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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낳으리니(3)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설 교 >
꿈--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한 방법입니다.
마 1:18-25 / 김영주 목사
아브라함 링컨은 저격 당하기 10일 전에 자신이 총에 맞아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꿈속에서 어떤 여인이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울음소리는 백악관의 지하실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던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보좌관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서 누군가의 관을 향해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링컨이 옆에 서있던 보좌관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은 누구의 관인가?"
"대통령 각하께서 저격을 당해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이 죽다니 대통령은 바로 나 아닌가?"
이튿날 아침 그는 아내에게 어젯밤 꿈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꿈이 불길하다면서 중단시켰습니다. 링컨은 이 꿈을 꾼 지 10일 만에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꿈 이야기는 아직도 백악관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특별히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인생의 갈림길에 있을 때, 장래를 위해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더욱더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런 일에 있어서는 다른 교회 신자들보다 훨씬 더 훈련되어있고,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나름대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성경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보편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은 아닙니다. 기도 중에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영역들이 환상, 음성을 들음, 금식 중 인도함을 받음 등이 해당 될 것입니다.
또 예언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성이 많습니다. 왜냐면 성경의 예언과 우리가 생각하는 예언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것인데 반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언은 장래를 점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인도함 받는 방법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과의 대화나 조언을 통해서 인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성경에 나오는 것이 꿈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말씀, 기도, 영적 지도자의 조언 등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만, 꿈을 통해서 인도하심을 받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대략 몇 가가 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꿈 중에는 대부분 깨고 나면 거의 잊어버리는 것들이기 때문에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인도 받기가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꿈이란 것이 너무 신비한 것이라 정상적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꿈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꿈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을 기억해도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네 번째는 꿈 중에 속칭, '개꿈'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들이 진짜 꿈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꿈 연구가들에 의하면 인간은 보통 하룻밤에 5-6번 정도의 꿈을 꾼다고 합니다. 1분도 못 되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고, 1시간이 넘게 긴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밤새도록 꿈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경이 약하여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아니라,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꾼 마지막 꿈만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룻밤 동안에 꾸는 꿈은 대부분 한 주제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다만 각각의 꿈은 다른 시각에서 각색되어 다르게 표현됩니다. 꿈 연구가들에 의하면 마지막에 꾸는 꿈이 모든 꿈을 하나로 종합하고 요약해준다고 합니다.
정태기 교수는 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꿈은 내 안에 존재하는 영이 나에게 전해 주는 이야기이다. 때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 졌으니 믿음의 자세를 바로 잡으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합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 곧 영이 내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 전달 통로가 꿈이다".
대부분의 꿈들은 주의를 주거나, 결정적 사건을 얘기해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셉도 그렇고 다니엘도 그렇습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의 영이 그만큼 맑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영이 어두우면 꿈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이해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이런 꿈을 통한 인도 방법이 무시되고 있습니까? 어떤 책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읽었습니다. '초대교회이후 희랍철학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희랍철학은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입니다. 이 철학풍조가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신자들도 희랍 사상에 영향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나 성경 읽기, 큐티 등은 발달했지만 꿈이라든지 영적인 현상을 다루는 일은 무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꿈을 비 신앙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또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고 신약성경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말씀을 제쳐두고 꿈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일도 문제지만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모두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도 그런 예가 됩니다.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가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18절, 마리아와 요셉이 정혼했습니다. 정혼이라는 말은 약혼했다는 말입니다. 말이 약혼이지, 당시 유대인들에게 약혼의 법적 효력은 결혼과 같습니다. 약혼한 상태에서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과부가 됩니다. 파혼을 당한 경우도 여자가 과부로 불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마리아는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약혼자인 요셉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마리아가 솔직히 말했더라도 요셉은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임신한 것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8절 하반 절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아의 배가 불러왔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고 나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요셉은 심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조만간 결혼할 사람이, 어느 날 보니까 배가 불렀습니다. 바람을 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요셉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장 순결한 여인, 가장 순수한 신앙을 가진 여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배가 불러서 나타났습니다. 몇 날, 몇 일 잠을 못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도, 마리아를 위해서도 어떻게든 이일을 처리해야만 하게되었습니다.
19-20절 전반 절을 잘 보세요.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 부분이 요셉의 신앙 인격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여자가 정혼을 했는데, 정조를 잃으면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법입니다. 만약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소문내면)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마리아만 죽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래도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에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2:20-21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정한 사람 같으면 이 일을 만천하에 알리고 끝장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다시 결혼하면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소문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도 살리고 뱃속에 있는 아이의 생명도 살리려 했습니다. '나 혼자 손해보면 되지'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입장만 고려하면 이렇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이렇게 배신한 여자, 부정한 여자, 저런 여자는 혼나야 한다하고 나발불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는 단어를 접하면 정의를 위해 분신자살을 한다든지,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다든지 하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가 피해보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의로운 일입니다. 의로운 일은 덕을 세우는 일과 상통합니다. 여기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 것은 먼저 신앙적인 면에서 의롭다고 한 것이고, 또 한편,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정말 의로운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 정의감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을 배려하고 덕을 세우는 것---의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린 생명도 살리고 마리아의 장래도 보장해주기 위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생각이 많아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 하였습니다. 세 가지를 꿈속에서 말해줬습니다.
1.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2. 아들을 낳을 텐데 이름은 예수라 해라
3. 이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다.
요셉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꿈에 천사를 통해 답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은 이 꿈을 꾸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24절, "요셉이 잠을 깨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개꿈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계시다 믿었습니다.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고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여러분 인류의 구세주 탄생 사건이 '꿈'을 통해 인도 받은 사건임을 아십니까? 요셉이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아십니까?
19절에서 한 가지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려 할 때, 생명 살리는 일에 헌신할 때, 일을 의롭게 처리하려 할 때 이런 아름다운 마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일하려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결정하려할 때,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20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라는 표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번 생각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졌는가?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내게 겪게 하셨는가?
--이런 일을 통해 내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가?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가 바로 다음 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2장11-12절을 보시면, 동방박사들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여기서도 동방박사들이 꿈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도 받았을 까요? 12절에 중요한 단어가 하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시하심을 받아'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은 요셉처럼 헤롯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을 것입니다. 헤롯이 돌아와서 아기에 대해 말 해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니, 아이 예수가 위험에 처할 것 같고, 안 하자니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 같아 부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역시 생명을 살리기 위한 고민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중요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편에서 해결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결정을 하실 때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런 다음 그런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하고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지혜와 방법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어기면서 근무해야 하는 직장, 불법을 해야 하는 일, 남을 속여야 하는 일, 내게는 이득이지만 남에게는 손해를 주는 일, 신앙을 타협해야만 하는 일....등 이런 일들을 택하려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런 상황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고민과 생각, 기도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 화요일 날 꾼 두 번의 꿈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응답하시는 지를 다시 깨닫게 된 꿈이었습니다. 전 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기도했습니다. '내일 새벽에 새벽기도 가야하니까 꼭 깨워 주십시오' 하는 기도였습니다.
첫 번째 꿈입니다. 수련회 장소 같은 곳에 성도들과 함께 갔습니다. 바닥은 마룻바닥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건물 안에 있는데 몇 몇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오더니 저를 둘러싸고 뭐라고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조직 폭력배들에게 둘려 싸여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밖에서는 성도들이 많이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있는 곳에 가까운 곳에 벨이 있었습니다. 마치 식당에서 웨이터를 부를 때 쓰는 벨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비상벨 같은 것입니다. 이 벨을 누르면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지 달려오게 되어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당하면서 마음속으로 빨리 저 벨을 눌러야 하는데... 저 벨만 누르면 밖에 있는 성도들이 뛰어 들어와서 나를 도와줄텐데.... 하면서 '빨리 눌러라!' '빨리 눌러라!' 하고 외쳤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그 벨을 못 누르게 하려고 하고, 저는 눌러야한다 하다가 잠을 깼습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 잠을 잤습니다.
두 번째 꿈입니다. 대학 강의실에 수업을 받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선물을 산다고 하다가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수업에 늦었습니다. 교수님이 늦게 들어오는 우리를 보면서 화를 벌컥 내는 것이었습니다. 내 수업에는 늦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벌써 두 번째 이렇게 늦었다고 하면서 다 나와서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어나서 늦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교수님의 화를 풀어드렸는데 그러다가 잠이 깼습니다. 두 번째 늦었다는 말이 상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 한참 늦은 것입니다. 시계를 보니까 알람을 안 켜놓고 잔 것입니다. 한번만 누르면 커지는데, 새벽에 하나님께 깨워달라고 기도는 했는데 알람은 안 키고 잔 것입니다.
이때 모든 꿈이 이해가 되더라구요. 첫 번째 꿈에서 벨을 눌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외친 것은 바로 시계 알람을 눌러야 한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일어나서 시계는 확인도 안하고 다시 자니까 두 번째는 대학 교수님이 벌써 두 번째나 늦었다 하면서 화를 낸 것입니다. 첫 번째 깨서 다시 잤거든요.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래, 얼른 교회 와서 기도하고 갔습니다. 제가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저녁에 자기 전 제가 짧게 기도한 것에 대해서 꿈속에서도 두 번이나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시계 알람이 안 눌러진 것까지 아시고 알람을 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안 누르니까 이번에는 교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깨워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기도에 얼마나 신실한지 모릅니다.
제가 7살 된 현도에게 저녁에 아침에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녁에는 "오늘밤에도 기도하고 자", 아침에는 "어젯밤 꿈속에서 하나님 만났어?" 그러면 꼭 만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만나서 그러는지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뭐래? "현도 사랑한데요" 주로 이렇게 답을 합니다. 거의 밤마다 하나님 만났다는 겁니다. 목사 아빠보다도 더 잘 만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잘 때 무섭다고 해서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라 했는데 이제는 자주 하나님 만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 뒤로는 무섭다는 얘기는 안 하는 것 같더라구요.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1.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것입니다.
2. 의로운 결정을 하려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고민하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인도가 있을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결정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3. 비록 꿈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라도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아름다운 결실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인도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시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사시기 바랍니다.
예 수
마 1:18-25 / 최영기 목사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의 기쁨과 축복이 이 시간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에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가 자기 백성을 소유한 왕이 되심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예수ㅔ께서 탄생하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예언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사 9:6-7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왕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를 경배하기 위하여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찾아 왔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 라고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하신 왕이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왕으로 오신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을 통치하기 위하여 오신 정치적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림하신 예수님에게는 고운 풍채나 위엄이 없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사람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재림하실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오실 것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볼 것이며, 예수님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재림의 예수님을 인하여 슬피 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재림의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이렇듯 예수님은 분명히 만왕의 왕이십니다.
2. 예수는 구원자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수태 고지를 하면서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저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은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Charles Hodge는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인간이 말한 모든 말들 중에서 예수라는 용어보다 더 인간의 마음을 거룩하게 고양시키고 강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라는 이름은 '구주'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어느 칭호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라는 이름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면서 무서워 떨며 묻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분명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어떤 인물이나, 어떤 권세나, 어떤 종교나, 어떠한 간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절대 무능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의 육적, 지적, 물질적 어떤 능력으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예수' 라는 이름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증거 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라는 이름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까? 롬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히 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는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범죄 함으로 죽게 된 인간을 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의 죽음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은 짐승을 죽여 피흘리게 하시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그후 사람들의 속죄 제물은 반드시 짐승의 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히 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고, 26절에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를, 백성을 위하여 염소를 속죄물로 바쳤습니다(렘 15:11-23). 이와 같이 대제사장은 피로 말미암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했고, 짐승의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매년 반복해서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단 한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누구도 피흘려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는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인 것입니다. 그래서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3. 예수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말씀은 전적으로 예수께 소속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 마귀의 자식을 위하여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불신자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구원받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피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예수님의 백성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마귀의 자식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날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구세주의 피로써 죄씻음을 받지 않고서 예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는 그의 백성 중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면서 스스로 자기가 의롭다고 자랑한 바리새인은 분명히 예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가슴을 치는 세리가 예수님의 백성입니다. 자기 영혼에 병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자랑하는 자는, 예수께서 거들떠 보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영혼의 의사이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악에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자는, 분명히 예수께서 죄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인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남이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번민하고 있습니까? 죄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 예수님은 당신을 아십니다 ##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짐승 곁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당신의 외로움과 쓸쓸한 시간을 알고 계십니다.
폭군에게 쫓겨 먼 나라로 피난했던 아기 예수님은
나그네와 같은 당신의 적막함을 알고 계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지만 깃들일 곳이 없었던 예수님은
의지할 곳 없는 당신의 불안을 알고 계십니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난 예수님은
당신의 땀과 고생과 그 피로를 알고 계십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은
욕심의 수렁 앞에 선 당신의 위험을 알고 계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던 예수님은
당신의 답답함과 절망을 알고 계십니다.
