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태안반도를 찾아가는 길목. 바다를 찾는 여행자들이 쌩하니 지나쳐가는 태안읍에는 정겨운 웃음과 넉넉한 인심이 함께하는 서부시장이 있다. 태안의 바다에서 나는 싱싱한 수산물은 물론이고 할머니들이 손수 캔 냉이와 쑥, 미나리 등 다양한 봄나물이 얌전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맛집들도 구석구석 숨어 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전통시장에서 장바구니 가득 태안의 봄을 담는다.
서부시장 입구에서 만난 선어 말리는 풍경 [왼쪽/오른쪽]서부시장 내부 전경 / 서부시장 입구
서부시장 입구 공터는 생선 덕장이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섞여든 비릿한 생선 냄새가 싫지 않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생선들이 훌륭한 음식으로 재탄생할 순간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태안의 아낙들은 질 좋은 선어를 사기 위해 서부시장을 찾는다. 특히 말린 우럭은 서부시장을 대표하는 명물로 태안의 향토음식인 우럭젓국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3일과 8일에 장이 섰지만 지금은 장날이 따로 없는 상설시장으로 변모했다. 200여 개의 점포와 90여 개의 노점들이 여러 골목으로 나뉘어 손님을 맞고 있다. 여행자의 장터 구경에는 지도가 필요 없다. 눈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느긋하게 걸어보자.
비 가림 시설이 되어 있는 시장 안에 들어서자 단번에 시선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호떡 좌판이다. 호떡을 뒤집는 틈틈이 새로운 반죽을 올리느라 주인장이 바쁜 사이, 손님을 맞아주는 이는 또 다른 손님들이다.
“먹어봐유. 아주 맛나. 한 개 500원이야. 어디 가서 이런 거 못 사먹어.”
나무의자에 앉아 호떡을 먹던 할머니들이 호떡 자랑을 대신 해준다. 기름기 없이 담백하게 구워낸 옛날 호떡을 먹으니 진짜 재래시장에 왔구나 싶다.
기름기 없이 담백한 옛날 호떡
뜨거운 호떡을 오물거리며 걷다 보니 수산물 골목이다. 태안의 청정바다에서 캔 바지락이 고무대야에 가득하다. 제철 맞은 주꾸미도 빠질 수 없다. 상인들은 주꾸미 값이 많이 올랐다며 손님보다 먼저 걱정이다. 그래도 관광지보다는 저렴하다고 주꾸미 한 마리를 쑥 건져 보여준다. 소라, 멍게, 갑오징어와 함께 일명 ‘쏙’이라 불리는 뻥설게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모래밭에 숨어 있는 녀석을 잡아 올릴 때 ‘쏙’ 하는 소리를 낸다는 뻥설게는 튀김이나 찜, 매운탕으로 요리해 먹는단다. 새우처럼 바삭하고 게살같이 부드러운 맛을 내는 태안의 명물 중 하나다.
파래보다는 굵고 빛깔이 검은 것은 김이다. 달래와 함께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으면 별미다. 고무대야 가득 꼼지락거리는 것들은 뻘게. 기름에 튀겨 양념장에 무쳐 먹거나 간장양념에 재웠다 먹는다. 한 그릇 가득 담고 정으로 반 그릇 더해서 5,000원인데 짭조름한 그 맛을 떠올리니 군침이 절로 고인다.
[왼쪽/오른쪽]봄철 태안의 명물인 주꾸미 / 바지락을 손질하는 아주머니 [왼쪽/오른쪽]태안에서 많이 잡히는 일명 ‘쏙’, 뻥설게 / 꽃게장과는 또 다른 맛을 내는 뻘게
비 가림 시설이 되어 있는 골목을 빠져나오니 담벼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할머니들의 좌판이다. 쑥이며 냉이에 미나리, 달래까지 봄 들녘이 길게 펼쳐져 있다.
“이 미나리 좀 봐. 내가 이거 꺾을라다가 몇 번을 미끄러질 뻔했어.”
흙물 든 거친 손으로 들어 보여주는 할머니의 미나리는 때깔이 곱고 깔끔하다. 슬쩍 데쳐 초고추장에 버무리면 딱이겠다.
“내 것도 좀 사유. 냉이랑 쑥도 있슈.”
옆에 앉은 할머니에게서 쑥 한 봉지, 냉이 한 봉지를 받아든다. 할머니들의 웃음과 이야기에 끌려 양손에 비닐봉지가 늘어간다. 대형 마트의 정돈된 진열대를 도는 기계적인 장보기와는 다른 삶의 향기도 함께 채워진다.
봄 들녘과 나란히 태안의 바다도 들어온다. 아낙네의 묵묵한 손놀림에 그릇마다 굴이 담기고, 간재미 가격을 흥정하는 대화가 잔잔한 파도처럼 오간다.
“열 명 넘게 먹어야 하는데 이놈으로 되겄슈?”
“작은 거 한 마리 더해서 5만 원에 해유.”
[왼쪽/가운데/오른쪽]봄나물이 가득 담긴 할머니들의 좌판 / 직접 뜯은 봄나물 자랑에 신바람이 난 할머니 / 봄 햇살과 함께 담긴 미나리 [왼쪽/오른쪽]묵묵한 손놀림으로 굴을 까는 아낙네 / 태안에서는 ‘갱게미’로 불리는 가오리. 잔칫상에 꼭 오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재래시장이다. 먹을거리 말고도 그냥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양한 크기의 호미와 삽, 손수레에 갈아 끼울 바퀴, 밭일 할 때 유용하게 쓰일 앉은뱅이 스펀지 의자까지 파는 만물상은 농사일을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며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안성맞춤이다.
