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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顯忠祠)
목차
1. 개요
2. 역사
2.1. 숙종의 현충사 중건
2.2.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강점기의 수난
2.3. 8.15 광복 이후
3. 관리
4. 박정희 현판 논란
5. 시설
5.1. 충무문(忠武門)
5.2. 충의문(忠義門)
5.3. 홍살문
5.4. 본전(本殿)
5.5. 구(舊) 본전
5.6. 고택(古宅)
5.7. 활터
5.8. 충무정(忠武井)
5.9. 정려
5.10. 이면 묘소
5.11. 舊 유물 전시관
5.12.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6. 외부 링크
7. 대한민국 사적 제155호
1. 개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 1967년 사적 제155호 '아산(牙山) 이충무공 유허(李忠武公遺虛)'로 지정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충사로 잘 알려져 있다. 해당 시설의 한글 명칭 끝 글자가 '~사'로 끝나서 이곳을 불교 사찰로 오해하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현충사의 끝 글자 '사'는 사찰을 뜻하는 寺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祠다.
본래 충청남도 아산군에 속해있던 곳이었으나, 1995년 옛 온양시와 아산군이 지금의 아산시로 통합되면서 현재 행정 소재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다.
이순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현충사 외에도 전국의 여러 곳에 위치해 있다. 이순신이 근무했던 전라좌수영이 있던 전라남도 여수시의 충민사(忠愍祠), 통제영이 있던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도의 충무사(忠武祠) 등이 그 예이다. 현충사는 그 중 대표격인 형태다.
2. 역사
2.1. 숙종의 현충사 중건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이후, 1598년(선조 34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하게 되면서, 1706년(숙종 32년)에 지방 유생들이 충무공의 숭고한 호국충절의 정신과 애민 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 사당을 세울 것을 조선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듬해인 1707년(숙종 33년) 숙종의 어명하에 지금의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생가에 충무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리고 나타낸다는 뜻에서 '현충(顯忠)' 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워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충무공의 공로와 업적을 기리는 성역(聖域)으로 거듭났다. 참고로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은 숙종이 친필 사액으로 직접 내린 것이다.
2.2.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강점기의 수난
1865년(고종 2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왕 섭정을 맡았던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 철폐 명령을 내리게 됨에 따라 현충사도 철폐되어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유생들이 충무공의 충성심에 대한 모독과 패륜 행위를 흥선대원군이 저지르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지만, 대원군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원 철폐를 강화함에 따라 현충사는 이를 계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한때 사라지기도 했었다.
일제 치하에 충무공 종손(13대 종손 이종옥)이 가난해서 고택과 묘소가 포함된 임야, 현충사 부지가 경매에 넘어갔는데, 1931년 5월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뜻 있는 인사들이 이 충무공 유적 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 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 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 이후 봉안식을 하고 현충사 사적비를 건립한다.
2.3. 8.15 광복 이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 이순신 장군의 성역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1962년에는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다는 유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유물 전시관' 이 개장되었고, 1966년에는 '현충사의 경역(敬域)'을 확장하여 1967년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본전(本殿)과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봤던 시절 지냈었던 가옥과 활터가 개장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주변에 살던 일부 주민들은 이주해 현충사 옆에 이주단지를 구성했다.
다만, 이 때 건축 양식과 현충사 내 내부 구조 등이 일본식으로 구성되어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원래 숙종 때 지어진 본전이 중심에서 밀려나, 측면에 화장실과 같이 있는 것처럼 조성된 것도 이 때 현충사 경내의 설계를 일본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후엔 2011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기념하여 현충사 안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 개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관리
현재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가 관리 및 운영을 하고 있으며 전 국민 무료 입장이다. 2014년까지는 매주 화요일에 휴관했지만, 2015년 1월 1일부터는 매주 월요일에 휴관한다.