친구들의 떠남과 배신을 체험하신 예수님은
혼자서도 굳세게 살아보려는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하고 호소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약함과 실패의 발걸음을 알고 계십니다.
수건을 동이고 제자의 발을 씻던 예수님은
숨은 봉사와 당신이 지불한 희생을 알고 계십니다.
갈보리 언덕을 홀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남몰래 흘리는 당신의 눈물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려고 이 땅을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몸부림치며 애통하며 십자가 밑에 나오는 자를 멸시치 않으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인의 왕이시요,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 앞에 나와 경배하는 여러분은 모두가 예수님의 백성이 되시고, 모든 죄 사함을 받으시고,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어, 영광 중에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여,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히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마누엘
마 1:18-25 / 박지온 목사
인사하겠습니다.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할렐루야! 한번 다시 합시다. 할렐루야! 우리 찬양하고 난 후에 할렐루야! 그럴 때에 아멘으로 힘껏 화답을 하셔야 되는데 이 소리 반만 나도 될 겁니다. 아마... 아마 그 찬양이 마음이 와 닿지를 않는지 모르지만 우리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오늘 아마 내일 크리스마스날이고 오늘 이브 날입니다. 이브라면 이제 우리 크리스마스 전날 준비하는 날이죠. 그래서 오늘은 내일 크리스마스 정말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주님의 날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진정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여러분과 제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이걸 좀 새겨 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너무 크리스마스가 삐뚤어져 있고 그렇게 있어서 이점을 좀 바로 알고 우리가 맞이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지난 수요일 날 저는 벌써 크리스마스 축하 예배를 드렸어요. 수요일 날 경찰청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에 여러분들이 기도도 하시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했는가? 하는 의문도 있고 이래서 저는 벌써 오늘 할 제목을 거기 가서 벌써 한번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 그 제목 그대로 거기서 조금 내가 임마누엘이라 그러니까 그대로 좀 옮기지 못하고 해석해 놓은 것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이 너무 친숙한 단어이기 때문에 '임마누엘' 그대로 했습니다.
오늘 마치고 난 후에 이제 예 결산을 위한 공동 의회입니다. 공동의회 한다! 그러면 거의 다 가요. 가실 분은 가세요. 나는 그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교회 축복하신 것처럼 새해에도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세례 받은 자들은 모여서 함께 듣기만 해도 될 겁니다. 우리 교회는 뭐 특별한 그런 이야기들이 없어서 어디는 가면 공동의회하면 뭐 이런 발언 저런 발언하는데 발언 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 주시는 데로 하면 되는 것이고 발언한다고 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또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거니까! 그러나 우리가 듣고 함께 기도하자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기억하시고 전부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오늘, 내일 크리스마스 준비 오늘 오후에 아마 크리스마스 이브를 준비하면서 우리 아이들하고 같이 유희도 하고 율동도하고 그렇게 할겁니다. 여러분 많이 참석을 하시면 좋겠죠. 이 크리스마스날, 또 크리스마스 이브 이날 너무 오해가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조금 오해를 풀고 뭘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뭐 예배를 드리던지, 뭘 드리던지 해야 될 것인데 오해가지고 예배를 드리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좀 오해를 풀어야 되겠다 싶어요.
예를 든다 그러면 지난 수요일 날 우리 박 목사님, 박 창 복 목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만은, 사실 12월 25일 날이 주님이 나신 날이다! 그건 모릅니다. 이건 또 알아서 좋은 것도 아니고 몰라서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안 좋을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날짜가 맞다, 안 맞다가 아니고 뭐가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우리 속에 오셨다. 이게 중요한 것이거든요. 그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12월 25일날 오셨다. 그것은 몰라요. 뭐 여러 가지 역사 속에서 이 일 가지고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25일이라 그러는 사람도 있고 1월 6일이라는 사람도 있고 5월 달이라 그러는 사람도 있고 별소리 다 합니다. 그건 상관이 없어요. 오셨다. 이것이 중요하죠. 그러니까 일단은 이 날을 기념해서 상징으로 이날 오셨다는 것만 가지고 그저 우리가 기념하는 것이지, 이날인지 그 날인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너무 날짜에 메이지 말라 그랬어요.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말라! 그런데 사람들은 날짜에 메이고 핵심을 놓치니까! 문제가 되죠.
그 다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여러분 이스라엘은 어디냐? 아열대성 기후입니다. 거기는 눈 내리는 것은 눈을 닦고 기다려도 눈 내리는 것은 없어요. 1년 내내 눈이 없어요. 그런데 뭐 눈이 펑펑 오고 눈 속에서 아기를 안고 전부 거짓말입니다.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곳에는 그런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뭐 징글벨, 징글벨 그것도 없어요. 그리고 루돌프 사슴 코! 사슴도 나오는 것이 없고요. 전부 이건 만들어 내 것입니다. 만들어 낸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엉뚱한 것에 대해서... 그래서 뭐 크리스마스 산타할아버지? 산타할아버지 좋아하시네! 그것이 다 전부 만들어 낸 것이고 우리도 이제 크리스마스날 헌금하는 것은 구제하는 것을 그렇게 기점을 하고 있습니다. 구제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복음 중심으로 해서 구제를 해야 되죠. 전액 아마 그렇게 나갈 겁니다 만은, 이런 것에다가 관심을 쏟다 보니까! 지금 크리스마스 그러면 뭐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교회보다도 오히려 크리스마스는 장식 번쩍, 번쩍 하는 이 전기 장식이 언제 이 전기 장식이 있습니까! 차라리 전기 장식 보러 가려 그러면 호텔에 가면 훨씬 예쁜 것 봅니다. 술집에 가면 더 예쁘고요. 그래서 나는 그 이런 것들이 마음에 거슬려서 교회는 뭐 장식을 전혀 안 했어요. 그러나 너무 안 하니까 아이들에게 조금 이 후손들에게 뭔가 꿈을 실어주는 이런 것이 조금 안되겠다. 싶어서 우리가 조금 여기에 장식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발표회 같은 그런 것도 하지 마라! 이러기도 그렇고 아이들한테 이것은 해야 되겠다. 그래서 발표회를 중심으로 하고 그 다음에 밤을 새우는 것은 이것은 여러분들이 조금 생각을 하셔야 되요.
왜냐하면 요즘 밤을 새우는 이 행사는 저는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정한 것이 오히려 크리스마스를 흐린다 싶어요. 차라리 크리스마스날 그냥 출근하고 그러면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배드릴 것이거든요. 출근할 사람은 하지만 나일론은 출근하고 또 진짜는 예배드리고 이건 뭐 공휴일로 해 놓으니까 산으로 들로 지금 이제 26일날 공휴일입니다. 서울 올라가야 되는데 차가 막혀 가지고 가니 안가니 하고 이럴 지경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날이 공휴일 되어서 지금 차가 막히고 야단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주님 맞이하려고 술 쳐 먹고 밤새도록.... 이러는 것은 주님 맏이가 아니고 주님 맏이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막 놀고 화투치고 고함을 지르고 거기에는 주님이 안 오셔요.
그래도 내가 우리 어린 아이들은 유희하고 율동 하는 데는 주님이 오시지 싶어서 오늘 오후에는 그것은 합니다. 아이들도 제가 될 수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해요. 아마 주일 학교에서 그렇게 배려를 했지 싶은데 한번씩 자기의 아이들은 한번씩 다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안 좋겠냐! 뭐 자기 아이들 안 나오면 곤란하거든요. 그런데 뭐 잘 생겼든지 못 생겼든지 잘하던지 못하던지 어쨌든 내 손자 내 아들이 나오면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쳐다보고... 보니까 사진도 막 찍어 대고 그러더라 고요. 속으로 참 아들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습니다. 왜 좋으냐? 그 배경이 있어요.
진짜 여러분 오늘 이런 모든 거품들 다 빼고 정말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크리스마스 그게 도대체 뭐냐? 그것을 오늘 좀 설명하려고 합니다. 내일 좀 구체적으로 맏이 하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좀 아실 것은 오늘 본문에 마태복음 서에 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이 나와요. 이 마태복음 처음에 나는 이걸 굉장히 지루하게 여겼거든요. 1장을 딱 펴면 구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내용을 1장부터 이제 말씀하는데 그 첫 번째가 뭐냐하면 낳고, 낳고... 낳고 에 질려 가지고 덮어 버려요. 그런데 이건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 자세히 보면요. 전부 아버지 이름만 기록이 되어 있어요. 아들 이름은 기록이 안 되어 있어요. 그 밑에 역시 아들도 아버지가 되면 기록이 되고 사실은 아버지 이름만 쭉 기록이 되었는데 낳고 라는 배경이 뭐냐 하면요. 생명의 배경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누구로 통해서 옵니까? 유대나라의 개념으로서는 아버지를 통해서 옵니다. 뭐 여자는 백 번 있어도 생명 개념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자는 말하자면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서 키우는 그런 어떤 배경에서 이름 아버지 이름만 썼어요. 그런데 오늘 중요한 것은 본문에 앞에 까지는 15절 보면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그러면서 낳고 소리를 안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요셉까지 낳았는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그러고 서는 요셉은 예수를 낳고 안 그랬습니다. 요셉은 빼버리고 '마리아에게서...' 그랬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마리아가 낳았다 그 말이 아니고 마리아에게서, 마리아를 통해서 누가 났습니까? 예수가 나왔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의 나심은 구체적으로 이러하니라 그러면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18절에"(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뭐라 그랬어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배가 부르니까 나타날 것뿐이잖아요. 그러니까 요셉이 너무 기분 나빠 가지고 저게 나 모르게 다른 남자가 있었구나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가지고 뭐라 그랬냐 하면요. 19절에 "그 남편 요셉은" 그래도 착한 사람이 되어 가지고 이것은 유대나라에서는 이것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서는 이 간음죄를 통해서 자식을 갖게 되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어요. 유대나라에서는...
그런데 요셉이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자기 손으로는 못 하겠다. 이런 마음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라! 여기에 의롭다는 말 배경에는 물론 뒤에 더 큰 배경도 있지만 단순하게 좋은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마리아가 아기 밴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관계를 끊어 버리려 그랬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을 생각을 했어요. 당연하죠. 내가 약혼을 해 놓고 내 아내가 뭔가 내 모르게 남자를 통해서 아기를 가졌다. 당연하죠. 나도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가만히 끊을 겁니다. 뭐 드러내 놓고 소문내고 안 그럴 겁니다. 어쨌든 요셉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이건 남자라면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0절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현몽이라는 것은 꿈하고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꿈하고는 좀더 똑똑한 현실적인 어떤 사실 감을 갖도록 하는 그런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시죠.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언약에 대한 내용을 배경에 깔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남자를 통해서 된 것이 아니고 뭐라 그랬어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 줬어요.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이 모든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구약에 벌써 예언이 되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런 이야기죠.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마 1:23) 보라..." 이 보라 그러는 것은 성경에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역사 속에 딱 한번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생명으로 오시는 사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뭡니까? 임마누엘! 크리스마스입니다. 이 사실!
그래서 이 크리스마스가 이 땅에 하나님이 이 땅에 주님이 생명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이 땅에 오셨다. 이것으로 끝내서는 안 되거든요. 그 이후에 설명을 여러분 잘 들어야 됩니다. 그 뒤에 이제 말씀 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은, 이렇게 딱 되고 나니까 "(마 1: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습니다" 그러나 "(마 1:25) 아들을 낳기까지"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함께 어떤 아들을 낳는 그런 일에 혹시 요셉이 장애가 될까 싶어서 하나님의 일에 이 말씀에 순종을 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 아들을 낳을 때에 이름을 예수라 했다. 그랬습니다. 받아합시다. "예수님은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뭐라고요? 직분이라 그랬습니다.
