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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主式會社 드림 원문보기 글쓴이: 관옥
이번 주일은 한번 제대로 놀아봅시다.
제대로 노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건강한 예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우선 아래 글을 읽어보십시오.
쓸데없이 길게 썼다는 느낌입니다만, 다시 쓰자니 꾀가 나고 그래서 그냥 올립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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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월드컵 열풍이 한국과 일본을 진원지로 하여 세계를 휩쓸고 있다. 과연 지구촌이다. 교통과 통신의 놀라운 힘이 지구라는 작은 별을 진짜 작은 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달라이 라마의 말대로, 국경선이라는 것이 의미 없게 되었다.
월드컵 개막전을 6억 인구가 TV화면으로 지켜보았다니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열 가운데 하나쯤 관중이 되어 월드컵에 참여한 셈이다. 대단한 놀이판이다. 어마어마한 돈이 이 놀이판을 통해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양이다. 그러다보면 돈을 버는 자도 있고 잃는 자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지구’라는 작은 별 밖으로 돈이 나갈 리는 없으니 결국 그게 그거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벌어봤자 그 돈이 언제까지나 자기 것일 수 없고 잃어봤자 자기 게 아닌 것을 잃었으니 사실상 벌어들인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다는 그런 얘기다.
놀이의 속성이 그렇다. 뭔가를 목표로 열심히 하지만 목표 자체가 허망한 것이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말을 쓴 것은 놀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놀이에 이겼다 해서 우쭐거릴 것도 없고 졌다 해서 주눅들 것도 없다. 놀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야 놀이다. 신나게 한 판 놀았으면 그것으로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그만이다. 더 무슨 바랄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다. 놀이에 이겼다 해서 부자가 되고 놀이에 졌다 해서 가난해진다면, 그건 놀이를 놀이로 하지 않고 ‘놀이’라는 이름으로 ‘노름’을 했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사촌 사이처럼 보이지만, 놀이와 노름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금방 놀이를 통해서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고 했지만, 그래서 놀이란 허망한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 말을 뒤집어야겠다. 놀이를 통해서 얻는 것이 있다. 그리고 잃는 것도 있다. 따라서 놀이는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다.
놀이를 통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먼저 놀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놀이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노름을 하고 있는 자들한테서 바른 대답을 얻을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놀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누군가? 머리 굴릴 것 없다.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잘 논다. 사실은, 놀이를 제대로 할 줄 알기에 아이들이다. 나이가 환갑을 넘었어도 제대로 놀 줄 알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이 같은 사람’이고 그래서 지금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어른’은 도무지 놀 줄을 모른다. 사실은, 놀 줄 몰라서 그래서 어른이다. 어른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놀 줄을 몰라서다.
놀이를 제대로 하려면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가 세 가지 있다.
첫째, 놀이 자체에 성실해야 한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몸과 마음이 온통 놀이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어머니가 그만 들어와 저녁 먹으라고 불러야 놀기를 멈춘다. 일단 놀이가 시작되면 그것을 마칠 때까지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성실함이란, 속이지 않는 것[不欺]이요 쉬지 않는 것[不息]이요 거짓됨이 없는 것[無妄]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속이지 않는다. 안 속이는 게 아니라 속일 줄을 모른다. 만약에 놀면서 속이는 아이가 있다면 겉모양은 아이로 남아 있으나 속은 벌써 어른이 된 가짜 아이다. 또, 아이들은 놀면서 딴 짓을 하지 않는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숙제 걱정을 하거나 어저께 매 맞은 일을 기억하여 속상해 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숨바꼭질을 할 때에는 오직 숨는 일과 찾아내는 일에 열중할 따름이다. 놀이는 그래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참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는 오로지 지금 여기만 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머물러야 할 현재 또한 없다. 이른바 깨달음을 얻었다는 성인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놀이를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금방 놀이가 재미없어지고 따라서 무의미해진다. 놀이라는 것이 재미있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둑을 두면서 생각이 딴 데 가 있다면 그 바둑판이 재미없어질 것은 뻔한 이치다. 농구를 하면서 농구보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애인한테 마음이 가 있는 농구선수를 상상해보자. 그의 농구가 어찌될 것인가?
모름지기 놀이는 성실하게, 진지하게, 열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 마음과 몸을 한 곳에 모아 놀이에 임하지 않으면 노는 것도 아니고 안 노는 것도 아니고,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그래서 결국 놀이가 시들해지고 재미없어지고, 마침내 놀이판 자체가 깨어지고 만다.