4. 박정희 현판 논란
현충사는 정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박정희시절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늘어난 것이 반영되어 종부 최순선은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을 철거하고 이전의 숙종 사액 현판을 걸 것을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난중일기의 전시를 중단시키겠다고 선언하였다.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 사무소 관계자는 "역사가 더 깊은 왕실 현판으로 교체하는 것에 공감한다"면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숙종 현판의 규격이 현재 현판보다 작아 교체할 경우 잘 안 보일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이 말은 뒤집어 이야기하면 2018년까지도 50년 이상을 박정희가 쓴 현충사 현판을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쭉 걸어오고 있었다는 소리다. 현충사가 성역화된 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와 같은 현충사를 조성한 인물은 박정희다. 박정희 정부가 이순신과 현충사를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했다는 비판이 항상 따라다니기도 했다.
또한 난중일기는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고 원본은 수장고에 있을뿐 아니라, 종부에게는 유물을 개인적으로 옮길 권리가 없다. 법원이 유물을 팔아먹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충무공파 종중이 제기한 유물 이동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누가 쓴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와 "친일행각을 저지른 박정희가 쓴 현판을 현충사에 걸어놓을 수는 없다"라로 나뉘었다.
이와 별개로 충무공파 종중에서는 '박정희 현판 철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기사 참조 그러나, 숙종의 현판은 본전의 박정희 현판 교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현충사 '구 본관'에 원래부터 걸려 있었다. 즉, 박정희 현판이 숙종 현판을 떼어내고 대신 걸려있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국가 관리하에 두지 않은 후폭풍이 전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다. 물론 국가가 온전히 관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2018년 2월 21일에 당시 문화재청(現 국가유산청)은 신 본전(1967년 건축)의 '박정희 친필 현판'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관련 기사) 문화재청은 숙종 친필 현판은 1932년 중건된 舊 본전에 그대로 걸려 있는 만큼 박정희의 현판이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며, 거꾸로 신 현충사가 박정희 정부의 작품인 만큼 오히려 현판 철거가 역사성과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무엇보다 현판을 함부로 떼는 과정에서 조금의 실수라도 한 번 났다간 건물에 손상이 가 버린다.
박정희를 둘러싼 논란(구체적으로는 일제 시대 당시의 행적, 충무공 현양의 정치적 이용)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랫동안 잊혀져 온 현충사를 다시 성역화했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현판이 논란 끝에 존속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점을 참작한 결과로 풀이된다.
5. 시설
현존하는 현충사 건물은 일제강점기 ~ 광복 이후에 지어졌다. 다시 말해서 중건, 복원 형태이므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원형에 비해 유적으로서의 가치는 낮은 편이다.
5.1. 충무문(忠武門)
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한옥 모습의 문으로,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지시에 따라 세워진 관문이다.
5.2. 충의문(忠義門)
현충사 본전의 정문으로 1932년 현충사 중건 때 세워졌다가, 1967년 본전이 확장 이전하게 되면서 새로 개축하여 지어진 관문이다.
5.3. 홍살문
본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관문.
5.4. 본전(本殿)
1967년 현충사 성역화에 따라 확장이전하여 신축된 콘크리트 건물로 안에는 충무공의 영정과 조선시대 때 사용했던 영기(令旗)가 보존되어 있다. 현충사에 봉안된 이순신 장군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 1973년 우리나라 1호 표준영정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장우성 화백은 19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은 인물로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다수 출품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됐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에도 이름을 올렸다.
표준영정 지정과 지정 해제를 심의하는 기구인 문화체육관광부 영정동상심의위원회도 복식 고증에 명확한 오류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2010년엔 친일 작가 논란, 2017년에는 복식 고증 오류까지 포함해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해제 신청이 있었지만, 문체부는 100원 동전과 교과서 전면 교체 등 막대한 비용과 사회적 혼란 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2020년 6월 다시 한번 지정 해제 신청이 있었지만,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 요구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매년 국정감사에서 지적된 사항이기도 하다.
옛 본전 위의 자리에 지금의 본전을 신축하여 넓고 웅장한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옥의 티가 있다면 사당의 기능을 하는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짓는 것이 보통이나 새로 만든 본전은 팔짝지붕이다. 당연하게도 구 본전은 맞배지붕이다.