박 지 온은 이름이고 목사는 직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실 것은 박 지 온으로는 안 됩니다. 이 자리에 못 서요. 그러니까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 이름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사도 행전은 예수를 무엇으로 믿어라 그랬습니까? 그리스도로 믿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전도에 있어서 이 소리한다고 자꾸 이단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복음을 모르는 소리죠. 그 이름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박 지 온 그 이름 가지고는 이 자리에 못 서요. 그런데 뭐가 되어야 됩니까? 직분자가 되어야 되요. 목사가 되어야 이 자리에 섭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제가 말씀 드렸죠. 우리 전도사님들이 강단에 원래는 못 서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강단에 설 수 있는 배경이 뭐냐하면, 소정의 기간을 지나서 신학을 마치고 강도사 인허를 받습니다. 인허라는 것은 '강도사' 빨리 말하면 곤란해요. 한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빨리 말하면 '강도사' 되어버리면요. 이상하거든요. 강도사 그럴 때에 그 강도사 인허를 노회로부터 받습니다. 그때부터 강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말하자면 자격을 주었다. 그 말이 강도사라 그럽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 강도사 님들이 세분인가 있어요. 이름 부를 때에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서서 메시지 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자격은 뭡니까? 직분을 받아야 되요. 직분이 되어야 됩니다. 직분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되요. 어떤 소정의 자격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날 때부터 달았지만 예수가 여러분과 제게 그리스도가 되심은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여러분과 저를 대신해서 생명을 내 주어야 돼요. 그래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을 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는다 이것을 자꾸 강조하는 겁니다. 우연히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 많아요. 그러나, 그리스도 되심을 안 믿는 사람이 있어요. 이게 바로 문제거든요.
그래서 왜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느냐? 그것은 조금 있다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만은 먼저 강조할 것은 문화상 사회 통념상 기독교도 종교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것은 원래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을 종교라 그럽니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뭐냐? 기독교는 신학 상 뭐라 그랬느냐? 계시의 종교라 그랬어요. 종교라 붙였기 때문에 이해를 하기에 종교라 붙인 겁니다. 종교 중에 뭐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래서 종교 중에도 좀 기독교는 다른 종교다! 이래서 계시의 종교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물론 신학적인 부분을 부정은 안 합니다만, 좀 강조하기 위해서 나는 기독교는 뭐냐? 받아합시다. "생명의 종교다." 기독교는 생명자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말씀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를 통해서 받습니까? 아버지를 통해서 낳아야 받습니다. 이것이요.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낳는 문제를 이미 말하고 그로 통해서 여러분과 저를 낳는 것으로 복음에 의해서 말씀하시면서 히브리서 1장 5절 한번 찾아봅시다. 예수님이 직접 낳았다 그랬어요. 여러분과 저를 낳았다고요. 예수를 낳았다!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5절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아멘. 뭐라 그랬습니까? 낳았기 때문에 뭐가 됩니까?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서 뭐라고 그럽니까? 아버지! 진짜 믿습니까? 여러분 이게 사실이 되어야 되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서 아저씨 그러면 곤란해요. 그런데 아버지라고 해 놓고도 안 믿으면 이게 곤란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진짜 낳게 된 그때부터는 아버지가 된 것을 그러니까 아버지가 된 것을 믿는 것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너무 쉬운 겁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 우리 신앙 생활 한다는 것은 쉽고도 쉬운 겁니다. 이것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나는 노력하고 그게 아닙니다. 뭐 낳아도 그것으로 끝났어요. 아들은 나한테 아버지인 것을 믿기 위해서 막 노력하고 밤새도록 철야하고 이렇게 안 합니다. 내 아들이 한번도 나를 믿기 위해서 철야하는 모습을 나는 못 봤어요. 그냥 눈뜨고 뭐 어느 날 말할 때 되니까 아빠! 그랬고 그랬죠. 그러고 지금도 아버지 믿습니다. 틀림없이 믿습니다. 한번 물어보세요. 내 아들한테... 진짜 박 목사는 너의 아버지 맞나? 여기에는 노력도 필요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열심히 믿는다. 그 말 자체가 어패가 있는 겁니다. '열심히 믿는다!' 그 말 자체가 어패가 있습니다. 막 믿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것도 어패가 있는 겁니다. 노력할 것도 없어요. 그냥 믿으면 되는 것인데 뭐 자연스럽게... 그냥 아버지는 아버지고...
그런데 이웃집 아저씨를 믿으라고 할 때는, 아버지라고 할 때는, 그것은 노력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웃집 아저씨한테 아버지라 불러라 이래도 안됩니다. 혹시 뭔가 이 협박에 눌려 가지고 '아버지!'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속으로는 아닌데 아저씨인데.. 이렇지. 그게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낳았다. 생명 주었다. 그게 전부 다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되면 이건 기독교라는 것을 잘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서 누구를 보냈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보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역사 속에 한번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이 귀하고 이 날이 복되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생명이 역사 속에 인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온 인류를 위해서 오셨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제게 개개인으로 이 사실이, 사실이 되는 것은 딱 한번 있어요. 그게 언제입니까? 또 한번 있어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누가? 성령이! 그때는 표현이 각 사람 머리 위에 그랬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비로써 여러분과 저는 크리스마스가 제대로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이것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이거 없이 아무리 떠들고 징글벨! 그래봐야 거짓말로 날뛰는 것뿐이죠. 그 사람은 주님과 상관없고 크리스마스와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점을 좀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밤새도록 춤추는 사람에게 크리스마스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 아닙니다. 생명관계!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성경에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요. 천국 가는 것도 생명주신자가 천국 갑니다. 한번 찾아봅시다. 우리 요한복음 5장 늘 잘 보는 성경이지만 일부러 찾아보는 것은 좀 확인을 해야돼요.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먼저 뭐했습니까? 영생을 준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냥 뭐 예수 믿고 천당 간다! 그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내가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생명이 되어야 되요. 그때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그렇게 언약했습니다. 약속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루어져야 되죠. 그래서 오늘 기도 속에서도 그랬습니다만 요한복음 3장 15절에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무엇을 준다고 했습니까? 영생을 준다고 그랬습니다. 영생! 영생! 이것이 지금 바로 되어야 되죠.
그 다음에 요한 일서 우리가 잘 아는 겁니다만 요한 일서 5장에 보면 요한 일서 5장 11절입니다. 다같이 시작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할렐루야! 영생이 누구 안에 있어요? 아들 안에, 예수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 아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그 직분을 이루시기 위해서 구약부터 쭉 내려오면서 이 아들이 생명이다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뭘 말했느냐하면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양을 잡고 그 다음에 소를 잡고 뭐를 흘렸어요? 피를 흘려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피를 절대로 먹지 말라 그랬어요.
그래서 또 피를 먹지 마라 그런다고 또 소피 안 먹는 사람도 있더라 만은, 그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소피 많이 잡수십시오. 상관없어요. 돼지 피도 잡수고 싶으면 배가 터지도록 잡수시고, 상관없어요. 자꾸 이게 물리적으로 흐르고 있어요. 또 뭐 목매달아 죽인걸 안 먹는다. 그건 잔인하게 죽이지 말라 그러는 겁니다. 동물들도 학대하지 말라. 그런 겁니다. 그런 것인데, 그래서 개고기 안 먹는다. 안 잡수시려면 전부 가지고 오십시오. 내가 다 먹을게. 그런 게 아니에요.
여러분 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요. 피는 생명이다! 그게 구약에 쭉 강조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이런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구약에 쭉 피 흘리는 그 문제를 말씀하면서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신약에 이루어 놓으시는데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가지고 여러분과 제게 왕, 제사장, 선지자 사명! 말하자면 사망의 우두머리인 사단을 깨드리고 왕, 사망의 왕입니다. 그 다음에 저주와 죽음과 멸망에서부터 구원하실 제사장, 그 다음에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속에 빠진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실 이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과 저의 구원을 완성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거쳐야 되는 과정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예수를 그냥 예수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생명이지만 뭐해야 되느냐? 그 직분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이는 뭐함이 없어요. 사함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반드시 예수님은 피를 흘려야 되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비로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늘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은 말씀! 뭡니까? 다 이루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문제해결 자다! 이 말씀이 속에 있습니다. 뭐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해결 자냐?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제게 생명을 주시게 되고 또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을 주실 직분을 완성했는데 그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때에 우리는 이 사실이 여러분과 제게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랬냐 하면요? 요한복음 20장, 여러분 요한복음이라는 것은 마태, 마가, 누가는 똑같은 사실을 각도를 조금 다르게 보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공간복음이라 그럽니다. 다 같이 똑같이 이제 같은 시각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공간복음 마태, 마가, 누가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조금 신학적으로 말하면 상당히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신명기를 신약에 요한복음서와 같이 이렇게 모세 오경 중에도 신명기는 좀더 깊은 하나님의 계획들을, 하나님의 역사들을 깊이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요한복음이 신명기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은 좀더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좀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 복음서에 이런 깊이 있는 설명을 하면서 마지막 마치면서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요. 요한복음 20장 31절에 20장 31절입니다.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뭐가 되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뭘 얻어요?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누구로 통해서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너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아예 결론부터 말씀했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예수를 믿는 자, 곧 영접하는 자, 믿는 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뭐가 되는, 자녀가 되는 신분문제를 말씀했습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확실한 크리스마스의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오늘 그냥 왜 나가면서 그렇게 핍박을 받아가면서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보는 사람마다 증거 해야되고 이것을 말해야 되느냐? 바로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어요. 여러분 정말 크리스마스를 바로 이해하자면 이것이 안되면 크리스마스는 전부엉터리 사건이 되고 맙니다. 오늘 이 사실이 바로 우리에게 이루어져야되죠. 그래서 이 일이 역사 속에서 온 인류를 위해서 성경에 마태복음서에 그랬죠. 인류를 위해서 인류 안에 인간 속에 누가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으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를 구체적으로 구속하시기 위해서 삼직을 완성하시고 이 삼직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셔서 다 이루었습니다.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왜 또 부활을 강조하셨냐 하면요. 초대교회에 부활을 말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완성하셨지만 계속해서 이 땅에 계시면 유대나라에 계시면 여러분과 저와는 상관이 없어요. 지금 신청해도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느냐? 유대나라에 계시면요. 우리 고고고 손자 때라야 내 차례가 돌아와요. 왜? 이 수억의 인구들이 1분씩 만난다고 해도 30초이던가 1분씩 만난다해도 그렇게 차례가 돌아옵니다. 그래가지고는 일이 안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하면요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똑같은 예수의 영으로 생명의 영으로 누구를 보냈습니까? 역사 속에 사도행전 2장 1절에 누구를 보냈어요? 성령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과 제게 약속이라 그랬습니다. 찾아봅시다. 하도 안 믿어 가지고 너무 안 믿는데 이골이 나가지고... 그래서 성경에... 성경은 믿을 것 아닙니까? 성경에 사도행전 1장 4절 말씀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랬습니다. 마지막 약속입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무엇으로 성령세례를 주마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세례는 어디에서 오느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되시고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부활하시고 그 다음에 예수께서... 예수 원래 예수로 더불어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성령이 역사 하시죠. 그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이 어디로 바로 오순절 역사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오죠. 여기에 보면 바로 오순절 역사가 나오는데 2장 2절에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받아합시다.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할렐루야!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각 사람 위에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성령이 임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리스도 없는 성령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성령 받기 위해서 애를 쓰면 신비주의 됩니다. 그리스도 없이 열심히 노력하면 종교에 빠집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못 믿고 이 뿌리가 안 내리면 전부 엉망이 되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뭐냐? 정말 크리스마스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고 그럴 때 전부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이 땅의 현상이에요. 지금! 참 생명을 받지 아니하고 열심히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사단의 종노릇합니다. 다 죽어버립니다. 사단은 이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딱 한가지 모르도록 지금 불을 켜고 설칩니다. 이걸 가지고 제가 발악한다고 그랬거든요. 별 짓을 다하면서 발악합니다. 그게 뭡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못 믿도록 구원의 축복과 은혜를 못 누리도록 이것만 모르도록, 다른 것은 다해라! 다해라!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상당히 여러 가지 기도하면서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증거하면서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생애를 세계복음화로 걸어야 됩니다. 걸기 위해서 그동안 지금 정진을 했고 내가 마지막 생애에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그래서 저는 공언을 했기 때문에 그때 가서 또 뭐 망발이 들어서 70세까지 한다 안 한다 할지는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문제고 일단은 6,7년 내생애가 남았다. 그러면 마지막 한가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교회를 찾아오고 또 예수그리스도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교회로 찾아왔으나 장소가 좁아서 야단이에요.
그래서 맞다.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금 현재 오늘도 기도 속에서 그랬습니다 만은 장소가 너무 협소하니까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런 시기에 있을 때에 해 놓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일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 좀 오더라 구요. 그래서 금년도 2001년도는 한가지 마음에 죽기 전에 마지막 제가 더 교회를 또 짖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모여서 누구를 듣도록?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이일이 우리 후손만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다.
그래서 그러면서 함께 1.5세 2세 말하자면 우리 지난번에도 핵심에서 많이 그랬습니다만 후손을 살려야 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 안 되면 후손들 다 죽어버립니다. 우리 교육받은 것이 그것이거든요. 지금 우리 후손들은 '징글벨'이 먼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그러면 징글벨입니다. 크리스마스 그러면 산타할아버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없어요. 이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지속해서 정말 심어주는 사역을 여러분과 제가 못한다면 이들은 전부 사회에 다 빠져버립니다. 멸망의 길로 다 갑니다.