놀이를 제대로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자세는 법을 지키는 것이다. 놀이에는, 그것이 어떤 놀이든, 나름대로 지켜야 할 법이 있다. 고무줄넘기를 하거나 구슬치기를 할 때에도 법이 있어서 그 법을 따라야 한다. 숨바꼭질을 하는데 술래가 눈을 떠서 숨는 아이들이 어디 숨는지를 알아두었다가 곧장 찾아낸다면, 그건 숨바꼭질이 아니다. 아이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놀이를 제대로 하는 것은 놀이마다 있는 법을 잘 지키기 때문이다. 물론 그 법은 저희가 스스로 만들었거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일단 법이 정해지면, 놀이를 하는 동안 모두 그 법을 성실히 따른다. 따로 심판을 두어 범법자를 징계하거나 추방하지 않고서도 아이들이 놀이를 제대로 하는 이유는, 가슴마다 보이지 않는 심판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놀이를 제대로 하려면 법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의 놀이판에는 심판이 있어야 한다. 그 까닭은 저들의 가슴마다에 있어야 할 심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이라고 해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가슴 속 심판을 모시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놀이판에 섞여 있으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따로 심판이 있어야 한다. 아이였을 때 모시고 있던 가슴 속 심판을 추방하거나 아니면 윽박지르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다. 그러니 어른들의 놀이판에는 따로 심판이 있어서 법을 어긴 자를 징계 또는 추방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 동네 아이들 농구는 열 명만 있으면 할 수 있지만 프로 농구는 주심 하나에 부심 둘까지 해서 최소한 열 세 명이 필요하다.
심판 없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생각이나마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아이들이 하는 농구라 해도 무슨 타이틀이나 컵을 쟁취하기 위한 농구대회쯤 되면 심판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더 이상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에는 상(賞)도 없고 벌(罰)도 없다. 그런 게 있으면 놀이가 아니다.
상도 벌도 없으니 구태여 법을 어기면서 놀 까닭이 없다. 법을 어기면 놀이판 자체가 망가지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는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놀이 자체를 위해서(놀고 있는 자신의 즐거움에 흠집을 내지 않고자) 법을 지킨다.
놀이를 재미있게 하려고 편을 가르지만, 그래서 청군이 이기고 백군이 지는 결과를 빚기도 하지만, 이겼다고 해서 우쭐거리거나 졌다고 해서 절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까지 한 것이 ‘놀이’가 아니었다는 반증일 뿐이다. 진짜 놀이를 했다면, 재미있게 놀았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겼든 졌든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상을 주고 벌을 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지 이긴 편을 떠받들고 진편을 깎아내리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서 잘 살면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로의 생각에 경계해야 할 함정이 숨어 있다고 본다. 놀이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주어지는 상을 받기 위해서 놀이를 할 때에 자칫 놀이판이 살벌한 경쟁마당으로 바뀔 수 있고, 바로 여기에 인간 세상의 온갖 부정(不正)과 비리(非理)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에 갔다가 TV에서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꼬마 아이들의 퀴즈 쇼를 보았다. 둘씩 짝을 이루어서 하는데 한 아이가, 자기 짝이 맞히든 상대편 아이가 맞히든 정답을 맞히기만 하면 손뼉을 치면서 “야―”하고 환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눈물겨운 동심(童心)이었다. 누가 맞혔으면 어떤가? 내 편이든 네 편이든 문제를 맞혔으니 신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저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한국이 골을 먹었을 때에도 한국이 골을 넣었을 때 터져 나오는 환성과 똑같은 환성이 터져 나올 수 있을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거기가 바로 천국일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놀이를 놀이로 할 수 있어야 하고, 놀이를 놀이로 할 수 있으려면 저마다 잃어버린 동심을 회복해야 한다.
끝으로, 놀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은 놀이에 얽매이지 않는 자세다. 놀이를 제대로 하려면 노는 사람이 놀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놀이에 성실한 것과 놀이에 집착하는 것은 정반대다.
축구장에서 공을 차는 사람들이 이기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마음에 스스로 얽매여 승부에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축구가 재미없어지고 따라서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승부에 집착하니까 반칙을 저지르고 몸이 굳어지고 상대편을 속이고 결국 놀이판이 전쟁판으로 바뀌는 웃지 못 할 비극이 연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말로 놀이를 했다면, 이겼어도 좋고 졌어도 좋은 일이다. 한바탕 놀지 않았는가? 그러면 됐지, 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탐한단 말인가?
이렇게 제대로 놀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다고 했다. 이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그것을 생각해볼 차례다.
아이들은 놀면서 무엇을 얻는가? ‘배움’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배운다. 그래서 성장(성숙)한다. 협동하는 법도 배우고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법도 배우고 경우에 따라 용감하게 나서거나 슬기롭게 물러서는 법도 배우고, 그러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함께 자란다.