참고로 현재 내걸려 있는 한글 현판은 성역화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현판으로 예전에 걸려있는 현판은 구(舊) 본전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다. 舊 본전은 현충사 한켠에 따로 배치되어 있는데 동아일보가 현충사를 새로 중건하며, 1707년(숙종 33년) 숙종이 내려준 현판을 걸고 다시 세운 것이 舊 본전.
5.5. 구(舊) 본전
1707년(숙종 33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어명하에 따라 최초로 지어진 본전이자 예전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셨던 사당. 숙종이 직접 하사한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는 영정이 1967년에 새로 지어진 현재의 본전으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만 남아 보존, 전시되고 있다.
과거에는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1910년(융희 4년) 일제(日帝)의 탄압 등으로 쇠퇴의 기로 및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가 1932년 충무공을 생각하는 사람들 전국 각지의 모금으로 다시 전면 중건되었고, 1967년 지금의 본전이 신축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규모에 있어서는 처질지 몰라도 역사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가치가 확실히 높은 곳이다.
5.6. 고택(古宅)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살아온 집으로 원래는 충무공의 부인(상주 방씨)이 살던 집이었는데 충무공이 데릴사위로 오게 되면서 사실상 충무공의 집으로 바뀌었고, 이후 종손이 대대로 살아오다가 지금의 현충사로 이전되어 보존 가옥으로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상술한 종부의 만행 때문에 경매에 넘어갔다가 덕수 이씨 풍암공파에게 낙찰받았다
(종부의 만행 관련 기사).
[현충사 이순신 장군 고택 부지 경매
뉴시스 기사 등록 : 2009. 3. 25. 11:10
이종익 기자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고택과 무예를 연마하던 10만㎡ 규모의 문화재 보호구역 내 사유토지가 법원 경매로 나와 안타깝게 하고 있다.
25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따르면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61과 산61-1, 100-1 등이 경매로 나와 30일 1차 경매가 실시된다.
경매가 실시되는 이 토지는 문화재로 지정된 현충사 경내의 이 충무공 고택 부지 3필지 7만4711㎡와 문화재 보호구역 내 임야와 농지 4필지 등 7건 9만8000여㎡다.
이 토지는 충무공 15대 후손 종부(宗婦)인 A씨의 사유지며 경매 청구권자는 B씨(70)로 청구금액은 7억원이다.
종부 A씨는 8년 전 남편 이모씨가 사망한 뒤 종갓집 재산을 담보로 얻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채무자에 의해 관련 부지가 경매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청이 법적으로 채무 관계가 있는 물건에 대해 응찰할 수는 없고 매입 예산도 없는 실정"이라며 "예산을 확보해 문화재청이 매입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중이다"고 밝혔다.]
[충무공 古宅 터 덕수 이씨 문중에 낙찰
이우명(연합)
연합뉴스 기사 등록일 : 2009.05.04
덕수 李씨 풍암공파, 천안지원 경매서 11억5천만원에
법원 경매에 부쳐진 충남 아산 현충사 내 이순신 장군 고택 터 등이 덕수 이씨 문중에 낙찰됐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4일 오전 제2호 법정에서 열린 이순신 장군 고택 터 3필지 7만4천610㎡와 문화재 보호구역 내 임야 1필지 등 4필지 9만3천여㎡에 대한 2차 경매에서 덕수 이씨 풍암공파(사무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가 11억5천만원에 낙찰받았다고 밝혔다.
이날 경매에는 덕수 이씨 문중 외에 문화재청과 D건설 등 3곳이 응찰했으나 가장 많은 금액(12억2천200만원)을 써낸 D건설은 입찰서류미비(법인등기부등본 미제출)로 탈락됐으며 문화재청은 2차 최저경매가인 10억7천362만7천310원을 써냈다.
경매에 부쳐진 관련 토지 4필지를 덕수 이씨 충무공 파의 상위 종파인 풍암공파가 사들이면서 이순신 장군의 고택 터를 둘러싼 `경매사태'는 일단 진정됐다.
이 충무공 조부(李百祿)를 종파로 하는 풍암공파는 충무공 고택 터를 사들이기 위해 덕수문중을 중심으로 모금운동을 펴 기금을 확보했다.