그래서 올해에는 그래도 한해도 말씀했습니다 만은 전도 비를 많이 좀 세웠습니다. 지난번에 제직 회를 하고 임시 제직 회를 하고 난 후에 목사님 사례를 똑같이 부 목사처럼 올려놨는데 왜 그랬습니까? 이런 사람들도 있더라 만은 그래서 제가 조금 해명을 해야 되겠다. 싶어요. 저는 올리지 마라! 나는 필요한 몫은 생활비이니까 내가 부족하면 달라할게 내가 달라할 정도로 교회에 할 일 못한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 달라할 정도로 내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힘이 있다고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생활비니까 부족하면 달라할게. 놔두고 달라하기 힘드는 부 목사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 좀 올려라. 그런데 좀 힘든 것 같아요 내 생각에는 다른 사람은 좀 많이 올렸으면 좋겠는데 그게 이렇게 올리다 보니까 좀 힘드는 가봐요. 또 담임목사는 놓아두고 올리려고 하면 여러분도 이상하게 왜 그럴까? 이런 생각이 있어서 그럴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또 저까지 같이 좀 올려놓았어요. 그래서 똑같은 프로 테이지로 부 목사를 올려놓았더라 구요.
어쨌든 제가 뭔 생각을 하는가하면 후손들을 살리기 위해서 전도 비를 좀 책정을 해 놓았으니까! 이 전도 비를 좀 써야 되겠다. 이래서 우선 세계화라 할 때에 말만 세계화지! 우리 교회가 제일 뒤떨어진 것 같아요. 왜 너무 이제 교회가 뭔가 비대하니까. 왜 이 정도에서는 별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을 세계화 시켜야 합니다. 그러자면 무엇부터 해야 되느냐? 언어부터 해야되겠다. 이래가지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한 분 모셔 가지고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가지고 영어다락방을 30개든 40개든 할 수 있는 대로해라. 그리고 주일날은 신경 쓰지 마라 주일날은 영어 어디 가는 데가 있더라 구요. 신경 쓰지 마라. 이래가지고 한번 계획을 좀 해보았습니다.
왜냐? 그래가지고 영어를 어릴 때부터 좀 뭔가 할 수 있도록 그래가지고 영어다락방이 이제 활성화되면 뭔가 다른 사람들이 영어하고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눈이 둥그래져 가지고 좀 쳐다보고 할 것 아닙니까? 어쨌든 그런 계기를 통해서 뭔가 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그래서 일본 같은 경우에는 벌써 영어를 자기나라 국가의 공용어로 말하자면 국가어로 공식 선언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참 고집 피울 것은 안 피우고 고집 안 피울 건 고집 피우고 이때 빨리 뭔가 변신해야 됩니다. 우리나라도요 공식 모든 언어를 영어로 빨리 해야 세계대열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또 지금 뭐 한자어도 못쓰도록 만들도 뭔가 자꾸 이라는데 물론 애국 좋아하는데 그게 애국이 아니라 나중에는 축 처져 버리는데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가 언어가 장애가 되어 가지고 외교에 엄청난 손실을 받고 있거든요.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여기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이 복음가지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증거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증거거리가 나와야 되겠다. 그러자면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 했더니 하나님의 교회에 축복 주셨더라. 교회도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해야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집중해서 그것도 기도 없이 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번 1월 달부터 들어가서 조를 짜 가지고 집중해서 한번 기도해보자.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부지라던가 이런 것이 있거든 추진하면 되는 겁니다. 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면 하나님과 뜻이 맞으면 주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게 될 때에 우리가 일년동안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되겠다. 작정하면 하나님께서 산업, 제정, 필요하면 축복하실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하실 겁니다. 이래서 좀 계획을 내 계획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을 알고 한번 붙잡아봤습니다.
제가 아마 우리 집사 님들이 우리 장로님들이 전부터 좀 건축에 대해서 서두르는 걸 제가 좀 안 서둘렀습니다. 안 서둘렀다기보다도 워낙 건축하는 일에 혼이 나가지고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아마 이 기회를 놓치면 저 영감이 아직은 영감은 아니지만 죽어버리고 나가버리면 또 시들해 지니까 마지막 시기이니 교회 건축하도록 붙잡아야 되겠다. 뭐 이런 생각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그것을 압니다. 그게 또 내 마음에 그렇다. 내가 지금 은퇴해 가지고 다른 사람이 세워져서 또 교회 지으려고 하면 또 늦어집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는 힘을 모아서 그리스도 증거 하는 이 마당에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정말 인생에 남길 여러분과 제가 남겨주어야 될 좋은 환경을 만들어놓는 것 그리스도를 전하는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이것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 기도해서 정말 우리중심에서 우러나올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나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통해서 이 말씀을 드린 것은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당신에게 생명으로 와 계신다는 사실이 고백될 때마다 하나님의 자녀 그때부터 뭡니까? '믿는다! 믿어라!' 가 아닙니다. 받아합시다. "자연스럽게 믿어진다." 그때부터 사건 생길 때마다 뭐해요? 기도하면 그대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받은 자들에게 주신 특권이 뭐냐하면 그때부터 특권이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하면요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그대로 다 되리라" 그랬습니다. 다 되리라! 여러분 내 아들이 내게 와서 연필 한 자루 달라고 하는데 못줄 내가 아닙니다. 못줄 아비가 아닙니다. 그걸 못 준다. 그건 아비가 아니지요. 낳은 게 아니죠, 이웃집 아저씨도 줄 것인데, 내 아들이 그러는데 안 줄 수가 없죠. 하나님이 아버지다. 정말 믿고 정말 기도한다 그러면 주시게 되어있어요. 워낙 안 믿으니까! 아저씨인데 자꾸 거짓말로 아버지, 아버지 그러고 따라다니니까 귀찮다고 발로 차버리지! 진짜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21장22절에 보면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에 그런데 이것이요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구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그리스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말을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한마디로 말씀했어요. 그래서 여러분과 제게 우리가 할 일이 뭐냐? 뭐 교회에 이일 한다! 저일 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믿고 생명이 내게 회복되는 만큼 저절로 다 움직이게 되어있어요.
우리 총회장 장 성 철 목사님이 대뇌를 많이 다쳐 가지고 밑에 정강이는 다 산산조각이 되었고 이래가지고 완전히 의식이 가버렸어요. 의식이 가버렸는데 정말 의사들이 기적적으로 이 뭔가 수술한번 안하고 저절로 대뇌에서 끊어졌던 선들이 이어져 가지고 의식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지금 의식이 회복이 다되었어요. 그래가지고 밑에 다리의 수술을 지난번에 했다고 그러더라 구요. 수술은 머리가 회복되어야 수술할 수 있습니다. 다리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 이제는 알아보기도 하고 손도 잡기도 하고 움직인다 그래요. 맞습니다. 생명이 반 나가버렸거든. 반 나갔을 때는 꼼짝못하고 있더라 구요. 그런데 생명이 회복되면 저절로 손발이 움직이고 그 다음 말하고 저절로 됩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생명이 확인되고 구원의 역사가 확인되는 만큼 받아합니다.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절대로 되게 되어있어요. 이건 '믿어라! 안 믿어라!' 할 것도 없어요. 받아합시다. 믿어진다.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냐? 그렇잖아요. 그때부터 모든 문제는 거기서 풀리고 확인되면 그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기도가 나옵니다. 그때부터 문제 당할 때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다 응답하겠다. 다 받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올해를 보내며 신년새해를 맞이하면서 오늘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중요한 것을 붙잡읍시다.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개개인에게 하나님이 무엇으로 성령으로 그 생명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천국 가는 배경도 바로 생명, 영생 그 영생 때문에 가는 것이지 다른 것 아닙니다. 그 생명을 주시면서 신분을 바꾸어놓았어요. 말하기를 너는 뭐라고 그랬어요? "내 아들이라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내 아들이 되겠다." 약속했습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과 마리아
마 1:18-25 / 김태복 목사
앞으로 이틀 후면 성탄절입니다. 오 헨리라는 소설가의 작품에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즐거운 성탄절 때 이야기입니다. 델라라는 아내는 남편에게 좋은 선물을 하고 싶었으나 돈이 없습니다. 그녀는 안타까워 울다가 결국 금발의 긴 머리칼을 팔아서 백금을 입힌 시계 줄을 샀습니다. 남편은 시계는 있었으나 시계 줄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면서 저녁을 기다렸습니다. 퇴근한 남편은 아내의 머리칼을 보더니 대단히 실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 짐도 아내에게 성탄절 선물을 하려고 했으나 돈이 없어 안타까워 하다가 결국 늘 아끼던 시계를 팔아서 아내의 금발 머리칼을 빗을 아름다운 빗을 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내가 늘 갖고 싶어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내나 남편의 선물은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가장 귀한 사랑의 마음의 선물을 주고받음으로 가난했으나 큰 희열이 그들 가슴에 가득 차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요즈음처럼 물질이 너무 풍요로와 쓸만한 옷가지나 가전제품, 혹은 가구를 마음대로 버리는 세상에서는 감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연인이요, 부부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연인과 부부의 모습이 나오는데 바로 성탄의 주인공 의 하나인 요셉과 마리아가 바로 그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비록 대단히 가난한 삶을 사는 연인들이었으나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인간 속으로 오실 때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통해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훌륭한 가문, 화려한 왕궁을 두시고 가난하고 초라한 목수의 가정을 통하여 오시려 했습니까?
1. 우리는 먼저 마리아를 쓰신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마리아는 정결했기 때문입니다.
눅1:30-31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으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할 때 마리아는 대답하기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친족 결혼제도이기 때문에 성년(成年)이 되기까지 정절을 지키기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천사 앞에서까지 부끄러움 없이 자기는 동정녀(童貞女)임을 담대히 고백할 정도요, 천사도 그것을 인정할 정도로 정결한 처녀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인간 역사 속에 들어오실 때에 아무 여인의 태나 빌려 들어올 수 없으며, 아무 가정에게 양육을 맡길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비록 대단히 빈한한 사람이나 깨끗하고 정절이 있는 거룩한 태를 빌려서 오시고 순수한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통해서 양육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죄를 떠나 성결된 삶을 사는 자를 쓰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재림하실 때에도 히9:28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인들 죄를 안 지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를 좋아서 짓는 자가 있는 반면, 어느 분은 죄를 안 지으려고 하다가 육신이 약해서 넘어지는 자가 있습니다. 죄를 짓기를 두려워하는 자, 그러다가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자, 그러한 성결된 자를 주님은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2) 마리아는 절대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가 아이를 잉태할 것인데 그는 성령의 아이가 될 것이라"고 말할 때에, 눅1:34에 보면 마리아는 너무나 놀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면서,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도 수태하지 못하다 성령의 능력으로 아이를 수태하여 6개월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의 대답이 너무나 귀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인간 속으로 들어오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드리는 절대적인 믿음의 소유자,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잉태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비록 연약한 처녀에 불과하였으나 성령의 역사하심을 절대적으로 믿을 때에 아기 예수님이 잉태되시는 기적인 나타난 것입니다.
(3) 마리아는 어떠한 희생도 각오했습니다.
천사가 "너는 성령을 통해서 아들을 잉태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에 마리아는 너무나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 동안 사랑하는 요셉과 가정을 꾸미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 것을 얼마나 학수고대해 왔습니까? 아마, 이스라엘 풍속 중에는 아무 어렸을 때부터 친족 어른들이 남녀의 짝을 정해서 정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10년 이상이나 교제하면서 결혼 날을 목마르게 기다려왔을 것이요, 혼수품을 마련하기 위해 틈틈이 뜨개질과 바느질을 했을 것입니다.
어느 때는 밤에 요셉과 만났을 때에 자기의 몸을 성적으로 요구할 때도 결혼 날까지 조금만 참으라고 달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머지 않은 때에 난데없이 아이를 가져 배가 불러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순수한 만큼 고지식하기 짝이 없던 요셉은 대단히 화를 내면서 당장 자기를 버릴 것이 분명할 것이요, 지금 가진 아이가 요셉의 아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퍼지면 평소 마리아를 칭찬하던 모든 이들이 일종의 배신감에 가득차서 가문에서 쫓아내거나, 심한 경우에는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능력이 많으셔도 각 사람의 허락 없이는 그에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아마,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계획을 가지시고, 먼저 다른 정결한 처녀들에게 이 사실을 허락 받으시려고 몇 번 시도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 다 놀라서 거절하기를 '나는 절대로 못합니다. 딴 것은 다 순종해도 그것만은 안됩니다.'라고 극구 반대함으로 몇 번이나 수포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의 순종의 모습은 대단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수치, 어떠한 모욕, 어떠한 손해나 희생이 닥치더라도 주의 뜻이 그러시면 절대순종 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다시 오는 거룩한 성탄을 앞두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성결과 믿음과 희생의 각오로 주님을 맞음으로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이번에는 하나님이 요셉을 쓰신 이유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요셉을 쓰셨습니까?
