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실물
강 문 석
인생 일흔 고개를 넘고부터는 깜박이는 기억력으로 자주 황당한 일을 당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도 노인성 치매가 찾아온 것 아닌가싶어 바짝 긴장하게 된다. 내게 만약 치매가 왔다면 그동안 멈추지 않고 마셔댄 술을 그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옛 직장 선후배 중에도 건망증을 밖으로 드러내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들이 얼마나 자주 소지한 물건을 잃어버렸으면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마저도 몸에다 묶듯이 한다. 어쩌다 단체사진이라도 찍을라치면 대각선으로 양복저고리에 걸친 가방 끈이 여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몸에서 떼어놓으려고하면 본인들은 질색을 한다.
직장은퇴자 모임에 새로 생긴 갈매기합창단 연습을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토요일 오후시각 시발역에서의 전철 안은 많이 한산했다. 열차가 한 시간가량은 달려야 갈아탈 수 있기 때문에 배낭을 벗어서 아예 선반 위에 올렸다. 그러곤 스마트폰을 꺼내 카톡에서 합창단 그룹채팅을 열었더니 합창연습은 일요일이었다. 일주일 전 첫 연습에 빠진 때문에 그날 일요일로 바꾼 걸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3개 역을 지났을 때 그 사실을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선반 위에 얹어둔 배낭은 까마득하게 잊고 전철을 내렸다. 승차했던 역으로 되돌아와 자전거로 갈아탈 때에야 등짝이 허전해서 배낭이 떠올랐다.
전철역 사무실엔 사십대로 보이는 남자직원뿐이었다. 그는 순진해보이면서도 표정은 어두웠고 행동이 굼떴다. 유실물 신고를 접수하는데도 같은 말을 두세 차례씩 물었다. 그러다가 제복 입은 여학생들이 대여섯 사무실로 들이닥치자 그들을 따라 사무실을 나가고 말았다. 그가 열쇠를 꺼내느라 열어놓은 책상 서랍엔 만 원짜리 지폐로부터 동전까지 돈이 잔뜩 들어있었다. 생판 모르는 노인에게 금고까지 맡기고 나간 꼴이었다. 유리문을 통해 내다보니 그는 두 대의 요금발행기 앞면을 열어 요금만 삼키고 표를 내놓지 않은 기계의 승차표를 손으로 뽑아서 건네주고 있었다. 속이 타는 나와는 달리 그는 참 느긋했다.
한 시간 반은 지나야 종점에 닿는다는 열차를 그는 자신의 짐작으로 적당한 중간 역을 두 개 찍었다.내가 보기에는 그가 찍은 열차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내 의견에 대해선 답하지 않고 열차에 사람을 올려 보내어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쪽 역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이 느린데다 눈이 본 번호를 머리가 기억하질 못하는지 여러 차례 통화를 실패하고 있었다. 속이 터져서 내가 아는 교통공사 직원에게 부탁해볼까 물었더니 그는 펄쩍 뛰었다.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원성을 듣지 않으려고 면피성으로 형식만 갖추는 응대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종착역 전화번호만 확인한 후 그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집으로 향하면서 분실한 콜맨배낭을 떠올렸다. 몇 년 전 가고시마 여행에서 돌아오며 후쿠오카공항 면세점에서 일본돈 남은 것을 처분하느라 구입한 배낭이었다. 색깔이 녹색이어서 어깨에 멜 때마다 젊은 날 병영생활이 생각났고 웬만큼 큰 물건들까지도 들어가서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오늘 배낭에 든 것 중에선 ‘똑딱이’로 불리는 디지털카메라가 애지중지하던 물건이었다. 손안에 쏙 들어가는 편리성 때문에 그동안 이 카메라만 혹사를 시켰었다. 일전 서울 용산전자랜드 캐논서비스센터에서도 수리를 받아주지 않던 카메라였다. 스스로는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던 물건인지라 한편으론 미련 없이 잘 사라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종착역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은 직원의 앳된 음성은 발표에 나선 여학생처럼 또박또박하게 들렸다.유실물을 신고했던 역 직원과는 대조적이었다. 녹색배낭이란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 있어요.”란 대답이 들렸다. 잘 보관하고 있으니 천천히 오셔도 된다고 했다. 마흔 중반에서 예순 무렵까지 인생 황금기를 보냈던 동네의 성당교우들이 중국으로 성지순례를 떠난다면서 우리 부부를 초청해주었다. 온천동 떠나온 세월이 십 수 년이나 지났건만 잊지 않고 불러주니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지 몰랐다. 그런데 난 여행을 떠나는 전날이면 평소 미루고 있던 정리를 하는 버릇이 있어 그때마다 아내의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어떤 때는 거의 밤을 꼬박 새고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집을 나서기도 했다. 그날도 피곤에 젖은 몸으로 항공기에 올랐고 아내는 그날따라 승무원들에게 깡통맥주를 추가로 주문하여 나에게 자꾸만 권했다. 항공기에선 기압 때문에 지상의 몇 배나 취기가 오른다는 것도 잊은 채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맥주를 계속 들이켰다. 그러다가 기내에서 파는 면세품 이어폰을 사느라 꺼낸 지갑을 그대로 좌석에 두고 내렸다. 북경공항 입국심사장에 길게 줄을 서서야 지갑을 빠트린 걸 알았다. 분실신고를 하겠다고 유실물센터를 찾아갔지만 근무자들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야릇한 웃음까지 흘리고 있었다.
일본 같았으면 바로 찾을 수 있는 물건을 이들은 승객을 오히려 조롱하는 듯했다. 그것은 어쩌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여행에 함께 나선 사제도 옆에서 걱정해주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때는 분실을 대비해서 미리 돈과 신용카드를 나누어 트렁크에 넣는데 이날은 부부가 닷새간 쓸 돈과 카드가 몽땅 그 지갑에 들어있었다. 지갑 분실 때문에 중국 토산품이나 기념품은 물론 옵션 하나 없는 알뜰여행 기록을 세울 순 있었다. 오래 전 현직 때 일본 다테야마를 처음 올랐을 때였다. 산행 도중 비를 만나면서 안개까지 겹쳐서 카메라에 장착한 이백 밀리 줌렌즈가 필요 없게 되었다.
주등산로인 능선에서 비를 피할 곳이라곤 없는데도 급하게 렌즈를 갈아 끼웠다. 그러면서 카메라에서 뺀 줌렌즈를 그 자리에다 두고 하산했던 것. 빗길에 다시 산을 오르기도 어렵고 등산객들이 오가는 능선인지라 누가 주워갔을 것 같아 렌즈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금 올라가면 반드시 그 자리에 그대로 렌즈가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큰소리는 틀리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이 고가품일수록 반드시 주인이 다시 찾으러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손대지 않는다고 했다. 이론은 쉽지만 실천하긴 어려울 터인데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