덕수 이씨 풍암공파를 대표로 입찰에 참여, 낙찰받은 이정환(68) 감사는 "충무공 고택 등을 국가나 타인에게 넘기는 것은 후손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며 "문중의 이러한 뜻이 모여져 관련 기금을 모았다"고 말했다.
풍암공파 이재신(68) 회장은 "지난 3-4월 풍암공파 및 대종회가 회의를 열어 경매참여를 결정했다"며 "문중에서 낙찰받게 돼 후손으로서 장군님께 면목이 섰고 떳떳하게 현충사 경내 고택에서 제사를 모실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경매법정에는 경매참가자와 취재진 등 200여명이 나와 경매현장을 관심있게 지켜봤다.
이날 낙찰된 토지는 이 충무공 15대 후손 종부(宗婦)의 사유지로, 경매는 채권자 김 모씨가 신청했고 청구금액은 7억원, 감정평가액은 15억3천여만원이었으며 지난 3월 30일 1차 경매에 부쳐졌지만 응찰자가 없어 유찰됐다.
(천안=연합뉴스) 이우명 기자 = lwm1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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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이씨 문중으로 간 충무공 고택 터
문화재청 "국민세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 충무공 이순신 고택 부지 경매 사태는 결국 충무공과 같은 덕수이씨의 한 문중이 낙찰받는 형식으로 일단락됐다.
4일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열린 충무공 고택 터 3필지 7만4천610㎡와 문화재보호구역 내 임야 1필지 등 4필지 9만3천여㎡에 대한 2차 경매 결과, 충무공의 증조에게 뿌리를 둔 덕수이씨 풍암공파가 11억5천만원에 낙찰받았다.
이로써 지난 3월25일 충무공 고택 부지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지 한 달여 만에 사태는 종결됐다.
이번 경매 결과는 그동안 문화재청이 표방한 직접 경매 참여를 통한 국가의 매입 방침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경매 직전까지만 해도 문화재청은 현충사 외부 구역 토지 1필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동산을 정부가 직접 경매에 참여해 낙찰받을 것이며, 응찰가격은 감정평가액인 15억원 수준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법원 경매에 참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에 앞서 정부가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자 문화재청은 법원행정처에 그 가부를 질의해 "가능하다"는 구두 답변을 얻기도 했다.
이런 공언대로라면 충무공 고택부지는 당연히 문화재청에 낙찰되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경매 결과는 달랐다. 이번 낙찰 금액이 11억원5천만원인 점으로 미뤄 문화재청이 제시한 응찰금액은 이보다 낮은 액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경매는 비록 예상하지 못한 D건설의 참여라는 돌발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정황상 문화재청과 덕수이씨 풍암공파가 사전 조율 끝에 '문중 낙찰'이라는 결과를 도출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문화재청 주무 국장인 엄승용 문화재정책국장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했다.
엄 국장은 "소중한 국민세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으며, 더구나 덕수이씨 문중이 적극적으로 나서 충무공 고택을 지키겠다는 데 그것을 외면하면서 우리가 고가에 응찰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에서는 직접 경매에 참여하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표명하긴 했지만, 내부에서는 반대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경매 참여와 이를 통한 낙찰이 선례가 될 것을 우려했다. 사실 충무공 고택부지와 같은 운명에 처한 문화재보호구역은 전국에 산재한다. 이런 문화재보호구역을 정부가 나서 모두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화재청은 이런 사태(경매)가 오기까지 충무공 고택부지를 수수방관한 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충무공 고택부지가 설혹 경매에 나오고, 그것이 문화재청이나 문중이 아닌 제3자로 소유권이 넘어간다 해서, 문화재로서의 충무공 고택 부지가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소유주가 누가 되건 관계없이 충무공 고택 부지는 국가가 그것을 해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문화재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민세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는 엄 국장의 언급은 바로 국가지정 사적으로의서 충무공 고택부지가 갖는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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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덕수 이씨 풍암공파 이재신 회장
(천안=연합뉴스) 이우명 기자 = "고택 터를 지킬 수 있게 돼 충무공 할아버지께 면목이 섰다"
경매로 나온 충남 아산 현충사 이 충무공 고택 터 등을 낙찰받은 덕수 이씨 문중 풍암공파의 이재신(李載信) 회장은 "앞으로는 종회에서 재산을 관리하며 국민에게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이 회장과의 문답.