성장한다는 말은 미숙함과 유치함을 벗는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저만 생각하는 마음, 터무니없이 고집부리는 마음 따위를 벗는다. 그래서 잘 노는 아이는 잘 자라는 아이다. 물론, 놀이를 위장한 어른들의 돈벌이 장난에 빠졌을 경우에는 반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상대를 속이거나 자신을 속이는 방법을 배우고, 결국 놀이를 통해 성장은커녕 일찌감치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 수도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이 그렇듯이 놀이도 사이비와 가짜가 많이 있다. 동심은 결코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세상에서 아이들만 할 수 있는 것이 ‘놀이’다. 어른들은 어른이기 때문에 놀 줄을 모른다. 지금 여기에 충실할 줄도 모르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성실할 줄도 모르고 특히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자유로울 줄을 모른다. 네 편 내 편 갈라서 놀지만 네 편의 승리에 축하하고 내 편의 패배에 박수칠 줄을 모른다. 만약에 어떤 어른이 놀면서 그럴 수 있다면 그 어른은 ‘어른의 얼굴을 한 아이’요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다.
자사(子祀) 자여(子與) 자려(子犁) 자래(子來) 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없음[無]으로 머리를 삼고 태어남[生]으로 척추를 삼으며 죽음[死]으로 엉덩이를 삼는가? 누가 죽고 나고 있고 없음이 한 몸인 줄 알까? 우리가 그를 벗으로 삼으리.”
네 사람이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이윽고 벗이 되었다(莊子, 6, 3).
자상호(子桑戶),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 세 사람이 더불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서로 사귀지 않고 사귀며 돕지 않고 도울 것인가? 누가 능히 하늘에 올라 구름을 타고 노닐며 끝없는 곳을 돌아다니고 서로 삶을 잊어 마침내 영원히 살 것인가?”
세 사람이 서로 보며 웃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이윽고 벗이 되었다.
아무 일 없이 한동안 지내다가 자상호가 죽었다.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에 공자가 소식을 듣고 자공을 보내어 장례 일을 거들게 하였는데, 한 쪽에서 가락을 고르고 다른 쪽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하기를,
“아아, 상호야, 상호야. 자네는 이미 근원으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구나.”
자공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삼가 묻습니다. 시신 곁에서 노래를 부름이 예인지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웃으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예의 뜻을 어찌 알겠나?”
자공이 돌아와서 공자께 묻기를,
“저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절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겉모습 따위는 아랑곳없이 주검을 곁에 두고 노래를 하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더군요. 도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 이르기를,
“저들은 틀 밖에서 노니는 이들이요 나는 틀 안에서 노니는 사람일세. 안과 밖이 서로 미치지 못하거늘 자네를 보내어 조문케 했으니 내가 생각이 모자랐구먼. 저들은 바야흐로 조물자(造物者)와 더불어 벗이 되어 천지의 한 기운을 타고 노닌다네[與造物者爲人而遊乎天地之一氣]. 삶을 군살이나 늘어진 혹으로 여기고 죽음을 곪은 종기 터지는 것으로 여기니 그런 이들이 어찌 삶과 죽음의 우열선후(優劣先後)를 따지겠는가? 서로 다른 것들을 잠시 빌어다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간과 쓸개를 잊어버리고 눈과 귀를 버려, 나고 죽기를 되풀이하되 처음과 나중을 헤아리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티끌세상 밖을 돌아다니며 무위자연의 경지에서 노닐거니와[逍遙乎無爲之業] 저들이 무엇 때문에 성가신 세속의 예를 지켜 사람들의 이목에 보이려 하겠는가?”(莊子, 6, 4).
틀 밖에서 노니는 자들이든 틀 안에서 노니는 자들이든, 노니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안팎이란 그것을 설정한 자에게나 있는 것이니, 결국 세상 모든 인간이 나름대로 “노닐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반이렷다. 다만 제가 지금 노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이 배움을 얻어 성숙으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제 살을 찢고 제 피를 말려 퇴락으로 떨어지느냐가 결정되는 것 아닐까?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놀이(인생)의 허망함을 꿰뚫어본 설교자는 그 깨달음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결국 좋은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잘 살며 즐기는 것밖에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선물이다”(전도서 4: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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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과 짝을 이루어 놀면 혼자 노는 것보다 쉽고 재미도 나겠지요.
화투를 치든지, 바둑을 두든지, 달리기를 하든지, 숨바꼭질을 하든지 아무튼 만만한 '놀이' 하나를 찾아서
열과 성의를 다하여 한판 놀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보고서를 만들어 재방송하시면 더 좋겠지요?
저는 월요일부터 사흘 간, 강원도 원통으로 집회를 갑니다.
그 사이에 카페에도 못들어올 것 같네요.
모두들 신명나게 잘 노십시오!
첫댓글 잘 놀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