(1)요셉은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1:19에 보면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다 허물투성이 인간이요,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그 중에도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힘쓰는 자, 의의 등불을 밝히려고 애쓰는 자를 주님은 기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도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이었으나 의롭게 살려고 힘쓰는 자였기에 주님은 그를 들어 기쁘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2)요셉은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관용이란 덕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넓은 마음, 남의 허물까지 대신 질 수 있는 그릇을 말합니다.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 중의 하나가 다른 이의 잘못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공의롭게 살면서 동시에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정이 많은 사람을 보면 어느 때 끊을 것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공의의 입장에서 보면 물에 물 탄 듯 너무 우유부단하게 보입니다. 실수가 많습니다.
반대로 공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너무 인정이 없어서 공의의 뼈대만 있고 사랑의 살은 보이지 않는 메마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의로운 사람인 동시에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마리아의 고백을 들어보니 아기를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기절초풍할 노릇입니다. 세상이 음란으로 가득 차서 다른 여인들이 다 순결을 잃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마리아만은 절대로 정결할 줄로 철석같이 믿었던 요셉입니다. 그런데다가 마리아가 말하기를 '자기는 지금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라고 횡설수설하는 모습에는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정결하고 믿음이 좋았던 마리아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자기가 그 꼴을 당한 것입니다. 기대했던 만큼 더 배신감과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화가 나는 대로한다면 마리아를 사정없이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싶은 마음이 충동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마리아로 인한 배신감과 분노를 조금도 들어내지 않고 마리아와의 관계만 가만히 끊음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분명, 아무 말도 안한 채, 마리아와 정혼을 파혼하면 엄청난 비난이 자기에 쏟아질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의 명예나 의로움에 엄청난 손해가 따를 줄 알면서도 그는 마리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모습이요, 큰 가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리아의 순결과 믿음만 보지 않으시고 요셉의 의로움과 그 관용도 보시고 이 가정을 택하신 줄 압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의로움과 관용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3)요셉도 절대적인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요셉은 인간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무슨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고 있는데 새벽녘인가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면서 주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사야의 예언인 사7:14의 말씀을 가르쳐 주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는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깜짝 깨어보니 꿈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성령을 통해서 처녀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가? 내가 계속 그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그런 꿈을 꾼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으로 큰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즉시로 이사야서를 찾아보았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안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24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고 나서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며칠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 여긴 대로 즉시 순종의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 즉시 마리아를 데려왔고, 아이를 낳기까지 갖은 수발을 다하면서도 동침하지 않았으며 아이가 낳자 꿈에 지시 받은 대로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했습니다. 이는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나타난 대단한 믿음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인 요셉과 마리아 가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순종의 행함이 있을 때 산 믿음이라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잘 해주시면 산을 옮길 것처럼 열심을 나타내다가, 조금의 시련이나 손해, 희생이 따르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 자리와 충성의 자리를 떠나는 자는 하나님이 강하게 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강한 역사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20대 대통령은 제임스 가필드인데 대통령 취임을 하고 첫 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장관이 와서 알리기를 '대통령 각하, 이번 일요일 아침 10시에 각료회의가 있습니다.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가필드는 즉시 말하기를 "그 시간, 선약이 있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관은 기가 막혀서 '각하, 비상사테이기 때문에 반드시 시급히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그 어느 선약이라도 취소하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고집불통입니다. '절대 취소할 수 없는 선약이네' '아니, 각하, 도대체 누구와 약속하셨기에 비상각료회의보다 중요하십니까?' '장관, 그 날은 하나님과 약속한 예배시간이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일날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로 약속했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장관들과 매스컴, 국민들은 대단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아니, 이러한 비상사태에 주일예배에 한 번 빠진들 무슨 문제인가? 아마 오늘 결정할 일을 하루 미루므로 국가적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하는가?'
가필드 대통령인들 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잘못하다가는 큰 실수, 큰 실책을 범하므로 대통령 자리도 물러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필드를 보십시오. 주님과 약속한 대로 주일 아침 자기 본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 위대한 순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놀랍게도 미국의 위기는 아무 일 없이 잘 넘어갔으며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옴으로 모든 장관들, 매스컴, 국민들 앞에서 하나님은 가필드를 높이 세우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 성탄을 즈음하여 우리도 마리아와 요셉처럼 엄청난 손해과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기의 이름이 주는 계시
마 1:18-25 / 임덕순 목사
미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수입이 조금 더 많기는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의료보험료가 비싼 나라가 미국일 것입니다. 20대 2인 가족의 한 달 보험료가 보통 70만원쯤 한답니다.
그렇게 비싸기 때문에 미국사람 중에 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절반이 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그런 의료보험을 직장에 다니는 동안에는 다 내줄 뿐 아니라 퇴직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대주는 회사가 있습니다.
미국의 지엠, 포드, 클라이슬러라는 자동차 회사들입니다. 그런데 그 회사들이 경제위기를 만나서 문을 닫을 지경이 되고 미국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세계의 일등이었던 소니라는 일본회사도 직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기 시작했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취직을 할 곳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일류 대학을 나오고, 토익 900점대의 성적이 오르도록 학원을 다니며 취업을 준비해서 자신만만하게 입사원서를 냈는데, 면접하러 오라는 데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서너 차례 까지는 괜찮았는데 열 번 넘게 거절을 당하니까 대학 졸업할 때 가졌던 자신감은 간 데가 없고 앞날이 겁이 나고 비관스럽고 입맛도 없어지고 머리에는 원형탈모증이 생기고 슬픈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거식증에 걸리거나 대인기피증을 앓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쉽게 가는 곳이 있는데 길거리에 포장마차처럼 임시로 차려놓고 3,000원에 점을 봐주는 ‘사주포차’라는 포장마차랍니다. 이 사주포차가 젊은이들이 많은 길거리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점괘를 믿지도 않으면서 장래가 불안하고 답답하니까 젊은이들이 싼 맛에 사주포차에 들른다고 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한 청년에게 기자가 물으니 “내년에는 취업이 잘 될 거라고 하더라.” 면서 “그래도 그때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랍니다.
믿지도 않는 점집을 왜 가느냐고 물으니 “딱 3000원어치 위로가 되기 때문” 이라고 하더랍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불안에 싸여 있고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위로를 받으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교회에 오면서도 3,000원어치 위로를 받기 위해 사주포차에 가는 마음과 비슷한 마음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까? 교회는 예수님께 경배하러 오는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고 우리를 죄와 사망과 절망에서 건지시는 구주이십니다. 이미 받은 구원 때문에 감사드리면, 오늘 우리의 삶에서 당하는 고난에서 또한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번 주 목요일은 예수님의 탄생의 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탄절이 마치 "산타클로스"나 "선물"의 날인 것처럼 생각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교인들마저도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잊은 채 TV에서 쏟아내는 왜곡된 선전에 미혹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눈과 관심을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집중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서 오신 그 분의 이름에 관심을 가져 보십시다. "그 분의 이름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할 주제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이름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신격의 표현이며 그 분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당신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지 알리시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란 칭호가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이름의 하나이고 모세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성함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는 어느 날 시내산 기슭에서 한 장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본 것입니다. 모세는 하도 신기해서 그 곳으로 갔습니다. 불타는, 그러나 타지 않는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모세는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네가 나온 곳 애굽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짓눌려 고생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자기는 애굽에서 이미 실패해서 도망친 사람이고 살인자로 지명수배 되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으며 말을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변명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고, 내가 보냈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반가워 할 테니까 가라고 엄히 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랬더니 하나님은 친절하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3-15)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더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라는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꼭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시는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은 그 분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와 같이 2008년 전에 나신 예수님의 이름도 그분의 어떠하심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라는 이름이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1) 천사가 요셉에게 해준 말입니다. 그리고 이 탄생하신 아기에 대해 "임마누엘"이라고도 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3)
이렇게 성탄절에 탄생하신 아기에 대하여 성경은 "예수"라는 이름과 "임마누엘"이란 두 가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맞는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이 특별한 아기의 이름을 통해서 그분의 누구신가를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예수와 임마누엘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 칭호인 "예수"는 예수님이 죄인의 구원자이심을 알려줍니다."예수"란 이름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이름입니다. "예수"란 뜻 자체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는 "구원할 자"란 말 이외의 다른 뜻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처녀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만 했지 서로 정조를 지키고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처녀 마리아가 잉태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놀랐고 요셉도 너무 놀랐는데 천사가 알려주어서 요셉이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사건의 자초지종만 말해준 것이 아니라 태어날 아기의 이름까지 정해 주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1:18-20)
이렇게 요셉을 안심시킨 천사는, 다음으로 태어나실 아기의 이름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21) 성령으로 잉태한 네 약혼자 마리아가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아이는 아들이고,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 이름의 뜻도 요셉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1)
왜 예수라고 지어야 하는가 하면,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구원자"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미리 지어주셨는데, 그 이름이 "구원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 주심으로써, 그 아기가 인류의 구원자요 구세주이심을 명백히 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라는 아기의 이름은 아이의 부모들이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되 너는 장차 이렇게 되라는 소원을 담아서 지어줍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부모로부터 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어 보내주신 특별한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태어나시기 전에 지어진 이름입니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나시기 전에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
하나님이 오래 전에 지어주신 아기의 이름이 인류의 "구세주"이셨습니다. 이분만 분은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하나님께서 명백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구세주라는 그 이름은, 그 분이 구원활동을 해서 그 결과로 얻은 이름이 아닙니다. 그분이 구세주처럼 살았기에 나중에 사람들이 그 분을 구세주라 믿게 되어서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아예 오시기를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할 분은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었으므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날이 성탄절입니다.
그 분은 오실 때부터 "구원자요 구세주"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분을 믿지 않고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이 없습니다.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고 섬기되, 내가 지은 죄에서 건져주신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며 마음을 바쳐 순종하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난과 암담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그분께 경배하기 위해서 오늘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십니까? 여러분과 관계된 이름입니까? 여러분을 구원하신 이름입니까?
오늘 탄생하신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 이 사실을 명백히 알리셨습니다.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한 이름입니다. 이름 자체가 "구원자"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다시금 이해하며 믿음의 복된 자리에 굳건히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칭호인 "임마누엘"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그 분의 특별한 품위를 알려줍니다. 태어나신 아기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 오늘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의 성취라고 말씀합니다.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그리고 임마누엘의 뜻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탄생은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여 년 전에 구세주의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바로 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런데 이 구약의 예언 중엔 이미 구원자의 인격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이라는 호칭 속에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마태가 설명했듯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서 사시면서 도와주시려고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임마누엘 예고’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이 성취된 날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란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 말씀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예언은 아직도 미래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은 이루어졌습니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임마누엘"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함께하기를 시작하시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신 진정한 임마누엘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인류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임마누엘"이란 이름엔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성탄절에 세상에 태어나신 분은 다름 아닌 너희와 함께 계시려고 내려오신 그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오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하나님이 내려오신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고 모두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시고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가 탄생했다는 탄생 자체만 기뻐한다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외면한 채,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산타클로스만 부각시켜서 자기들 즐기는 기회를 삼고 백화점의 세일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장사꾼들만 수지맞는 계절로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 영광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살아주며 도와주시기 위해서 내려오셨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 그분이셨고, 태어나신 주님이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이 지구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른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청년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약한 자처럼, 종처럼, 죄인처럼 오셨습니다. 이 아기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아기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나은 아기는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이 아기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와 함께 하신 신비한 탄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아기는 아기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삶과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려고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가히 믿어지지 않을 일들입니다. 우리가 무언데 하나님께서 그런 황송스런 일을 행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음 외에는 이것을 받아들일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 외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이며,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사시는 임마누엘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외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믿을 수 없는 신비요 경이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이 일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신비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와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아십니까? 성탄절에 태어나신 그분의 이름의 의미를 아십니까?그렇다면 이 위대한 이름이 나와는 무슨 관계에 있습니까?
