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로 공부를 한 사람.
지인이 어느 날 학교 선배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땅 걷기 이야기가 나왔단다.
그 선배가 우리 땅 걷기 대표인 ‘나’를 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나더러 ‘야매’로 ‘공부를 한 사람이라고 평한다.’고 하더란다.
그 자리에서 피식 웃고 말았지만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내가 어떤 대상들과 야매를 했단 말인가? 그들이 ‘야매’라는 말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알고나 하는 말인가?
‘야매’는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다. ‘야매’는 일본어인 야미(yami; 闇)에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말로 뒷거래(남의 눈을 피하여 뒤에서 하는 정당하지 않은 거래)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하고 서로의 삿된 이익을 위해서 뒷거래를 한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허락을 받지 않고서 사숙(私淑.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도(道)나 학문을 본받아서 배우는 것을 이르는 말. 사(私)는 절(竊), 즉 ‘남 몰래 마음속으로’라는 뜻이고, 숙(淑)은 선(善)을 말함) 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니, 너무도 많다. 그 이유는 내가 삶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분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최초로 내 가슴을 열고 들어왔던 매월당 김시습이 최초였고, 그 뒤로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지드,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에픽테토스, 키케로 등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은밀하게 뒷거래를 튼 게 아니었던가.
나는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옛 사람들이 쓴 책의 바다와 이 땅의 산천을 떠돌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나쁘게 말해서 '야매' 좋게 말해서 오늘날의 홈스쿨"을 한 것이다.
내가 야매로 배움을 받았다는 그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은 다 정규교육을 배운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 속에 의외로 그 사람들이 말하는 ‘야매‘로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화담 서경덕,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으로 혼자서 공부한 사람이고, 헤르만 헤세나, 허만 멜빌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이나 작가들도 대학을 나오지 않고서 세계문학사상 위대한 작품들을 남긴 사람들이다.
일례를 들러보자. 영국의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는 대부분 독학을 하거나 친척으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았지만 40세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몹시 게을렀고 아버지는 관대했다.
그의 나이 13세에 아버지는 허버트를 엄격하기로 소문난 백부 밑에서 공부하도록 힐튼으로 보냈다. 그러나 허버트는 곧 달아나서 더비에 있는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다. 첫날은 48마일, 둘째 날은 47마일,세 째 날은 20마일을 약간의 빵으로 때우며 걸어왔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2.3주가 지난 후 다시 힐튼으로 돌아가서 3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정규교육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 역사. 자연과학. 일반문학도 배우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 <일리아드>를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6권 쯤 읽자 더 이상 읽는 것이 지겨워졌고, 끝까지 읽는 것보다는 대금大金을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생계를 위해 일했다. 그의 직업은 철로나 교량의 측량사, 감독자. 설계사, 일반적으로 말하면 기사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명을 시도했으나 그는 언제나 실패했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종합철학체계(The Synthetic Philosophy)』를 저술한 허버트 스펜서는 그가 주장한 무수한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것들을 어디에서 찾아냈을까? 그는 대부분 그러한 사실들을 독서가 아닌 직접적 관찰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의 호기심은 항상 날카로워서 그는 언제나,....그때까지는 그만이 알고 있는 주목할 만한 현상에 상대방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를 지켜보았던 지인의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받은 철저하고 엄격한 천재교육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해서 허버트 스펜서는 영국을 빛낸 철학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대해大海의 스쳐 지나가는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한 스펜서는 정부기관을 믿지 않았다. 그는 우체국을 통해 원고를 보내지 않고 직접 인쇄소로 들고 갔으며, 개성이 강해서 독자적인 생활을 고집했다.
어떤 사람은 정규교육이 맞지만 어떤 사람은 정규교육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교육이 더 들어맞는데, 스펜서의 경우가 정규교육과는 맞지 않고 독학이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는 정규교육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에머슨의 글을 보자.
