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거리 문제 토론회 개최)
14일(금) 오후 3시 안산동주민센터
주제발표: 정진각(지역사학자)
안산동장 그리고 비석거리 이전을 찬성, 반대하는 시민들도 참석할 수 있는 조건, 많은 참여부탁드립니다.우리 열정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라 생각됩니다.
김완수 면장 공덕비 문제 해결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스루티 펌
http://www.grassrooti.net/
홀대받는 ‘3·1 정신’…안산이 부끄럽다
[안산역사 바로세우기①]수암면 비석거리 ‘비석’은 어디로 갔나
3월 1일 아침9시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안산 중앙역 안에는 삼삼오오 만세길 탐사 참가자 30여명이 모여 있었다. 칠십대 어르신과 초등학생까지 주최 측에서 나눠주는 작은 태극기를 갖고 오늘 행사의 출발지인 원후마을 우물터(현 장하동)로 가기위해 시내버스에 탔다.
안산지역에서 3·1 만세시위는 3월말에서 4월초까지 진행되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시위가 수암면 비석거리(안산동)에 2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3월 30일 만세시위이다. 당시 수암면의 인구가 8천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2천여 명이 나왔으니 지금 봐도 대단한 규모다. 그리고 군자면(원곡동) 지역에서 1천여 명의 시위가 있었고 4월 1일 반월면에서 6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대부도에서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있었던 기록이 있다.
올해 3·1 만세길 탐사는 바로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의 현장을 따라 걷는 행사이다.
원후마을 우물터에서 안산지역사연구모임 정진각 소장님으로부터 1919년 당시 수암면 일대의 3·1독립 운동사를 들었다. 특히 94년 전 3월 30일 와리(와종)에서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홍순칠 독립운동가의 손녀이신 홍혜수 여사가 함께 하셨다. 현재 배달조선 민족겨레연합 공동대표이신 홍 여사는 참가자들에게 할아버지의 뒤를 잇는 뜻 깊은 행사에 고마움의 인사와 함께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대한독립 만세 삼창과 함께 일행들의 3·1절 만세행진이 시작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원후마을은 날선 바람을 막으며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있어 말 그대로 포근한 전원마을인데 무분별한 작은 공장과 창고들이 사람 살던 집들을 밀어내고 차지하고 있어 고즈넉한 마을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어 우리 일행들을 안타깝게 했다.
세월이 흘러 지식은 변해도 지혜는 변치 않는다
원후마을을 출발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신이나 행인들의 숙박 장소로 쓰였던 쌍록원(장하동 안산승마랜드 인근)에 도착해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주위를 보니 바로 앞이 서서울 톨케이트로 3·1절 연휴를 맞아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통요지를 보는 인간의 지혜는 변함이 없다는 정 소장님의 설명은 일행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쌍록원터를 둘러보고 벌말(장하동)을 지나 만세시위대가 1차로 집결하였던 당시 도살장터(안산동 주민자치센터 뒤쪽)에 도착해 다리품을 팔아 사발통문을 돌려 2천명의 시위대를 규합한 주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마냥 뜨거워진다.
하지만 94년전 이 길을 따라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던 흔적도 기념비도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날의 만세 함성을 육교위에서…
안산동 육교를 지나다 일행들은 육교위에서 ‘대한독립 만세’, ‘안산시민 만세’, ‘평화통일 만세’를 외치고 당시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수암면사무소를 향했던 비석거리(안산동 수암농협 자리)로 갔다. 비석거리는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수암면 18개리에서 모인 만세 군중이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진행했던 장소였다.
비석거리는 안산 최대의 만세운동 역사 현장이지만 도로이름으로라도 남았던 만세길은 새로운 도로명 정비사업 와중에 원당골 1길로 바뀌었고, 비석거리의 상징이었던 비석마저도 제자리를 벗어나 새로 지은 주택가 앞마당에 홀대받고 있었다. 과연 누구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무관심한 우리 모두의 망각이었을까?
필자가 몇 년 전 중국에서 열렸던 세계도시포럼이라는 행사에 간적이 있다. 주제가 조화로운 도시였다. 역사가 조화로운 도시 주제의 섹션을 참관한적 있다. 기억에 의하면 도시는 새로운 건축물이나 도로를 세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역사 문화적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조화로운 도시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머릿속에 남았었다. 안산은 2016년이면 시승격 30주년이 된다. 역사와 조화로운 도시는 아닐지라도 존재했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비석거리에서 안산초교까지, 시대의 부끄러움을 느끼다
비석거리를 지난 일행들은 안산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안산초교 100주년 기념비 앞에 모여섰다. 역사적 기록에 의해 1899년 개교가 되어 올해면 114주년이 되는 학교인데 2012년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100주년을 상징하는 100이라는 글자가 비석위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정 소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1912년 조선인 교장을 내쫒고 일본인 교장을 새로 앉혔는데. 이를 기점으로 2012년 안산초교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기념비 건립논의 시점부터 안산 지역사 연구모임과 여러분들이 100주년 기념비의 부당함을 얘기했지만 오늘까지도 기념비는 버젓이 서있다. 우리는 ‘기념비 철거 만세’를 연거푸 외치며 꼭 해결해야할 3·1절 숙제를 저마다 가슴에 안고 내년에는 3·1운동 기념비로 바뀐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 안산초등학교를 다시 찾을 것을 다짐했다.
안산 역사바로세우기로 시승격 30년을 준비하자
이번 만세길 행진의 마지막 목적지인 안산 관아터에 도착했다. 작년보다는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주변에 안산읍성 발굴지가 보였다. 안산지역사연구모임의 신대광 선생님은 서산의 해미읍성과 순천의 낙안읍성 같이 잘 복원하면 우리지역 또 하나의 역사적 명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관아터에 다시 모임 일행은 오늘 행진을 마무리 하며 참가자들의 뜻과 의지를 모은 ‘2013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3·1 안산시민제안서’를 낭독하였다.
제안서에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천년 안산의 역사를 되살려 나가기 위하여 안산초교 100주년 기념비 철거와 같은 일제 왜곡역사 바로세우기와 독수리 모양을 닮아 수리바위라고 부르며 취암(鷲巖)이라 했던 지명을 수암봉으로 바꾼 사례와 같은 일제의 왜곡된 지명 바로잡기 운동과 비석거리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적지 기념사업 등을 전개하기 위한 안산시와 안산시의회 그리고 안산 시민들의 참여와 실천을 촉구하였다.
제안서의 낭독과 만세삼창으로 2013년 3·1절 만세길 탐사의 짧은 일정을 마치는데 산꼭대기 취암(鷲巖)이 마치 우리를 내려다보며 호통 치듯한다.
“오늘 같은 마음으로 살아라!”
신윤관 안산내일포럼 운영위원장
첫댓글 저 파란지붕 안에서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보는 곳에서 홍보할 때에 더욱 신중하게 생각하셨더라면
그 슬로건을 폐지시키고 국민들과 소통하자고 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블로그 총방문 4,107,166 명을 돌파하면서 네티즌 여러분들께 고합니다.
http://blog.daum.net/hblee9362/11309181
그것도 모자라서 정책브리핑 소설네트워크 로 간판을 또 이렇게 위정자들이 바꾸었습니다.
http://blog.daum.net/hblee9362/11332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