그 분이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사십니까?태어나신 그 분은 여러분의 구원자사며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경제위기의 한파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하며 떨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도리어 이런 기회에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면, 말씀을 따르는 이스라엘앞에 홍해를 갈라 길을 내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하나님이 도우시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광의 보좌를 내려놓고 나를 구원하려고 찾아와주신 나의 구원자께서 내 곁에 계시며 동행하신다는 이 신비하고 놀라운 사실 때문에 위기를 도리어 승리와 성장의 기회로 만드는 한사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시대의 천사들
마 1:18-25 /안효관 목사
여러분, 장기려 박사(1911-1995)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지요? ‘한국의 슈바이처, 작은 예수, 살아 있는 성자’라는 불리던 분이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서 경성의전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의대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의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경성의전 교수직을 물려주겠다는 스승(백인제)의 제의를 거부하고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합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의대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기도대로 그는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6.25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와 피난민들이 들끓던 부산에서 진료소를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꺾지 않고 오로지 한 평생을 믿음과 생명 사랑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분에게 얽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산복음병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자신이 받은 월급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비로 대신 내 주기도 했는데, 한 번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농촌에 살던 한 아낙네가 중병에 걸려 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받았지만 병원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 아낙네가 복도 병원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남편을 불러 병원 뒷문으로 몰래 도망가도록 했습니다. 병원 원장이 말입니다.
그렇게 젊었을 때 드렸던 헌신의 기도와 같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셨던 그는 죽음 후에 자신이 들어갈 묘지 하나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85세로 세상을 떠난 후 경기도 마석에 있는 모란공원에 작은 묘지가 만들어져 있는데, 그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그분은 정말 우리시대에 성자로 사셨던 분 가운데 한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성자라고 부르는데, 너무 가난해서 병이 들어도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죽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분을 통해서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고 생명을 건진 사람들에게 그분은 천사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읽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성경 안에만 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에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메시야이심을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결혼 전에 약 1년 정도 정혼 기간을 가집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풍습으로 한다면 ‘약혼’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정혼은 우리나라의 약혼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사회는 약혼과 결혼이 엄격하게 구별됩니다. 약혼한 상태에서는 파혼을 해도 어떤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정혼은 다릅니다. 말만 정혼이지 결혼과 다름이 없습니다. 같은 집에 살지 않을 뿐이지 모든 법적인 효력은 결혼한 상태와 같았습니다. 한번 정혼을 하면 한쪽이 간음으로 인해 부정해지지 않는 한 정혼을 파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정혼한 남녀는 남편과 아내로 불려졌습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에서도 정혼한 요셉을 ‘남편’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요셉에게 마리아를 지칭하면서 “네 아내”라고 말씀합니다. 정혼이지만 사실상 결혼과 다름이 없는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정혼 상태에서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됩니다. 율법의 의하면 정혼 기간 중에 부정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신 22:23-24)
그런데 요셉은 정혼하여 아직 자신과 잠자리를 하지 않은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그건 마리아가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른다면 정혼기간 중에 부정한 짓을 저지른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을 들추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19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는 그 일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정혼관계를 끝내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정혼한 사람이 법적으로 정당하게 이혼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면 됩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이혼할 수 있고, 마리아 또한 돌에 맞아 죽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말씀은 아직 요셉이 마리아와 이혼하기로 결정하기 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부정한 짓을 했다는 증거가 분명한데도 요셉은 마리아의 부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해서 이혼증서를 써 주려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그 문제로 홀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것인가? 마리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깊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셉은 더 이상 마리아와 정혼이나 결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마리아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관계를 청산하려고 마음먹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마리아에 대한 진실을 알려줍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그녀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죄의 씨앗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하나님의 일이라고 알려 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짧게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사실은 천사가 요셉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마리아가 부정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파혼하기로 마음이 굳어가고 있던 요셉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한 두 마디로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이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날 아기는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에 의해서 태어나야 할 분입니다.
그러기에 만일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을 하게 된다면 그건 하나님의 계획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가로막는 엄청난 죄악이기도 합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바로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었고,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는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까지 -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요셉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땅에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요셉에게 알려주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요셉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고 둔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길로 가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게서 나를 위해서 보내주신 그 천사를 만나보셨습니까?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에 나에게 찾아와 나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도록 깨닫게 해준 천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때 나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게 하여 나로 하여금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천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때로 하나님은 요셉에게 한 것처럼 꿈을 통해서 계시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자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나에게 천사로 보내셔서 그 일을 하십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를 통해서 내 삶을 바꾸기도 하시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만들기도 하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해 준 말 한 마디를 통해서 힘들고 낙심해 있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작은 행동 하나를 통해서 나를 바로 보게 만드십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소돔성의 이야기에서 소돔성을 찾아간 두 천사를 성경은 “그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롯은 그들이 천사인 줄 모르고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천사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천사인줄 모르고 자기 집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는 그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왜 천사인 줄 몰랐을까요? 사람의 모양으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장에 가보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야곱과 씨름하던 그 천사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곱에게 나타난 천사 역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는데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는데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도록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내가 만난 사람이 하나님의 천사라는 마음으로 대할 때에 그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신앙생활하기 힘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말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람 자체를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지는 모릅니다. 때로는 가난한 거지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보기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기도 합니다. 전혀 천사와 같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천사로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성탄절이 가까이 다가오면 자주 생각나는 톨스토이의 단편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제목의 단편소설입니다.
어느 마을에 구두수선을 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는 마틴 아브제이치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던 중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내일 내가 너를 찾아가마.’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무너무 기쁜 마음으로 노인은 다음날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늙은 청소부가 추운 날씨에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청소부를 자신의 구둣가게 안으로 불러 몸을 녹이게 하고 따뜻한 차를 한 잔 대접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추위에 울고 있는 아기를 업은 한 아주머니가 추위에 떨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 아주머니를 불러 추위를 녹이게 하고는 아기와 아주머니를 위해서 먹을 것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입을 옷을 주었습니다. 한 참 후에는 한 노파가 사과를 팔고 있는데 한 아이가 할머니의 사과바구니에서 사과를 훔쳐 달아나다가 잡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아이가 스스로 잘못한 것을 뉘우치게 하고, 대신 사과 값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어 성경을 읽으려 하는데 방 한쪽 어두운 구석에 낮에 도와주었던 청소부 노인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게 나였단다.” 그리고 이어서 아이를 업고 추위에 떨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도 나타났고, 사과를 팔던 할머니와 사과를 훔치던 아이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도 나였단다.”
여러분, 하나님의 천사는 흰 옷을 입고 등에 날개를 단 채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초라한 모습으로, 때로는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때로는 내 작은 손길을 기다리는 불쌍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만나는 사람 한 분 한 분을 천사를 만나는 것처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내가 멸시하고 업신여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멸시하고 업신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천사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그 천사를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를 당신의 천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 요셉처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길 원하십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 그에게 희망을 주길 원하십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오늘 그의 천사로 보내어 그의 배를 채우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나에게 천사이면서 동시에 내가 그의 천사가 되어주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종이시계』라는 소설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앤 타일러(Anne Tyler)의 소설 가운데 『바너비 스토리』(A Patchwork Planet)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그녀가 죽은 남편에게 헌정한 소설인데, 그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게이틀린’이란 가문의 가장들에게는 재미있는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각자 자신이 만난 ‘천사’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오래 전 나무 가봉틀을 만들어 성공한 바너비의 증조할아버지가 당시 그 가봉틀의 아이디어를 준 낯선 여자를 자신의 천사로 묘사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게이틀린’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계기가 되거나 도움을 준 ‘천사’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올해 5월 세상을 떠난 서강대 영문과 교수였던 장영희 교수가 이 소설을 번역했고, 이 소설에 관해 작가 타일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장 교수님이 타일러에게 재미 삼아 이렇게 물었습니다. “천사를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장 교수님은 그녀가 “아니요.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상황이지요.” 라고 대답할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타일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 물론이지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천사를 만났습니다. 당신은 나의 천사이고, 또 나도 당신의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천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날개 달린 천사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무언가 영적인 신비함을 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주변에는 우리와 같은 모양을 한 수없이 많은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오늘 이 시대에 바로 여기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천사들입니다.
뭔가 엄청나게 큰 일을 해야만 천사가 아닙니다. 기부 천사라고 불리는 김장훈 씨는 지금까지 80억 원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해야만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 속에서 작은 선행 하나, 작은 나눔 하나, 작은 배려 하나가 우리를 천사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강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 주에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습니다.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천사는 아기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게 한 숨은 공로자였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 천사들이 들녘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면서 하늘에는 영광이, 땅에는 평화가 찾아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에게 헤롯에게 가지 말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안내를 해 준 것 역시 천사였습니다.
여러분, 그 천사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천사를 만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천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천사가 되어준다면 우리 주변에는 천사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던 그 천사가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아기 예수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할 오늘의 천사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채 갈등과 분열로 인해 마음 상한 현대인들에게 아기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참 평화를 선포해야 할 천사가 누구입니까? 그 아기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오늘 우리 시대의 천사들입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 천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세상에 널리 알려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천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삶에 찌들고 힘들어서 신음하며 살고 있는 내 이웃들에게 아기 예수가 주신 위로와 안식을 나누는 천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추운 날씨에도 기름을 아끼기 위해서 냉방에서 살아야 하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작은 나눔을 통해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이 시대의 천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늘 우리 시대의 천사들로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마 1:18-25 / 이용효 목사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세계 최고 석학 가운데 한분인 피터 드러커 교수의 “반전의 시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이 시대의 특징을 ‘단절’이라고 보았습니다.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 직장동료, 친구사이, 이웃과의 관계가 서로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가상공간이나, 텔레비젼 앞에서 기계와 마주 대하여 있기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간의 교제가 끊어진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단절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난 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생명에서 떠나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상실하고, 주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죄와 마귀의 종이 되는 비극이 왔습니다. 이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단절이 가져온 현실의 결과를 벽제 화장터나 용미리 공동묘지에 가면 볼 수 있고, 종합병원 중환자실이나 일반 병실에서, 또 정신병원이나 환락의 뒷거리에 가도 볼 수 있으며, 폭력과 유괴, 자살과 같은 사건 현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마음속을 보면 하나님과의 단절의 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 원망과 불평과 탄식과 저주, 불안과 공포와 초조함, 두려움, 염려와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 괴로움과 억울함, 우울함, 짜증,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의 단절의 산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단절은 우리 인간이 회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나 철학, 도덕이나 종교적 수행, 과학이나 정치적인 술수로 하나님과의 단절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영어로 ‘Incarnation' 즉, 성육신하신 사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굿간에 초라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영국에 맥도날드 목사님이 2차 대전 때, 연합군 병사로 참전하여 전투 중, 독일군에게 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맥도날드 목사님의 친구 중에 전기와 기계를 만지는 재주를 가지고 있던 병사가 여러 가지 기계와 재료를 모아서 라디오를 만들었습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깊은 밤중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청취했습니다. 그 날 영국의 BBC 방송을 들었는데,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이 사실을 옆에 있던 맥도날드 목사님에게 전해졌고, 또 맥도날드 목사님은 그 뉴스를 다른 포로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포로수용소 안이 밝아졌습니다. 포로들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연병장에 모인 독일군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매를 맞고 고문당하고 죽어가던 포로들의 얼굴이 항상 초췌했고, 수색과 근심이 가득하고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포로들의 눈동자와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독일군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연합군 포로들 가슴 속에는 ‘해방군이 진격해온다. 우리 연합군이 오면 우리는 곧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생각에 희망의 빛이 번져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악한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진격해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건은 온 인류에게 희망의 빛을 주셨습니다. 눅 2:10에 “오늘날 너희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베들레헴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은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저주에서 해방시킨다는 소식입니다. 이 우주에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원 형벌 받을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자비와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체적인 목적 3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본문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조류 인플렌저’라는 균이 어느 한 농가에 퍼지면 그 농가의 닭과 계란은 모조리 땅에 파묻어 죽입니다. 그 옆 마을, 인근지역 수 킬로미터 안에 있는 양계장 닭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메추리와 오리까지도 수백만 마리라도 흙에 다 파묻습니다. 그 균은 사람을 통해, 자동차를 통해, 바람을 통해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지고 그것이 사람 몸에 들어가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을 아까워도 다 죽입니다. 또 광우병이 발견되면 인근 지역의 소는 모두 도살시킵니다. 그 광우병의 균이 사람의 생명에도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조류 인플렌져와 광우병의 바이러스 균이 심각하지만 죄는 이런 균보다 더 무섭습니다. 성경에는 죄의 삭은 사망이라고 하였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조상이 죄인이기에 우리의 유전자도 죄의 유전자입니다. 이 죄의 결과가 눈물과 한숨과 비탄과 저주와 불행과 질병과 늙어짐과 썩어짐과 죽음과 심판과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비극과 불행이 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웃다가 곧 늙어 울게 됩니다. 