“무엇이 어떻든 나는 아이를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혹독한 학교 선생의 우울한 기분에 맡겨 두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를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짐꾼들같이 하루에 열 너댓 시간이나 고역과 노동에 매어 두 어서, 그 아이의 정신을 퇴락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외롭고 우울한 기분에 잠겨서 서적 공부에 철없이 열중하게 하고, 이런 기분을 가꾸어 주는 것도 좋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는 사람과의 교제에 서투르고, 더 좋은 직무를 회피하게 돕니다. 우리시대에 분에 넘치게 학문을 탐하다가 천치가 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옛 격언에 말하기를, 프랑스의 예지는 일찍 총명해지고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프랑스의 어린애만큼 귀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사람들이 품고 있던 희망을 배반해서, 어른이 된 뒤에는 아무런 탁월한 점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어린이들이 그처럼 많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이렇게 바보가 된다.‘ 고 지각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아이들의 방에서나 정원에서나, 식탁에서나 잠자리에서나, 혼자 있을 때나, 친구와 함께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모든 시간이 한가지이며, 어디 있어도 공부가 될 것입니다.(....)
교육은 늘 있는 식이 아니고, 엄격한 온정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린애들이 글을 배우게 유도하는 대신에, 징그럽고 잔혹한 심술로 남을 해롭게 하는 행위밖에 내놓지 않습니다. 폭력과 강제는 그만두십시오. 내 의견으로는 이보다 더 심하게 점잖은 집 아이를 둔하고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업습니다. 그가 수치와 징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싶더라도 거기에 굳어지게는 하지 마십시오. 땀과 추위, 바람, 태양, 위험들을 가소롭게 보도록 길들이십시오.
예쁘장한 멋쟁이를 만들지 말고 발랄하고 억센 사내가 되게 하세요. (...)
학교란 정말로 어린애를 가두어 두는 감옥입니다. 그들이 방탕아가 되기 전에 처벌하여 방탕아를 만듭니다. 그들이 공부할 때에 학교에 가보세요. 들리는 것은 고초 받는 어린애들의 울음소리와, 화가 치밀어 정신을 잃은 선생들의 고함소리뿐입니다.
이렇게 연하고 겁 많은 어린 마음들을 손에는 채찍을 들고 시뻘겋게 채찍을 들고 시뻘겋고 무서운 얼굴로 지도하다니,
이것이 아이들에게 공부할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이겠습니까? 부당하고 해로운 방법입니다. 그뿐더러 쿤탈리아누스가 적절히 지적하였듯, 이런 강압적인 권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특히 우리의 처벌 방법이 그렇습니다. 교실은 피 묻은 회초리 동강이보다는 꽃과 잎새를 깔아 장식하는 일이 얼마나 아담한 일입니까. 나 같으면 철학자 시프우시포스가 학교에서 하던 식으로, 거기다가 기쁨, 즐거움, 플로라(꽃의 신을 가리킴), 우아의 여신들을 그려 붙이게 하겠습니다. 이익을 얻는 곳에 즐거움도 있어야 합니다. “
<몽테뉴의 수상록>에 실린 글이다.
내가 ‘야매’로 교육을 받았다면 앞에서는 말하지 못하고 뒤에서 나에게 말을 들어오게 하는 그 사람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남들이 레일을 깔아놓은 곳에서 안전하게 걸어가는 그런 정규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조금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비바람 눈보라가 치기만 해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 그들이 배운 교육이 아닐까?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큼만 쓸 수 있다.”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실 앞에서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져 버리는 지식, 그래서 가끔씩 그들이 말하는 ‘야매’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나는 추상 속에서만 너무나 방황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점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서투른 관찰자”라고 말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의 말이 어찌 그리 맞아 떨어지는지,
시대를 뛰어넘는 스승들이 건네주는 말, 그게 참다운 공부일 것이다. 잡다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현대의 스승들, 그들을 스승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자득自得(스스로 깨달아 얻는 기쁨)의 기쁨을 ‘지상 최고의 기쁨’이라고 여기며 살자, 하면서도 씁쓸한 것이 요즈음의 내 생활이다.
허버트 스펜서는 말했다.
“나는 성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고생할만한 보람이 성공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
다시 이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삶은 진정 어렵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