--이순신 장군 고택 터 경매에 참여한 동기는.
▲이 충무공의 후손으로서 충무공을 욕되게 할 수 없어 지난 3월30일 충무공 조부(李百祿)인 풍암공파 회의를 열고 4월에는 덕수 이씨 대종회를 열어 모금 등을 통해 기금을 마련, 입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국가에서 매입해 관리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상을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 매년 음력 11월, 충무공 제사를 비롯한 조상들의 제사를 고택에서 매년 5차례 지내는데 자신의 집에서 지내야지 남의 집 등에서 지내서야 떳떳하겠느냐. 당연히 이 충무공 제사를 지내는 고택은 종회 소유로 있어야 한다.
--향후 관리에는 문제가 없나?
▲문제없다. 앞으로는 종회 소유로 등기돼 개인에게 넘어갈 수 없다. 또한 풍암공파에는 기금도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없다.
--종가집 며느리 최씨가 이 충무공 관련 소장유물을 문화재청에 보관토록 했다. 이에 대한 종회의 입장은?
▲유물은 도난 등의 걱정이 없는 현충사에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현충사 터에 이 충무공 유물전시관을 따로 짓는 것으로 안다. 그곳에서 안전하게 전시돼 국민들이 많이 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7. 활터
충무공이 무과 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사용해 왔던 활터로 이 곳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수령 약 500년 이상. 두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충청남도 보호수(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가 있고 충무공이 늘 사용했다는 과녁판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안내 지도원의 안내에 따라 충무공이 사용했다던 과녁을 향해 직접 국궁 체험을 할 수가 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가서 체험하길 바란다.
5.8. 충무정(忠武井)
충무공과 가족들이 고택에 살던 시절에 사용했던 우물가로 원래는 이름이 없는 우물가였으나 충무공이 전사하고 '충무(忠武)' 라는 시호(屍號)가 내려지면서 그의 시호를 본떠 충무정이라 불렀다.
현재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관람객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고 있다.
5.9. 정려
충무공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정려로 본래는 마을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 성역화 사업으로 위치를 바꿔 옮겨놓았다.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그의 조카인 이완, 후손인 이봉상과 이홍무, 이제빈 등 충신 4명과 효자 1명의 정려가 걸려있다.
5.10. 이면 묘소
고택과 활터를 지나면 볼 수 있는 곳으로 1597년(선조 34년) 충무공의 외가가 있는 아산에 각종 해전에서 패해 복수심에 쳐들어 온 왜군을 상대하다 수적열세에 전사한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의 시신을 모셔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기 외할아버지(방진), 외할머니 곁에 모셨으므로 왜군에 당한 치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5.11. 舊 유물 전시관
거북선을 비롯해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물 및 유품들을 전시했던 곳으로 성역화 사업 중인 1962년에 세워졌으나 노후와 등의 이유로 2011년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건립된 이후에 철거되었고, 그 흔적은 현재 舊 본전 옆에 남아있다.
5.12.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충무공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이자 국립 박물관으로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공식 개장했다.
기존 '舊 유물 전시관'의 노후화 등으로 인해 새로 지은 건물로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도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충무공 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 전시관, 교육관, 사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3년 9월부터 전면 개편을 위해 휴관 중이다.
6. 외부 링크
한국어 위키백과: 아산 이충무공 유허
한국어 위키백과: 현충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산이충무공유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현충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 이충무공 유허
대한민국 구석구석: 아산 이충무공 유허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현충사
두산백과: 아산 이충무공 유허
7. 대한민국 사적 제155호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아산 이충무공 유허 (牙山 李忠武公 遺墟)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현충사를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는 국보76호 9점(난중일기 7권, 임진장초 1권, 서간첩 1권), 보물 326호 6점(장검 2병, 요대1구, 옥로1구, 도배구대1쌍), 보물 1564호 16점 (선무공신교서, 기복수직교서 등) 등이 소장되어 있다.
현충사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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