정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이 부족하더라도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부족하고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고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도 주님의 교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가족 가운데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는 자가 있다고 가정을 버리고 나가는 것은 그 자체가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가정의 구성원들 가운데 힘들게 하는 가족이 있다고 전부 가정을 떠난다면 가정을 해체되고 어린 자녀들은 고아처럼 살게 되었을 것이다. 가족들 가운데 습성이 좋지 못하여 날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이 살아도 가족들이 참고 견디며 그래도 제 할 일은 묵묵히 해 왔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동체는 서로가 양보하고 희생하고 섬겨주며 기다리는 가운데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혼자 잘났다고 뛰쳐 나가는 자는 교만한 자며 무책임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영육 간에 노숙자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9) 하나님의 권속이란 말은 하나님의 가족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교회란 영적인 가정을 세워주신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가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족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속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처럼 가정과 교회의 구성원으로 인해 힘든 부분이 있어도 내 가정이고 내 교회이므로 떠나지 않고 그 공동체가 즐거운 우리 집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도들 개개인이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를 즐거운 우리 집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세워주신 가정과 교회를 소중히 여기며 가정과 교회를 아울러 잘 섬기는 구성원들이 되어야 영육 간에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