꽃들도 활짝 피어나지만 금방 썩어집니다. 새들도 노래하다 금방 떨어집니다. 젊음이 가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의 종교나 철학, 도덕이나 종교적 수행,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러시아 작가인 도스트예프스키는 28살에 국가 음모내란죄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에 끌려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집행관이 5분의 여유를 주었습니다. 그는 손이 묶인 채로 피가 마르는 고통 속에서 남은 시간을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는 2분을 자신의 죽음을 보려고 찾아온 친구들과 친지들을 만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2분은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는데 보냈습니다. 지나간 날이 머리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가자 눈물이 났습니다. 마지막 남은 1분 사형장 주변의 환경을 보고 있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떨려와 정신이 혼미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철컥!” 실탄을 장진하는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저격수들이 사형하기 위해 그를 조준하는데 “중지! 황제의 칙령이오!”하고 백기를 든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황제께서 이 사람의 사형을 감면하고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라는 명령을 하셨소!”하고 말했습니다. 그 후그는 그날 사형장에서의 피가 마르던 5분을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고 시간을 아껴 쓰며, 죄와 하나님과 생명과 죽음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죽음에서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영한 지옥 벌에서 구원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제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 9:2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참 빛, 생명을 주는 빛, 죄악을 소멸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그 빛이 베들레헴으로부터 온 세상에 2,000년 동안 계속해서 비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빛을 받는 사람은 죄에서,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무거운 죄의 멍에가 부러졌으며 죄악의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고 모든 저주에서 풀어졌습니다.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의사로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헤밍웨이가 잘못을 범하면 독방에 가두고 먹을 것도 안주었습니다. 때로는 어린 헤밍웨이를 감옥소에 데리고 가서 “너 죄를 지으면 이 사람들처럼 감옥에 갇힌다.”하고 그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받고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때문에 죄로 인한 공포와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는 죄로 물든 자신의 더러움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 깨끗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며 살다가 결국 자기 아버지가 자살했던 총으로 자기도 자살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인기와 명성을 얻어도, 부귀영화를 누려도, 아름다운 별장을 두 개나 가지고 미녀들과 염문을 뿌려도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에서 자유를 주셨고, 죄의 결박을 풀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롬 5:18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본문 22절에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주시겠다고 수없이 약속하셨습니다. 창 3:15에 남자의 피를 받지 않고 여자 후손으로 보내주시겠다고 하셨고, 창 3:21에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제물이 되어 피를 흘려 온 인류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겠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창 22:18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예언하셨고, 창 49:10에 유다 지파에 오시고, 다윗의 가문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미 5:2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예언하고 있고, 사 7:14에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다고 예언되어 있고,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는 성경에 예언한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유다지파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야만 하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야만 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기적으로 사셔야 하고, 그렇게 죽어야 하고, 그렇게 다시 살아나야만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말씀대로 태어나시고, 성경말씀대로 사시고, 성경말씀대로 죽으시고, 성경말씀대로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의 말씀을 위루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3.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사 7:14의 예언입니다. 임마누엘은 ‘임마’라는 ‘함께’ 라는 뜻과, ‘누’라는 ‘우리’라는 뜻, ‘엘’이라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임마누엘은‘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었기에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파도가 치듯이 고난 많은 이 세상에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은 참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있지만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럴 때 어느 누가 내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내 대신 잠을 자줄 수 도 없고, 내 대신 먹어줄 수 없으며, 내 대신 문제를 짊어져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주님께서 연약한 당신과 함께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스승이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구멍 뚫린 항아리를 주면서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헝겊으로도 막아보고 판자로도 막아보지만 물은 새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가 연못에 가서 그 깨진 항아리를 연못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스승이 그것을 보고‘옳거니!’하면서 칭찬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만족과 평안, 행복과 기쁨을 얻으려고 이 세상의 것으로 아무리 채우려고 애를 써보아도 다 새어 나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젊음도, 건강도, 물질도, 생명도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예수로 채워집니다. 주님의 기쁨, 주님의 평강, 주님의 부요하심, 주님의 권세, 주의 능력, 주의 나라, 주의 영광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즉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분 안에서 내 생이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많지만 본문에서 크게 세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둘째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셋째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이 복을 소유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5 / 지태일 목사
오랜 된 통계입니다만, 어느 방송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이냐’고 물었더니, ‘산타클로스의 생일’이라고 대답한 어린이가 무려 64%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에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휴대전화라고 대답한 어린이들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남자아이들은 게임 CD이고, 여자아이들은 예쁜 옷과 액세서리, 등이라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 = 선물 받는 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선물이나 주고받으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육적인 즐거움을 찾기에 분주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금년은 연휴라 하여 영동고속도로가 밤샛것 정체되고 스키장은 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어디를 가고 먹고 마시고 함으로 성탄의 즐거움을 대신하려는 사람들 많습니다. 사람들은 “Mery Christmas", 즐거운 성탄이라고 인사를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왜 진정으로 즐거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크리스마스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최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 불에 던져져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낮고 천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생케 한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실감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많이 팔아야 느낌이 온다하고 정서적인 사람들은 흰눈이 오고 캐롤송도 들리고 무엇인가 보여지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위기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떤 극적인 인들이 일어나야 느끼고 실감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혼란하고 염려스러워 사람들의 마음이 얼어 붙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한편에서는 성탄을 즐기기 위하여 하루 저녁에 수십, 수 백만원을 물쓰듯 하면서 팁을 수십만원 정도도 쉽게 건너주며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성탄을 느끼고 왜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성도로서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성탄을 기다리십니까? 성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 마음입니까?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분의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뜻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과 임마누엘 이름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니다.
왜 성자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오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은 죄없는 인간으로서 출생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로 가득한 인간이 되실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죄인이 죄인을 대속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이 땅에 아기 예수님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21절)
본문 마태복음 1: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본문은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했다고 번역했습니다만 이 말은 약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약혼이 법률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혼은 법률적, 도덕적 구속력이 있습니다.
신 22:23-24절을 보면 확실해 집니다. "처녀인 여자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으면서도 소리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성적 문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대응이 매우 엄격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의 사상하고는 너무도 다름니다.
둘째는 23절에서 말하는 약혼녀를 가리켜 24절에서는 이웃의 아내라고 말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비록 약혼이긴 하지만 (아직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부부관계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약혼한 사람들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취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남녀가 혼인관계를 맺을 때 먼저 인격적 서약을 존귀하게 여기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아니라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아직 동거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이미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정신이 적용되어야 마땅합니다. 신명기에서도 그랬지만 오늘 읽은 마 1:20에도 천사가 요셉에게 말할 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말씀합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셔야만 우리는 첫 번 성탄의 주인공인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심이 어떠한가를 알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지금 결혼하기로 약혼한 사이입니다. 결혼식을 안올렸기 때문에 아직 동침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약혼 기간동안에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마리아와 동침한 사실이 없습니다. 분명 자기의 아기가 아님니다. 다른 남자의 아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않는 그런 경우를 요셉이 맞이하게 됩니다. 어디 가서 말을 할 것도 못됩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건입니다. 요셉의 분노와 슬픔은 형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약혼한 애인이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이제 요셉이 취할 태도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이 추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마리아가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형벌은 거의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태도는 조용히 눈감아 주는 것입니다. 다행한 것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셉의 입장에서 마리아가 너무 사랑스러우면 눈감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내 아이다"라고 말해버리면 최소한 마리아가 죽음을 면할 수는 있습니다. 또 사랑스런 마리아를 아내로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는가?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사랑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증거에 의하면 요셉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눅2:23- 24) 그렇지만 그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비록 패망한 나라지만 왕족입니다. 왕족의 긍지를 잃지 않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람보기에 의로웠다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유로 공의를 져버리지 않습니다. 의로운 요셉이 이 위기상황에서 취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공의로운 사람으로 마리아를 돌에 맞아 죽게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고 가만히 관계를 끊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가진 마리아의 범죄를 묵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문내지 않고 약혼관계를 끊는 것이 의로운 사람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안 요셉은 파혼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분명 성령으로 잉태케 하셨다는 사실을 주의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가르쳐 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20절) 분명히 확실하게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죄없으신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난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한 일에 대한 그 남편 요셉도 그렇지만 마리아 자신은 어찌했겠습니까?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마리아가 반응을 보였습니까? 만왕의 왕이 나를 통해 태어난 것을 인해 기뻐하고 영광스러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놀랐습니다. 고민했습니다. 눅1:34절에 보면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천사에게 반문합니다.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일이,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에게 탄생하신 사건은 이처럼 요셉과 마리아를 신음케 했습니다. 마리아의 고백도 믿지 못하고 신음했던 요셉이 확고한 믿음에 이르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결혼을 종용하면서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아기가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때로 요셉과 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때 성령님 이 의외로 좋은 피할 길과 명쾌한 대답을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령으로부터 의외의 좋은 피할 길과 명쾌한 대답(20절)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은 의문과 두려움과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 없었다면 요셉은 이 기이한 사건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남자를 알지 못한 동정녀를 통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기이한 사건입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건이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드린 것은 마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에만 일어난 휴먼드라마가 결코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를 곧 그의 아내로 맞아드립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낳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때 요셉은 그의 이름을 천사의 고지를 따라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5)
옳습니다. 요셉에게는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기적의 아이다! 이것이 요셉을 놀랍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적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는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이것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요셉은 시험받을 수 있는 시험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를 거절할 수 있는 유혹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사생아로 생각했단 말인가요. 아버지 요셉 그가 아기 예수님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구주로 믿은 것입니다. 요셉의 증거만큼 신실한 증거는 또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라는 증거는 충분합니다. 문제는 인생의 나태와 불신앙이 있을 뿐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을 가지시기 바람니다. 요셉의 증언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그러면 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까?(21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그 분의 이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름인데 하나가 예수, 다른 하나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입니다. 먼저 본문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씀합니다.
원래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이름은 그 아이의 성품과 사역의 방향을 말해 줍니다. ‘물에서 건졌다는 의미의 모세’, ‘이스라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이가봇 등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이 이 정도라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실 하나님의 이름은 정말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우리의 신앙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했습니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한데서부터 출발했지 않습니까. 내가 왜? 죄인이냐? 너희는 왜? 멀쩡한 사람보고 죄인이라고 말하느냐? 이렇게 말한 사람은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이 엄위로운 하나님 말씀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당신이 죄인이다는 진리의 본질을 숨기는 일이 없습니다. 거기가 바로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음을 성경은 이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인생은 하나님을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태 신앙의 축복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중직자들의 자식들이 타락하고 타락해서 감히 하나님을 대적한 사실에 놀라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이미 하나님을 향해 칼을 뽑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반열에 섰던 종들이 사단의 졸개가 되어버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죄의 세력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존재가 인생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뿐입니다. 종교적 수양을 통해 인간의 외적 행위가 어느 정도 바르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성경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가르치십니다만 일반 은총아래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종교적 편협성이 아닙니다. 오직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절망 중에 있는 인생의 희망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며 살아가는 축복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마태가 이사야서 7:1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이를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엘'은 하나님이란 뜻이며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오신 임마누엘의 목적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1절)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크리스마스, 성탄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지금까지, 교회에서나 많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 하면 산타만을 기억합니다. 맛있는 것이나 선물만을 생각합니다. 무슨 카드난 주고받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무슨 가까운 사람들하고 어디를 놀러가고 즐길 것만을 생각하는 것은 참 성탄의 의미와 목적이 아님니다. 예수님 탄생의 진정한 의미인 죄에서 해방된 구원의 기쁨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탄은 '죄 가운데 있는 인생을 건져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임마누엘 하신 축복입니다. 성탄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영원한 죽음에 빠뜨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구원의 축복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면 주님은 영원토록 그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 찬송가 364장 2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 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부모를 떠나 홀홀 단신으로 이역만리 외삼촌 라반의 집을 찾아 도망 가다가 빈들에서 돌베개 하고 잠을 자야 했습니다. 하늘을 지붕으로 삼고, 차가운 땅을 구둘삼아 빈들의 찬이슬을 이불 삼아, 온 몸을 덮고, 한마디 말도 못하는 돌덩어리를 친구 삼아 베개를 베고 잠을 잠니다. 이름 모를 짐승들의 무서운 신음 소리를 꿈결에 싣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자다가 머리 위에 뜬 달을 보게 됩니다. 눈물 젖은 눈으로 자기를 보내시는 듯 하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요, 수많은 별들은 조금전 까지 지내던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반짝거립니다.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입니다. 조금 전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 아버지 이삭에게 물려주신 기업!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시기로 했던 복중의 복! 그 복을 드디어 어머니의 협조아래,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따돌리면서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히려 그 복을 자기 것으로 받고 보니 평안했던 삶이 "변하여" 고생이 되고,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고, 형제가 변하여 원수가 되고, 안락했던 집을 떠나 청처없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곱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돌베개 배고 자는 야곱은 지금 인생 처음이자 최악의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외롭습니다. 유난히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달 빛 아래 자기의 새까만 그림자만 멀뚱하니 드러누워 가만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던 어머니, 곧 좇아올 것 같던 어머니가 보이질 않습니다. 둘러보니 어둠 뿐이요, 귀를 기울여 보니 짐승들의 울음소리뿐입니다. 온 천지가 외로움뿐입니다.