마늘이며 대추, 감자가 담긴 바구니 옆에 노란 향기를 가득 품은 프리지아가 놓여 있다. 손님의 시선을 끌려는 요량으로 한자리 차지한 소품일까? 이것도 당연히 파는 물건이란다. 한 묶음에 1,000원. 춘심에 두근거리는 여인네의 장바구니 안에 황송하게 꽃다발까지 담길 참이다.
이불가게 앞에 내놓은 상품들은 푸근한 충청도 사투리로 눈길을 끈다.
“나는요! 3만 원만 줘유. 깎지 말구유. 골라봐유~. 여기도 봐유. 우린 1만5천 원.”
쌓아놓은 이불 앞에 애교 섞인 설명글을 함께 달아놓았다.
알록달록 꽃무늬 일바지에 뒷덜미가 푹 덮이는 모자까지 쓰면 거뜬하게 봄볕 아래로 나가 나물 캐기 삼매경에 빠질 수 있겠다. 유치하고 촌스러울수록 돋보이는 패션이다.
[왼쪽/오른쪽]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만물상 / “깎지 말구유, 골라봐유~” 애교 있는 이불가게 [왼쪽/오른쪽]봄부터 가을까지 유용하게 쓰일 꽃모자 / 향기로운 프리지아도 사지 않을 수 없다.
시장 골목 투어에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 1970년경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서부시장의 역사인데, 그 시간과 함께 지금도 손님을 맞는 식당들이 남아 있다.
먼저, 시장 골목 안 깊숙이 자리 잡은 순대집이 있다. 시어머니가 시작한 순대국밥집은 어느덧 시집 온 며느리가 함께 거드는 30년 전통의 식당으로 변모했다. 낮은 천장 아래 놓인 테이블 3개와 긴 의자 몇 개가 전부이지만 겉모습에 반비례하는 것이 재래시장 식당의 맛이라 했다. 답답하고 옹색한 공간이어도 순대 맛은 서부시장의 자랑으로 꼽힐 만하다. 태안에서 나는 마늘과 달래로 누린 맛을 잡은 순대는 시어머니가 직접 만든 작품이다. 두툼하게 썰어 내는 순대 한 접시가 푸짐하다. 시장에서 만난 친구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먹는 할머니들의 음식이 순대라면, 뽀얀 육수가 담백한 순대국밥은 시장을 찾은 아저씨들이 반주 한잔에 곁들여 먹는 술친구다. 여행자도 그들 틈에 앉아 이야기와 함께 먹는다.
[왼쪽/오른쪽]30년 전통의 할머니 전통 손순대 / 마늘과 달래로 누린 맛을 잡은 두툼한 순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운영하는 순대집이 있다면 자매가 함께 운영하는 칼국수집도 있다. 올해로 29년째 칼국수를 만들어 파는 ‘파전칼국수’집이다. 처음에 가게를 시작할 때 파전을 만들어 팔았는데 찾는 손님이 없어 칼국수만 팔게 되었다고 한다. 가게 이름을 바꾸려고 했지만 이미 알려진 이름이라 어쩔 수 없이 팔지도 않는 파전을 가게 이름으로 계속 쓰게 되었단다.
가게 이름도 특이하지만 놀라운 것은 가격이다. 단돈 3,000원. 더욱 놀라운 것은 그냥 칼국수가 아니라 바지락이 듬뿍 들어간 바지락칼국수라는 점. 내로라하는 바지락칼국수 전문점에 가도 바지락 껍데기를 찾으려면 젓가락을 휘휘 저어야 하는데, 이 집에서는 바지락을 건져 먹느라 국수를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이 바지락은 중국산이 아니라 아침마다 아주머니들이 잡아다주는 것을 쓴다고. 바지락칼국수 한 그릇에 여러 번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500원이던 칼국수 가격은 3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치며 이제 겨우 3,000원이 되었다. 다시마를 듬뿍 넣어 끓여낸 육수에 직접 썰어낸 면발과 고명으로 뿌리는 깨소금, 그리고 넉넉하게 들어간 바지락. 긴 세월 동안 칼국수의 자태는 변함이 없다.
“할매들이 이리 찾아주는데 가격을 어떻게 올려유? 언니는 끓이고 동생은 나르고, 우리 둘이 인건비 따로 안 들이고 허니께 괜찮아유. 일을 하니 건강해지고 월매나 좋아유.”
[왼쪽/오른쪽]30년 세월 동안 서부시장을 지켜온 ‘파전칼국수’집의 사장님 자매 / 가격에 놀라고 그 맛에 다시 놀라는 바지락칼국수
게장에 어리굴젓. 조기구이에 파김치, 달래김무침까지. 태안의 맛을 한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된장찌개백반은 서부시장 상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일미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호박나물에 미나리무침, 물김치, 감태무침 등 때마다 나는 먹을거리가 곁들여지는 밑반찬이 10여 가지에 이른다. 가격도 착하다. 단일 메뉴인 된장찌개백반이 8,000원이다. 짜지 않은 게장과 알싸한 어리굴젓뿐 아니라 밑반찬들 모두 칭찬 받을 만한 맛이다. 된장찌개도 일품이다. 후식으로 나오는 누룽지까지 먹고 나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진다.
간장게장과 어리굴젓을 맛볼 수 있는 일미식당의 상차림
태안의 바다로 가는 길, 태안읍내 서부시장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 시장의 맛과 인심이 바다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다.
여행정보
주변 음식점
- 할머니 전통손순대 : 순대․순대국밥 /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서부시장 내 / 041-675-4393
- 파전칼국수 : 바지락칼국수 /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서부시장 내 / 041-673-2772
- 일미식당 : 된장찌개백반 /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시장1길 35-16 / 041-674-3587
숙소
첫댓글 갱기가 넘 안좋아````````````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