야곱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습니다. 사랑해 주던 어머니 라헬이 싸준 도시락을 아껴 먹고 아껴 먹으면서, 자꾸만 줄어드는 물주머니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물을 건너, 돌을 밟으며, 먼지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지금 벧엘 들에서 돌 베개하고 잠을 자는 야곱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훨씬 더 무겁고 깊은 밤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한 몸과도 같은 쌍둥이 형 에서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따스한 사랑의 어머니 리브가와 아버지 이삭의 품을 내버려야 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축복이 이것이란 말인가? 정신적인 갈등이 그를 한없이 더욱 더 피곤하게만 합니다.
오늘날도 삶속에 이런 야곱과 같이 돌 베개를 배고 피곤에 지쳐 쓰러진 성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음산한 울음소리, 탄식 소리만 들려 옵니다. 야곱은 너무 두려웠습니다. 강도의 위협, 짐승의 위협, 의식주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금방 축복기도 받았는데 이게 무엇인가?
그러나 돌베개 배고 자던 야곱의 그 어둡고 무거운 상황은 갑자기 바뀌기 시작합니다.
창 28장 "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보입니다. 그 위를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하나님이 저편 끝에, 이 편 끝엔 야곱이 서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창 28:13에 설명이 나옵니다.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과 야곱은 항상 동거, 동행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임마누엘! 임마누엘을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통하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사닥다리 천사들이 우리의 기도와 신음과 눈물, 한숨을 하나님께로 올려갑니다. 또 천사가 하나님의 긍휼과 응답과 말씀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옵니다. 그러니 염려없습니다. 걱정없습니다. 야곱이 자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임마누엘의 축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6년 금번 성탄절에는 여러분의 삶 어느 현장에서든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문이, 치료의 문이 열리고, 형통의 문이 열리고, 구원의 문이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병든 몸, 늙은 몸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전에 기둥같이 쓰여질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지식, 변변찮은 재주이지만 임마누엘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 앞에 드려질 때, 그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기둥같은 열매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던 모든 것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평가됩니다. 옛 말에도 이르기를 "친구를 보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와 함께 한 친구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술 친구 놀음 친구와 함께 하면, 그 사람도 그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사를 친구로 두거나, 교수를 친구로 두거나, 또는 계급이 높은 장군을 친구로 두었다면, 그 사람을 대하는 평가는 달라집니다. 비록 우리가 이렇게 세상의 지위와 명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친구로 두지 못하였을지라도, 이것과는 게임도 안되는 예수님이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며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믿는 자들과 늘 함께 하시마 약속하셨고, 지금도 임마누엘로 지켜 주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는 용기와 새 힘을 얻고 어떠한 난관도 능히 극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023년! 구주 성탄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큰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 1:20-21 / 석원태 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성탄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최대, 최고, 최귀, 최종의 선물입니다(요 3:16). 이것은 세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헤롯 왕처럼 오히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처럼 구주의 탄생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지는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 2:1-18).
그럼에도 천군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영광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눅 2:14). 양을 치던 목자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 가서 고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께 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면서 경배하였습니다(눅 2:15-18).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예루살렘의 경건한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성전에 나아오는 아기 예수를 안고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눅 2:25-35). 또 과부된 지 84년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던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예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눅 2:36-38).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천사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을 찾아와 현몽한 내용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0-21).
지금 요셉은 그와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수태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고민하면서 잠들던 중에 천사로부터 이 현몽을 받았습니다.
그 현몽 중에 받은 메시지는 ① 마리아에게 수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 ②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것, ③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은 유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규례대로 부모가 지어준 것이 아닙니다. 또 낳은 후에 지은 이름이 아니라 나시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짓는 권한을 행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신적 사역을 위한 택자들에게 그 이름을 직접 명명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Ⅰ. 예수 탄생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모노게네(monogene)’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출생방식을 인간적인 생리방식에 의하지 않고, 독특한 하나님의 방법 곧 하나님의 초자연성에 의해서 출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마 1:20). 요셉에게 오기 전에 천사는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먼저 방문하였습니다. 그때는 세례요한이 어머니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은 지 여섯 달째 되는 때였습니다(눅 1:26).
천사는 그녀에게 평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자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면서 영광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눅 1:28-38).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눅 1:31).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2-33). 실로 엄청난 메시지였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놀라면서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눅 1:34). 그 당시는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유대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죽어야 하는 때였습니다.
이때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5). 그리고 덧붙이기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37). 이때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1:38). 그리고 그 후에 그 천사는 또 요셉에게 가서 예수의 성령잉태와 출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의 잉태에는 보통 수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성령의 권능,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는데, 여기 ‘덮다(ejpiskivasei)’라는 말은 성경에서 몇 가지 경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한 경우입니다(창 1:2). 하나님의 성령이 공허(수면)를 덮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창조된 우주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여기 ‘운행’이란 말이 곧 ‘덮음’입니다. 그것은 어미 새가 새끼를 까기 위해서, 혹은 돌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알을 품고’ 있는 상태나, 또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새끼 위를 계속해서 너풀거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신 32:1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께서 공허(수면) 중에 운행(덮어줌)함으로 우주의 맥박이 뛰게 하였습니다. 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덮어주심(품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된 것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을 경우에도 나타납니다(출 40:34-35). 또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를 나타낼 때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라고 한 경우입니다. 그 덮으심의 결과 이스라엘은 광야의 위험과 적들의 위험에서 안전했습니다(시 91:4, 140:7). 이렇게 예수의 잉태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마리아를 덮으신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심은 그의 초자연적 탄생을 알려주는 내용이었습니다.
Ⅱ. 예수 출생의 초자연적 목적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성탄의 목적성을 확실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사명을 띠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명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과 함께 그의 탄생을 통하여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1. 이 세상 중에 ‘자기 백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중에 ‘자기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가운데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라고 하였습니다(요 17:11).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11). 저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요 17:6). 그 아버지의 것인 자기 사람들을 예수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요 17:7-8).
이 놀라운 사실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서,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을 영접하는 비유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세상 중에 예수의 자기 백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 이름을 통하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해주시기 위하여 ‘임마누엘’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마 1:23).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다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25).
2. 이 세상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1).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구원이 필요했을까? 이 세상에 있는 예수의 자기 백성은 죄인이었고, 죄로 인한 사망에 빠져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고 오셨습니다(히 2:14-15).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기 백성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선택받은 자’, ’언약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세리장이라고 하는 직장 때문에 동족인들에게 죄인 취급,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를 찾기 위하여 여리고에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2000년 성탄을 맞고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지고하신 축복의 선물, 영광의 선물을 내려주신 날입니다.
그 선물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성령)이 처녀 마리아를 품어(덮어)주신 결과로 잉태되고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목적적 이름, 사명적 이름이었습니다.
구별된 출생, 구별된 이름, 독특한 이름의 출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을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성탄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를 체험한 자만이 예수 이름의 존귀성, 탁월성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받는 축복입니다. 바로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입니다(요 1:12-13).
예수를 믿는 믿음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 드리는 감사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전하는 주는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충만한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은혜 / 가장 거룩하신 분이 밟았던 그 곳을 / 가장 비천한 사람이 밟고 지날지 모르네. /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계시된 놀라운 은혜 / 크리스마스의 은나팔들이 울려 퍼질 때 /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네. < by Phillips Brooks >
성탄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영광의 날입니다. 그 분을 영접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름을 예수라
마 1:20- 21 / 김근중 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성탄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최대, 최고, 최귀, 최종의 선물입니다(요 3:16). 이것은 세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헤롯 왕처럼 오히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처럼 구주의 탄생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지는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 2:1-18).
그럼에도 천군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영광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눅 2:14). 양을 치던 목자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 가서 고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께 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면서 경배하였습니다(눅 2:15-18).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예루살렘의 경건한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성전에 나아오는 아기 예수를 안고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눅 2:25-35). 또 과부된 지 84년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던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예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눅 2:36-38).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천사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을 찾아와 현몽한 내용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0-21).
지금 요셉은 그와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수태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고민하면서 잠들던 중에 천사로부터 이 현몽을 받았습니다.
그 현몽 중에 받은 메시지는 ① 마리아에게 수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 ②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것, ③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은 유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규례대로 부모가 지어준 것이 아닙니다. 또 낳은 후에 지은 이름이 아니라 나시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짓는 권한을 행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신적 사역을 위한 택자들에게 그 이름을 직접 명명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Ⅰ. 예수 탄생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모노게네(monogene)’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출생방식을 인간적인 생리방식에 의하지 않고, 독특한 하나님의 방법 곧 하나님의 초자연성에 의해서 출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마 1:20). 요셉에게 오기 전에 천사는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먼저 방문하였습니다. 그때는 세례요한이 어머니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은 지 여섯 달째 되는 때였습니다(눅 1:26).
천사는 그녀에게 평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자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면서 영광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눅 1:28-38).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눅 1:31).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2-33). 실로 엄청난 메시지였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놀라면서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눅 1:34). 그 당시는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유대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죽어야 하는 때였습니다.
이때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5). 그리고 덧붙이기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37). 이때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1:38). 그리고 그 후에 그 천사는 또 요셉에게 가서 예수의 성령잉태와 출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의 잉태에는 보통 수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성령의 권능,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는데, 여기 ‘덮다(ejpiskivasei)’라는 말은 성경에서 몇 가지 경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한 경우입니다(창 1:2). 하나님의 성령이 공허(수면)를 덮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창조된 우주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여기 ‘운행’이란 말이 곧 ‘덮음’입니다. 그것은 어미 새가 새끼를 까기 위해서, 혹은 돌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알을 품고’ 있는 상태나, 또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새끼 위를 계속해서 너풀거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신 32:1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께서 공허(수면) 중에 운행(덮어줌)함으로 우주의 맥박이 뛰게 하였습니다. 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덮어주심(품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된 것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을 경우에도 나타납니다(출 40:34-35). 또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를 나타낼 때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라고 한 경우입니다. 그 덮으심의 결과 이스라엘은 광야의 위험과 적들의 위험에서 안전했습니다(시 91:4, 140:7). 이렇게 예수의 잉태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마리아를 덮으신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심은 그의 초자연적 탄생을 알려주는 내용이었습니다.
Ⅱ. 예수 출생의 초자연적 목적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성탄의 목적성을 확실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사명을 띠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명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과 함께 그의 탄생을 통하여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1. 이 세상 중에 ‘자기 백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중에 ‘자기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가운데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라고 하였습니다(요 17:11).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11). 저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요 17:6). 그 아버지의 것인 자기 사람들을 예수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요 17:7-8).
이 놀라운 사실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서,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을 영접하는 비유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세상 중에 예수의 자기 백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 이름을 통하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해주시기 위하여 ‘임마누엘’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마 1:23).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다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25).
2. 이 세상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1).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구원이 필요했을까? 이 세상에 있는 예수의 자기 백성은 죄인이었고, 죄로 인한 사망에 빠져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고 오셨습니다(히 2:14-15).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기 백성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선택받은 자’, ’언약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세리장이라고 하는 직장 때문에 동족인들에게 죄인 취급,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를 찾기 위하여 여리고에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2002년 성탄을 맞고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지고하신 축복의 선물, 영광의 선물을 내려주신 날입니다.
그 선물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성령)이 처녀 마리아를 품어(덮어)주신 결과로 잉태되고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목적적 이름, 사명적 이름이었습니다.
구별된 출생, 구별된 이름, 독특한 이름의 출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을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성탄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를 체험한 자만이 예수 이름의 존귀성, 탁월성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받는 축복입니다. 바로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입니다(요 1:12-13).
예수를 믿는 믿음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 드리는 감사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전하는 주는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충만한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은혜 / 가장 거룩하신 분이 밟았던 그 곳을 / 가장 비천한 사람이 밟고 지날지 모르네. /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계시된 놀라운 은혜 / 크리스마스의 은나팔들이 울려 퍼질 때 /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네. < by Phillips Brooks >
성탄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영광의 날입니다. 그 분을 영접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